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주국은 원래 남주국보다 부유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번에 윤구주에게 철저히 짓눌리며 국주의 위신마저 땅에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귀국 후 왕위마저 위태로울 것이 분명했다.이에 그는 더욱 비굴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처럼 몸을 낮춰 윤구주의 환심을 사려 한 것이다. 하지만 북주국의 국운이 짓눌린 후 곧바로 그 화살은 남주국으로 향했다.현재 남주국의 병력 십만이 목신의 힘으로 얼어붙어 전멸했다. 십만의 정예군을 단번에 잃은 것은 남주국에겐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설령 이 병력이 온전했다고 해도 화진의 흥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감히 화진의 주중에 하나와 승부를 겨뤄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정말 화진의 화를 돋우면 북역의 병력만으로 남주국은 한순간에 멸망할 수 있었다.남주국 국주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윤구주를 알현하러 왔다. 가까이 다가서기도 신하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서 있을 정도였다. 윤구주의 차가운 눈빛이 한 번 스치자, 남주국의 모든 신하들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국주는 아예 땅에 엎드려 두려움에 몸을 떨다가 실금까지 하고 말았다.이 모습을 본 윤구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남주국은 상당히 부유한 나라였다. 오랜 세월 국운이 번창하여 한때는 화진을 능가하기도 했다. 지금도 남주국의 인당 재산은 화진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시절이 아깝지도 않은지 남주국은 문제를 일으키려 했다. 수십 년 동안 화진의 문화를 표절하고 역사를 마음대로 조작하며, 화진의 절반이 넘는 영토를 과거 남주국의 것이라 주장했다. 심지어 공자마저도 남주국 출신이라 우겼다.이처럼 방자한 행위는 반드시 단죄해야 했다. 윤구주는 말없이 흥주의 두 대사를 훑어보았다. 주승진은 반응이 둔해 윤구주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성격대로라면 현장에서 남주국의 모든 신하들을 참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흥주성 감독은 달랐다. 그는 지금 굳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미 북주국을 짓밟아 위세를 떨쳤으니,
그들은 공주마마가 아니라 형수님이라고 불렀다. “어머나, 우리 공주마마께서 도착하셨네.” 방 밖에서는 백호가 정태웅과 공수이와 함께 화투를 치고 있었다. 주작은 흥미가 없는지 벽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훑어보았다. 그 눈빛은 엄청 괴상했다. “어라? 형수님 오셨네!” 화투를 치던 공수이는 임홍연을 보자마자 패를 던져두고 아첨하러 달려갔다. 질 위기에 처한 백호는 교활하게 웃더니 정태웅 앞에서 공수이의 패를 몰래 훔쳐봤다. 그리고 안 좋은 패를 바꿔치기한 뒤 좋은 패만 남겨두었다. “아니, 백호 형님! 이러면 안 되죠!” 정태웅은 불만을 토로했다. “닥쳐! 웃어른 말씀에 따를 줄 알아야지. 내가 네 아비다! 게다가 공씨 가문 저놈은 외부인이야. 우린 같은 편이잖아. 팔은 안으로 굽어야지.” 백호가 호통쳤다. 정태웅은 어이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냥 화투 치는 중인데 아무리 형님이라도 이렇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잖아요!” 정태웅이 말을 듣지 않자 백호는 주먹으로 정태웅을 한 대 쳤다. “항복할 거야?” “흑, 이건 그냥 괴롭히는 거잖아요. 저 안 해요.” “뭐? 지금 감히 안 하겠다고?” 퍽! 주먹은 또 한 번 날아갔다. 정태웅은 정말 어이없었다. 하지만 백호 같은 무법자를 만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때 아첨을 다 한 공수이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손에 남은 세 장의 패, 두 눈이 퍼렇게 멍든 정태웅과 패를 들고 히죽거리는 백호를 보고 모든 것을 깨달았다. “너 이 자식, 이거 반칙이야!” 공수이는 곧바로 패를 내던지며 욕을 퍼부었다. “어쭈, 공씨 가문 놈이 감히 나한테 덤비는 거야?” 백호는 주먹을 휘둘러 공수이를 마구 두들겨 팼다. 결국 두 사람은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백호와 함께 화투를 쳤다. ‘이런...’ 임홍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것이 바로 강한 자 위에 더 강한 자가 있다는 거지.’ 정태웅과 공수이
