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한편, 옆 방 대기실 침대에서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감정을 한 번에 몰아붙이느라 숨도 돌릴 여유가 없었다.양시연은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그래서 연정훈의 목에 팔을 걸고 연정훈의 체온을 피부로 느꼈다. 그러다 보니 몇 년 동안 두 사람이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원망하고 사랑했던 시간이 다시 떠올라 가슴이 벅차올랐다.입술을 맞추니 연정훈의 숨결이 얼굴에서 느껴졌다. 양시연은 흐릿한 시야로 연정훈과 시선을 마주했고 연정훈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서 양시연은 연정훈의 품을 더 파고들며 두 눈을 감고 연정훈의 사랑을 느꼈다.한참 뒤, 양시연이 코를 훌쩍이며 연정훈의 귀를 만지작거렸다.“그날 밤 확인하라고 했는데 안 해서 잊어버린 줄만 알았어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제 어깨에 기대게 하며 말을 이었다.“그땐 소현주 쪽 소식을 기다리느라 여유가 없었어. 네 의심대로 나도 그 사람의 생사가 궁금해졌거든.”“그리고 그동안 너도 많이 바빴으니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어.”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그렇게 변명할 필요 없어요. 내가 뭐 다른 생각이라도 할까 봐 그래요?”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조그만 가능성도 줄이려고 그러는 거지.”소현주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니 양시연은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 했다.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도둑 맞힌 것을 되찾아왔으니 다행이기도 했으나 뺏긴 시간에 아쉬움도 많았다.그러나 연정훈이 이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양시연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깨끗이 지우기로 했다.그래서 연정훈의 품에 안겨 입을 꾹 다물고 연정훈의 체온을 느꼈다.그런데 한참 동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양시연은 조금 부끄러워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왜 그렇게 봐요?”연정훈이 말했다.“믿기지 않아서.”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운명이라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그렇게 많은 시공 속에 두
연정훈은 입을 열기도 전에 뭇매를 맞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양시연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연정훈의 다리를 걷어찼다.“뭔 데요! 일단 무릎이라도 꿇고 말하던가요!”연정훈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가법이 생기기 전의 일이니까 정상 참작 안 돼?”“그건 옆 방 변호사한테 물어보던가요!”“싫어.”연정훈은 옷을 정리하며 양시연의 두 볼을 잡고 빠르게 뽀뽀했다.“물어볼 거 없어.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릎 꿇을까?”퍽.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또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허구한 날 말장난만 하는 사람이 교수라니. 가당치도 않아.’양시연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빨리 말해봐요. 더 늦으면 정말 화낼지도 몰라요.”연정훈은 맞은 편의 의자에 편하게 앉으며 요즘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얌전히 듣고 있던 양시연이 입을 열었다.“그럼 마봉식이 퇴출하면 아버님이 더 올라가실 수 있다는 말이에요?”“이론적으로는 그렇지.”양시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아버님을 제외하면 누가 유력한데요?”“표원정.”양시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표원정이 누군지 떠올렸다. 아마도 몇 년 전 주변 사람에 대해 외울 때 들어본 이름 같았다.“그 사람 서운시로 발령된 거 아니었어요?”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또 말을 이었다.“설마 낙하산?”“그럴 가능성도 있지.”양시연은 연재혁의 나이를 계산하며 말했다.“그래도 아버님은 아직 젊으시니 이번이 아니더라도 또 기회가 있을 거예요.”“지금은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지.”“우린 뭘 도울 수 있을까요? 우리 아버지한테 연락해 볼까요?”양시연이 한껏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는 모습이 퍽 귀엽게 느껴져 연정훈은 웃음이 터졌다.그래서 이마에 작게 땅콩을 먹이며 말했다.“이게 무슨 소꿉장난인 줄 알아? 우리가 안 되면 어른들 모셔 오게?”양시연이 입을 삐죽였다.“그게... 그 뜻이 아니었어요?”“아버지 일에는 우리가 가입할 필요 없어. 아버지에게 기회가 차려진
