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참 멍청하구나. 내가 남릉에 가자는 건 저하를 위해서야!”정태웅은 남궁서준이 고집을 부리자 욕을 하기 시작했다.“지금 날 욕하는 거예요?”남궁서준은 정태웅이 욕을 하자 표정이 굳어졌다.정태웅도 화가 났다.“널 욕하는 게 뭐 어때서? 너 이 자식, 저하 곁에 있을 때 내가 줄곧 널 돌봤어. 그런데 나한테 고마워하지도 않고 말이야!”정태웅에게 혼난 화진의 소년후는 눈동자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정태웅을 죽어라 노려보았다.정태웅이 한 마디라도 더 하면 그를 죽일 듯했다.하지만 정태웅이 누구인가?정태웅은 두려운 게 없었다.그는 계속해 화가 나서 몸까지 떨고 있는 소년후를 욕했다.“뭘 그렇게 노려봐?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괴물 같은 놈, 빌어먹을 꼬맹이. 형이 널 데리고 저하를 만나러 가겠다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네가 그렇게 잘났어? 그러면 어디 한번 날 공격해 봐. 내가 널 두려워할 것 같아?”정태웅은 두 손을 펼치면서 남궁서준과 싸울 듯이 굴었다.그러나 남궁서준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당연한 일이었다.그들은 형제였기 때문이다.그는 그저 차가운 표정으로 눈앞의 정태웅을 바라보았다.“조금 전에... 저하를 만나러 간다고 한 거예요?”“그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이 빌어먹을 남궁 일가에 왔겠어? 암부에서 편히 지냈겠지.”정태웅이 노기 등등하게 말했다.“말도 안 돼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구주 형은 죽음의 바다에서 죽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구주 형을 만나러 간단 말이에요?”남궁서준은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면서 온몸에서 검기를 뿜어댔다.“멍청하긴, 내가 왜 널 속이겠어? 솔직히 얘기할게. 우리 저하는 죽지 않았어!”정태웅은 마침내 사실을 얘기했다.그 말에 손발이 전부 쇠사슬로 묶인 소년후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덜덜 떨면서 정태웅을 바라보았다.“절... 절 속일 생각은 하지 말아요. 구주 형이 정말 죽지 않았다고요?”“그래! 생각해 봐. 겨우 10국 따위가 어떻게 우리 저하를
“진짜 형의 목소리네요. 진짜 구주 형이에요!”쇠사슬에 사지가 묶인 소년후는 갑자기 아이처럼 울먹이기 시작했다.“하하, 서준아. 형은 널 속이지 않았다니까!”정태웅은 녹음펜을 거두어들인 뒤 기쁜 얼굴로 말했다.“얘기해줘요. 구주 형 지금 어디 있어요?”남궁서준은 갑자기 고개를 들면서 흥분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정태웅을 향해 물었다.“얘기했잖아. 나랑 같이 남릉 고씨 일가로 향하면 저하를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넌 지금 검옥에 갇혀 있고 너희 집안 어르신들이 쇠사슬로 네 사지를 묶어놓았지. 이걸 어떡하지?”정태웅은 중얼거리면서 아래쪽에 있는, 쇠사슬에 사지가 묶인 흰옷을 입은 소년을 바라보았다.남궁서준은 차갑게 웃었다.“겨우 쇠사슬일 뿐이에요. 절 묶어둘 순 없죠.”남궁서준은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엄청난 검기를 뿜어댔다.그 검기는 마치 용과 같았다. 그것은 곧바로 검옥 안의 모든 검기를 제압했다.마치 그가 검 중의 왕인 것처럼 말이다.무시무시한 검기가 움직이면서 철컥철컥 소리가 났다.남궁서준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의 사지를 묶었던 쇠사슬이 순식간에 부서졌다.“세상에! 서준아, 너 그사이 실력이 또 는 거야?”그 광경에 정태웅의 눈이 빛났다.“역시 괴물답네! 이 정도 재능이면 곧 저하를 따라잡을 수 있겠는데?”흰옷을 입은 소년은 자신의 사지를 묶었던 쇠사슬을 부순 뒤 오른손을 들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리 와!”챙 소리와 함께 금빛의 검이 지면을 뚫고 지하에서 올라왔다.금빛의 검은 그 길이가 아주 길었고 검날은 보통 검보다 조금 더 넓었다.칼자루에는 빛나는 야명주들이 박혀 있었다. 그 검은 남궁 가문의 명검 유용검으로 남궁서준의 독특한 무기였다.유용검을 손에 넣게 되자 화진 소년후의 기세가 다시금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마치 그와 그가 들고 있는 금빛의 검이 한 몸이 된 듯 말이다.금빛의 검을 든 흰옷을 입은 소년은 위로 올라가서 정태웅의 앞에 섰다.엄청난 검기가 그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는 정
