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하, 저자는 이미 등룡을 이룬 자입니다. 비록 교룡이라 해도 진룡은 진룡입니다. 실체를 지닌 진룡은 모든 화신을 초월합니다.”황보웅의 말에 담긴 의미를 윤구주는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그것은 곧 자신의 구룡화신조차 교룡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문아름... 역시 날 위해 완벽한 무대를 준비했구나.”윤구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좋다. 청룡은 어디 있지?”윤구주는 곧장 본론을 던졌다.이 모든 상황이 함정임을 뻔히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걸어들어온 이유는 오직 하나, 청룡이 여기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문아름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청룡만이 윤구주를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미끼라는 것을.이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종족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유혹을 위해서는 반드시 매개체가 필요했고, 그 매개체는 바로 인간의 감정, 인간의 본능이었다.“안심해라. 청룡은 이곳에 있다. 하지만 먼저 나를 넘어서야 한다. 나를 이긴다면 청룡을 보여주지.”교룡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리고 동시에 수라전의 자객 군단이 앞으로 나섰다.서역 불종 종주 불만루와 수라전 전주도 전열에 합류했다. 반면 윤구주 진영은 상황이 매우 불리해 보였다.윤구주를 제외하면 주작과 황보웅뿐이었고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불만루나 수라전 전주 한 명도 당해낼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황보웅은 잘 알고 있었다.황보웅은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섣불리 허세를 부리다 목숨을 잃는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다.그는 이미 한발 물러선 상태였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윤구주였고, 자신은 말 그대로 구경꾼에 불과했다.윤구주가 승리하면 자신도 살아남고, 패배하면 함께 죽을 것임을 너무나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하지만 주작은 달랐다.그는 화진의 전신이었고, 물러설 수 없었다.“저하, 수라전의 자객들과 수라전 전주는 제가 맡겠습니다. 암살은 제 전문 분야입니다.”주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하지만 그 누구도 주작의 말을 있는 그대
윤구주는 눈앞의 남자를 비웃듯 농을 던졌지만 주작과 황보웅은 감히 그러지 못했다.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황보웅은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겉모습은 분명 인간이지만 그 존재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흉수가 눈앞에 선 듯한 압도적인 기운이 몰려왔다.그는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로 극도로 긴장했다.주작 또한 몸속의 성수정혈이 마치 불에 달궈진 듯 끓어오르고 있었으며 눈동자는 점점 야수의 눈처럼 변해갔다.주작은 당장이라도 폭주할 것 같았다.“저하, 이 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눈앞의 형상도 법신일 뿐 본체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황보웅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직감이 외쳤다. 이번 적수는 정말 위험한 상대라고.“법신? 그 표현으론 턱없이 부족하지.”윤구주가 피식 웃었다.하지만 황보웅에게는 감히 웃을 여유가 없었다.“저하, 이 자의 정체는 대체 무엇입니까?”황보웅은 이를 갈며 물었다. 윤구주는 폭주 직전의 주작을 한번 흘깃 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말은 법신이라 하지만 저건 단순한 도행의 화신이 아니야. 저건 인형 환영이다.”황보웅은 침을 꿀꺽 삼켰다.곤륜 지역의 전주로서 화인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입도는 곧 도의 완성, 절정이었다.이는 수련의 정점에 오름을 의미하는 경지였다.화인 즉 인간의 형상을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입도의 징표였다.이건 단순히 형상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영지를 갖추고 법력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만들어 세상을 속일 수 있는 경지를 일컫는 것이었다.이 경지에 오른 야수를 사람들은 정귀라고 불렀다.“이 자는 정귀다. 이 정도 능력을 지닌 존재는 곤륜 지역에서조차 손꼽을 정도로 희귀하다. 게다가 그들마저 생사불명이니, 지금 이 자가 세상에 남은 유일한 정귀일지도 모른다.”황보웅의 얼굴은 잿빛으로 질렸다.윤구주가 어떻게 저런 괴물과 맞설 수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정귀 중 일부는