“네가 있어서 난 더 조심스러운 거야.”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양시연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양시연의 배를 빤히 바라봤다.“몇 달 뒤면 우리 아이가 태어날 텐데 아이와 네가 마음 놓고 편히 지내게 해주고 싶어.”양시연은 연정훈의 손을 잡아 배 위로 올리며 말했다.“이렇게 대단한 아빠가 있으니 편하게 지내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아이가 얼마나 행복해할지 눈에 보이는걸요.”연정훈은 다정한 시선으로 양시연을 바라봤다.“내가 굳이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함께 넘어야 할 산이 있을 거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정훈 씨, 잘 생각했어요. 나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니까 나한테 기대요.”양시연이 한껏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예전엔 내가 잘못 생각했어.”“알면 무릎이라도 꿇던가요!”그러자 연정훈은 웃음이 터졌다.“정말 무릎 꿇는 걸 보고 싶어서 그래?”“프러포즈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서 한번 해주는 게 뭐 어때서요?”연정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저녁에 집에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지 뭐.”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은 바로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헐!”그리고 연정훈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변태!”“내가 뭐 어쨌다고?”“그냥 변태예요!”양시연은 빠르게 연정훈의 손을 뿌리쳤고 배도 만지게 못 하도록 했다.연정훈은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양시연을 바라봤다.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양시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조재민이라는 폭탄은 정훈 씨가 해결해 줘야겠어요. 난 우리 아버지 찾아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그래도 조이현 씨 일은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네가 직접 움직일 필요 없어. 사람 시켜 조씨 가문에 따로 얘기하게 할 거야.”“그러지 마요. 정말 그러다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어요. 조이현 씨 정상도 아닌데 조씨 가문 사람들이 고분고분 말을 따를 거라는 보장 있어요?
무더운 여름이 다가오고 연정훈과 양시연은 꿀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날이든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이든 집안에만 콕 박혀 지냈다.양시연의 배는 점점 불러왔고 연정훈은 미룰 수 있는 약속을 최대한으로 미뤘으며 퇴근 시간만 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방문 셰프는 매일 맛있는 요리를 해줬고 집 반찬이 질리는 날이면 두 사람은 새벽이라도 밖으로 나가 야식을 함께 했다.어느 날 아침, 연정훈은 거울 앞에 서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양시연은 멀지 않은 곳에서 아침밥을 느긋하게 먹고 있었다.고개를 돌리니 양시연이 아침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나비와 똑 닮은 것 같았다.그래서 그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배고팠어? 아침 맛있게 먹네.”양시연은 셰이크를 한 잔 들이켜며 입맛을 다셨다.“나도 왜 이런지 잘 모르겠어요. 잠들기 전에도 잔뜩 먹었는데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요.”“아기가 식욕이 좋나 보지.”연정훈은 양시연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러자 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아기가 먹는데 나만 살이 쪄요.”“그래도 예뻐. 하나도 안 쪘어.”연정훈이 양시연의 볼을 만지작거렸다.“계속 살이 안 쪘다고 거짓말하지 마요. 예전에 입던 옷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단 말이에요.”“진심이야. 동글동글하니 귀엽기만 해.”양시연은 여전히 투덜거렸지만 입꼬리는 어느새 올라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출근 직전까지 알콩달콩했고 연정훈은 매일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했다. 양시연은 매일 같이 지각을 했지만 부승원은 막달이 된 양시연을 너그럽게 이해해 줬다.집을 나서기 전 연정훈이 양시연에게 말했다.“오전에 시간 되면 아버님, 어머님께 안부 전화해.”“걱정하지 마요. 매일 하고 있어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옷차림을 스캔하며 말했다.“정훈 씨는 좀 적당히 하는 게 좋겠어요. 엄마가 매일 전화 와서 똑같은 안부 인사한다고 질려해요.”“시간 되면 우리가 직접 뵈러 가자.”“어휴 됐어요. 우리 엄마 아빠도 신
