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그가 입을 열자마자 소진웅이 버럭 화를 내며 욕을 할 줄.“흥! 난 너 같은 미련탱이에게 물어본 게 아니야! 다만 한 가지 물을 게 있다. 너 정말 소씨 가문을 위한답시고 내 보배 같은 손녀를 중해그룹 아들과 혼인시키려 들었니?”그 말에 소청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아버지, 저는...”“닥쳐! 이 쓸모없는 놈아! 회사 관리도 못 하면서 딸을 팔아? 그러고도 나를 아버지라 부를 면목이 아직 남아있는 거야?”면전에서 한바탕 욕을 먹은 소청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윤구주는 내 손녀사위로 들일 거야, 무조건! 누구도 내 의견을 막을 수 없다!”그런 뒤 소진웅은 패기 있게 윤구주를 자신의 곁으로 불렀다.“채은아, 너도 이리 오렴!”그리하여 소채은도 그곳으로 걸어갔다.이윽고 소진웅은 두 사람의 손을 각각 하나씩 잡은 뒤, 그 두 손을 한데 놓으며 말했다.“비록 내가 병상에 2년간 누워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직 눈이 먼 게 아니야! 이 할아버지가 보기에 너희 둘은 아주 잘 어울린다! 그러니 내 말 듣고 너희 두 사람 연말에 결혼할 수 있도록 잘 얘기해보아라,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얼른 나에게 건강하고 통통한 손자를 안겨줬으면 좋겠구나!”“할아버지...”소채은의 얼굴은 시뻘겋다 못해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옆에 있던 윤구주도 쓴웃음을 지었다.“됐어, 이 할아버지는 할 말 다 했다! 이제 집으로 가자꾸나!”이렇게 소진웅은 한 손으로 윤구주를, 한 손으로 소채은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그 장면을 본 소청하는 안색은 무서울 정도로 파래졌다!너무 화가 난 나머지 소청하는 천희수에게 말했다.“빌어먹을! 아버지는 왜 그 더러운 자식을 손녀사위로 여기시는 거야, 이제 어떡하지?”“여보, 제 생각에 그 남자 채은이한테 잘해주는 것 같던데요?”천희수가 중얼거렸다.“닥쳐!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서 왔는지 근본도 모를 애한테 우리 딸을 시집보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앞으로 그런 소리 하기만 해 봐!” 한바탕
드디어, 소씨 가문 가족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소청하 부부와 소채은 등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소씨 가문의 지계 옆 친척도 함께 있었다.소진웅은 가장 중간 자리에 앉았는데, 얼굴이 불그스름한 게 기운이 넘쳐나 보였다.그는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쓱 훑어보고는 비로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늘 나는 가족회의를 하려고 한다. 한 가지 선포할 일이 있거든!”“무슨 일이신데요?”소청하가 궁금해하며 묻자, 소진웅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2년 동안의 소씨 가문 상황에 대해 나는 이미 전부 알고 있어! 따라서 이번 회의를 모집한 것은 바로 소씨 가문 가주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함이다. 나도 이제 많이 늙었으니...”“가주의 자리를요?”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해했다.“그래!”소진웅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나는 소씨 가문 가주의 자리를 채은이에게 정식으로 맡기려 한다. 다들 의견 있는가?”그 말에 온 장내가 떠들썩해졌다!‘채은이한테 가주의 자리를 넘겨준다고?’“회장님, 도리대로라면 채은이한테 가주의 자리를 넘겨주는 건 옳지 않습니다! 큰 형님도, 둘째 형님도 아직 있으시잖아요!”한 지계의 친척이 입을 열었다. “천홍이 그 빌어먹을 자식은 내가 이미 가문에서 쫓아냈어. 이제부터는 소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때문에 그 자식은 전혀 고려할 필요 없어.”곧이어 현장에 있던 모든 소씨 가문 가족들이 멍해졌다.그러나 그들도 모두 소천홍이 파렴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둘째로 말하자면, 너무 고분고분해서 큰일을 도맡을 성격이 아니야. 그래서 나는 채은이에게 가주의 자리를 넘겨주려는 것이다.”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뒤이어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소청하에게 눈길을 돌렸다.그러자 소청하가 탄식하며 말했다.“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이 집안의 가주가 될 자격이 없어요... 채은이한테 맡기는 게 좋겠습니다!”“좋아! 그렇다면 오늘부터 이 소씨 가문의 가주는 바로 내 손녀, 채은이다!”
