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순간, 윤구주의 몸으로부터 광풍 같은 강기가 폭발했다.그 광경을 진파천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어떻게 네놈이......""내가 왜?""곤륜 지역에선 호신 강기 따위는 흔해 빠진 기술인데, 오직 너 같은 멍청이만 곤륜이 자길 높이 평가한다고 착각하지."윤구주가 비웃듯 입을 열었다.또, 또 저런 쓰레기를 본 듯한 거만한 눈빛이라니!진파천은 분노로 의해 실신할 지경이었다."건방지도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놈!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느냐!""윤씨네 애송이야, 넌 짐을 모욕할 자격 없어!"알 수 없는 공법을 운용하기 시작한 진파천의 온몸에는 불꽃이 타오르며 사악한 기운이 넘쳐흘렀다.펄펄 끓는 용암 속으로부터 칼날이 깨진 혈도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핏빛으로 물든 칼을 손에 쥐자 진파천은 다시 위세를 키웠다."진 씨 도법은 천하무적이다!""이 몸이 바로 화진 제일의 도왕 진파천이시다!"진파천이 지은 일그러진 미소가 칼날에 비치며 핏빛 칼날로부터 서리 같은 한기가 뿜어내지기 시작했다."무예 대결은 포기한 거냐? 좋아, 그럼 무기로 승부 보지.""팔기기, 어검술."윤구주가 손가락을 펴 기를 검 형태로 응집했다. 검기가 발현된 그 순간, 세간의 모든 법칙이 그의 휘하로 수렴되는 듯했다.복잡 다양한 속성의 영기가 혼잡하던 공간은 순식간에 윤구주의 검의 기운만 남았다.자신의 도기조차 완전히 이에 눌려버리자 진파천의 표정은 똥을 씹은 듯 일그러졌다.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갑자기 튀어나온 자칭 윤 씨 가문 꼬맹이 괴물한테 기선 제압당한 진파천 자신의 비참한 모습이라니... 너무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넌 극 신급 절정 경지의 초반, 하지만 난 중반이다! 수련 기간이 길어봤자 30년인 자가 어떻게 나를! 나는 300년인데! 네 공력과 시간의 열 배나 더 되는 내가 어떻게 이렇수가?"진파천은 이미 윤구주의 실력을 체감했다.이 정도의 독보적인 기세는 자신이 그 아무리 많은 목숨을 뺏어도 범접할 수도 없는 그런 수준
“혈음광도!” 진파천은 칼을 휘둘러 백 장이나 되는 빛을 냈으며 윤구주를 향해 전력을 다해 내리쳤다. “어검술, 만법귀일!” 윤구주는 검을 휘둘러 만법을 제압했다. 천옥의 검은 무적이었다. 지금 이 검은 하늘 아래 무적이다. 신도 참형당할 것이다. 검 한 번 휘두르면 만물이 죽었다. 아래의 용암마저 삼 척이나 눌려 내려갔다. 쿵! 진파천의 검도가 순식간에 소멸했다. 그 절세의 검도 수천 조각으로 부서졌다. 산산이 부서진 칼날 조각이 진파천의 온몸을 그대로 꿰뚫으며 체내로 파고들었다. 이어서 끝없는 검기가 몸속을 휩쓸었고 그의 경맥은 모조리 끊어졌다. 산산조각 난 오장육부마저 등이 터지며 밖으로 흩뿌려졌다. 진파천이 용암 속으로 추락하자 억눌렸던 용암이 마침내 폭발하듯 솟구쳤다. 순식간에 지하 세계 전체가 뜨거운 용암으로 뒤덮였다. “구주야, 내가 먼저 주작을 데리고 올라갈게!” 임정설은 실력이 부족해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말을 마친 임정설은 주작을 데리고 전에 내려온 통로로 뛰어올랐다. “주작은 먼저 올라가고 국주 님은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해요.” 윤구주는 기를 이용해 임정설을 묶었다. 주작은 기에 의해 지하 궁전으로 튕겨 올라갔다. “응? 구주, 너 지금...” 임정설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까 진파천과 맞붙었을 때 윤구주가 진심을 담아 움직인 건 오직 만법귀일 단 한 번뿐이었다. 나머지 시간 동안 그의 마음은 진파천에게 없었다. “하하, 진파천이 뭐라고 했더라? 화진에는 두 명의 왕이 공존할 수 없다고? 그런데 지금 화진에는 두 명의 왕이 있지. 나는 화진에 두 명의 황자를 탄생시킬 거야!” 윤구주는 웃으며 말했다. “이런, 망할 놈의 구주왕! 화진은 내 왕국이야! 죽어!” 진파천은 다시 덤벼들었다. 그는 부서진 몸을 이끌고 강다시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필사의 일격을 날렸다. 섬뜩한 귀기가 몸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음산한 살기가 용암 세계의 뜨거운 온도마저 억누르며 순식간에 거의 얼어붙을 듯한 한
윤구주는 임정설을 데리고 용암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암반을 뚫고 용맥의 땅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화진 대부분을 가로지르는 지하의 숨겨진 용맥이다. 위로는 용암이 끓어오르고 있다. 전체 용맥은 어두운 금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순간 임정설조차 여기가 지상인지 지하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전설에 따르면 천하에는 아홉 개의 용맥이 한 나라의 기운을 좌우한다고 해. 그런데 오늘날 남은 건 오직 서울의 이 한 줄기 용맥뿐이야. 그래서 500년 전부터 역대 왕조가 서울을 국도로 삼았던 거지!” 