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석의 두 눈에 다시 이채가 돌아왔다.절망의 순간에 찾아온 특대 희소식이었다.손씨 그룹을 믿고 화련상조회를 나간 상인들은 그룹의 수장인 염구준이 죽으면 어차피 화련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상인들이 다시 화련으로 돌아오면 안홍기와 홍준식이 화련에서 그를 퇴출할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이번 일만 성공하면 진서호는 큰 공을 세우게 되고 진무석은 화련의 핵심 원로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게 된다.“아, 제가 보낸 사람들이 돌아왔나 보네요.”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회색 도복을 입은 두 노인이 살기등등한 기세를 풍기며 안으로 들어왔다. 시력을 잃은 둘이지만 서슬퍼런 표정으로 진씨 부자를 노려보고 있었다.그 둘은 당연히 가씨 형제였다.“어르신들!”진무석과 진서호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다.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한 진서호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물었다.“벌써 임무를 완수하시고 돌아오신 건가요? 염구준을 죽인 거 맞죠? 시체는 어디 있습니까? 제가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시체?’가씨 형제는 그들의 어리석음에 헛웃음이 나왔다.“시체 같은 소리하고 있네!”형 가천좌가 냉소를 지으며 다가가서 진서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진서호의 머리를 짓밟으며 분노에 차서 말했다.“내가 오늘 네 녀석을 시체로 만들어 주지!”“너희들 진씨 가문은 눈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야? 하늘이 우릴 도와서 괜한 오해를 사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아니다. 이런 말을 해도 너희는 못 알아듣겠지. 너희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바닥에 쓰러진 진서호는 눈앞이 아찔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진무석은 경악한 얼굴로 두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암살자가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고?둘은 진씨 가문의 오랜 호위이자 자랑으로 여길만한 강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씨 가문에 머물며 진씨 가문이 제공한 비책으로 무예를 수련했고 진씨 가문의 영패에 무조건 복종하는 자들이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두 노인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염구준이 전신전 전주이자 전설 속 인물이 맞다면 아무리 가씨 형제라고 하더라도 그를 쓰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진씨 가문의 모든 힘을 동원해도 불가능했다.“이제 이유를 알겠어?”가천좌는 다시 다리를 들어 쓰러진 진서호의 복부를 걷어찼다.“고작 진씨 가문 따위가 감히 염 전주의 목숨을 노리려 들다니. 웃기지도 않아!”그 말을 끝으로 두 형제는 뒤돌아서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떠나기 전 지은 그들의 섬뜩한 냉소는 진무석 부자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오늘부터 우리 형제는 진씨 가문과 완전히 선을 그을 것이다.”“너희는 알아서 살아남아! 죽어도 어쩔 수 없고!”말을 마친 가씨 형제는 미련 없이 진씨 가문 저택을 떠났다.진씨 가문이 수십 년을 통해 육성한 최강 호위가 결렬을 선언하면서 진무석 부자의 유일한 희망도 산산이 부서졌다.“멍청한 자식!”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충격에서 정신을 차린 진무석은 진서호에게 달려가서 그의 멱살을 잡고 호통쳤다.“말해! 너 대체 염 전주와 무슨 원수를 졌길래 죽기살기로 싸우는 거야? 대체 그분한테 무슨 실수를 했어? 우리 가문 살아남을 수는 있는 거야? 말하라고!”원한?“아버지,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입가에 피멍이 든 진서호는 한참 고민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희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기억 났어요. 저 염구준과 그렇게 큰 원한을 진 적은 없어요. 모든 건 앨리스가 주최한 그 연회에서 시작했어요!”그 연회에서 그는 손가을에게 흑심을 품었다. 하지만 그녀가 유부녀라는 것을 알고 이내 생각을 포기했다.나중에 화련상조회 때문에 염구준에게 귀뺨을 맞은 뒤로 오정형의 부추김을 받고 왕종서의 딸을 납치했다. 그리고 염구준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진실이 밝혀지며 가문의 산업에까지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그 뒤로 앙심을 품은 진서호는 가씨 형제를 보내 염구준을 암살하라고 했다. 하지만 가씨 형제가 무사히 돌아온 것으로 보아 진짜 암살을 시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처음부터 손해를
