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돌리지 말고 바로 말해. 지금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거야?”윤구주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간단해. 너랑 같이 가면 돼. 네 팔자가 나보다 더 사나운 데다가 나는 원래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사주를 타고났어. 나를 노리는 자들은 모두 내 팔자에 제압되어 죽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모든 위험이 스스로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야.”문아름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윤구주는 어이가 없었다. 문아름처럼 지혜로운 인물이 이렇게 무모한 말을 할 줄이야.“이게 뭐야? 사람들을 제압하는 사주를 가졌다면 난 너를 곤륜 구역으로 돌려보내면 되잖아?”윤구주가 화를 내며 말했다.“그건 안 돼. 지금 나더러 돌아가라고 해도 난 감히 못 가. 네가 나한테 혼술을 심었다고 백호가 거짓말을 퍼뜨렸으니 돌아가면 바로 죽을 거야.”문아름은 머리를 저었다.“네가 죽을까 봐 걱정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봐.”윤구주는 조바심이 나서 얼른 물었다.“간단해. 비록 비밀을 말할 수 없지만 네가 나를 데라고 가기만 하면 만족스러운 답을 줄게.”문아름은 자신 있게 말했다.“결국엔 곤륜 구역으로 가거나 화신전으로 가야 할 텐데.”윤구주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물론이지. 하지만 구체적으로 실행하면 너의 계획과 다를 거야.”문아름이 고개를 끄덕였다.문아름이 계획을 밝히지 않으니 윤구주도 그녀를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곤륜 구역은 반드시 가야 하는 곳이다.“알았어. 어서 화진의 방어 업무를 잘 안배해야 해. 떠나기 전에 윤씨 가문의 본가에도 다녀와야 해.”윤구주가 말했다.“윤씨 가문의 본가에는 왜 가야 해? 네 선조에게 사죄하라고?”문아름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윤구주를 바보처럼 쳐다보았다.“너의 선조야.”“너 전에 윤씨 가문 사당에 가면 천상 구역에 들어간 윤씨 가문 선조가 누군지 알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어?”윤구주가 큰소리로 말했다.“정말 성질 급하네. 농담이었어. 업무 안배는 반나절이면 충분해. 이렇게 하자. 나한테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줘.
그는 그의 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때 재능이 뛰어난 고신도의 신녀였던 그녀가 이제는 풍상을 겪으며 얼굴에 밭고랑 같은 주름이 생겼다.“여보, 당신은 어떻게 나보다도 더 늙어버렸어? 같이 나가면 당신이 내 엄마라고 해도 믿을 수 있어.”윤상현은 눈시울을 붉히며 웃었다.평범한 농담 속에 담긴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하미연은 말없이 윤상현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윤상현이 더 힘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외롭게 떠돌아다니며 겪은 고통은 오직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그녀는 적어도 세 명의 착한 아들이 곁에 있었지 않은가.“여보, 울지 마세요. 난 당신의 이런 낙담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요.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화진을 부흥시키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우리 윤씨 가문처럼 수많은 가족이 더는 누구의 위협도 받지 않도록,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잖아요!”하미연은 윤상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단호하게 말했다.윤상현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날이 반드시 이루어질 거야. 목숨을 걸더라도 꼭 이루어낼 거야.’한편, 잠시 쉬고 있던 윤구주는 곧바로 화신전에 연락했지만 아직 답을 받지 못했다.“설마, 곤륜 구역의 미친놈들이 화신전까지 손댔을까?”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그의 여러 스승 중 화신전의 전주인 화공두목이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그는 이 시대에서 성기구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련자였지만 스승 중에서 내공은 가장 낮았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화신전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원래 생각으로는 화공두목 같은 제기사 대가가 대단한 기술을 가졌기때문에 곤륜 구역이 검도를 공격해도 화신전에는 손을 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곤륜 구역의 입장에서는 더 많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만약 그 사람들이 정말 화신전을 공격했다면 이미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는 거야. 즉 우리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지!”“수천 년 동안 오직 너
