‘만났는데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고?’연정훈은 갈피를 잡지 못했으나 점점 서운함에 입을 삐죽이는 양시연을 보며 농담이 아님을 알아차렸다.막 신혼이고 양시연이 아이도 가졌으니 연정훈의 삼십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애틋하고 사랑이 넘치는 시기였다. 양모 펠트 인형을 만들다가 손가락에 구멍이 나도 상관이 없었고 양시연이 조금이라도 서운해하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보아하니 양시연은 정말 섭섭한 게 있었고 솔직하게 말하기엔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연정훈은 머리를 빠르게 굴리다가 ‘다른 사람’이라는 키워드에 누군가가 떠올랐다.‘설마... 소현주?’“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라면 아마도 강의실이겠지?”연정훈이 떠보듯 물어보자 양시연이 눈을 흘겼다.“글쎄요. 나도 기억이 잘 안 나서.”연정훈이 질문을 이어갔다.“넌 그때 주지혁 만나지 않았어?”“자꾸 쓸데없는 얘기로 대화 돌리지 마요.”양시연이 정확하게 아픈 곳을 찌르자 연정훈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시선을 피했다.“내가 언제 대화를 돌렸다고 그래? 이미 지난 일에 질투도 하면 안 돼?”양시연은 쯧 하고 혀를 찼다.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우울한 얼굴로 배를 쓰다듬었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도둑 맞힌 물건을 몰래 가져왔는데 지금 와서 본인이 원래 주인이라 당당하게 말하기도 난감해졌다.그때 연정훈이 또 떠보듯 물었다.“내가 멍청하다고 한 건 요즘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거야? 아니면 과거에 내가 저지른 일을 가리키는 거야?”양시연은 대답이 없었고 연정훈을 바라보는 대신 양모 펠트 인형을 꾹꾹 눌렀다.그러자 연정훈은 바로 눈치를 챘다.“과거구나.”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과거에 있은 일 때문에 나온 말이긴 해도 요즘 정훈 씨가 잘했다고 할 수 있어요?”양시연은 못생긴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것 좀 봐요. 정말 못생겨서.”“못생긴 건 그렇다 해도 내 성의를 봐서 받아줘. 우리 양 대표님이 부디 선심을 베풀어 나를 용서해 주길 바라.”“무슨 선심.”양시연이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정말 하찮은 것 같아요.”양시연이 투덜댔다.“그냥 내가 예쁘니까 좋아하는 거잖아요.”“그러면 네가 못생겼다고 해서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내면을 좋아한다고 해야죠.”“너는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고 마음속엔 온통 나만 있는데 이게 내면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양시연이 반문했다.“그러면 소현주 씨는요? 처음에 소현주 씨를 좋아했던 이유가 뭐였어요?”연정훈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와 펜을 꺼냈다.“뭐 하는 거예요?”양시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연정훈이 답했다.“프로젝트에 큰 문제가 생기면 몇 가지 방안을 세워서 최적의 선택을 투입하지.”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이 교활한 인간 말로만 날 달래려는 거잖아.’양시연은 일부러 표정을 가다듬고 단호하게 말했다.“소현주 씨의 첫인상을 한 마디로 묘사해 보세요.”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물을 마셨고 심지어 연달아 몇 모금씩 꿀꺽꿀꺽 삼켰다.양시연이 재촉했다.“처음 소현주 씨와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의 느낌을 말해보세요.”연정훈은 찻잔을 내려놓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내 아픈 곳을 찌르는 거잖아.”양시연은 긴장하며 물었다.“왜요?”“소현주와 편지 주고받을 때 내가 눈이 멀어서 소현주가 순수하고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결국...”연정훈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건 정말 큰 웃음거리였어.”‘순수...’이번엔 양시연이 물을 마시고 입술을 꽉 깨물며 일부러 말했다.“소현주 씨는 순수하고 나는 단순해서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소현주 씨와 비슷하다고 느껴서였나요?” ‘뭐라는 거야.’연정훈은 과거의 일을 단번에 떨쳐내며 반박했다.“내가 그렇게 말한 적 없어. 말뜻을 바꾸지 마.”양시연은 눈을 굴리며 일부러 화난 척하며 코웃음 쳤다.“아니에요? 그러면 왜 그렇게 긴장해요?”“너 때문에 긴장하는 거지.”“...”“너 지금 배도 많이 커졌는데 내 곁에