진무석은 서글픈 얼굴로 진서호를 바라보다가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네 목숨을 내놓는다고 해서 염 전주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런 높으신 분이라면 얼굴에 생각을 드러내고 다니지도 않을 텐데.”진서호는 그저 살았다는 생각뿐이었다.그는 멍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죽이지 않고 염구준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정녕 있단 말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가문을 포기하려는 걸까?“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다시 일어나는 것. 이건 내가 너에게 해주는 마지막 수업이다.”진무석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간만에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서호야, 네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 우리 가문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가 이 수업에 달렸다. 성공하면 모두가 사는 거고 실패하더라도 이 아비를 원망하지는 말거라.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말을 마친 그는 진서호의 대답도 듣지 않고 핸드폰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그는 핸드폰에서 연락처를 뒤지다가 결심을 내린 듯,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그가 연락한 사람은 안씨 가문 가주 안홍기였다.“진 가주?”전화를 받은 안홍기가 의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벌써 결정을 내리신 겁니까?”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진무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쓴웃음을 지었다. 수화기 너머로 안홍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안 가주의 의견에 동의하네. 진씨 가문이 화련을 떠나야 그 상인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어. 떠나기 전에 난 봉황국에 있는 진씨 가문의 산업을 전부 매각할 생각이네. 안 가주가 생각이 있다면 저가로 안 가주에게 양도하겠네.”“6조. 이 정도면 괜찮은 가격 아닌가?”안홍기는 속으로 진무석을 능구렁이라고 욕하면서도 그가 정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인지 의심이 갔다.게다가 봉황국에 있는 산업을 매각한다니?수화기 너머로 안홍기의 흥분한 듯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진무석 이 늙은 여우가 드디어 타협한 거야!’지금 상황으로 보아 시간만 끌면 결국 진무석은 그
안홍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화련상조회의 핵심 멤버로서 그들은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홍준식이 만약 진씨 가문의 산업을 이어받는다면 세력이 홍씨 가문으로 쏠릴 것은 당연한 일!“진 가주, 농담이 지나치십니다.”안홍기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흔쾌히 대답했다.“양도 절차는 바로 진행할 수 있도록 처리해 주십시오. 진 가주께서 양도 계약서에 사인만 하시면 바로 계좌로 6조를 입금해 드리겠습니다.”성공이다!진무석은 통화를 마친 뒤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아들을 바라보았다.“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버릴 건 단호하게 버리는 것. 이게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그는 모든 산업을 현금화해서 도주할 생각이었다. 봉황국을 순조롭게 떠날 수만 있다면 어디에 가서든 그 돈으로 다시 재기를 노릴 수 있을 것이다.“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일 나랑 같이 염 전주에게 사과하러 가자.”진무석은 아들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고개를 돌려 손씨 그룹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염 전주가 그래도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것도 운명인 거야.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다. 네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는 그분의 생각에 달렸어.”다음 날 아침, 손씨 그룹 봉황국 지사 건물.대문 입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지나가는 행인들, 그룹 관계자들, 대문을 지키는 경비원은 물론이고 언론사 기자들까지 건물 대문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든 가운데 진서호는 상반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한겨울의 바람을 맞으며 건물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늦가을의 추위가 피부를 때리고 채찍 자국이 가득 남은 그의 등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염 선생님!”진무석은 진서호의 옆에 서서 바짝 긴장한 자세로 그가 있는 사무실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정중한 어투로 사과했다.“진씨 가문 진무석, 어리석은 아들을 데리고 사과하러 왔습니다. 부디 용서를 받아주십시오!”그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전신전 전주와 대적할 힘이 그에
