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던 천희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소채은의 목에서 빛나는 화정석 펜던트를 보았다. 그 펜던트는 바로 윤구주가 소채은에게 선물해 줬던 그 ‘평범한’ 펜던트였다.“젠장!”“계집애가 목에 이렇게 좋은 보호구를 차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네.”“그런데, 그걸로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아?”말을 마친 방지헌이 소채은에게 날아갔고 바로 그 일촉즉발의 순간, 우뢰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가 감히 형수님을 건드려.”민규현은 군형삼마의 첫째와 둘째에게 술법으로 묶여있었지만 계속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러다가 소채은이 위험에 빠지자 더 큰 힘을 폭발해내며 짙은 자주색의 기운을 몸에 두르고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자주색 기운으로 만들어낸 호랑이가 있었다.저게 바로 오장맹호!“기운의 형상화! 환상의 실물화!”“구품이 아니야. 이미 신급에 이르렀어!”방지형이 놀라서 소리치며 현실에 구현된 오장맹호와 거대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민규현을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민규현가 신급에 이르른 기운을 내뿜자 그의 주위에 있는 공기가 떨린다 싶더니 공중에 있던 검은 주문이 전부 터져나갔다.그는 그중심에 굳게 서서 전쟁의 신 마냥 노호성을 내질렀다.주위의 주문을 폭파한 민규현이 주먹을 내질렀고 그 공격에 방지형이 만들어낸 혈강시들이 전부 죽었다.공격은 혈강시를 없애는데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더 나가더니 그 곳에 서 있던 두 사람을 멀리 날려보냈다.두 군형 삼마를 처리한 민규현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소채은에게 달려갔다.방지헌은 민규현이 두 형님의 술법에서 벗어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빠르게 반응하여 혈무속에서 손을 내질러 공격을 시도했다.민규현은 그 손을 피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가며 공격을 모두 받아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그의 동작에 반응한 오장맹호가 포효성을 내지르며 공격을 개시했고 순간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방지헌이 바닥에 쓰러졌다.그가 있는 곳에 커다란 구멍이 뚤렸다.“
하지만 그들이 소라를 놔줄리가 없었다.방지형이 소라의 목을 꽉 쥐며 붉게 물든 눈으로 민규현과 소채은을 보았다.“놔줬으면 좋겠어? 그럼 네 목숨과 바꾸든가.”그 말을 들은 민규현이 포효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죽어!”“지휘관 님, 당신이 신급에 도달했다는 건 잘 알겠어. 대단하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한 발짜국만 더 움직이면 이 애는 죽게 될거야.”방지형이 그렇게 말하며 소라의 목을 더 꽉 쥐었다.“안돼...”“아이는 건드리지 마!”방지형에게 잡힌 소라가 거의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걸 본 소채은이 소리를 질렀다.“말했을 텐데? 아이를 살리고 싶으면 네 목숨과 바꾸라고!”방지현이 다시 한 번 말하자 소채은이 다급하게 대답했다.“알겠어, 바꿀게, 바꾼다고!”오늘, 그녀의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남은 건 불쌍한 소라뿐이었다.만약 소라까지 잘 못된다면 그녀는 죄책감에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형수님, 안됩니다!”민규현이 소채은의 팔을 잡으며 군형삼마를 노려보았다.“네 놈들 잘 들어, 이 분은 나 민규현의 형수님이야.”“오늘 이 분 털 끝이라도 건드렸다가는 내가 저승까지 쫓아가서 껍질을 벗겨줄테니까 잘 생각해.”군형삼마가 그 말을 듣고는 음험하게 웃었다.“어이구, 지휘과 님. 지금 협박하시는 거예요? 어쩌지, 우리한텐 안 통하는데. 예전이었다면 당신들 암부를 두려워했을 진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오늘, 저 년은 죽게 될거야.”방지형이 말을 끝마치고는 소채은을 손가락으로 짚었다.예전이었다면 군형삼마도 화진의 암부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그들은 문씨 가문에 귀속되었기에 든든한 뒷배를 둔 그 들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소채은이 눈물을 흘리며 방지형의 손에 잡힌 소라를 보았다.“소라야, 무서워하지마. 내가 곧 구해줄게.”말을 마친 그녀가 민규현을 보았다.“민규현 씨, 죄송해요. 저는 꼭 소라를 살려야겠어요. 만약 소라까지 잘 못되면 저는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형수님!”민규현이 그녀를