방 안에서 윤구주는 공법을 거두고 남궁서준이 깨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구주 형님...” “응, 남궁 가문 사람들은 이미 북주로 보내 잘 배치해 뒀어.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 윤구주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남궁서준은 바로 일어났다. “구주 형님, 뭐든 말씀하세요.” 이 생기발랄한 소년을 보며 윤구주는 문득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남궁서준은 정말 윤구주와 여러 면에서 닮았다. 의리 있고 정의로우며 언제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남궁서준은 윤구주보다 운이 좋을 뿐이었다. “북주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어. 남궁 가문을 북역으로 옮겨 북역 제일의 가문으로서 대대로 북주를 지키게 하고 싶어. 네 생각은 어때?” 윤구주가 물었다. “네? 구주 형님, 이건 중대한 일이라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께 물어봐야 해요.” 남궁서준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를 잡나 했더니...’ 윤구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그가 결정권이 없었다면 물어볼 이유가 없었다. “서준아, 내가 너에게 묻는 것은 이미 남궁 가문과 상의한 후라는 걸 알아둬.” 윤구주가 말했다. 남궁서준은 멍해졌다. ‘무슨 뜻이지? 아버지가 나에게 결정하라고 한 거란 말인가?’ 남궁서준의 반응을 본 윤구주는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넌 이제 공식적으로 세상에 나섰어. 태백산에서의 수련은 너에게 하나의 시험이지. 그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남궁 가문에게 인정을 받았어. 이제부터 너는 남궁 가문의 후계자이자 미래 남궁 가문의 리더야.” 이전까지 남궁서준은 남궁인에게 어린애 취급을 받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남궁인은 남궁서준이 이미 홀로서기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자신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오늘부터 아무도 너를 통제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의 길은 네가 스스로 개척해야 해.” 윤구주가 말했다. 이
“하지만 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남궁 가문의 실력으로는 백호의 화형 성수조차 깨뜨릴 수 없었을 거야. 네 아버지는 너보다 더 어려운 입장이었지. 한편으로는 화진을 지켜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친아들을 보호해야 했으니까.” 윤구주의 이 설명을 듣고서야 남궁서준은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며 흘러내렸다. “다행히 모든 게 지나갔어. 넌 공식적으로 세상에 나섰고 홀로서기 할 수 있게 되었어. 그래서 네 아버지가 가문의 이주 결정권을 너에게 맡긴 거야. 난 네 의견을 완전히 존중해.” 윤구주는 웃으며 말했다. 남궁서준의 정신이 다른 데로 가 있는 걸 눈치챈 윤구주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한 것이다. 윤구주가 돌아서려는 순간, 남궁서준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궁 가문은 북주로 이주하겠습니다. 우리 남궁 가문이 대대로 북주를 지킬 수 있게 해주시니, 이는 남궁 가문의 영광입니다!” 윤구주는 이 말을 듣고 돌아보았다. 남궁서준의 눈빛은 확고했다. 이 순간 윤구주는 드디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다 컸네.’ “좋아, 나를 따라와.” 윤구주가 앞장서 걸어가자 남궁서준은 한 발짝도 뒤처지지 않고 따랐다. 윤구주는 문을 활짝 열었다. 밖에서 싸우던 일행은 모두 얼어붙었다. 방금까지 주작에게 시비를 걸던 임홍연은 교활한 표정을 지으며 윤구주에게 고자질했다. “윤구주, 네 부하 주작이 날 괴롭혔어! 봐! 저기서 아직도 이를 드러내며 날 협박하고 있잖아!” 윤구주는 주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강한 질투심이 가득했고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임홍연은 반응이 더 빨랐다. 그녀는 주작보다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백호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 구경했다. “하하, 왕. 그냥 주작도 공주로 봉하시죠. 주작은 항상 왕을 아버지처럼 모시잖아요. 주작의 소원대로 임홍연와 다투게 하시죠. 생각만 해도 재미있겠네!” 주작은 이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임홍연은 깜짝 놀랐다. ‘뭐