점심시간이 되자 양시연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주지혁 앞에서 게걸스레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간단히 배만 채우며 바로 조이현이 신고한 일을 입에 올렸다.주지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반박했다.“이 일은 정말 나도 몰랐어.”양시연은 지금 와서 잘잘못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이현 씨가 이러는 건 정말 난동이고 민폐예요. 난 이현 씨에게 잘못한 거 하나 없고 잘못이라면 오히려 두 사람이 내게 저지른 거죠.”주지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아, 내가 미안해.”“지난 일은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요.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제발 본인 아내 간수를 잘하라고 말하러 왔어요. 다른 사람한테 민폐 끼치지 말아줘요.”양시연은 과거와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주지혁은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손끝을 바라봤다. 과거의 양시연은 일하는 데 불편하고 집안일하는데 거슬린다며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었다.그리고 차라리 네일 하는 돈으로 간식이나 사는 게 이득이라 했다.돈을 차곡차곡 모아 집을 사고 차를 사는 게 더 현실적이라며, 힘들게 돈을 버는 주지혁을 마음 아파하며 선물한 팔찌도 마다했었다.돈 모아서 결혼하자고 말했던 과거 양시연을 떠올리며 주지혁은 고개를 숙여 쓴 차를 들이켰다.“돌아가서 잘 얘기해 볼게.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야.”“그러길 바랄게요.”양시연은 덤덤하게 말했다.“우린 이제 책임질 가족도, 사업도 있는 사람이에요. 조씨 가문은 경인에서 좋은 입지를 가졌고 지혁 씨도 승승장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 행복하게 살자고요.”‘행복이라...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미친 조이현은 평생 내게 들러붙으러 작정을 한 것 같은데.’주지혁은 더 올라가려면 피를 깎는 고통을 겪어야 했고 죽을힘을 다해야 조이현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이런 생각에 주지혁은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양시연이 본인을 찾아온 이유는 아마도 연정훈의 부담을 덜어주려 온 것 같았고, 진심으로 연정훈을 아끼는 모습을 보며 예전에는 본
“내가 가서 밥 먹여줄까?”“좋죠.”“그래. 15분 뒤에 도착할 것 같아.”연정훈이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치자 양시연은 다급하게 말렸다.“그러지 마요! 혼자 먹을 수 있어요.”“그럼 밥 먹을 때 영상 통화할까? 같이 먹고 싶어.”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그건 좋아요.”한참 알콩달콩 얘기를 나누다가 회사에 거의 도착할 무렵, 양시연은 방금 주지혁과 만났던 사실을 입에 올렸다.“지혁 씨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조이현을 말리지 못한다고 해도 간섭은 할 거예요. 앞으로도 조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 조이현이 가문을 망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연정훈은 애초에 조씨 가문을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양시연이 주지혁을 만나게 한 건 신중한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었다.주지혁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바로 조이현을 처리할 것이다.하지만 주지혁이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오늘 양시연이 주지혁을 만나는 건 되려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 연재혁이 가장 중요한 시점에 있는데 더 이상 조씨 가문이 논란을 만들게 하지 막아야만 했다.만약 주지혁이 계속 다른 사람과 만남을 이어가고 굳이 논란을 피운다면 그건 결국 본인의 무덤을 파는 일이었다.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이러한 얘기를 했었고 양시연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람 시켜 주 대표 조사하라고 해. 똑같은 방법으로 되갚아 주는 건 좋은 데 우리가 위험해져서는 안 되잖아.”“나도 알아요.”대화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양시연도 회사에 도착했다.이어 점심을 주문하고 영상 통화를 시작했다.반우희는 요즘 들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다. 요즘엔 사내 식당도 아닌 양시연의 사무실로 직행했는데 양시연은 음식을 많이 주문하고 혼자 먹기엔 버거워 반우희와 함께 나눴었다.그런데 멀리서 보니 오늘엔 연정훈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고 반우희는 도시락을 들고 양시연의 사무실로 향하려다가 부승원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오늘 부승원은 점심 약속이 있어 사무실을 비웠다.그래서 부승원의 큰