임정설은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용맥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번 생에 여한이 없었다. “한 나라의 기운을 결정한다는 것은 좀 과장된 말이에요. 중요한 것은 용맥이 천지의 영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죠. 영기는 음과 양 두 가지 속성으로 나뉘어요. 평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지령의 음기뿐이에요. 하늘의 양령 기운은 접하기 어렵죠. 수련을 하려면 음과 양을 모두 갖추어야 해요. 한 나라의 기운을 결정한다기보다는 얼마나 많은 수련자를 탄생시킬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요.” 윤구주는 더 합리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일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군주의 흥망도 사람의 선택에 따라 결정됩니다. 인간의 의지가 하늘의 뜻을 이길 수도 있죠. 중요한 것은 우리 화진의 전통이 끊이지 않는 한, 화진 문명은 영원히 이어질 거예요.” 윤구주가 말했다. 임정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맥을 본 후 임정설은 윤구주가 어떻게 자신이 극 신급 절정에 오르도록 도울지 궁금해했다. “구주야, 어떻게 나를 도와 극 신급 절정에 오르게 할 거야? 내가 아는 바로는 곤륜 구역처럼 영기가 풍부한 곳에서도 극 신급 절정에 이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던데.” 임정설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맞아요. 인간은 최대 구오지존 경지까지 수련할 수 있어요. 그 위의 극 신급 절정은 인간의 수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구오지존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하지만 진정한 수련자에게는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구주야, 화진은 잠시 너에게 맡길게. 임씨 일가에 문제가 생기면 내 삼촌이라도 내 체면은 생각하지 말고 처벌하는 대로 처벌해. 만약 임씨 일가 중 누구라도 화진을 배신한다면 너는 황명을 내려 그를 처단할 수 있어.” 임정설은 윤구주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 속에 있는 뜻은 분명했다. 윤구주를 새로운 왕으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황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윤구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정설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할지는 임정설이 더 이상 간섭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마친 후, 임정설은 안심하고 관문에 들어갔다. “아버지, 제가 남긴 전법을 사용하실 수 있어요. 만약 누군가가 침입하려 한다면 전법의 힘을 빌려 그 자리에서 처단하세요.” 떠나기 전에 윤구주가 전음으로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임정설은 잠시 멈칫했다. 원칙적으로 사위가 장인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는 윤구주의 이 한마디가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하, 그럼 너를 양아들로 삼도록 하지.” 임정설은 생사를 건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황자급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출관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윤구주는 지하 궁전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주작은 바로 윤구주의 품에 안겼다. “이 아이 언제 다 크겠어,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구나. 이렇게 많은 날 동안, 너를 혼자 두고 고생시켜 미안해.” 윤구주는 부드럽게 주작의 등을 토닥였다. 비록 화진의 군신이자 천하제일의 살수지만 주작 역시 부드러운 면이 있었다. 더군다나 주작은 여자다. 세상의 모든 여자는 다 똑같아서 토닥여주고 달래줘야 했다. “고생하지 않았어요. 왕께서 무사하시니 다 괜찮아요.” 주작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먼저 너의 상처를 치료하자.” 윤구주는 천지 영기를 끌어와 법술을 펼쳐 주작의 상처를 치료했다. 치료하