모두 총독부로 자리를 옮겼다. 윤구주는 북역의 크고 작은 문무 관료들을 소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는 걸 보고 남궁서준은 의아해했다. ‘남궁 가문 이주 문제인데 이렇게 공식적으로 할 일인가?’ 윤구주가 영주 문서를 꺼내자 남궁서준은 비로소 깨달았다. “남궁서준, 앞으로 나오게. 넌 태백산 전투에서 공을 세워 화진에 이바지했으므로 특별히 너를 북주 후작으로 봉하며 관청을 개설하고 관직을 설치해 남궁 세가를 이끌고 영원히 북주를 지키게 하노라!” 남궁서준은 당황했다. ‘무슨 뜻이지? 어떻게 갑자기 후작으로 봉해지는 거지?’ “네가 당황하는 건 알겠어. 사실 국주께서는 일찍이 후작으로 봉할 뜻을 가지고 계셨지만 네가 공을 세우지 않아서 결정하기 어려웠지. 이제 공을 세웠으니 국주의 뜻을 따르게 된 거야. 오늘부터 남궁서준은 화진의 제일가는 소년 후작이다! 명을 받들게. 혹시 거역할 생각은 아니겠지?” 이에 남궁서준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문서를 받았다. 남궁서준의 머리로는 윤구주가 이렇게 한 목적을 알 수 없었다. 후작으로 봉한 것은 다른 문제였다. 북주에는 이미 진동왕이 버티고 있어 남궁 가문을 하나 더 두는 건 다소 불필요했다. 진동왕을 경계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건 화진의 세가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윤구주는 단지 그들을 괴롭히기만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잡고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었다. 남궁 가문이 후작으로 봉해질 수 있듯 다른 세가들도 공을 세우면 후작 지위에 오를 수 있다. 세가 문벌은 다 죽일 수 없는 법이다. 이 가문을 멸하면 저 가문이 나타날 뿐, 중요한 건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고 바른 군주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날 밤, 윤구주는 형제들과 한자리에 모여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즐겁게 보냈다. 윤구주가 방으로 돌아오자 임홍연이 슬그머니 문 옆을 돌아 밖에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화진의 공주라면 당당하게 문으로 들어와야지. 거기서 몰래 뭐 하는 거야?” 윤
‘결국 공주님 기질을 발휘하는구나.’ 윤구주에게 성질을 부릴 수 있는 인물은 손에 꼽히는데 임홍연이 바로 그중 하나였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를 줄 알아? 네 머릿속은 소채은으로 가득 차 있잖아. 그 계집애는 지금 너보다 훨씬 잘 나가고 있어. 나 같은 공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야. 우리 아버지가 몰래 임씨 가문의 비전을 전수해 줬는데 머리가 나빠 외우지 못할까 봐 특별히 공법을 적어 주셨어.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 일세의 절학은 모두 문파의 수장 머릿속에만 새겨져 있지. 아무리 조심해도 가문 속의 도적은 막기 어렵네. 공법을 글로 남기면 반드시 유출되고 말 거야.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너는 당대 최강자인 김 어르신을 소채은의 스승으로 모셨다니. 내게 이런 자원이 있었다면 이미 날아다녔을 거야.” 임홍연은 윤구주의 이런 배려에 매우 불만이 많다는 걸 드러냈다. 윤구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먼저 그녀가 김도현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물었다. “나는 곤륜 구역에 가본 적 없고 아버지도 가본 적 없지만 우리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곤륜 구역에 가셨던 걸 잊지 마. 나는 증조할아버지를 뵌 적이 있어. 증조할아버지께서 진정한 강자들에 대해 말씀해 주셨지! 김도현은 곤륜 구역 검도의 도주이자 신계 최강의 세 파벌 중 하나의 수장이며 전 세계가 인정한 검성이지. 이런 인물은 우리 증조할아버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야.” 임홍연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음, 맞는 말이야. 김도현은 확실히 당시 최강자지만 나는 그를 검성으로 인정하지 않아.” 윤구주는 웃으며 말했다. 임홍연은 깜짝 놀랐다. ‘윤구주가 김도현을 모실 정도면 둘 사이가 나쁘지 않을 텐데.’ 하지만 곧바로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윤구주도 검객이었다. ‘검을 쓰는 고수가 어떻게 다른 검객을 인정할 수 있겠어?’ “아이고, 내가 헛소리했네. 다 네 탓이야. 나랑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다 알았을 텐데. 네가 검을 쓴다는 걸 까먹었잖아.” 임홍연은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공주는 공주만의 장점이 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현실의 방해로 인해 자신의 감정이 변한 적이 없다. 