“무도에 무지한 사술쟁이가 감히 내 앞에서 천지를 논하다니, 우습군. 나는 천명을 받은 인황 윤구주다. 너희 같은 하찮은 것들이 감히 내 수련을 판단하려 들다니.”윤구주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태도를 보면 불만루가 도리나 진리를 따지는 건 명백히 쓸모없는 짓이었다.윤구주 같은 사람한테는 집착이 곧 마성처럼 깊어져 있어 남의 말 따위는 귀담아듣지 않는다.벽에 머리를 찧기 전까진 절대 물러서지 않을 터였다.이를 깨달은 불만루는 더 이상 말다툼을 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불력을 사용했다.“저자가 진짜 배후였던 거야? 셋이 상대하면 우리가 유리하지!”황보웅은 빙술을 펼치려 했지만 기운이 마음처럼 모이지 않았다. 이곳의 전법 때문에 그의 영기 사용이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었다.영기가 원활하지 않자 술법의 위력은 현저히 줄어들었다.“아니야. 상대는 그 하나가 전부가 아니야.”주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불만루에 대한 정보는 내가 가지고 있어. 본래 무도인이었으나 우연히 곤륜 지역에 들어가 수련한 후 어찌 된 영문인지 서역 불종에 귀의했지. 도행은 백 년쯤 됐고 나이는 이백 세 안팎이야.”이백 세라면 일반인과 비교하면 장수 중 장수다.하지만 수백 년은 기본으로 사는 마인들과 비교하면 사실상 그저 그렇다.그리고 그 정도 도행으로는 이런 초월적 전법을 이곳에 펼칠 수 있을 리가 없다.“맞다. 나 하나로 구주왕처럼 아사신족을 멸족시킨 자와 맞서기엔 역부족이지.”불만루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편 깊은 어둠 속에서 수많은 검은 그림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하나같이 진한 음기와 살기를 내뿜으며 검은 망토로 전신을 휘감고 붉은 눈만 드러낸 모습이었다. 마치 지옥에서 온 사신 같았다.주작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들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챘다.“저하, 저들은 수라전의 자객들입니다. 서역 불종과 마찬가지로 곤륜 지역에 속하지 않는 독립 조직이며 서남 제국의 실질 권력을 장악해 온 세력입니다. 전에 제가 이끄는 암부가
희뿌연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윤구주 일행은 마치 환영 같은 수풀을 헤쳐 나갔다. 사방에서는 귀물이 어른거리며 원혼과 악귀의 울부짖음이 귓가를 맴돌았다.비록 황보웅과 주작은 만만치 않은 실력자였지만 이 음산한 기운 속에서는 그들조차 전율을 감추지 못했다.“정기가 곧고 맑으면 백 해를 막는다.”앞장서던 윤구주가 담담히 전음을 보냈다.주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황보웅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는 그런 정기니, 정의니 하는 말을 애초에 믿지 않았다. 오직 실력과 수련만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윤구주가 두려워하지 않는 건 그의 월등한 실력 때문일 뿐이라고 여겼다.수산 외곽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황보웅이었기에 지금처럼 숲 깊숙이 들어온 상황에서는 당연히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윤구주가 없었다면 황보웅에게 열 개의 목숨이 있어도 감히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사방의 귀물들이 사람의 신경을 갉아 먹는 데다 불경스러운 불음까지 퍼져 나와 황보웅과 주작의 짜증은 더욱 고조되었다.“젠장! 언젠가는 저 요승들 씨를 말려버릴 거야!”황보웅이 욕설을 퍼부었다.그 순간, 앞을 가리던 안개가 마치 거짓말처럼 걷히며, 그들은 숲의 중앙에 도착했다. 중앙은 거대한 힘으로 평탄화되어 있었고 원래 울창했던 나무들은 불길에 그슬려 까맣게 타버린 재만 남아 있었다. 세 사람이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자 재먼지가 공중으로 흩날렸다.“공기가 완전히 정체되어 있어. 천지 영기도 느껴지지 않아.”황보웅이 숨을 들이켰다.“그래.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의 땅이다.”앞서 걷던 윤구주가 무심하게 대답했다.세 사람의 시선은 곧바로 숲의 중앙에 앉아 있는 한 노승에게 고정되었다.노승은 단정하게 다리를 접고 있었고 마치 살아있는 불상처럼 고요했으며 그의 얼굴은 온화함 그 자체였다. 겉모습만 보면 고위 고승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의 주변으로 퍼져 나오는 기운 또한 정결하고 숭고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번뜩이는 차가운