주작은 방금 경지에 올랐고 경지가 안정되지 않았으며 진파천과의 전투에서 내상을 입어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왕! 저는 단지 왕의 동료만이 아니라 화진의 장군이예요! 구주군 전사 중에 후퇴하는 자가 있습니까? 북라국이 우리 화진을 침범했으니 화진의 장군으로서 마땅히 나라를 지켜야 해요! 게다가 이건 단순히 두 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빙신전과 아사 신전이 배후에 있으니 이때는 제가 나서야 해요!” 주작은 고집을 부렸다. 윤구주도 이 점을 고려하고 있었다. 단순히 천현수만으로는 부족했다. “좋아. 하지만 조심해야 해. 다른 건 말하지 않을게. 국전까지 며칠 남지 않았으니 내가 너의 상처를 치료한 후 나와 함께 북주로 돌아가자.” 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침내 다시 구주왕과 함께 전투할 수 있게 되어 주작은 매우 흥분했다. 윤구주가 주작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며칠이 걸렸다. 하지만 지하 궁전 위의 견배영은 이를 알지 못했다. “흠, 벌써 5일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네.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없을 텐데?” 윤구주가 산을 옮겨 만들어 낸 틈에서 지키고 있던 견배영은 걱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지휘사님, 우리가 형제들을 보내어 아래를 살펴보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 은용위가 제안했다. “안 돼. 저 마인은 전조의 국주야. 극 신급 절정의 존재지. 만약 왕이 의도한 것이라면 우리가 내려가는 순간 왕의 의도를 드러내는 꼴이 되잖아. 이 정도 경지의 싸움에 있어서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실수하는 것보다 나아.” 견배영은 거절했다. “하지만 만약 무슨 일이 생겼다면요?” 은용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 다물어! 왕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저 진파천 따위가 왕을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잊지 마, 문씨 가문이 빙신전과 함께 천옥에서 왕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어!” 견배영은 엄하게 꾸짖었다. 비록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걱정되었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이 말을 들은 임홍연은 며칠 동안 연속으로 바쁘게 일하느라 지쳐 있었지만 순간 피로가 사라졌다. 탁! 임홍연이 책상을 치며 진동왕을 노려보자 임성진은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는 지금 모두 구주왕을 위해 일하고 있어요! 모두 구주왕의 부하예요. 이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흠, 너 이 녀석. 할아버지를 꾸짖는구나. 네 아버지도 나에게 감히 이런 식으로 말하지 못했어!” 임성진도 화가 났다. 구주군 중에서 그는 윤구주만을 존경했고 윤구주 다음으로 자신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공주 따위는 별것 아니었다. “할아버지! 제발 정신 차리세요. 구주왕의 명성은 죽여서 얻은 것이에요! 제 아버지 같은 인자한 왕과는 달라요! 구주가 당신을 쓰는 것은 할아버지가 구주에게 유용하고 화진에 유용한 인물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만약 언젠가 구주가 당신이 화진에 위협이 된다고 느끼거나 당신이 구주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구주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우리 아버지가 가장 먼저 당신을 처단할 거예요! 믿든 말든 그게 현실이에요.” 임홍연은 엄숙하게 말했다. 이 말은 임성진을 깜짝 놀라게 했다. 임정설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한계를 넘지 않는 한 마음대로 놀게 해주지만 한계를 넘는 순간 삼촌이라도 죽일 수 있다. “알았어, 충고 고마워. 나도 그냥 말만 한 것뿐이야. 군자는 행실로 판단 받지 속마음으로 판단 받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말하자면 너는 정말 누가 왕이 되든 상관없어? 그래, 우리 임씨 일가가 왕이 되면 너는 공주이고 윤구주가 왕이 되면 너는 왕후지. 어쨌든 우리 임씨 일가는 손해 볼 것이 없네!” 진동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특히 왕후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할아버지, 입 다물어요! 저는 왕후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그리고 만약 윤구주가 정말 왕이 된다면 이 왕후 자리는 제 것이 아니에요. 저는 그 자격이 없어요.” 임홍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응? 그렇게 말하면