“진무석은 똑똑한 사람이야.”건물 맨 위층에서 염구준은 창가에 서서 진씨 부자의 연극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가문을 살리려면 이게 유일한 방법이긴 하지. 진서호가 아버지의 반만 닮았어도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네.”진씨 가문이 한 일은 괘씸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숨통을 비틀어버리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손가을은 염구준의 옆에 서서 그의 팔짱을 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구준 씨, 진심으로 잘못을 알고 사과하는 걸 봐서 기회를 한번 주는 게 어때?”염구준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그렇게 또 30분이 지나간 뒤에야 그는 등 뒤에 있는 부하에게 손짓했다.“올라오라고 해.”임명성이 직접 경호원들을 데리고 대문으로 나갔다. 행인들이 옆으로 흩어지고 기자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임 이사님, 진가의 가주께서 직접 후계자와 함께 염구준 씨한테 사과하러 왔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혹시 알고 계시나요?”“임 이사님, 손씨 그룹 해외지사의 총괄 책임자는 임 이사님 아니던가요? 이번 사건의 내막에 대해 알고 계실 것 같은데 혹시 괜찮으시면 인터뷰 잠깐 해주실 수 없나요?”“손가을 대표도 이 일을 알고 있습니까? 염 부장이 손가을 대표의 남편분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손가을 대표님 한번 만나뵐 수 있을까요?”“손가을 대표님과 염 부장님 인터뷰 신청합니다. 진짜 데릴사위 신분이 많나요? 세간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아내한테 용돈이나 받아 쓰는….”임명성의 얼굴이 사납게 굳었다.무례한 인터뷰 요청은 그렇다 하더라도 염구준을 모함하는 말은 참을 수 없었다.대체 이들은 손씨 그룹의 진정한 주인이 누군지 알기나 할까? 이 기업의 진정한 주인은 회장인 손태석도 아니고 대표인 손가을도 아니고 청해의 왕으로 불리는 염구준이었다.“해산 시켜.”임명성이 손짓하자 경호원들이 기자들을 밀어서 내쫓았다. 소란이 잠잠해진 뒤, 임명성은 진무석 부자에게로 다가가서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염 부장님이 보자고 하십니다.”말을 마친 그는
“염 선생.”진무석은 길게 심호흡하며 바닥에서 가냘픈 숨을 토해내고 있는 아들을 힐끗 바라보고 말했다.“매사에 냉철하신 염 선생께서 우리한테 다시 재기할 기회를 쉽게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저의 입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오늘 이후로 우리 진씨 가문은 염 선생께 그 어떤 위협도 되지 않을 겁니다.”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진무석은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향해 힘껏 내리치며 스스로 단전혈을 봉인했다.“그런 건 아무 의미 없어요.”염구준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손을 펼쳐 진무석의 기운을 걷어내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진 가주가 이렇게 하지 않아도 나나 가을이, 그리고 우리 손씨 그룹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진무석은 흠칫하더니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그랬다. 전신전 전주나 되는 사람이 고작 진씨 가문이 자신을 해할까 봐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가 수련을 거듭해서 무성이 되고 또 전신이 된다고 해도 염구준 앞에서는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일반인이었다.“사실 요행을 바라고 사죄하러 찾아온 거 인정합니다.”진무석은 씁쓸한 미소 뒤에 긴 한숨을 내쉬고는 염구준의 앞에서 큰절을 올렸다.“출발하기 전에 이미 봉황국에 있는 모든 산업을 매각했습니다. 염 선생이 우리를 용서해 준다면 우린 다른 나라로 가서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습니다.”“하지만 염 선생을 직접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염 선생만 동의하신다면 우리 진씨 가문은 평생 염 선생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그 말은 진씨 가문의 굴복을 의미했다.손가을은 화색을 띤 얼굴로 염구준의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만약 진씨 가문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손씨 그룹의 미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진서호의 인성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진무석은 확실히 품고 싶은 인재였다.“제안은 괜찮네요.”염구준은 손가을을 향해 미소를 짓고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진무석을 바라보며 말했다.“다만 손씨