두 사람은 검옥 위쪽으로 향한 뒤 문 앞에 정태웅이 기절시킨 두 명의 부하를 보게 되었다.그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았다.정태웅이 말했다.“우선 이 둘에게 물어볼까?”남궁서준은 짧게 그러자고 대답했다.정태웅은 손가락을 들었고, 곧 현기 두 줄기가 기절한 두 명의 남궁 제자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두 사람은 정신을 차렸다.“헤헤, 일어났네요!”정태웅은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리자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정 지휘사님, 정말 너무하시네요! 어떻게 저희를 기습할 수 있죠? 지휘사님...”두 사람이 검을 뽑으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두 사람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고 곧 옆에 서 있는 흰옷을 입은 소년을 보았다.‘응?’“도련님...”“도련님을 뵙습니다!”두 사람은 남궁서준을 보자 두 다리가 후들거려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남궁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없이 두 제자를 힐끗 보았다.“도련님, 어... 어... 어떻게 나오신 겁니까?”한 제자가 전전긍긍해서 남궁서준에게 물었다.“내가 나오고 싶으면 나오는 거지. 누가 날 막을 수 있겠어?”남궁서준이 말했다.그 말에 두 제자는 말문이 턱 막혔다.확실히 남궁 가문의 천재이자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귀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너희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반드시 솔직히 대답해야 해. 알겠어?”남궁서준이 갑자기 말했다.“네, 네. 물으세요!”두 사람이 말했다.“남궁 가문의 젊은 세대 중 절름발이가 있어?”남궁서준은 정태웅이 했던 질문을 똑같이 했다.‘뭐라고?’“절름발이요?”두 제자는 그 말을 듣고 당황했다.“맞아. 그 절름발이가 남릉 고씨 일가 딸과 약혼했다던데, 알고 있어?”정태웅이 말을 더 보탰다.그 말을 들은 두 제자는 한참을 생각했다.그런데 바로 그때 얼굴이 긴 편이 제자가 갑자기 이마를 ‘탁’ 치면서 말했다.“혹시 남궁 가문의 방계인 남궁혁 말씀이세요?”“남궁혁?”남궁서준은 그 이름이 낯선 듯했다.
남릉 고씨 일가.윤구주가 고씨 일가의 장원을 점령한 뒤로 고씨 일가는 아주 초라했다.특히 대문 쪽은 윤구주의 검에 의해 30m에 달하는 길이의 흔적이 남겨졌다. 그로 인해 한때 휘황찬란했던 고씨 일가는 아주 황폐해졌다.현재 고씨 일가 사람들은 전부 장원을 떠났다.누가 감히 그곳에 남아있겠는가?고씨 일가 가주인 고준형도 사람들을 데리고 고씨 일가 장원을 떠났다.현재 고씨 일가 장원에는 윤구주와 시괴 거인 동산을 제외하면 다른 이는 없었다.널따란 고씨 일가 대전 안, 윤구주는 휴대전화를 들고 정태웅이 보낸 문자를 보고 있었다.정태웅은 남궁서준을 데리고 남릉으로 오고 있고, 남궁혁의 신분도 알아냈다고 했다.고씨 일가는 남궁 일가 쪽에 줄 서기 위해 자기 딸을 남궁 일가 방계에 시집 보내려고 했다. 윤구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어쩐지 남궁 일가의 젊은 세대 중에서 남궁혁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없다 싶었는데 방계에 불과한 쓰레기였군.”윤구주는 문자를 다 본 뒤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휴대전화를 넣어두고 계속해 수련했다.이제 그는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고씨 일가 어르신이 돌아오기를 말이다.천년초 하나와 엇비슷한 수준의 봉안보리구슬 팔찌가 그에게 있었다.윤구주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수련하고 있을 때 끼익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곧 아름다운 여자가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고씨 일가 셋째 딸 고시연이었다.레이스가 달린 긴 치마를 입은 고시연은 종처럼 차를 들고 와서 내려놓은 뒤 묵묵히 윤구주의 뒤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마치 정말로 윤구주의 종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네 몸에 남겼던 화련금안은 이미 풀었는데 왜 가지 않는 거야?”윤구주는 갑자기 눈을 살짝 떴다. 횃불과도 같은 시선이 고시연에게 닿았다.고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침묵했다가 대답했다.“전... 당신이 저희 할아버지와 싸우기를 바라지 않아요.”“하! 날 걱정하는 거야? 아니면 네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거야?”윤구주가 물었다.고시연은