“제가 예전에 배운 보잘것없는 천문 지식으로 연 대표님께 지혜롭다고 칭찬받을 만한 자격이 있나요?”양시연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상대적으로는 그렇지.”연정훈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천문학 전공은 아니지만 네가 그런 지식을 알고 있어서 꽤 놀랐어.”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겠죠. 원래는 그냥 단순한 교류라고 생각했는데 정훈 씨가 저랑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순간 레벨이 올라간 것 같죠.”“...”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끔 쳐다보며 미소인지 아닌지 모를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정훈 씨와 소현주 씨는 진짜 화면 너머로 순수하게 온라인 연애를 한 거네요.”연정훈은 질투를 느끼며 잠시 멈칫한 뒤 말했다.“왜 자꾸 말끝마다 소현주를 언급하는 거야?”“정훈 씨의 옛일을 들춰내고 있잖아요.”“그렇다고 계속 소현주랑 나를 비교하지는 마.”“나는...”“나는 네가 항상 소현주랑 비교하는 게 싫어.”양시연은 잠시 놀랐고 연정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솔직하게 말했다.“넌 내 아내고 내가 마음속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자꾸 너 자신을 한심한 사람과 비교하는 게 난 싫어.”양시연은 그가 소현주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소현주에 대한 감정이 혐오에 가까운 것을 느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 감정을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연정훈이 내려간 입꼬리를 바라보며 양시연은 이번에야말로 연정훈이 소현주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았고 심지어 소현주의 그림자조차 양시연에게 닿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았다.양시연은 한때 그렇게 깊었던 사랑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연정훈은 다시 말을 이었다.“만약 내가 항상 자신을 주지혁 씨와 비교한다면 넌 분명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야.”양시연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맞네.’주지혁도 한때 양시연과 함께 결혼을 꿈꾸던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에게는 그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만약 연정훈이 계속해서 주지혁을 언급했다면 양
‘소현주가 죽었다고?’갑작스러운 소식에 양시연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고 연정훈도 잠시 멍하니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죽었는데?”“자살입니다.”임성원이 차분히 답했다.“소현주 씨를 24시간 감시하도록 사람을 붙여뒀습니다. 그런데 잠깐 식사를 하러 간 사이에 소현주 씨가 플라스틱 숟가락을 부러뜨려 날카로운 끝으로 자신의 경동맥을 찔렀습니다.”양시연은 무심코 그 장면을 떠올렸다가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나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바라보더니 스피커폰을 끊고 임성원에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한 뒤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양시연은 황급히 휴지로 입을 막으며 화면 쪽으로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지만 속에서 올라오는 메스꺼움은 점점 더 심해졌다. “우웩.”참으려 했지만 속이 뒤틀리는 것을 이기지 못한 양시연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콸콸 쏟아지는 물소리 사이로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입을 헹궜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붉은 핏물의 이미지에 속이 더 울렁거렸다.“시연, 괜찮아?”연정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양시연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끔찍한 상상을 억누르려 애쓰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양시연이 화장실을 나가기도 전에 침실 문이 열리며 양지원이 급히 들어왔다.“시연아?”양시연이 문 쪽을 바라보자 양지원은 양시연의 얼굴이 물에 젖어 흥건하고 창백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무슨 일이야?”“괜찮아요. 그냥 입덧이 좀 심해서...”양지원은 양시연을 부축하며 물었다.“연정훈이 갑자기 전화해서 네가 아프다며 당장 와 보라고 하길래 왔는데 왜 이렇게 심하게 토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이 영상통화를 끊었는지 모르겠지만 후속 이야기가 궁금해 빨리 알아야 했기에 입꼬리를 올리며 양지원을 안심시켰다.양지원은 미간을 찌푸렸다.“싸운 거야? 연정훈이 너 화나게 했어?”“아니에요.”양시연의 얼굴에 약간의 혈색이 돌아왔다.“그냥 대화하다가...상상력이 너무 지나쳐서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어요."양지원은 믿지