7일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아직도 윤구주는 북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현모, 아직 윤구주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모든 결정은 윤구주가 돌아올 때까지 미루자.” 임홍연은 청관에 있는 현모와 통화진며 말했다. “장군이 전장에 나가면 군령을 따르지 않을 때도 있죠. 왕께서 7일 후에 전쟁을 시작하라 하셨으니 7일 후에 전쟁을 시작할 것입니다. 제가 직접 구주군을 이끌고 북라국을 공격하겠어요.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제가 전적으로 책임지겠습니다.” 현모의 대답은 단호했다. 임홍연도 전쟁 선포가 내려진 이상 전 세계가 이 전쟁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되었는데도 출병하지 않는다면 화진의 국제적 위상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이미 화살은 시위에 걸려 있고 발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임홍연이 할 수 있는 일은 현모의 행동에 협력하는 것뿐이었다. 하나를 움직이면 전체가 따라 움직인다. 북경 삼주의 군사력이 동시에 출동했다. 현모는 청관을 떠나 병력을 이끌고 나가는 동시에 북라국 내부에서는 암부가 세운 비밀 기지에 예기치 못한 침입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수많은 방어선을 뚫고 기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기지 밖에 도착했을 때 천현수는 비로소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신무 주작진을 펼쳐!” 상대가 혼자서 기지 깊숙이 침투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 실력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천현수는 곧바로 삼백 명의 암부에게 진을 짜서 대응하라고 명령했다. “죽여라!” 300명의 암부가 일제히 돌진했다. 신무 주작진은 수많은 고수를 쓰러뜨린 전법으로 일류의 신급 강자가 와도 맞설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천현수는 암부를 시험 삼아 보내고 자신은 기회를 노려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멩이 여러 개를 들어 암부들을 쓰러뜨렸다. 열몇 명이 쓰러지자 전법의 기운도 흩어져 버렸다. 전법이 제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상대는 손쉽게 전법을 무너뜨렸다. 천현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알아보다니?” 주작은 의아해하며 말했다. “정말로 대장님이시군요! 무슨 말씀이세요? 대장님은 재가 되더라도 제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 천현수는 감격에 겨워 울부짖었다. 주변의 암부들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군신 현모가 돌아온 것도 암부에게는 기쁜 일이었지만 주작만큼은 그들의 중심이었다. 현모와 비교했을 때 주작은 그들에게 단순히 대장님이 아니라 가족 같은 존재였다. 암부들이 하나둘 모여들며 눈물을 흘렸다. “다들 이게 무슨 꼴이야? 그리고 내가 떠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너희들은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구나. 가문의 규율을 적용해야겠어.” 암부들의 감격과 달리 주작은 매우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암부들은 다시 무릎을 꿇었다. 천현수도 땅에 엎드려 벌을 청했다. “벌은 돌아가서 주겠다. 지금은 전쟁이 코앞이다. 현모 쪽에서 우리 정보가 필요하니 너희가 알아낸 상황을 모두 내게 보고해. 북라국은 작지만 빙신전과 아사 신전에 대한 정보가 가장 중요해.” 주작이 기지 안으로 들어가자 천현수와 몇몇 대장들도 다급하게 따라 들어갔다. “대장님, 전황이 급박합니다. 현모는 이미 출병했어요. 하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왕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북라국만 놓고 보면 현모가 주력을 이끌고 출격하고 진동왕이 협공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대장님 말씀처럼 빙신전과 아사 신전이 진짜 적이에요.” 천현수는 진지하게 말했다. 두 신전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북라국을 이기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왕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들만으로는 두 신전을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누가 왕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어? 이번에는 내가 왕과 함께 서울에서 돌아왔어.” 주작은 차갑게 말했다. 중요한 점을 설명하려던 천현수는 그 말을 듣고 멍해졌다. “네? 왕께서 돌아오셨다고요? 그럼 국주께서는 안전하시다는 건가요?” 천현수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국주가 무사하기를 바라지 않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천현수의 그런 속마음은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