“걱정하지 마. 구주야, 내가 지금껏 사방을 떠돌아다닌 것도 바로 이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어.”윤상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화진과 고신도의 전쟁은 피할 수 없어. 고신도엔 약한 자가 없고 그들의 유일한 약점은 마음이 하나로 뭉치지 못한다는 점이야. 반면 우리 화진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지만 결국 평범한 인간의 육신으로는 고신도의 무사들과 맞서기 힘들어.”윤상현은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평범한 백성은 물론이고 지금 화진에서 가장 정예라 할 수 있는 구주군도 고신도의 무사들과 비교하면 아직 큰 격차가 있어. 무사끼리 비교해도 전체적인 내공에서 화진이 밀릴 수밖에 없어. 구주야, 난 곧바로 해외로 나가서 구주정이 화진으로 돌아온 사실을 다른 고대 가족들에게 알릴 생각이야. 사실 이미 몇몇 고대 가족 수장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지. 구주정이 가진 힘은 우리 상상 이상이야. 조금만 기다려. 분명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테니.”윤상현이 넉넉히 웃자 윤구주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대 가족들을 다시 모으는 일은 윤상현에게 맡겼다.다음 날 새벽이 가까워져 오자 서울에 드리운 위기가 완전히 해소되었다.윤씨 가문 식구들은 모두 뒷마당에 모여 돌아온 윤상현을 정식으로 맞이했다.가문의 젊은이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할아버지!”윤상현은 웃음을 터뜨렸다.집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분명 윤씨 가문의 가주였는데 이제 다시 돌아오니 어느새 모두가 그를 할아버지나 어르신이라 부르고 있었다.윤상현은 문득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다.예전엔 자신도 얼마나 패기 넘치고 혈기 왕성했던가.임씨 가문과 함께 나라를 세웠고 온 나라를 누비던 그 시절이 선하게 떠올랐다.그러나 이제는 옛 친구든 숙적이든 같은 시대를 살던 이들 중 살아남은 자가 거의 남지 않았다.모두가 흩어진 뒤 작은 방에는 윤상현과 하미연 두 사람만 남았다.이제야 비로소 오래된 벗이자 평생의 동반자와 조용히 마주 앉을 수 있었다.늙고 쇠약해진 하미연을 바라
서울의 왕도.정씨 가문 성경의 고수 셋은 기린수의 감시 아래 묵묵히 무릎을 꿇고 밖으로 기어가고 있었다.기린수는 사실 저 세 노인이 자존심 좀 세워서 한 번쯤 반항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그래야 본인이 나서서 마음껏 손을 볼 명분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세 사람은 내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이렇게까지 치욕을 당하면서도 찍소리도 못 내? 속에 불만 있으면 그냥 질러버려. 답답하게 속으로만 삭이지 말고 좀 내뱉으라고!”기린수가 거칠게 쏘아붙였지만 세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떨리는 몸으로 바닥을 기어갔다.한편, 미혹진이 깨진 뒤 주작은 모든 힘을 쏟아 백성 구조에 나섰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결국 수백 명이 변을 당했다.윤씨 가문과 교외에 있던 청룡 역시 미혹진에 갇혀 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다.원래 정가희가 청룡을 묶어둔 것도 윤구주를 협박하려는 수였지만 이제 정가희 본인조차 윤구주 손에 잡혔으니 청룡을 더 붙잡아 둘 이유도 사라졌다.“저하, 저 자식들은 기회만 노리다 이렇게 뒤통수치는 족속들입니다!”청룡은 당장이라도 현천신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죽일 죄인이긴 하지. 하지만 지금은 살려둬야 쓸 데가 많아. 네가 직접 나가서 임홍연이랑 다들 데리고 돌아와.”윤구주가 침착하게 명령했고 곧이어 문아름이 윤씨 가문에 도착했다.현천신녀가 사로잡혀 있는 걸 보고도 문아름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마치 모든 게 예정된 일이었던 것처럼 담담했다.윤구주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문아름에게 전했다.“그래? 현천신녀가 정씨 가문에서 이 정도로 영향력이 컸단 말이지? 정씨 가문은 고신도의 사대 가문 중 하나잖아. 그렇다면 이걸 이용해야겠네.”문아름이 짧게 생각한 뒤 그렇게 말했고 윤구주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고신도 백여 가문이 한데 뭉치기라도 하면 아무리 윤구주라 해도 마음 한구석에선 불안함이 스쳤다.윤구주가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전쟁의 불길이 화진에까지 번지는 것만
