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이제 가봐.”윤구주는 할 말을 다 한 뒤 축객령을 내렸다.안두성은 눈치가 빨랐기에 윤구주가 축객령을 내리자 곧바로 인사를 하고 떠났다.그가 떠난 뒤 윤구주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꼬맹아, 숨어있는 그놈을 잡아 와.”“네!”남궁서준은 대답한 뒤 어두운 왼쪽 구석을 향해 오른손을 움직이며 말했다.“나와.”쿵!손그림자가 어둠을 향했다.어둠 속, 큰 머리에 동그란 눈을 가진 아이는 남궁서준의 손그림자가 날아오는 걸 보더니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뻗어 남궁서준의 손그림자를 맞받아쳤다.그러나 건장하고 다부진 아이는 남궁서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쿵 소리와 함께 아이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고 아픈지 앓는 소리를 냈다.하지만 아이는 전혀 화가 나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오히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자세히 보니 그 아이는 다름 아닌 육도진의 손자 꼬마 패왕 육시우였다.겨우 열 살짜리 아이가 갑자기 나타나자 민규현뿐만 아니라 정태웅 등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응? 이 녀석은 누구지? 감히 여기까지 와서 우리 대화를 엿듣다니.”정태웅은 답답해하면서 말했다.옆에 있던 재이, 용민 등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앞에 있는 육시우를 바라보았다.정작 육시우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육시우는 두 눈을 부릅뜨고 호시탐탐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두려운 게 전혀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이 자식, 어디서 튀어나왔지? 감히 여기까지 찾아와서 우리 대화를 엿듣다니. 꼬맹아. 너희 집 어른들은 널 상관하지 않는 거냐?”이때 민규현이 참지 못하고 차갑게 코웃음 치면서 물었다.육시우는 두 손을 허리 위에 올리고 거만하게 말했다.“똑똑히 들어요. 제 이름은 육시우예요! 알겠어요?”“...”사람들은 어린아이가 건방지게 굴자 어이가 없었다.재이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시우야, 누가 널 우리에게 보낸 거니?”정태웅이 물었다.“제가 오고 싶어서 온 건데요. 왜요?”육시우가 대답했다.“참나, 어린
육시우가 윤구주를 때리고, 그와 싸워서 이기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다시 한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는 거예요? 계속 웃으면 제 주먹으로 다 때려죽일 줄 알아요!”사람들이 웃자 겨우 열 살 된 육시우는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됐어, 됐어. 다들 그만 웃어.”이때 윤구주가 그들을 말렸다.그런 뒤 그는 육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왜 세계 최강이 되고 싶은 거야? 그렇게 윤구주를 이기고 싶어?”육시우는 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육시우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동그랗고 큰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세계 최강이 된다면 할아버지가 절 매일 무각탑에 가둬놓고 수련시킬 일이 없을 테니까요!”“아, 그렇구나.”윤구주는 그제야 깨달았다.육시우는 수련하기가 싫어 윤구주와 싸워서 이기려는 것이었다.“형, 형은 잘생겼고 성격도 좋네요. 대체 누가 윤구주인지 저한테 알려줄 수 있어요?”육시우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그가 윤구주라는 걸 몰랐다.육시우가 묻지 윤구주는 웃으며 대답했다.“내가 바로 윤구주야!”‘뭐?’자기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윤구주라는 걸 알게 된 육시우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는 윤구주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정말로 형이 윤구주예요?”“그래.”윤구주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육시우는 당황스러웠다.그는 윤구주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형이 어떻게 윤구주예요?”“왜 내가 윤구주가 아니라고 생각해?”“하지만 조금 전에 다들 절 비웃을 때 형은 절 비웃지 않았잖아요. 형은 저한테 좋은 사람인 걸요?”겨우 열 살 된 육시우가 말했다.육시우는 무도 귀재일 뿐만 아니라 육도진의 친손자였지만, 겨우 열 살이었다.그래서 아직 미숙하고 유치했다.조금 전 다들 그를 비웃을 때 오직 윤구주만이 그를 비웃지 않았다. 그래서 육시우는 윤구주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그렇게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만약 세계