드디어 염구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표정을 약간 풀었다.그에게는 꼭 필요한 단서였다.고성 전쟁 이후로 흑풍 존주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면서 신무 옥패에 관한 단서도 같이 사라졌다. 그의 아버지 염진은 현존하는 신무 옥패는 총 여덟 개라고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현재 염구준은 세 개를 보유하고 있었다.신무 옥패의 존재는 무림에서 실력을 지속적으로 높일 수 있는 중요한 가치가 있 고 반보천인이 천인의 경지로 넘어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며 그의 어머니의 가문의 비밀과도 연관되어 있었다.“신무 옥패에 관해 얼마나 아십니까?”염구준은 형형한 눈으로 진무석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면 진씨 가문이 계속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진무석은 드디어 성공했다는 마음에 감개무량해서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그때 당시 저도 어려서 자세한 것은 할아버지에게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40년 전, 진가의 노가주가 집권 당시 그는 비즈니스를 위해 고려국 제명도로 건너간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한 기회에 사업 파트너의 집안 장로를 만난 적이 있었다.그 장로는 비취색의 옥패를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그때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신무 옥패의 완벽한 복제품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다.비록 진품이 아니라 신무 옥패의 기적 같은 효능은 발휘할 수 없지만 표면의 도안은 진짜 신무 옥패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같았다.“왕년의 그 사업 파트너는 고려의 황씨 가문이었습니다. 그 장로는 제 할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었으니까 아마 지금은 돌아가셨을 겁니다.”진무석은 조심스럽게 염구준의 안색을 살피며 계속해서 말했다.“옥패가 훼손되지 않았다면 아마 황씨 가문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겠지요. 물론 이건 제 추측일 뿐입니다.”추측이든 아니든 신무 옥패에 관한 일이라면 신중해야 했다.“아주 흥미롭네요.”염구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펼쳤다. 그러자 공기 중에 무형의 기운이 진무석의 몸에 닿더니 그대로 진무석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아버지가 자신을 살리려고 이렇게까지 희생한다고 생각하니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진서호.”염구준은 그제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진서호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진무석 씨 얼굴을 봐서 이번 한번은 그냥 넘어가 준다. 다음에 또 나한테 걸리면 오늘처럼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돌려 한결 누그러진 어투로 진무석을 바라보며 말했다.“진무석 씨, 앞으로 아들 교육 똑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진씨 가문이 내 소속이 되었다고 해도 봐주지 않을 거예요. 아시겠습니까?”진무석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염구준과 손가을에게 큰절을 올린 뒤에 진서호를 향해 호통쳤다.“멍청한 자식, 당장 감사 인사를 올리지 않고 뭐 해?”진서호는 흠칫하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경호팀 부장도 아니고 재벌가 데릴사위도 아닌, 전설로 불리는 전신전 전주이자 모두가 선망하는 절대강자였다.“염 선생님, 손 대표님.”진서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바닥에서 기어일어나 두 사람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전에는 제가 어리석어서 두분께 많은 무례를 범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저 진서호는 지난 과거를 모두 씻고 손씨 그룹을 위해 힘을 이바지하겠습니다.”진지하게 반성하는 그의 태도에 염구준은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손가을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신무 옥패에 관한 정보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 고려국으로 한번 가볼 차례였다.“구준 씨.”텔레파시가 통한 듯, 손가을은 고개를 돌려 임명성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봉황국 지사는 임 이사님이 전적으로 맡아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염구준에게 시선을 돌렸다.“고려국으로 갈 거면 나도 같이 가.”같이 가자는 말에 염구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번 고려행은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주 먼 고대에 고려국은 용하국에서 대량의 무기와 비술을 빼돌렸기에 그곳에는 무림강자가