양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병실에 카메라가 있으니 절대로 타살일수는 없어요.”“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연정훈이 말했다.“소현주가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을 가능성도 있고 약물의 영향일 수도 있어. 소현주의 하루 세 끼에 손을 댄 가능성도 많아. 결국 임성원이 항상 소현주를 감시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철저하지 않았어.”양시연은 힘이 빠져 의자에 기대어 앉았고 갑자기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아직 혼란스러워했다.“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양시연이 연정훈에게 물었다.연정훈은 처음 충격을 받은 기운이 가라앉았고 이미 차분해졌다.“그냥 절차대로 해야지. 우리랑은 관계없는 일이야.”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움직임이 어딘지 어색하고 굳어 있었고 연정훈은 그녀가 마음속으로 부담을 느낄까 봐 걱정하며 말했다.“그쪽에서는 아마 부검을 할 거야. 정확한 사망 원인은 확인될 테지만 어쨌든 그건 너랑은 관계없어. 소현주가 저지른 죄는 셀 수 없이 많아. 외국에 있는 동안에 남편의 비서가 계단에서 떨어지도록 꾸민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너의 몇 마디로 생을 마감할 리는 없잖아.”“알아요...”“걱정하지 마.”양시연은 여전히 멍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멀리 떨어져 있어 연정훈은 양시연 곁에 갈 수 없었고 그저 대화 주제를 바꾸어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안해지도록 하려 했다.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고 양시연은 그에게 말했다.“아빠 수술 끝나고 나서 돌아갈 거예요. 무슨 일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꼭 말해줘요.”그녀는 이번 일이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는 직감을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일이 생기면 전화할게.”그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양지원이 차를 들고 들어오자 양시연은 그제야 영상통화를 끊었다.주위가 조용해지자 그녀는 최근 일들을 떠올리며 양지원이 건넨 차를 받아 들면서 하마터면 거의 델 뻔했다.양지원은 급하게 말했다.“천천히 마셔.”양시연은 입술을 핥고 난 후 정신을 차렸다.양지원은 양시연이 더
양홍두가 가볍게 기침하자 양시연과 양지원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양홍두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수술실 밖에서 이렇게 시끄럽게 뭐 하는 거야?”“...”양시연과 양지원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지만 양시연은 마음속의 답답함이 조금 가라앉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연정훈이 양시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아버님, 수술은 어떻게 됐어?][곧 끝날 거예요.][이제 밥시간이니까 기다리지 말고 어머님이랑 같이 뭐 좀 먹어.]양시연은 기분 좋은 느낌을 받아 그에게 포옹 이모티콘을 보냈다.[알았어요.]세 시간이 더 흐르고 수술이 끝났지만 양석진은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병실로 옮겨졌다.양시연은 처음 양석진을 봤을 때 그가 신처럼 강력한 사람이라고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병상에 누워 있고 주변에는 여러 의료 장비들이 놓여 있으며 머리카락에 섞인 흰색을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반면 양지원은 매우 차분하게 행동했다. 밥도 먹고 물도 마시며 양석진이 필요할 때는 단호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저녁이 되어 양석진은 마침내 깨어났고 양지원은 창가에 앉아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오빠, 나 여기 있어요.”양석진은 눈을 뜨고 양지원을 바라보았지만 말하지 못했다. 대신 양지원의 손을 잡고 손에 힘을 주려 애썼다.양지원은 그 미세한 힘을 느끼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알아요. 걱정하지 말고 쉬어요. 말할 수 있을 거예요.”그 말을 들은 양석진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양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양시연도 옆에 서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양석진의 눈길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양시연은 얌전하게 조용히 옆으로 물러나 기다렸다.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변이된 부분을 절제하여 진행한 조직검사 결과도 이상이 없자 양시연은 크게 안심했다.그녀는 다시 이틀을 더 한강시에서 보내고 양석진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에야 경인으로 돌아갔다.“저는 이틀 더 있을게요.”양석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지만 양시연이 마음속으로