방지형이 소채은의 목에 걸린 화정석 펜던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펜던트는 여전히 강한 보호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목에 있는 목걸이 빼고 와!”소채은이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내려 윤구주가 선물한 목걸이를 보고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그래.”그녀가 망설임 없이 목걸이를 잡아당기자 그녀의 몸에 둘려져있던 보호의 기운이 스르르 사라졌다.“그럼 이제 소라를 놓아주는 거지?”소채은이 군형 삼마에게로 천천히 다가오자 방지형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너처럼 강인하고 마음씨 착한 여자는 나도 존경해. 하지만 임무는 임무인지라, 어쩔 수 없네.”말은 마친 그가 손을 휘두르더니 잡혀있던 소라를 공중에 멀리 내던졌다.“소라야...”작은 아이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걸 본 소채은이 멍하니 중얼거렸다.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민규현이 날아오르더니 소라를 공중에서 가로챘고, 이어서 주먹을 내질러 소채은에게 공격을 가하려는 군형 삼마를 막으려 했다.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군형 삼마는 소채은을 당장 죽일 생각이 없었다.비릿한 웃음을 흘린 방지형이 손바닥을 내밀더니 핏빛의 혈충을 그녀의 미간으로 날려보냈다.“형수님!”소채은이 혈충에게 당하는 걸 본 민규현이 순간적으로 힘을 폭발시키며 공중에서 날아가 착지했다. 그 맹호같은 기세에 군형삼마가 서있던 바닥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혈충에 당한 소채은은 바닥에 쓰러져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손톱 크기만한 혈충이 이미 그녀의 미간을 통해 몸 속으로 들어간 뒤였다.“개새끼!”“감히 형수님을 건드려?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민규현이 이성을 잃고 날뛰자 겁을 집어 먹은 군형 삼마가 뒷걸음 질 쳤다.그들도 신급의 능력자를 상대하기는 어렵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하지만 군형 삼마가 도망치려는 그때, 하늘에서 순간 번개가 번쩍 내리치며 강한 폭풍이 불어닥쳤다.동시에 숨이 막힐 정도로 농후한 기운이 이쪽으로 빠르게 나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느껴지는 기운과 분위기에서 패자의 향기가 짙게 풍겨왔다.민규현이 고개를 들
윤구주가 목소리를 떨며 소채은의 곁으로 왔다.“전하!”“죄송합니다.”“제 불찰로 형수님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전부 저 때문에 형수님이 그 세 개자식들에게 이렇게 다쳤습니다...”민규현이 눈을 붉히며 윤구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윤구주는 민규현을 보지 않은 채 그저 그 세 사람때문에 소채은이 이렇게 되었다는 말만 듣고는 살기를 끌어올렸다.그의 눈동자는 지금 당장 세 사람을 죽이러 온 저승사자의 그것처럼 붉게 빛났다.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한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살기에 몸을 떨었다.“세상에, 저게 무슨 눈빛이야? 됐고, 저놈은 위험해 보이니까 빨리 도망가!”방지형이 놀라서 말했다.“이 윤구주의 여자를 다치게 해놓고, 도망?”윤구주의 포효가 하늘을 찔렀다.그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하더니 그의 팔뚝 쪽에 검은 낙뢰가 나타났다.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늘에는 번개가 쉼없이 번쩍번쩍 터졌다.번개를 불러일으킨 윤구주의 입에서 하늘을 움직이는 주문이 터져나왔다.“8번째 기적의 힘, 뇌왕인!”“죽어!”말을 끝마친 윤구주가 오른손을 뒤집자 하늘에서 한줄기의 굵은 천둥 번개가 떨어지더니 군형 삼마에게로 날아갔다.화진에서 지명수배록의 9위를 차지하는 군형 삼마는 그 번개를 보며 그 자리에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한줄기 번개가 하늘에서 떨어지며 방지헌에게 떨어졌다. 그는 반항을 해보지도 못하고 번개에 맞아 순식간에 재로 변해 버렸다.방지헌이 즉사 당하는 걸 본 방지찬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오른손을 내밀어 수십장의 부적을 윤구주에게 날렸지만 부적들은 윤구주에게 닿기도 전에 번개에 맞아 재가루가 되었다.“형... 살려줘.”자신에게 빗발치는 번개를 보며 방지찬이 방지형에게 도와달라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순식간에 그에게 도달한 번개가 그의 몸도 재가루로 만들어 버렸다.몇 초도 안되는 시간 안에 군형삼마의 두 사람이 윤구주의 손에 죽었다.방지형은 자신의 두 형제의 시체를 보며 화가 머