그의 재력이라면 대형 수영장을 만들어 향유고래를 키울 수도 있지만 바다가 고래의 고향이라 그러지 않았다.“선장, 고래가 엄청난데 잡지 않아요?”갑판에서 몸이 건장한 흑인 선원이 불만을 토로했다.눈앞에서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 돈이니 그럴만했다.“독수리, 주둥이 닥쳐!”선장은 아직도 누군가 향유고래에 미련을 두자 버럭 화를 냈다.염구준이 어디 출신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발산하는 기운은 보는 사람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독수리가 염구준을 힐끗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나머지 선원들도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선장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저기, 아직 볼일이 남았어요?”선장은 염구준이 조용히 앉아 있자 조심스럽게 물었다.“여기서 가까운 부두로 데려다줘요.”염구준은 끝없는 바다를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이곳은 바닷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일단 상륙한 후에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울 생각이었다.“그게…”선장은 난처한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어려우면 말씀하세요. 그렇다고 폭행을 휘두르면서 강요하지 않으니까.”염구준은 선장의 태도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 분명하게 말했다.선박은 어부들 것이니 강제로 빼앗지 않을 것이다.그의 말에 선장은 솔직하게 말했다.“우리는 고래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해요. 이제 나와서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손해가 엄청납니다.”그들은 염구준이 무섭지만 돈을 벌지 못해 가족들이 굶는 것이 더 무서웠다.“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아요. 얼마를 원하세요? 육지에 도착하면 내가 줄게요.”염구준에게 있어 돈으로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100만 달러.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선장은 믿지 않는지 거액의 가격을 부르면서 떠보았다.듣기에 높은 가격이지만 따져보면 수리비용, 연료, 인건비 등등 모두 제외하면 얼마 남지 않으니 합리적인 가격이었다.“이걸로 담보할게요. 어차피 당신네 선박에 있으니까 도망치지 않아요.”염구준은 상대방이 걱정하는 걸 알아차리고 딸에게 선물하려고 주은 주먹
이튿날, 미지의 바다에서 향유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고, 등에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그 사람은 바로 염구준이었다.사방에 온통 푸른 바다라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지금은 고래가 바닷가로 데려가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고래야, 잘 부탁한다.”“우웅!”둘은 서로의 말을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수시로 교류했다.염구준이 눈을 감고 운기조식하다가 배고프면 심해의 눈물로 에너지를 보충했다.신기한 것은 한 방울만 먹어도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뿌우우우웅!그때 멀리서 선박 소리가 들렸다. 염구준은 눈을 번쩍 뜨고 소리를 질렀다.“저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목소리에 기운을 담았더니 쩌렁쩌렁한 소리를 지를 때마다 수면이 음파에 진동하는 것 같았다.어디선가 나타난 선박에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슥!그런데 선박에 다가간 순간, 상대방이 고래를 잡는 쇠고랑을 발사하는 것이었다.염구준은 재빨리 검기로 밧줄을 잘라버렸다.선박은 그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향유고래를 잡으러 온 것이었다.생각하지 않아도 고래의 용연향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스스슥!선박에 있는 사람들은 고장난 줄 알고 이번에 작살을 던졌지만 역시 염구준에게 잘려서 바다 밑으로 들어갔다.상대방과 가까워지자, 염구준은 그들의 선박에 번쩍 뛰어올라 엄숙하게 경고했다.“멈춰. 아니면 무력으로 대응할 거야.”선원들은 대부분 기운이 없는 평범한 어부였다.그들은 염구준이 먼 곳에서부터 뛰어올라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는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여기서는 고래를 잡는 걸 허락해요.”한참 뒤, 선장은 국제 감독기관에서 온 줄 알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이 고래는 내 친구예요. 어떻게 할지 잘 알겠죠?”염구준은 선장을 노려보며 차갑게 되물었다.“알았어요. 이 사람 말을 못 들었어? 당장 작살을 내려놔!”선장은 상대방이 보통이 아니란 걸 눈치챘는지 바로 선원들에게 지시했다.그러자 당황한 선원들은 정신을 차리고 지시대로 작살을 내려놓았다.염구