소진웅은 미소를 지으며 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그러자 윤구주가 고개를 지었다.“이미 둘쨰한테서 들었다. 네가 기억을 잃었다고 말이야, 자신이 누구인지, 심지어 어디서 살았는지조차 전부 까먹었다면서?”소진웅은 이렇게 말하며 윤구주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러나 윤구주는 아무런 소리 없이 그의 말을 경청할 뿐이었다.“그러니 이제부터 이곳이 자네 집이라고 생각해!”그 말에 윤구주는 마음이 조금 흠칫 떨렸다.“자네와 채은이의 관계가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손녀가 정말 좋은 남자의 보살핌을 받았으면 좋겠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자네, 내가 인생의 선배로서 한마디만 묻겠네, 정말 우리 채은이를 잘 보살필 수 있겠나?”뒤이어 윤구주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꼭 그럴 테니까요.”“그래! 이러면 나야 마음이 놓이지!”소진웅은 윤구주의 어깨를 토닥였다.“SK가 이 정도로 발전하기까지 정말 쉽지 않았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우리 SK그룹을 잘 이어나갔으면 좋겠어! 둘째에 관해서는 너무 개의치 말게, 평생 고분고분하게 산 자식이라 나쁜 마음은 절대 품지 않을 거야!”그의 말에 윤구주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됐어,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내려가 봐도 좋아.”소진웅이 마지막 말을 끝마치자, 윤구주도 이에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그리고 그가 떠나는 것을 소진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지켜보았다.윤구주가 거실에서 나오자, 소채은은 기다렸다는 듯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윤구주! 대체 할아버지께서 너한테 무슨 말씀을 하신 거야?”그녀의 물음에 윤구주는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그냥 두어 마디 대화를 나눴을 뿐, 아무것도 아니야!”“흥! 내가 그걸 믿을 줄 알고? 솔직히 말해봐, 대체 우리 할아버지를 어떻게 치료한 거야? 그리고, 할아버지는 왜 또 너한테 잘해주시는 거고?”소채은이 계속해서 질문을 퍼붓자, 윤구주도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아마 할아버지가 보시기에 우
“구주야, 내가 널 왜 여기로 데려왔는지 알아?”소채은이 갑자기 화초 한가운데로 가서 묻자, 윤구주가 고개를 저었다.“왜냐하면 여기는 내 비밀 정원이니까!”그녀는 자신이 직접 심은 화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거 알아? 여기는 우리 부모님도 모르는 곳이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억울하거나, 마음이 괴로우면 혼자 여기로 오곤 했었어. 그리고 지금까지 내 비밀 정원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도 없었어, 구주 네가 처음이야!”그제야 윤구주는 이 작은 방을 빙 둘러보기 시작했다.“이 꽃 이름이 뭔지 알아?”소채은이 아름답고 고귀한 캐롤라인 장미꽃을 가리키며 말했다.이에 윤구주는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저었다.“이 꽃은 캐롤라인 장미꽃이라고 해. 원산지는 프랑스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꽃이지! 게다가 의미도 아주 좋아, 꽃에 자신이 제일 간절히 바라는 소원을 빌 수 있거든. 듣기로는 프랑스의 많은 왕족들이 이 장미를 매우 좋아했다 하더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장미는 워낙 비싸고 희귀해서...”소채은은 캐롤라인 장미 꽃잎을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천천히 말했다.“자, 구주야, 나랑 얼른 무릎 꿇자!”“어? 무릎을 꿇으라고?”윤구주는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과 스승님 외에, 그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요구를 받았다!“그래, 이리와, 나랑 무릎 꿇고 소원 빌자.”소채은이 다시 한번 거듭해 말했다.소원을 빌자는 말에 윤구주는 그제야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따라 함께 무릎을 꿇었다!캐롤라인 장미꽃을 앞에 두고 말이다!무릎을 꿇은 후, 소채은은 두 손을 모아 장미꽃에 대고 말했다.“구주야, 두 눈 꼭 감고 이 장미꽃에 소원을 빌면 네 마음속의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질 거야.”말을 끝낸 후, 이 멍청한 계집애는 정말로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하늘이 보우하사, 저는 구주가 얼른 기억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그가 영원히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희망합니다! 또 그가 평생 근심 걱정 없이 자유로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그녀의 소원