“늙어서 죽지 않으면 도둑이라 했습니다. 겨우 이삼백 년 살아도 마인이라 불리는데 천 년을 살았다면 그건 진정한 대요마입니다.”천 년을 살아남은 대요마라면 곤륜 지역에서조차 그 존재는 절대적인 정점에 우뚝 선 자들이다.황보웅이 아는 윤구주의 스승들조차 이런 경지에 도달한 이는 없었다.“무능한 자는 천 년을 살든 만 년을 살든 결국 무능하다.”윤구주는 오만한 어조로 말했다.황보웅은 할 말을 잃었다.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구주왕은 역시 말 한마디에도 기세가 넘쳤다.하지만 황보웅은 재빨리 눈치챘다. 윤구주의 말은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어딘가를 향한 도발이 섞여 있었고 누군가가 듣고 있을 것을 알고 일부러 내뱉은 말이었다.“그러면 저하, 이 지역의 전법이 천 년 전에 짜인 거라면 그 늙은 요괴는 자신의 혈육으로 이 고목들을 기르고 고목으로 다시 전법을 이루고 그걸 또 반대로 자기 수련에 이용했다는 말씀이군요. 이 구조는 이제 이해했는데... 저하께선 어떻게 이 전법을 깬 겁니까?”황보웅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전법과 술법의 원리라면 누구보다 흥미를 갖는 그는 그 해법 또한 알고 싶었다.“내가 언제 전법을 깼다고 했냐? 다만 그 구조에 있는 허점을 이용한 것뿐이지.”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주작을 가리켰다.“주작의 몸엔 고성수정혈이 융합돼 있다. 짐승과 나무는 원래 상생하는 존재야. 고성수정혈도 원래는 극양 속성이지만 내가 손을 봐서 음양을 모두 아우르게 만든 상태지. 그래서 이곳의 고목 입장에선 주작은 그들과 같은 동류인 셈이다. 고성수정혈도 개조한 내가 이 전법의 구조를 파악해 틈새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윤구주의 설명에 황보웅은 그야말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무공, 무기, 전법, 술법, 부적, 금술까지 모두 정통한 윤구주는 곤륜 지역의 살신이라 불릴 수밖에 없었다.그제야 황보웅도 윤구주가 아까 자신에게 절대 술법을 쓰지 말라고 경고했던 이유를 깨달았다.자신이 이 전법의 먹이였다.술을
다급한 순간, 황보웅은 재빠르게 기지를 발휘해 윤구주의 발치에 엎드려 꿇었다.기발한 수단이긴 했지만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검게 마른 나뭇가지들은 일제히 윤구주 쪽으로 몰려왔으나 마치 눈이 멀기라도 한 듯 윤구주와 주작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오직 황보웅만 노리며 덮쳐들었다.“왜 나만 노리는 거냐고. 이건 불공평하잖아!.”황보웅은 악을 쓰며 좌우로 필사적으로 뛰어다녔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나뭇가지들한테 휘감겨 꽁꽁 묶이고 말았다.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십 개의 나뭇가지가 그를 꽁꽁 묶어버렸다.“어디 한번 당해봐라. 평소에 착하지 않은 대가가 이거구나. 인과응보다 이놈아!”주작은 고소하다는 듯 침을 뱉으며 상황을 즐겼다.속수무책으로 꽁꽁 묶여 신음조차 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속이 다 시원했다.“됐어. 아무리 한심한 놈이어도 나름대로 쓸모는 있어.”윤구주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손끝에서 목령 한 줄기를 소환해 황보웅의 몸속으로 주입했다.그러자 황보웅을 칭칭 감고 있던 나뭇가지들은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듯 그를 풀어주었다.그 잠깐 사이에도 황보웅은 마치 벌레에 갉아 먹힌 듯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의 머리 위로는 희미한 녹색 기운까지 피어올라 주작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저하,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혹시 무슨 술법과 관련 있는 겁니까?”황보웅은 심각하게 고민하며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어쨌거나 그는 빙신전의 전주였고 머리 하나는 타고난 인물이었으니까.“이곳의 목령이 너무 짙어서 음기로 이루어져 있지만 저하께서 음양을 모두 다루시니 음속성의 목령을 조종하시면 이 숲을 충분히 통제하실 수 있을 겁니다.”황보웅은 흥분한 듯 말했다.사태의 본질이 의외로 단순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하지만 윤구주는 비웃으며 냉소적으로 대답했다.“그 정도로만 생각했다면 네가 문아름을 너무 과소평가한 거다. 그녀의 책략이 하늘을 뒤집을 순 없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무적이라 불릴 만큼 치밀하거든.