윤구주가 소채은을 보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몇개의 인영이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창용 부대의 사령관, 박창용. 천하회의 원성일.주세호.그리고 암부의 나머지 두 지휘관, 정태웅과 천현수까지.화정석의 신호를 받자마자 윤구주가 먼저 달려왔고 그의 부하들이 그 뒤를 따른 것이었다.하지만 그들은 결국 늦어버리고 말았다.“형수님!”박창용, 정태웅과 천현수는 소채은이 쓰러진 걸 보고 놀라 소리 질렀다.“전하!”“신 민현규가 형수님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죽여주십시오!”“죽여주십시오!”민현규가 그말을 끝으로 윤구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하지만 윤구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품에 소채은을 안은 채 어둠 속으로 점점 멀어졌다.그 뒷모습을 보는 부하들은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밤, 용인 빌리지.수백명의 천하회 소속 사람들이 일자로 정열해서 별장을 지키고 있었고 그들을 이끄는 자는 천하회의 노정연이었다.천하회 외에도 백여명의 암부원들이 실탄을 소지한 채 별장을 지켰다.오늘 밤, ‘신’이라 불리던 남자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공격을 당했다.그 누구도 잠에 들 수 없는 긴 밤이 될것이다.별장 위, 우람한 덩치의 민현규가 두 눈을 붉힌 채 윤구주의 방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암부의 지휘관 중 한명인 그는 지금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그의 곁에는 창용 부대의 사령관, 박창용과 천하회의 회장, 원성일, 그리고 나머지 두 지휘관, 정태웅과 천현수가 서 있었다. 그리고 강성의 제1갑부, 주세호까지.“형님,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형수님이 그렇게 된게 전부 형님 탓도 아니고...”“그 빌어먹을 군형 삼마가 거기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소.”민규현이 꿈쩍않고 윤구주의 방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걸 본 천현수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래, 규현 씨. 빨리 일어나. 전하께서 꼭 형수님을 살리실 거야.”곁에 있던 박창용도 그를 말렸지만 민규현은 꿈쩍않고 석상처럼 계속 그 곳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말리지들 마시
”진정? 박 대표, 우리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지금 안에서 형수님이 생사를 헤매고 있는 데 어떻게 진정하오!”정태웅은 말을 하면 할 수록 더 격앙되어 눈동자가 벌겋게 달아올랐다.박창용은 그런 정태웅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이래서 내가 무지막지하다고 하는거요. 형수님이 당하셔서 원통한 마음인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소. 그런데 이번에 왜 그렇게 당하게 되셨는지는 생각을 안해보셨소? 대체 누가 배후에 있는지. 그 군형 삼마까지 끌어들이며 우리 형수님을 해하려 했는지.”그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순간 멈칫했다. 박창용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군형 삼마는 현재 화진의 수배록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악인이었다.지난 몇년 동안 그들이 아무리 악랄하게 굴어도 그 실력이 너무 강해 처리하지 못했었다.그런 그들이 갑자기 강성이 나타나서 소채은을 노린데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박 대표, 그 말은?”원성일이 물었다.“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간단하오. 그저 군형 삼마의 뒤에 누군가 지시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거라는 거지. 그게 아니면 형수님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군형 삼마가 왜 갑자기 형수님을 공격하겠소.”박창용의 말을 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침묵했다. 그들 모두 박창용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박창용이 한숨을 쉬더니 굳게 닫힌 윤구주의 방문을 보았다.“그러니까 다들 일단 진정하시오.”“만약 조사 결과 진짜 군형 5대 가족이 형수님과 연관이 있는 게 맞다면 우리 창용 부대가 먼저 나서서 군형을 쓸어버릴거니 걱정하지 마시오!”“그러니 지금은 다들 전하의 지시를 기다리는게 좋을 것 같소.”“이 세상에서 형수님을 구할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전하뿐일 테니까.”박창용이 말을 마치고 방문을 바라보았다.그 시각, 굳게 닫힌 문 안에서는 숨 막힐 정도로 커다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윤구주가 정좌를 틀고 앉아 절세신공을 운기하며 소채은을 치료하고 있었다.소채은은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는데 미간에는 방지형에게 당해서 생