그녀는 사랑을 위해, 윤구주과 함께하기 위해 공주의 신분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 그녀가 첩이 되고 소채은에게 황후 자리를 양보해 줄 수 있었다. 이런 말들은 윤구주가 그녀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소채은에 대해서는 더욱 말할 수 없었다. 임정설이 임씨 일가의 비전을 아낌없이 소채은에게 전수한 것은 단순히 윤구주의 체면 때문만이 아니었다. 현문 비술에 관한 일은 단순한 관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원칙과 기준이 있다. 임정설은 윤구주의 관계로 인해 소채은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할 수는 있었다. 심지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전을 전수하는 일은 윤구주가 직접 부탁해도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보야, 어떤 일들은 미래에 알게 될 거야.” 윤구주는 한 마디도 설명하지 않고 그저 임홍연을 가볍게 품에 안았다. 천 마디 말보다 이 가벼운 포옹이 자신의 마음속에 그녀가 있다는 걸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임홍연은 코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말하기 싫은 거 다 알아. 모든 걸 마음속에 묻어두면 안 힘들어? 너 또 어디 가려는 거지?” “하하, 무슨 소리야. 내가 또 어딜 가겠어? 그저 우리의 작은 집을 지키기 위한 것뿐이지. 무너진 나라 아래 온전한 집이 어디 있겠어. 나 윤구주는 이미 매우 운이 좋은 편이야. 적어도 큰 집을 지키면 이 작은 집의 안전은 보장될 테니. 우리 화진 백성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대부분 아직도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어. 권력과 부, 명문 가문, 종문 같은 상류층들을 견제하지 않으면 화진 백성들은 영원히 진정한 행복을 얻지 못할 거야. 나는 천추만대의 업적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화진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을 뿐이야. 염황의 자손으로서 우리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더욱 윤씨 가문의 자손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윤씨 가문은 장 선생의 말을 가훈
“음, 괜찮아. 남자애들은 원래 생각이 많은 법이지. 가끔은 불평도 늘어놓고 말이야. 하하!” 윤구주는 웃으며 말했다. “이 자식아! 이게 무슨 불평이야! 안 돼, 나는 네가 나를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든 백호, 주작, 현모 그들 세 놈에게 시켜. 너 그들을 단련시키려는 거 아니었어? 모든 걸 네가 다 할 필요는 없잖아.” 임홍연은 졸라대며 윤구주가 자신을 떠나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윤구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지치고 졸릴 때까지 울며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윤구주를 꽉 안고 깊이 잠들었다. “우리 공주님, 나랑 자려고 오더니 정말 잠들어버렸네.” 윤구주는 가볍게 임홍연의 뺨을 꼬집으며 그녀를 안고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윤구주는 방을 나섰다. 임홍연을 깨우지 않기 위해 그는 특별히 그녀에게 잠드는 술법을 걸어 아름다운 꿈을 꾸게 했다. “공주마마는 최근 매우 피곤하셨어. 푹 쉬게 해. 깨우지 말고 스스로 깨도록 해.” 윤구주는 왕도에서 온 시녀들에게 당부하고 저택을 떠났다. 저택 밖에는 주작, 현모, 백호 세 사람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다 준비됐어?” 윤구주는 다시 화진을 위엄 잡는 구주왕이 되어 있었다. 어젯밤 하늘의 운명과 미래를 탄식하던 윤구주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모두 왕의 명령대로 준비되었습니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은 일제히 대답했다. 다시 출발할 때가 왔다. 어젯밤 술을 마신 후, 윤구주는 세 사람을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화진 북역 변경을 안정시키는 것은 단순히 북라국 하나를 굴복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풀을 뽑으면 뿌리까지 없애야 한다. 뒤에 있는 큰 호랑이를 처단해야만 근본적으로 후환을 없앨 수 있었다. 화진 북역의 큰 근심은 바로 아사 신전이었다. 이번에 윤구주가 정벌할 목표는 바로 아사 신전이었다. 갈 사람은 네 명이면 충분했다. “그럼 출발하자. 너희 셋은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