백호는 삼 할은 인간 같고 칠 할은 마귀 같은 존재였다.진정한 인간 세상의 요마였다.쾅!주작이 말을 마치자마자 멀리서 다시 한번 폭음이 울렸고 사호수의 처참한 비명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 비명은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였다.사호수가 어떤 지옥 같은 고통을 겪었기에 저토록 끔찍한 비명을 내뱉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어서 가자. 저 배후에 숨어 있는 놈이 한두 명이 아닌 것 같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문아름의 헛소리에 속아 죽으러 오는 놈이 누군지 궁금하군.”윤구주는 코웃음을 치며 원시 밀림 깊숙이 발을 내디뎠다.숲의 깊은 곳은 외곽과 달리 음산한 안개는 없었지만 나무들이 너무나 빽빽하게 엉켜 있어 시야는 여전히 답답했다. 특히 신념술의 탐지력도 이곳에서는 여전히 제한적이었다.황보웅은 처음 발을 들인 순간부터 계속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주작아, 이 숲... 느낌이 너무 이상한데. 누군가가 계속 우리를 감시하는 것 같지 않아? 게다가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아.”황보웅이 긴장된 목소리로 속삭였다.“누구 허락 받고 감히 주작이라 불러? 넌 내 개야. 주인님이라고 불러.”주작이 버럭 소리쳤다.“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황보웅은 어이가 없었다. 어쨌든 황보웅은 빙신전의 전주인 데다가 서방세계에 가면 신들의 왕으로 대접받는 존재였다.황보웅이 불만을 토로하던 찰나, 옆의 덤불이 갑자기 움직이며 검고 마른 나뭇가지들이 미친 듯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황보웅이 술법을 펼치려던 순간 윤구주가 날카롭게 경고했다.“술법 쓰지 마! 안 그러면 나도 널 못 구한다!”그 말에 황보웅은 소름이 돋았다. 하는 수 없이 몸놀림만으로 나뭇가지들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피해야 했다.“빙신전의 전주라는 자가 무술 하나 제대로 익히지 못했나 보군. 참 웃기는 꼴이야.”윤구주는 재미있다는 듯 비꼬았다.옆에서 지켜보던 주작의 표정도 묘했다.웃기긴 웃기지만 나무가 움직인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저하,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사호수는 윤구주에게서 빈틈을 찾으려 했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지금 사호수의 눈앞에 선 윤구주는 하늘이었으며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청천이었다.팽팽한 대치가 오래 지속되자 사호수는 점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이 인간 너무 강력하다.’요수의 직감이 속삭였다. 구주왕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을 처치할 수 있다는 것을.아무리 기다려도 윤구주에게선 약점이 보이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호수의 불안감만 더해만 갔다. 마침내 사호수는 싸울 의지를 잃고는 격렬하게 울부짖으며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도망? 네놈이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윤구주가 손바닥을 들어 아래로 내리누르자 산을 뒤엎을 듯한 기세가 사호수를 짓눌렀다.윤구주가 조금씩 힘을 주자 5층 건물을 무너뜨릴 만한 압도적인 중력이 사호수의 몸을 짓눌렀다.금강불괴의 육체를 가진 사호수조차 견디지 못하고 뼈마디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터졌다.