윤구주가 봉왕팔기 중 하나인 소생술을 시전하자 한줄기 생명의 빛이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더니 소채은의 몸으로 스며들었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소생술은 살을 만들고 피를 제공해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수 있다고 한다.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이 소생술이 화진 제일의 의원의 절학이라고도 했다.그리고 그 절학을 지금 윤구주가 소채은에게 시전하고 있었다.소생술을 비록 의술이었지만 강대한 현기를 필요로 하기에 윤구주가 아닌 다른 사람은 이 술법을 잘 다루지도 못했다.윤구주가 소생술을 시전함에 따라 거의 죽어가던 소채은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때, 손톱 크기만한 고충이 그녀의 심장쪽에서 꿈틀거렸고, 그걸 느낀 윤구주가 얼굴을 굳혔다.“이건... 군형 고충?”서남의 군형은 그 독한 고충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고독술과 고충은 무려 천년의 역사를 거쳐 아직도 전승되고 있었다.윤구주는 소채은이 군형의 고충에 당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군형의 고충은 그 종류가 수천가지는 된다.뱀충, 금고충, 나비고충, 석화고충 등등...소채은을 치료하기 위해서 윤구주는 그녀의 몸속에 든 고충이 어떤 종류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걸 모르는 이상 화타가 와도 그녀를 살릴 수 없었다.하지만 그때, 윤구주가 두 손으로 힘을 모으자 그의 몸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한 줄기의 금빛이 그의 몸에서 솟아올랐다.그리고 그가 음산한 눈을 들어 소채은을 보며 손가락을 들어올리자 금빛이 정확히 고충 위에 떨어졌고 그에 고충은 자극을 받아 소채은의 몸속에서 빠르게 밖으로 기어 나왔다.심장에서 목으로, 이마까지...그러다가 마침내 소채은의 미간에서 기어 나왔다.벌레는 회갈색의 못생긴 벌레였는데 배에는 핏빛 반점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그리고 회색 고충이 나타나자 윤구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군형의 고충 뒤에 있는 핏빛 반점은 벌레의 수명을 나타내는데 한 반점이 10년을 대표한다. 그런데 눈앞의 이 고충에는 적어도 30여 개의 반점이 있었기에 이 고충은 적
대문 밖에는 한 남자가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그는 암부의 지휘관 중 한 명인 민규현이었다.그는 자책하고 있었고, 분노하고 있었다. 이번에 소채은이 당하게 된 게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윤구주가 벌을 내릴 때까지 이곳에서 계속 무릎꿇고 있을 생각이었다. 옆에 있던 박창용, 원성일, 정태웅과 천현수가 아무리 말려도 민규현은 꼼짝도 하지 않고 윤구주의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그렇게 얼마 동안 있었을까, 문이 열리며 윤구 주가 밖으로 나왔다."전하."밖으로 나서는 연구들을 보며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불렀다.민규현이 붉어 진 눈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윤구주를 바라 보았다.윤구누는 밖에 나서자마자 땅에 무릎을 꿇고 있는 민규현을 발견하고는 말했다."왜 무릎꿇고 있어, 빨리 일어나.""아닙니다. 전하.""제가 형수님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부디 벌을 내려 주십시오. "민현규가 자책하가 윤구주가 다시 1번 말했다."네 탓이 아니니까 빨리 일어나."그래도 민규현이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자 곁에서 있던 정태웅과 천현수가 얼른 그를 일으켜 세웠다."형님, 전하께서 괜찮다고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고집 그만 부리고 빨리 일어나요."그러자 민규현이 마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전하, 형수님은 지금 어떠십니까? "민규현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박창용이 윤구 주에게 물었고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윤구주를 보았다."상황이 썩 좋진 않아."윤구주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가슴이 쿵 떨어지는 듯 했다."전하, 설마 전하의 의술로도 형수님을 살리지 못하는 건가요? "박창용이 믿기지 않을 듯 물었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윤구주가 무술에 뛰어 날 뿐만 아니라 그의 의술 또한 이 세상에 둘도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예전에 곤륜에 있을 때 그의 사부님이 윤구주가 17살 때 이미 자신을 초월 했다는 걸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