정씨 가문 성경의 고수 셋은 그제야 고개를 깊이 숙였고 모든 것은 결국에 가문을 위한 선택이었다.그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윤구주는 속으로 조금은 기개가 있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정가희가 가문에서 이렇게까지 힘을 쓸 수 있는 인물이었나? 몇 년 전 곤륜 구역에서 그녀를 혼내줬을 땐 전혀 이런 위세가 없었는데. 이 현천신녀는 확실히 보통내기가 아니군. 몇 년 사이에 내공이 이만큼 오르다니...’윤구주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이 정도라면 정가희도 앞으로 쓸 데가 많겠다는 판단이 들었다.그때 윤상현이 냉소를 머금고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너희들은 기분 나쁘겠지만 우리 정도면 이미 충분히 이성적으로 대해 준 거야. 네가 이런 수치를 느끼는 건 애초에 우리 화진을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너희 눈에 우리 백성은 그저 아무렇게나 짓밟아도 되는 벌레 같았잖아.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치욕적으로 느껴지는 거겠지. 하지만 분명히 알아둬. 예전에는 화진 인황이 구주오방을 다스렸으니 천신도 따위가 감히 넘볼 존재가 아니었어. 온 무사계가 인황을 섬겼지. 그러니 내가 너희한테 무릎 꿇으라고 한 게 뭐가 그렇게 잘못이냐? 전혀 과하지 않아. 솔직히 너희 목을 그냥 베지 않은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자비로운 거야.”분명히 옳은 말이었지만 정씨 가문 성경 세 고수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때였다.“슉!”기린수가 도착했고 기린수를 보는 순간 정씨 가문 성경 셋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어이, 이게 누구야. 정씨 가문 자랑스러운 성경의 고수님들 아니야? 근데 표정이 왜 이래? 천신도라며? 내가 아직 겁도 안 줬는데 혼자 벌써 겁먹은 거야?”기린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윤구주는 곤륜 구역에서 살신이라 불릴 만큼 무시무시했지만 그는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하지만 기린수는 달랐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이 잔혹하게 죽였고 심지어 자기 가문도 무자비하게 멸문시킨 인물이었기에 정말 못할 짓이 없는 자였다
‘한 달 동안의 경험으로는 아직 부족했던 모양이군.’“정가희, 참 뻔뻔하네. 개인적인 문제니까 무고한 사람은 건드리지 말라고? 그래. 그럼 네 정씨 가문 사람들은 그렇게 무고하고 우리 화진 백성들은 죽어도 싸단 말이야?”“한 달로는 부족했던 것 같군. 지금부터는 내 곁에 붙어 있어. 어차피 밖에서는 네가 내 개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좋아. 내가 직접 세상에 알릴 거야.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공식 발표하지.”윤구주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정가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얼굴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거부권은 없어. 물론 그게 싫다면 선택지는 하나 더 있지. 지금 당장 목숨으로 화진에 진 빚을 갚아.”윤구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고 모든 게 그의 계산 안에 있었다. 과연 죽으라는 말에 그토록 단호하던 정씨 가문도 곧바로 주저앉았다.정가희는 고신도에서 만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이자 현천신녀였다. 아직 육신 성경의 경지엔 오르지 못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었다.윤구주는 진작에 고신도라는 집단은 하나같이 자기 목숨을 끔찍이 아끼는 족속들이라는 걸 알았다.결국 굴욕적인 조건 앞에서 정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아가씨!”정씨 가문 성경의 세 사람은 도저히 더는 못 참겠다는 얼굴이었고 이건 정씨 가문 역사상 손꼽힐 치욕이었다.“입 다물어. 내가 너희 때문에 여기까지 양보한 거야. 한심한 것들.”정가희가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고 그녀는 윤구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거절했다간 진짜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존엄 따위는 목숨 앞에서는 아무 의미 없었다.게다가 이런 조건으로 정씨 가문 성경의 고수 셋의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정씨 가문 가주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다만 설마 윤구주가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고 잃어버린 구주정을 다시 찾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 망할 놈아! 구주왕, 이제 우리 가도 되겠지?”정씨 가문 성경 셋은 윤구주를 증오에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