“이렇게까지 길러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대로 두면 금방 죽어버리겠군.”윤구주는 의도적으로 큰 소리로 외쳤고 그 목소리는 사방으로 퍼져나갔다.마침내 사호수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땅 아래서 한 줄기의 검은 용기가 솟구쳐 올라와 사호수를 짓누르던 압력을 순식간에 무력화시켰다.곧이어 그 검은 용기는 사호수를 감싸 보호한 채 재빨리 빠져나가려 했다.“흠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윤구주는 눈빛을 번뜩이며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그가 사호수와 이렇게 대치해 온 진짜 목적은 오로지 배후의 강자 위치를 정확히 찾기 위함이었다.상대는 수산의 용맥을 이용해 자신의 기운을 철저히 숨겨뒀기에 윤구주라도 한순간엔 찾기 어려웠지만 지금처럼 기운을 움직이면 순식간에 위치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너희들도 따라와.”윤구주는 주작에게 전음을 보냈다. 주작은 현모를 짊어지고 황보웅과 함께 윤구주의 뒤를 바짝 쫓았다.한편, 사호수는 검은 용기의 호위를 받으며 수산 밖으로 벗어났다.“저하, 그놈을 그냥 놔두시는 겁니까?
놀랍게도 사호수는 입을 열어 사람의 말을 했다. 그것도 정확한 화진어였다.“오? 이제 말을 다 하는 걸 보니 이미 정령의 경지에 올랐군. 음룡의 기운을 조금 빨아먹었다고 네가 대단한 존재라도 된 줄 알았지?”윤구주는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압도적인 기세에도 흔들리지 않던 사호수는 오히려 별거 아닌 듯한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멈칫하더니 눈동자에 두려움의 그림자가 스쳤다.“인간은 죽어라!”사호수는 포효와 함께 윤구주에게 맹렬히 덤벼들었다.윤구주는 술법 하나 쓰지 않고 오로지 육체의 힘만으로 맞섰다.요수는 본래 체질 자체가 강인하다.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수련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사호수의 육체는 이미 금강불괴에 가까운 수준으로 단련되어 있었다.이런 경지의 요수에게는 몸의 털 한 가닥조차 언제든 무기가 될 수 있었다.사호수는 윤구주를 공격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피 칠갑이 된 입으로 물어뜯고 강철도 가볍게 찢어낼 듯한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심지어 온몸의 털까지 세워 윤구주에게 치명타를 날리려 했다.하지만 모두 무용지물이었다.“넌 인간이 아니다. 네놈은 분명 수신전의 신령이다.”사호수는 혼신의 공격이 먹히지 않자 윤구주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이렇게 강력한 육체를 가진 존재라면 자신과 같은 요수일 거라 생각했다.“흥. 짐승은 역시 짐승이구나. 무식하기 짝이 없군. 나는 윤구주다. 곤륜 지역을 종횡하며 베어낸 신이 천이 넘지만 인간의 육체를 완벽히 구현한 짐승 따위는 본 적도 없다.”윤구주는 비웃었다.인간의 모습으로 완전히 변신한 요수는 아직은 소설이나 전설에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일 뿐이었다.현실에서는 아무리 신비한 곤륜 지역이라 해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사호수의 증오는 점점 깊어졌다.처음부터 지금까지 윤구주는 사호수를 깔보기만 했을 뿐이다. 사호수는 사자와 호랑이의 힘을 동시에 지닌 존재였다.“네놈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크아아악!사호수는 특이한 술법을 펼쳐 허공에서 금빛 구름을 소환했다. 구름 위로 영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