감히 그의 전우나 다름없는 고래를 잡아먹으려고 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만약 향유고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심해 밑에서 죽었을 것이다.“염 선생님, 안 돼요!”당황한 노신기 일행이 다급히 나서서 말렸지만 염구준은 듣지 않았다.그는 요트를 타고 서해충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러 공격했다.“당장 토해!”염구준은 두 손으로 검을 들고 번쩍 뛰더니 위에서 서해충을 자르려고 했다.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고래를 살려낼 것이다.“하악!”뿔난 서해충이 나지막하게 울부짖더니 커다란 입을 벌이고 염구준을 통째로 삼키고는 물속으로 들어갔다.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심지어 천기문의 고위층들도 진정할 수 없었다.“염 선생님!”“안 되겠어. 모든 음성탐지기를 던져!”노신기는 당황한 마음에 맞서 싸우려고 명을 내렸다.유동심연의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이번에 오면서 대량의 음성탐지기를 챙겼었다.그러나 워낙 위력이 강한 무기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염 선생님, 제발 잘 버텨줘요.’촤아악!이제 막 음성탐지기를 내려놓고 가동하려고 할 때 눈앞에서 거센 물보라가 솟구치는 것이었다.해저 지진으로 거센 파도가 밀려오면서 일으킨 쓰나미였다.“다들 선실로 들어가!”위급한 상황에서 노신기는 어쩔 수 없이 먼저 가문을 지켜야 했다.선박 세 척은 쓰나미에 밀려 먼 곳까지 흘러갔다.한편, 바다 밑은 난리도 아니었다.서해충 체내에 들어간 염구준은 선사 시대의 바다 생물과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그가 공격할 때마다 서해충은 심한 고통을 느꼈는지 커다란 몸집을 꿈틀거렸다.실은 서해충이 삼킨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도망칠까 봐 염구준이 스스로 잡혀 먹힌 것이었다.한참 공격하면서 돌진했더니 드디어 향유고래가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구자검법! 검일참공!”그는 기운을 폭증시켜 강력한 살술로 서해충의 몸에 길이가 10미터되는 상처를 냈다.잘린 부위에서 바닷물이 역류하여 들어올 때, 염구
동물의 감각은 때론 인간보다 훨씬 뛰어났다.특히 바다에서 자란 생물이라면, 웬만한 레이더보다도 훨씬 빨리 감지할 수 있었다.쿠쿵!혹시라도 싸울 수 있기 때문에 다들 몸에서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아래쪽에서 뭔가 빠르게 올라오고 있어.”염구준은 날카로운 눈으로 바다밑을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 검은 점 하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아직 수면까지 오지도 않았는데, 그 그림자는 이미 성체 향유고래와 맞먹는 크기였다.‘설마, 진짜 서해충이 있는 건가?’“목표가 공격 범위에 진입했습니다. 모든 작살 준비 완료했습니다.”대원들은 지시가 떨어지고 나서 3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내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쏴!”노신기는 참을성 없이 바로 명령을 내렸다.‘망했다!’염구준은 말리려고 했지만 결국 말리지 못했다.물속의 거대한 생물체는 어선보다도 커서 자칫하다간 오히려 배가 끌려갈 수도 있었다.슥! 슥! 슥!고래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세 척의 어선에서 수십 발의 대형 작살이 물밑의 검은 그림자를 향해 발사되었다.타겟의 몸집이 컸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살이 정확하게 꽂힐 수 있었다.“끌어 올려!”노신기는 고래 잡이를 할 때 쓰던 방식을 운용하며 숙련하게 명령을 내렸으나 기계를 최대치로 올려도 타겟을 끌어오리지 못했다.이에 조타실에서 다급하게 소식을 전했다.“큰일입니다. 어선이 저것에 의해 유동심연 쪽 소용돌이로 끌려가고 있어요!”배는 엄청난 속도로 끌려갔다. 배 자체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속도였다.“밧줄을 끊어!”염구준은 노신기의 무전기를 낚아채고 지휘권을 넘겨받았다.“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꽉 감겨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조타실에서 절박한 답변이 돌아왔다.현대식 어선은 전부 인공지능 시스템이라 이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우웅!염구준은 결국 검기를 날렸고, 날카로운 검광이 연달아 번쩍이며, 단숨에 밧줄들을 잘라냈다.이에 배가 거대한 관성에 휘청이며 흔들렸고, 균
오늘 만약 염구준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전부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빨리 항행하라고 하세요. 뭔가 이상합니다.”염구준의 갑작스러운 말에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졌다. “네, 말하고 오겠습니다!”그러나 눈치가 생긴 사람들은 염구준의 뜻을 알지 못해도 그대로만 하면 된다는 걸 알고 있어 곧바로 달려갔다.그들은 염구준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염구준은 흡족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면을 바라보며 물었다.“스텔라성의 성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십니까?”이번에 스텔라성의 성주는 두 개의 판을 짰는데, 하나는 겉면으로 보이는 부성주 베르였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숨어있던 노대영이었다. 다른 걸 다 따지고 나서 판을 짠 것만 본다면 정말 훌륭한 계획이었다.그랬기에 염구준은 그를 중시했다.노신기와 아타는 미간을 찌푸리고 서로를 바라본 뒤, 늙은 아타가 입을 열었다. “성주의 이름은 노세입니다. 압도적인 실력의 소유자로, 진 적이 없습니다.”“하지만 지난 20년간, 외부에서는 그의 모습을 본 이가 없습니다. 폐관 중이라는 소문도 있고, 이미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지요.”“그의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라, 저희도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이야기를 들은 염구준은, 오히려 흥분한 듯한 웃음을 지었다.