그러나 그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앞의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에게 정복당했다. 심지어 저도 모르게 눈앞의 마귀 같은 남자가 점점 더 좋아졌다.하지만 그를 좋아해도 될까?아니, 절대 그래서는 안 됐다.그는 고씨 일가의 원수고 고씨 일가를 점령했다. 게다가 이젠 고씨 일가의 보물을 빼앗으려고 하고 있었다.이런 남자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게다가 그는 화진의 4대 가문 중 하나인 고씨 일가 아들과 결혼 약속을 했다.그래서 고시연은 이 마귀를 빨리 보내버리고 싶었다.그가 이 남릉에서 떠나길 바랐다.그러나 윤구주가 떠날 리 없었다.화진의 왕이자 과거 10개국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최강자였다. 그의 영예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그러니 일개 고씨 일가는 말할 것도 없었다.“어쨌든 호의는 고마워. 하지만 넌 이만 돌아가도록 해. 이제 이곳은 곧 폐허가 될 테니 말이야.”윤구주가 갑자기 고시연을 향해 말했다.고시연은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온몸을 흠칫 떨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윤구주를 힐끗 말했다.“그래요, 갈게요! 그렇게 죽고 싶다고 하니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말을 마친 뒤 고시연은 단호히 떠났다.그녀가 방문을 나서려는 순간, 윤구주가 갑자기 말했다.“잠깐!”고시연은 고개를 돌렸다.“또 무슨 일이에요?”“묻는 걸 잊었네. 너랑 남궁 일가의 결혼은 네가 선택한 거야? 아니면 고씨 일가를 위해서야?”윤구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시연은 흠칫했다.그녀는 그곳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저랑 남궁 가문의 그 사람은 겨우 한 번 봤어요.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이랑 결혼하겠다고 할 리가 있겠어요?”그 말에 윤구주는 짧게 대답했다.“알겠어. 네 가문에서 강요한 건가 보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희 가문에서는 몰랐나 봐. 모든 남궁 가문의 사람이 4대 가문의 직계는 아냐.”“그 말 무슨 뜻이에요?”고시연은 의아한 얼굴로 윤구주에게 물었다.윤구주가 말했다.“별 뜻 없어. 그냥 좋은 마음
“고 가주님, 어떤 빌어먹을 놈이 제 사제를 이렇게 다치게 한 겁니까?”질문을 한 사람은 용호산의 기성윤이었다.그는 흐려진 안색으로 사람을 죽일 듯이 짙은 영기를 내뿜었다.“맞습니다, 고 가주님. 홍 대사님께서는 무려 태허 경지인데 누가 그를 다치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기성윤의 뒤에 있던 십여 명의 도포를 입은 제자들도 의문을 표했다.질문을 받은 고준형은 탄식했다.“기성윤 대사님, 홍 대사님을 다치게 한 사람은 바로 우리 고씨 일가를 점령한 놈입니다!”“젠장! 고 가주님, 그놈 지금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전 그 자식의 살갗을 벗기고 사지를 분질러 제 사제의 복수를 할 겁니다!”기성윤이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그 자식은 지금 저희 고씨 일가 장원에 있습니다!”고준형이 대답했다.“좋아요! 오늘 그 자식이 얼마나 배짱이 두둑하길래 감히 우리 용호산과 척지려 하는 건지 한 번 지켜봐야겠어요!”기성윤은 그렇게 말한 뒤 윤구주를 찾으러 가려고 했다.“기성윤 대사님, 잠시만요!”이때 고준형이 기성윤을 불러 세웠다.“왜요? 설마 제가 그 자식을 이기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 겁니까?”기성윤이 고개를 돌려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전 그저 홍 대사님이 저희 고씨 일가 때문에 심하게 다쳤으니 저희 고씨 가문도 당연히 복수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제 두 아들이 조금 전 저한테 연락을 했습니다. 예상대로라면 아마 30분쯤 뒤에 저희 집안 어르신께서 올 겁니다.”고씨 집안 어르신이 곧 돌아올 것이다.그 말을 들은 기성윤은 멈칫했다.“고씨 집안 어르신께서 오신다고요?”그가 물었다.“네.”“그래요. 고씨 집안 어르신이 돌아오신다니 제가 나설 필요는 없겠네요. 아무래도 고씨 집안 어르신이 저보다 더 강하니 말이에요.”기성윤이 말했다.고진용은 고씨 집안 어르신으로 무도 천방 7위인 사람이었다.그가 드디어 출관해서 돌아온다니!시간은 일분일초 흘렀다.고씨 일가 사람들, 무