이른 아침.소채은은 얇은 허리선을 강조하도록 만든 세련된 검은색 정장을 입었다.검은 스타킹은 가늘고 긴 두 다리를 감쌌고, 게다가 완벽한 미모까지 더해 그녀는 단번에 도시적인 사람으로 변했다.“구주야, 나 회사 다녀올 테니까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인사를 건넨 뒤 소채은은 곧장 차를 몰아 SK제약으로 향했고, 그렇게 윤구주는 홀로 소씨 저택에 남게 되었다.그녀가 떠나는 것을 다 보고 나서야 윤구주는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그때, 뒤에서 누군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 보니, 소청하가 눈을 부릅뜨고 윤구주를 노려보고 있었다.“아버지가 자네를 좋아한다고 해서, 자네가 우리 집에서 거들먹거리며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게. 그건 어림도 없어! 그리고 채은이, 정말 자네가 우리 딸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내가 자네라면 더 창피해지기 전에 얼른 소씨 저택을 떠났을 거야!”소청하의 이런 태도에, 윤구주는 더 상대하기도 귀찮아 그만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어이, 지금 나 말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이 자식이 귀가 먹었나, 거기 서지 못해!”윤구주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소청하는 화가 나서 거의 벌떡 일어날 뻔했다.바로 그때, 천희수가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여보, 무슨 일이예요?”그러자 소청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분을 토했다.“화가 나 죽겠어! 이거, 정말 화병이라도 걸릴 것 같군!” “누가 또 건드렸어요?”천희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누구겠어? 당연히 우리 집에 거저 사는 그놈이지!”“윤구주 군 말이에요?”“그래!”“나는 아무래도 여보가 조금 지나친 것 같아요. 그 아이가 여보한테 뭘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지난번 공장에서 그 아이가 우리를 도왔고...”그러나 소청하는 오히려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상관없어! 아무튼, 난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으니까! 퉤, 감히 내 사위가 되겠다고? 차라리 나를 때려죽이라 그래!”소청하는 윤구주가 떠난 방향을 향해
오후 무렵, 중형 트럭 한 대가 천천히 소씨 저택 대문에 들어섰다.그리고 트럭의 뒤편에는 캐롤라인 장미꽃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얼마 뒤 차가 도착한 후, 몇 명의 일꾼들이 차에서 뛰어내렸다.마침 그때, 소청하와 천희수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눈부신 장미꽃을 가득 실은 트럭 한 대가 대문 앞에 정차해 있는 것을 보고 궁금해하기 시작했다.“이건 뭡니까?...”소청하는 트럭에서 막 뛰어내린 일꾼에게 물었다.“안녕하세요, 꽃 배달하러 왔습니다!”“꽃이요?”“네! 의뢰인의 요구로 저희가 아침 일찍 온 도시에 있는 캐롤라인 장미꽃을 전부 사들인 겁니다. 소채은 씨에게 선물하기 위해서요. 실례지만, 소채은 씨는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어? 채은이한테?’그 말에 소청하 부부는 완전히 어리둥절해졌다!게다가 그들은 소채은에게 주기 위해 온 도시의 캐롤라인 장미꽃을 사들였다는 일꾼의 말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온 도시의 장미꽃을 우리 딸한테요? 대체 누... 누가 보낸 겁니까?”천희수가 물었다.“DH 그룹이요. 혹시 모르십니까?”“DH 그룹이요?”이 네 글자가 귀에 전해지자, 부부는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어서 소청하가 단번에 흥분하며 말했다.“맙소사! 또 DH 그룹의 주 회장님이시네! 게다가 온 도시의 장미꽃을 보냈다니? 이건... 이건 정말 클래스가 남다르잖아!”천희수도 덩달아 웃으며 기뻐했다.“봐요, 여보! 내 말이 맞죠? 그 주 회장님이 분명 우리 딸을 좋아하시는 거라니까요!”“확실해, 확실해!”그렇게 트럭을 한가득 채운 캐롤라인 장미꽃이 모두 소씨 저택으로 옮겨졌다.주세호가 보내온 이 장미꽃을 바라보며, 소청하 부부는 그야말로 얼굴에 즐거움이 피어났다. 그들은 모두 소채은이 주세호의 눈에 들었다고 생각했다!그때, 윤구주가 방에서 걸어 나왔다.일꾼들이 아름다운 캐롤라인 장미꽃을 들여오는 것을 보고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채은이도 이제 만족하겠지?’“따르릉!”윤구주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그 핸드폰