“흐음, 전부 사실이라면 꽤 괜찮은 상대가 되겠군요.”방금, 막 육체의 극한을 돌파한 염구준은 적당한 시험 상대가 필요했다.‘대단해.’주변 고위 간부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염구준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다만 약간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스텔라성 성주 같은 괴물은, 대부분 기겁하며 피하려 하는데, 정면 승부를 기대한다니까 말이다.“그나저나 염 선생님, 전에 올라오실 때, 인원이 적던데, 혹시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노신기는 다른 걸 얘기하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아, 이거 아십니까?”그의 손에는 투명한 비닐에 담긴 작은 물방울이 들려 있었는데, 외부에는 진기가 감돌았다.‘어라?’조금 더
이 독에 중독된 무인은 일시적으로 기운이 흩어지고, 단전이 봉쇄되어, 꼼짝없이 폐인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만약 과다 복용할 경우,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이런 희귀한 독약은 스텔라성 성주가 준 거겠지?”염구준이 흥미롭게 물었다.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진짜 산기봉단을 보았고, 게다가 그 양이 상당했기 때문에 꽤나 관심이 갔다.“맞아. 얼른 저 녀석을 잡아!”노대영은 승리자처럼 손을 휘저으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그는 희귀한 독약인 산기봉단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에휴.”아타 등 사람들은 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염구준마저 당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이제 구세주가 사라졌으니, 최악의 경우 전부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가서 두들겨 패! 나 아까 진짜 쫄아서 오줌 쌀 뻔했단 말이야!”몇몇이 소리치며 달려들었고, 염구준을 한껏 때려서 화풀이를 하려 했다.반보천인급 고수를 때릴 기회는 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우웅. 그러나 그 순간, 검광이 번쩍이더니 달려들던 사람들 전부가 쓰러졌다. 그들의 목에는 옅은 혈흔이 있었는데, 상처는 아주 작았지만 모두 목숨을 잃었다.“이 독이 아무리 강해도, 나를 상대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염구준은 조용히 진기를 운용하며, 체내에 남아 있던 독기를 모두 없애버렸다.육신이 이미 반보천인의 극한의 경지에 다다른 탓에 약물 저항성도 엄청나게 강해져 그는 산기봉단 같은 독약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너... 이건 말도 안 돼!”노대영은 절규하듯 외쳤다.희망이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자, 정신이 붕괴되기 직전이었다.곧 있으면 승리할 수 있었는데, 이젠 그게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는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스텔라성 성주랑 뭘 꾸민 거지?”염구준은 서두르지 않고 물었다.해독제 같은 건 이제 관심 없었다. 상대가 정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난 진작 그분의 문하로 들어갔어. 언젠가는 그분이 내 복수를 도와줄 거다!”“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데,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
염구준은 주머니를 집어 들어 곁에 있던 그레이에게 휙 던져주며 분부했다.“먼저 기운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독제를 나눠줘.”“네.”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노대영을 흉악하게 노려보았다.반보천인으로서 이런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게 조금 창피해서였다.노대영은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흘러가는 걸 감지하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할 말이 있습니다.”“해.”염구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단 한 마디만 툭 내뱉었다.그레이와 다른 이들이 힘을 회복하고 나면, 그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기에 곧 죽을 이의 유언쯤은 들어줄 수 있었다.노대영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얼른 말을 이었다.“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원수에게 복수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그래.”염구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딱히 다른 변수가 없다면, 이 말을 부정할 이유가 없어서였다.‘어라?’이에 주변 사람들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말투로만 보면, 염구준이 노대영의 편을 들어주려는 것 같아서였다.그러나 방금 전에는 또 그들을 구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염구준이 무슨 생각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노대영은 염구준의 마음을 돌린 줄 알고 속으로 기뻐하며 바로 말을 이었다.