무시무시한 추락으로 인해 무도 연맹 지면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심하게 진동했다.더욱 두려운 점은 그의 발밑에 백 미터 반경으로 단단한 지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그는 회색 옷에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그의 나이 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그의 무시무시한 현기는 숨겨지지 않았다.그가 바로 고씨 일가의 어르신 고진용이었다.고진용이 천 미터 고공에서 뛰어내리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 용호산의 기성윤까지 눈이 휘둥그레져서 80대 고령인 고진용을 바라보았다.“아버지, 오랜만입니다. 출관을 축하드립니다!”첫 번째로 무릎을 꿇은 것은 고씨 일가 가주 고준형이었다.“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출관을 축하드립니다!”곧이어 현장에 있는 수백 명의 무도 연맹 사람들이 일제히 노인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수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자 고진용은 무덤덤하게 손을 휘저었다.“이렇게 예의 차릴 필요는 없어. 난 그저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야. 내 팔순 잔치가 곧 열리는데 그 직전에 갑자기 우리 고씨 일가에서 소동을 벌이는 사람이 있다니 말이야.”고진용이 차갑게 말하자 고준형이 서둘러 나섰다.“아버지! 제가 고씨 일가를 지키지 못한 탓입니다. 절 벌하여 주십시오!”고진용은 코웃음 친 뒤 말했다.“벌은 일단 차치하고 질문 하나 하겠다. 우리 손녀는 어디 있어?“그가 말한 손녀는 당연하게도 고시연이었다.“아버지, 시연이는… 아직도 그놈에게 붙잡혀 있습니다!”고준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진용이 바럭 소리를 질렀다.“젠장!”우레와도 같은 소리였다.심지어 그 무시무시한 서리에 내공이 약한 무도 연맹 사람들은 혈기가 날뛰어서 피를 토할 뻔하기도 했다.“나 고진용의 손녀를 누가 감히 감금해?”무적의 육신이라 불리는 고진용의 얼굴 위로 무시무시한 살기가 드러났다.“고준형, 내가 물을게. 너 아버지로서 자격이 있니? 네 딸이 남에게 감금당했는데 넌 여기 한가하게 있는 거야?”고진용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준형을 바라보았다.“용서해 주십시오, 아
고진용이 고씨 일가에서 가장 아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손녀였다.고시연이 돌아온 걸 본 고진용은 서둘러 손녀를 끌어안았다.고시연도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꼭 끌어안았다.“우리 손녀, 울지 마. 얼른 할아버지에게 얘기해 봐. 어디 다치진 않았니? 억울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고? 이제 할아버지가 돌아왔으니 네가 힘들었던 만큼 이 할아버지가 천 배 만 배 상대에게 갚아주마!”고진용은 애정 가득한 얼굴로 고시연을 바라보았다.“할아버지, 전 다치지 않았어요. 억울한 일을 당하지도 않았고요. 그냥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어요.”고시연은 눈물을 닦으면서 고개를 들었다.“바보 같긴!”그렇게 고시연이 돌아왔다.널따란 무도 연맹 로비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그중의 선두는 고진용이었다.그리고 용호산 천암사의 기성윤과 고준형, 무도 연맹 각 파벌의 장문인들이었다.그들 모두 고진용의 출관을 축하하러 온 것이었다.그리고 현재 그들은 윤구주를 어떻게 상대할지 의논하고 있었다.“난 이미 출관했고 우리 손녀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솔직히 얘기해 봐.”고진용이 물었다.“어르신, 무도 연맹의 체면을 봐서라도 이번만큼은 부디 저희 편이 되어주세요!”한 남자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고진용을 향해 말했다.그가 무릎을 꿇자 무도 연맹의 다른 구성원들도 고진용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어르신, 저희 형의문을 위해 나서주십시오!”“신씨 일가 형제를 나서주십시오!”“금강사와 청성관도요!”단도문, 형의문, 신씨 일가 형제, 금강사, 그리고 청성관까지 전부 서남의 유명한 무도 문파들이었다.그런데 그들의 제자가 갑자기 본인 앞에 무릎을 꿇자 고진용의 안색이 살짝 달라졌다.고진용은 슬쩍 보았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5대 문파의 제자들이었는데 장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체 무슨 상황인 것이냐? 너희들 장문인은?”“어르신, 저희 장문인은... 이미 그놈에게 전부 죽임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