어렸을 때부터 초인적인 힘을 타고난 육시우는 무도 재능이 남궁서준 만큼 뛰어났다.육시우는 네 살 때 맨손으로 바위를 깨부쉈고 열 살인 지금은 무각탑 안의 선생님 십여 명을 흠씬 두들겨 팰 수 있었다.이로써 육시우가 얼마나 강한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천 근 무게가 담긴 주먹은 마치 트럭처럼 윤구주를 향해 날아들었다.윤구주는 육시우의 주먹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육시우가 휘두른 주먹을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훌륭한 권법이야!”퍽!강한 주먹이 윤구주의 가슴을 강타했다.윤구주는 꼼짝하지 않았고 몸도, 옷자락도 움직이지 않았다.“이게...”육시우는 그 광경을 보고 완전히 넋이 나갔다.그는 자신의 천 근 무게가 담긴 주먹을 윤구주가 전혀 피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심지어 더욱 중요한 건 그의 가슴을 때렸는데도 옷자락조차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치 돌이 바다에 가라앉은 듯, 윤구주의 몸이 그의 주먹에 담긴 힘을 전부 녹인 것처럼 말이다.육시우가 경악하고 있을 때 윤구주는 웃으며 말했다.“자, 네가 이겼다. 이제부터 네가 세계 최강이야!”“...”천 근 무게를 담긴 주먹으로 때렸는데도 옷자락조차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가 이겼다고 하다니.육시우는 비록 겨우 열 살이긴 했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고 체면이 있었다.윤구주의 말에 육시우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지, 지금 저 모욕하는 거죠?”육시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닌데? 난 정말로 네 권법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윤구주는 솔직히 말했다.“하지만 제가 형에게 주먹을 휘둘렀는데도 형은 꿈쩍하지 않았잖아요... 제가 진 게 확실해요!”육시우는 당장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윤구주는 육시우를 위로했다.“아니, 틀렸어. 난 열 살 때 너처럼 엄청난 위력이 담긴 주먹을 휘두르지 못했어. 그러니까 따져보면 네가 이긴 거지!”“정말요?”육시우는 그 말을 듣고 기뻐했다.“당연하지!”윤구주는
서울 우상 저택.“어르신, 큰일입니다.”신급 강자 실력의 노인 한 명이 초조한 얼굴로 육도진에게 말했다.“뭐라고? 시우가 사라졌다고? 시우 무각탑에 있는 거 아니었어?”육도진이 물었다.“어르신, 무각탑의 사람이 꼬마 도련님께서 몇 시간 전 무각탑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그 말을 들은 육도진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이놈, 정말 하루 종일 사고만 치는구나. 찾아. 지금 당장 그놈을 찾아서 데려와!”육도진은 손주를 아주 아꼈다.육시우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그는 매우 걱정이 되었다.이때 하인 한 명이 달려왔다.“어르신, 몇 시간 전에 꼬마 도련님께서 어르신 방문 앞에 딱 달라붙어서 대화를 엿듣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혹시...”그 말을 들은 육도진은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다.“뭐라고? 그 녀석이 내 말을 엿들었다고?”“네, 어르신. 전 당시 도련님께서 어르신을 찾아간 줄로 알고 막지 않았습니다.”하인이 계속해 말했다.그 말에 육도진은 표정이 확 바뀌었다.몇 시간 전, 그는 집사 안두성에게 윤구주를 찾아가서 공씨, 제씨, 옥씨, 신씨 4대 문벌이 신급 절정 실력의 조상을 데려오려고 한다는 걸 윤구주에게 알리라고 했었다.설마 윤시우가 윤구주의 이름을 들은 걸까?윤구주를 떠올린 육도진은 순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큰일이야! 그 녀석 설마 구주왕을 만나러 간 걸까? 세상에나, 진짜면 어떡하지? 이걸 어떡해야 하지? 여봐라! 어서, 어서 나와 같이 내 손자를 구하러 가자!”육도진은 자신의 겁 없는 손자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육시우가 말실수라도 한다면 어떡한단 말인가?상대는 무려 천하제일의 윤구주인데 말이다.만약 육시우가 윤구주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된다면, 육시우는 곧바로 윤구주를 찾아가서 싸우자고 할 것이다.그런 생각이 들자 육도진은 머리털이 쭈뼛 솟았다.잠시 뒤, 십여 명의 신급 강자가 육도진의 뒤에 나타났다. 그들은 육시우를 찾으러 갈 예정이었다.그런데 육도진이