“이름은 뭐예요?”“반우희입니다. 넉넉할 우와 기쁠 희입니다.”“그래요?”“그럼, 나이는?”“스물두 살입니다...”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반우희는 도시락을 손에 쥐었지만 한 입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마치 학창 시절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물어보는 질문에만 꼬박꼬박 대답했다.“괜찮아요. 편하게 먹어요.”채애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크게 한 입 떠먹었다.채애정은 다정한 말투로 또 질문을 이었다.“승원이가 없어도 혼자 사무실에 있었던 거예요?”반우희는 채애정이 아직 본인과 부승원의 사이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조금 머리를 굴려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평소에 사내 식당을 이용하고 자주 사무실에 오는 않는 편은 아닙니다.”채애정은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며 반우희에게 반찬을 집어줬다.반우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감사합니다.”“아니에요.”채애정은 동그란 얼굴의 반우희가 꽤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 부승희가 반우희에 대한 좋은 말을 많이 했기에 좋은 인상도 남아 있었다.그러나 반우희의 나이를 들은 채애정은 기분이 조금 착잡했다.제 아들이 이성에 눈을 뜨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부승희의 말 대로 그동안 할 건 다 하고 산 모양이었다.게다가 그 깔끔하던 아들이 사무실을 이렇게 어지럽히는 것도 용납하고 있다니, 꽤 놀라운 사실이었다.‘그래 스물둘이면 미성년자도 아니고 괜찮지, 뭐.’반우희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구별이 되지 않았으나 채애정이 계속 반찬을 집어주는 덕에 멈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채애정이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모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뭐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수표 한 장 던져주면서 아들이랑 헤어지라는 전개는 아닌 것 같은데.’‘설마 내가 마음에 드는 건가?’‘음... 머리를 굴리자. 머리를!’그러나 그렇다 할 결론을 내리기 전에 위가 감당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반우희는 끝내 참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딸꾹!딸꾹!반우희는 부승원의 등 뒤로 몸을 숨기고도 딸꾹질을 멈추지 못했다.부승원은 몸을 돌려 반우희를 살폈다.“왜 그래?”‘그게 아니라.’반우희는 서둘러 부승원을 당겨 채애정의 시선을 가렸다.지금 딸꾹질 때문에 얼굴이 시뻘게졌을 게 뻔했고 못생기게 보일 수는 없었다.부승원은 자기 셔츠 끝자락을 잡은 반우희를 보며 빠르게 자리에 앉히고 물을 따라줬다. 그리고 채애정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어머니, 먼저 돌아가세요. 우린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게...”채애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부승원이 반우희를 챙기느라 손이 부족하자 채애정은 대신 물을 따라 건넸다.“우희 씨, 괜찮아요?”“딸꾹... 네! 딸꾹... 괜... 찮습니다!”“...”부승원은 물을 건네받고 직접 반우희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 병원 갈까?”반우희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어머님만 가면 괜찮아질 거예요.’부승원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부승원이 옆에 있었기에 반우희는 서서히 진정되었고 드디어 딸꾹질을 멈출 수 있었다. 이에 채애정이 다가가 또 말을 걸었다.그런데!반우희는 더 긴장되어, 또 딸꾹, 하고 딸꾹질하고 말았다.“...”딸꾹!딸꾹!결국 다시 시작이 되었다.부승원은 반우희가 긴장이 되어 딸꾹질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래서 거의 자신의 품에 가두다시피 하며 채애정을 향해 손을 저었다.채애정은 더 이상 대화는 무리라는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럼 먼저 가볼게. 내가 뭐 겁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놀란 거야?”“오신다고 미리 말해주지도 않았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정말 연애 좀 한다고 이 엄마는 뒷전인 거니?’‘어휴. 그래도 드디어 연애한다니 다행이긴 해.’채애정은 가방을 챙겨 밖으로 걸었다.그때, 반우희가 빠르게 부승원의 셔츠를 잡아당겼다.부승원은 고개를 돌려 반우희가 핸드폰에 적은 문자를 확인하고 채애정을 다시 불렀다.채애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부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