이윽고 윤구주의 머릿속에 손에 군도를 들고, 만천의 시체 앞에 서서, 자신을 위해 돌격 전진하는 부창용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윤구주의 가장 좋은 “형제” 중 한 사람이었다!또한 그는 예전 윤구주의 휘하에서 가장 맹렬했던 장군이었다!다만, 10개국 간의 전쟁에서 윤구주는 부창용을 서부전선 전장에 보냈다. 때문에 윤구주가 “순국”했을 때 부창용은 그의 곁에 없었다!자신이 그렇게도 아끼던 친한 형제, 부창용이 모레 열리는 연회에 참석할지 모른다는 소식에, 윤구주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부창용 장군이 온다니, 저도 한번 가보겠습니다!”“좋습니다! 그럼 모레 제가 저하를 모셔 올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윤구주는 더는 말하지 않고 이내 통화를 끊어버렸다.고개를 들어 먼 곳의 흐린 창공을 바라보자, 윤구주의 눈동자가 두 번 반짝였다.바로 그때였다.소청하 부부가 캐롤라인 장미꽃을 운반하는 일꾼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자, 이리로 천천히 오세요! 꽃들은 전부 이곳에 놓으면 됩니다!”“조심해요! 캐롤라인은 우리 딸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란 말이에요, 천천히!”소청하는 앞에서 일꾼들을 안내하고 있었다.“아니, 그런데, 주 회장님은 어떻게 우리 채은이가 가장 좋아하는 게 캐롤라인 장미꽃이라는 걸 아셨대요?”소청하는 갑자기 궁금해했다.그러나 일꾼들은 꽃을 옮길 뿐이니 뭘 알겠는가?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곧이어 윤구주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소청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봐, 윤 씨, 두 눈 크게 뜨고 똑바로 좀 보지, 그래? DH 그룹 주 회장님께서 우리 채은이한테 또 캐롤라인 장미꽃을 선물하셨다고. 뭐가 낭만인지 조금 알겠어? 진짜 여자를 쫓아다닌다는 게 뭔지 알겠냐는 말이야.”하지만 윤구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웃어? 정말 뻔뻔하군.”한바탕 욕설을 퍼부은 뒤, 소청하는 더 이상 윤구주를 신경 쓰지 않기도 했다.‘아버님... 혹시 주세호 씨가
“채은아, 우리 딸 돌아왔구나!”소청하 부부는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 서둘러 맞이해주었다.“엄마, 아빠, 이 꽃들은 어떻게 된 거예요?”소채은은 의아한 표정으로 마당에 가득 찬 캐롤라인 장미꽃을 가리키며 물었다.“바보야, 이건 DH 그룹의 주 회장님이 너에게 주는 거야!”소청하가 웃으며 말했다.“네? 주 회장님이요?”소채은은 그만할 말을 잃었다.“그래! 채은아, 봐봐, DH 그룹의 주 회장님이 너에게 얼마나 잘해주시는지!”옆에 있던 천희수도 말을 거들었다.하지만 소채은은 마당을 가득 메운 캐롤라인 장미꽃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전혀 즐거워하지 않았다.‘DH 그룹이 나한테 장미꽃이 이렇게 많이 보냈다고? 미친 거 아니야?’“미치겠네, 정말! 주 회장님은 왜 이렇게 많은 꽃을 보낸 거야!”그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서 있자, 소청하가 서둘러 말했다.“바보야, 아직도 모르겠어?”“뭘요?”“주 회장님이 너를 좋아하시는 거잖아!”“네?! 풉!”너무 놀란 나머지 소채은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아빠, 무슨 소리예요? 저는 주 회장님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저를 좋아할 수 있어요?”그러자 소청하가 빙긋 웃었다.“너는 못 봤겠지만, 주 회장님은 너를 봤을 수 있잖아! 게다가, 한 남자가 여자에게 장미꽃을 선물한다는 게 뭘 뜻하는지, 너도 알고 있지?”소채은은 온몸이 굳어졌다.‘그래, 장미꽃을 선물하는 건 연애할 때만 가능한 건데... 지금 주 회장님께서 무려 9만 9천 9999송이의 장미꽃을 선물했다는 거야? 설마... 진짜 나를 좋아하시는 건가?’“안돼! 그럴 리가 없어!”그녀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그게 왜 불가능해? 이 바보야, 생각 좀 해봐, 우리 소씨 가문이 기사회생하기 전까지 매번 넘었던 난관 중에, 주 회장님께서 안 도와주신 적이 언제가 있는지. 그런데도 아직 못 알아보겠어?”소청하가 다시 한번 말하자, 소채은은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그의 말대로, 그동안 DH 그룹이 줄곧 소채은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