육도진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예전에 육시우더러 무각탑에서 수련하라고 하면 육시우는 죽을 만큼 괴로워했다.그런데 오늘 육시우는 자발적으로 수련하러 갔다.심지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굴었다.‘이건...’“어르신, 꼬마 도련님이 변하신 것 같아요!”하인 한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그건 나도 당연히 알아봤지! 그런데 내 손자가 오늘 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저렇게 달라진 걸까?”이때 육도진은 저도 모르게 윤구주를 떠올렸다.설마 육시우가 달라진 건 윤구주 때문일까?육도진이 고민하고 있을 때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 육도진의 곁으로 다가갔다.“어르신, 급한 용무입니다! 공씨, 제씨, 옥씨, 신씨 4대 문벌 쪽에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회색 옷을 입은 노인의 말에 육도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서재로 가서 얘기해.”곧 육도진은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을 데리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얘기해. 네 가문에서 무슨 짓을 벌이는 거야?”육도진은 서재에 들어선 뒤 물었다.“어르신, 저희가 심어둔 사람이 말하길 공씨, 제씨, 옥씨, 신씨 4대 문벌에서 신급 절정 실력의 조상들에게 연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일 점심 정양문에서 그들을 맞이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공부, 이부, 형부에서도 사람을 보내 그들을 맞이할 거라고 했습니다.”그 말에 육도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서울 황성에는 6부 24사가 존재했다.6부는 각각 병부, 공부, 형부, 이부, 호부, 예부였다.그중 병부, 형부, 이부는 무를 관리하고 공부, 호부, 예부는 문을 관리했다.“6부 중에서 3부가 간다고?”육도진이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그렇습니다. 어르신도 알다시피 공씨, 제씨, 옥씨, 신씨 4대 문벌은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그들 가문의 훌륭한 자식들을 6부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 그렇게 얘기하자 육도진은 화가 난 듯 코웃음을 치면서 앞에 놓인 황화리목 탁자를 내리쳤다.딱딱
그것은 모두 윤구주의 공로였다.그래서 육도진은 신세를 갚을 생각이었다.“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명령을 전하겠습니다.”회색 옷을 입은 노인은 말을 마친 뒤 서재 속에서 모습을 감췄다.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 떠난 뒤 육도진은 그제야 살벌한 눈빛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서울이 곧 혼란에 빠지겠구나.”...소슬한 어두운 밤.윤구주는 강성에 있는 소채은과 한 시간 가까이 통화했다.통화를 통해 윤구주는 현재 소채은이 연규비의 지도 아래 정식으로 무도에 발을 들여놓았음으로 알게 되었다.게다가 소채은은 접무구변을 수련하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강성을 지키며 윤구주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뒤 윤구주는 그제야 마당으로 돌아갔다.마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남궁서준, 정태웅, 천현수, 재이 등 사람들이 마당에 꼿꼿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왼쪽에 있는 작은 집을 바라보았다.작은 집 안.강한 기혈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그 기혈은 절정에 오른 후 형성되는 무홍 기혈이었다.무홍 기혈이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는데 뜨거운 불의 기운이 뒤섞여 있었다. 가끔은 우레와도 같은 울부짖음이 민규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윤구주는 마당 안으로 들어온 뒤 그들에게 물었다.“저하, 저것 좀 보세요. 형님이 왜 저러시는 겁니까?”정태웅이 말했다.그는 말하면서 근심 어린 표정으로 민규현이 있는 방을 가리켰다.민규현은 한밤중에 갑자기 몸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겨우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그의 방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무홍 기혈과 엄청난 화염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그래서 정태웅과 다른 이들은 조금 걱정이 됐다.“걱정할 필요 없어. 민규현은 경지를 돌파하는 것뿐이니까.”윤구주는 덤덤한 눈빛으로 민규현이 있는 방 위쪽의 무홍 기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경지를 돌파한다고요? 저하, 형님은 이미 신급 절정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슨 경지를 돌