네 사람은 비석을 지나자마자 환각의 전법에 부딪혔다. 이 전법은 우연히 들어오거나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 서요산 밖으로 나가게 만드는 것이었다.의지력으로 환각의 전법을 통과하면 다음 전법이 기다리고 있었다.당연히 네 사람에게 환각의 전법은 통하지 않았다. 윤구주와 임정설은 물론, 백호와 청해도 곤륜에서 강자로 존경받는 존재들이었다.다음은 섭혼 전법이었다.전법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원한의 기운이 밀려왔다.그 기운을 느낀 임정설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수년간 왕궁에서 비술을 연구해서 알아본 건데. 이곳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거야. 반경 수천 리 이내의 원한의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어. 내 치하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걸 내가 몰랐다니.”그는 깊은 자책에 빠졌다.“국주님, 인간이 있는 곳에는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근대에 들어 큰 전쟁은 사라졌지만 소규모 충돌은 끊이지 않았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게다가 이곳에 모여진 원한의 기운은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극형을 받은 흉악범들의 원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죠. 사랑 때문에 미워하고, 미움 때문에 미쳐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윤구주의 말을 듣고 임정설이 한마디 물었다.“구주야, 너는 문아름을 미워하지 않느냐?”문아름의 이름을 들은 윤구주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번뜩였다.“당연히 미워하죠. 저 윤구주는 순수하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인간입니다. 사랑은 사랑, 증오는 증오에요. 그녀를 위해 변명 같은 건 하지 않겠습니다. 문아름이 저를 배신했으니 저에게 당연히 미워할 권리가 있죠. 하지만 문아름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아름이 제게 사랑이 무엇인지, 인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으니깐요. 가려는 길이 다르면 미래를 함께할 수 없죠. 저희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걸었어요. 저희의 만남 자체가 잘못이었지만 문아름이 저를 구주왕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죠. 그리고 제가 문아름을
“저하와 생사를 함께할 수 있다니. 그건 제 영광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전하와 제가 정말로 서요산에서 죽게 되면 청룡이 돌아온다 해도 성수가 한자리 비게 되는 건데 그분을 어떻게 소환하시렵니까?”백호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윤구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걸 설명하려면 너를 실험체로 삶고 실험을 진행할 때부터 얘기해야 해. 정확히 말하면 청룡, 현모, 주작의 몸속에는 네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성수의 피를 융합한 첫 번째 수련자야.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직 너만이 진정한 융합에 성공했지. 네 피를 빌려 그들에게 성수의 정수를 주입했던 거야.”“백호,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네가 이런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 나를 원망해도 좋아.”백호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어떻게 저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려고 그러신 거였잖아요. 제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융합에 성공한 수련자는 제가 아닐건데요? 저하께서도 성수의 피를 다루시지 않았습니까?”그 말을 들은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달라. 그건 그냥 성수의 피를 통제하는 것 뿐이야. 진짜 융합했으면 나도 네 꼴이 됐을 거야.”백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됐다. 옛날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서요산으로 떠날 준비나 해.”며칠 후, 윤구주는 임정설 국주, 청해, 백호와 함께 서요산으로 향했다.비 오는 밤, 연기를 뿜는 수송기가 짙은 구름을 뚫고 산을 향해 돌진했다.비행기가 산에 충돌하기 직전, 수많은 바람의 부적이 나타나 비행기를 강제로 선회시켜 간신히 산기슭에 착륙했다.비행기가 막 착륙하자 비행기 문이 누군가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났다. 멀미로 비틀거리던 청해가 나오더니 몸을 움츠린 채 구토를 멈추지 못했다. 뒤이어 내린 임정설도 배를 움켜쥐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그들과 달리 윤구주는 멀쩡한 상태로 내려와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백호의 질문에 윤구주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네가 진짜라 믿는다면 그것은 진짜야. 초심을 잃지 않아야 길이 열리는 법이지.”이 말은 백호에게만이 아닌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었다.서울의 위기는 해결되었지만 윤구주는 이 모든 것이 문씨 가문의 그 여자의 계획 중 하나임을 알고 있었다.“국주님, 이제 서요산으로 갈 때입니다.”