날씨가 점점 더워졌고 양시연이 비행기에서 내릴 때 하늘은 더욱 우중충했다.연정훈은 그녀를 데리러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바로 본가로 향했다.표세연은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아들이 보고 싶었던 건지 일부러 두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차 안에서 연정훈은 양시연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그런 일들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했잖아. 정말 말 안 듣는다니까.”양시연은 연정훈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걱정을 털어놨다.“누가 우리를 함정에 빠뜨려서 당신에게 해를 끼칠까 봐 무서워요.”“괜한 걱정이야.”연정훈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쉽게 당했으면 벌써 몇백 번은 죽었을 거야. 경인에서는 물론 경인 밖에서도 나한테 시비 걸 사람 몇이나 되겠어.”“말은 그렇지만...”“말이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양시연은 그의 단호한 말에 살짝 안심하며 그의 품에 기대 눈을 감았다.집에 도착하자 연재혁은 없었고 표세연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표세연은 임신한 양시연을 보자 아들보다 더 반가운 표정으로 맞으며 자리에 앉아 음식을 권했다.“음식들 맛 좀 봐봐. 입맛에 안 맞으면 내가 말해서 새로 차리게 할게.”양시연은 식탁 위에 놓인 각 지역의 신선한 음식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충분합니다. 그만하시고 어머님도 앉으세요.”표세연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자는 양시연에게 음식을 챙기는 데만 집중하며 한동안 대화가 거의 없었다.양시연이 거의 다 먹고 나서야 표세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너의 아버지 건강은 좀 어떠니?”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끔 바라봤고 연정훈은 그녀의 눈빛을 이해한 듯 표세연에게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네 아빠가 알려줬어.”양시연은 잠시 침묵하며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양지원의 태도로 보아 이번 양석진의 건강 문제는 비밀리에 처리되고 있을 터였다. 연재혁이 높은 위치에 있긴 하지만 양석진의 측근도 아닌 그
“정말 죽었어요.”연정훈의 단호한 대답에 표세연은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이 사실에 은근히 안도하는 듯했다.아마도 공휘 사건이 그녀에게 남긴 충격이 꽤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연정훈은 소현주에 관한 이야기를 더 꺼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양시연의 마음에 불필요한 부담을 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하필 표세연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고 양시연도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소현주 씨에게 가족이 있나요?”“잘 모르겠어.”양시연은 그의 대답이 성의 없다고 느꼈는지 이번엔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소현주 씨가 갑자기 죽었는데 장례는 어떻게 치르죠?”표세연 역시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그래. 누가 소현주의 일을 마무리해 주는 거야?”연정훈은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전국에서 매년 이름 모를 시신이 얼마나 많은데 꼭 누군가가 수습해 줘야만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시연에게 말했다.“내가 욕조에 물 받아 놓을 테니까 넌 아래층에 잠시 나가서 산책하고 있어. 내가 데리러 갈 때까지 기다려.”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몇 걸음이나 된다고 굳이 데리러 와요?”연정훈은 그녀와 논의할 생각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기다려.”“알겠어요.”양시연은 순순히 응했고 연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연정훈이 자리를 뜨자 표세연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기분이 상했나 보네.”양시연은 고기를 한 입 더 먹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표세연은 그녀가 괜히 마음 쓰지 않도록 차분히 다독였다.“걱정하지 마. 연정훈은 단순히 소현주를 잊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소현주 얘기를 듣는 것 자체가 싫은 거야.”양시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혹시 마음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그럴 리가 있나.”표세연은 비웃듯 말했다.“소현주가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연정훈은 소현주를 역겹게 생각하는 것도 모자랄걸.”표세연은 혀를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