다들 민규현이 절정 이중천에 오르는 걸 지켜보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 소문 없이 마당 근처에 모습을 드러냈다.“누구야?”그 사람이 가까워지자마자 윤구주는 곧바로 눈치를 챘다.어두운 밤, 제복 차림의 그는 귀신처럼 마당에 도착했다.“간첩 BL41, 저하와 지휘관님을 뵙습니다!”그 사람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곧바로 윤구주와 정태웅 등 사람들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암부에는 십만 명에 달하는 간첩이 있었다.그 간첩들은 화진 심지어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서 기밀 정보를 알아냈다.그리고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건 BL41이었다.간첩을 힐끗 본 뒤 윤구주가 물었다.“무슨 일이야?”“저하, 제 감청 내용에 따르면 공씨, 제씨, 옥씨, 신씨 4대 문벌이 곧 그들의 신급 절정 실력의 조상들을 맞이할 거라고 합니다.”그 말에 윤구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신급 절정 실력의 사람은 절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었다.세상에 나온다면 죽게 된다.그것은 당시 곤륜에서 내린 금지령이었다.그런데 문벌 쪽에서는 감히 그들의 신급 절정 실력의 조상들을 데려왔다. 그것이 뭘 의미하겠는가?그건 그들이 곤륜의 금지령을 어겼다는 걸 의미했다.“그 4대 문벌 미쳤대? 감히 공공연히 신급 절정 실력의 조상들을 데려와? 화진의 금지령과 곤륜의 금지령 따위 안중에도 없다 이거야?”정태웅이 화를 내며 말했다.“황성 쪽에서는 그들을 말리지 않은 거야?”천현수도 물었다.신급 절정인 자가 세상에 나오는 건 화진 무도계와 전 세계 무도계에 있어서 큰일이었다.그 금지령은 세계적으로 백 년 가까이 집행되었기 때문이다.그런데 문벌에서는 신급 절정 실력의 조상들을 모셔 왔다. 그건 그들의 변절을 의미했다.“황성 쪽에서 눈감아준 것 같습니다.”간첩이 말했다.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황성 쪽에서 눈감아줬다는 건 뭘 의미하는가? 그건 황성 쪽에서 문벌이 신급 절정 실력의 조상들을 데려오는 걸 묵인했다는 뜻이었다.그리고 문벌에서 신급 절정 실
이미 이중천 절정이 된 민규현은 온몸의 무홍 기혈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짙었다.이런 무시무시함은 용하 산맥 의수 감옥에서의 신급 절정 강자 5명을 다 합해도 비할 바가 못 된다.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절정의 강함이었다.이중천 절정에 도달한 민규현은 공씨, 제씨, 옥씨, 신씨 4대 문벌을 죽이겠다고 했다. 내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다음 날, 서울 정양문.서울의 가장 큰 오래된 성문중 하나인 정양문은 예로부터 서울에서 가장 번화하고 떠들썩한 곳이었다.그러나 오늘 정양문 양쪽 거리는 아주 썰렁했고 근처 가게들은 전부 문을 굳게 닫았으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오로지 정양문 대문 밖에 꼿꼿이 서 있는 무인들 한 무리가 있었다.수백 명은 될 듯했다. 그들은 공씨, 제씨, 옥씨, 신씨 4대 문벌 사람들이었다.4대 문벌은 윤씨 일가와 견줄 만큼 저력이 깊었다.그러나 각 가문의 신급 절정 강자들이 은둔을 선택하면서 네 가문은 조용히 지내기 시작했다.그러나 현재 윤구주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공공연히 문벌을 학살하고 있으니 네 고대 문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그들은 윤구주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6년 전, 윤구주는 홀로 문벌, 세가, 종문을 제압했다.그 원한을 문벌은 잊지 않았다. 그리고 쉽게 잊을 수도 없었다.윤구주는 죽은 걸로 알려졌지만 공씨, 제씨, 옥씨, 신씨 4대 문벌은 윤구주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암암리에 알게 되었다.4대 가문이 신급 절정 실력의 조상들에게 연락한 이유는 다시 윤구주는 제압하기 위해서였다.그래야만 문벌이 궐기할 수 있었고 화진에서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이때 4대 문벌 사람들은 그곳에서 신급 절정 실력의 조상들을 맞이하고 있었다.“제윤 씨, 여씨, 황씨, 당씨 세 문벌을 멸문시킨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죠?”질문을 한 사람은 봉씨 문벌의 신급 강자 공지철이었다.노인은 기운이 음산했다. 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는 부한 몸매의 신급 강자 제윤에게 물었다.“알죠.”제윤은 어두워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