그가 임정설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요산을 지키려는 거니? 마인이 나타날 거란 말이야?”임정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요탑 아래에는 천년 동안 갇힌 수많은 마인들이 있었다.“맞아요. 서요산의 지맥 영기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만약 진요탑이 무너지면 큰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윤구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요탑이 붕괴하여 마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윤구주라도 그들을 처리하기 힘들 것이다.“좋아. 내가 같이 가주마. 이 늦은 재앙은 언젠가 닥칠 운명이니 우리가 짊어져야 해. 지금의 희생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야.”임정설의 눈빛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화진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그는 언제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윤구주는 현모에게 연락을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뭐라고요? 저하께서 서요산으로 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저희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현모와 주작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특히 주작은 서요산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천년 동안 축적된 재앙을 겨우 수십 년 수련한 윤구주 혼자서 떠맡기엔 버거웠다.“괜찮아. 너희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서요산에 있는 동안 너희는 국경을 지켜줘. 청룡의 행방은 잠시 접어두고 내가 시킨 일에 몰두해. 난 문아름을 그 여자를 잘 알고 있어. 문아름은 일이 내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추가로 부탁이 있는데 만약 내가 전사한다면 그때쯤 청룡이 모습을 드러낼 거야. 청룡을 불러내는 게 복인지 화인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이 오면 너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야. 문아름이 결정을 내리겠지. 그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둬.”유언을 남기는 듯한
‘헐, 대박.’진동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윤구주를 신처럼 떠받들었다.‘이게 진짜 신이지. 곤륜에 있는 그 자식들은 모두 가짜 신들이었어. 허위적이기 그지없지.’오늘 밤 그는 여러 강자의 싸움을 직접 목격하고 강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문경우도 아주 강했지만 윤구주가 나타나자 문경우는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영혼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윤구주의 술법에 의해 영혼도 남기지 못하고 진정한 죽음을 맞이했다.승리는 결국 화진에게 돌아갔다. 화진을 무너뜨리려는 역적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윤구주는 자신의 힘으로 화진의 막강한 실력을 전 세계에 알렸다.문경우를 처단한 윤구주는 즉시 임정설의 치료에 돌입했다.“짐은 별일 없으니 먼저 왕숙과 네 친구를 치료해줘라.”임정설이 임성진과 청해를 가리키며 말했다.청해는 이미 정신을 차렸다. 비록 상처가 심해 반쯤 죽은 상태였지만 화진 국주에게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묘한 영예감이 그의 마음을 꽉 채우며 날아갈 듯 기뻤다.“이 두 사람 모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주님이 더 위험하십니다. 경지를 무리하게 넘어서셨고 섭혼번 아래서 정기를 너무 많이 잃으셨습니다. 지금 국주님의 기운이 안정하지 않으니 제 도움이 없다면 폭주 할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윤구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임정설은 결국 윤구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황자급 경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보다 죽음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있었다. 윤구주는 임정설에게 풀지 못한 원한이 있음을 눈치채고 치료를 해주며 화진으로 압박했다.“국주님께서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화진에게는 국주님이 필요합니다. 국주님은 30년 동안 화진을 지켜오셨잖아요. 지금 승부가 달린 이 중요한 시점에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임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