“이 도리를 알고 계시니, 그럼 행동에 옮겨도 되겠죠.”노대영은 혹여나 다른 변수가 있을까 두려워 단검을 꽉 쥐고 중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노신기에게 달려들었다.그레이 등이 조금 있다가 어떻게 나올지는 크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복수를 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말이다.쾅!하지만 달려가자마자 염구준의 발에 얼굴을 맞아서 옆으로 나가떨어졌다.그의 코와 입에서는 순식간에 피가 줄줄 흘렀다.“날 가지고 노는 거냐, 염구준!”“허, 내가 나설지 안 나설지 짐작이 안 됐나봐?”염구준은 비웃으며 말했다.그는 노대영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지만 상대방의 행위를 몹시 혐오했다.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대놓고 복수하는 건 괜찮지만, 그 아비가 악행을 일삼던 사람이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방식에,
그러나 몸속에 독이 퍼진 탓에 기운을 끌어올릴 수가 없어 모두 답답하게 속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노대영이 혓바닥을 자르려고 할 때,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대영 문주님, 염구준인 것 같습니다!”이름을 듣자마자, 노대영의 얼굴에서 희열이 싹 사라지고, 이내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기습에 성공한 후 바로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고래를 타고 쫓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염구준 한 사람만으로 충분히 그들을 몰살할 수 있었다.“어서 고래잡이 작살이랑 그물 그리고 멀리에서 공격할 수 있는 무기들을 준비해.”노대영의 가슴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급속히 퍼져갔다.허겁지겁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겨우 쇳조각 몇 개로 염구준을 막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휙휙!염구준은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작살, 그물, 조명탄 따위를 보며 입꼬리를 비웃듯이 끌어올렸다.아직 사격거리에도 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공격을 했기 때문이었다.‘적지 않게 겁을 먹었나 보네.’그는 생각했다. 역시나 첫 번째 공격은 전부 허탕이었다.염구준은 거대한 향유고래를 타고 빠르게 이동했고, 이윽고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됐다.커다란 작살 하나가 고래의 머리를 향해 곧장 날아들었는데, 맞으면 죽지 않더라고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게 뻔했다.우웅!염구준은 검기 한 줄기를 내보내 날아오던 작살을 두 동강 낸 뒤, 작살에 묶인 쇠사슬 위로 몸을 던져, 빠르게 어선으로 돌진했다.풍덩!향유고래는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속으로 잠수했다.노대영은 염구준이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걸 보자마자 다급히 소리쳤다.“어서, 어서 배에 못 올라오게 사슬을 끊어!”그도 자신이 염구준과 맞서봤자, 단 한 줌의 승산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구자검법, 검일참공!”염구준은 배 위 인원들의 움직임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강한 검술을 발동해 검기를 날렸다.제대로 검기를 축적하진 못했기에, 완벽하게 완성된 검일참공은 아니었고, 약간의 반동
파악!곧이어 물기둥이 하늘로 솟구치며 거대한 향유고래가 염구준과 멀지 않는 곳에 떨어진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마치 떠나기 아쉬워하는 듯했다.촤악!염구준은 몸을 날려 향유고래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뒤, 세 척의 어선 쪽으로 진기를 날려 물보라 일게 했다.이에 향유고래는 곧장 방향을 틀고, 어선을 향해 빠르게 헤엄치기 시작했다.말이 통하지 않아 이런 방식으로 밖에 교류할 수 없었지만 별로 큰 문제는 없었다.그 시각, 1호 어선은 다른 어선보다 조금 더 시끌벅적했다.노대영은 배의 지휘권을 장악한 뒤, 끝까지 저항한 소수만을 제거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포로로 붙잡아두었다.물론 그가 자비로워서가 아니었다.그저 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어떻게 복수하는지 지켜보게 하기 위해서였다.“대영 문주님, 준비 완료됐습니다. 언제든 시작 가능합니다.”노대영에게 붙은 아첨꾼 하나가 다가와 공손하게 말했다. 이번에 출정한 천기문 문도 중 절반 이상이 이미 노대영 편이었다.쿵!노대영은 부도 갑옷을 입은 채로 웃으면서 팔을 휘둘러 노신기를 바닥에 내던졌다.“악독한 놈. 네가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난 오늘 아버지의 복수를 할 거다.”며칠 전에 대의를 위해서라면 혈연관계는 얼마든지 끊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그저 노신기를 안심시키기 위함에 불과했다. 그의 가슴 속에 맺힌 복수심은 한순간도 식지 않았었다.“하아...”노신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창백한 얼굴엔 깊은 후회가 서려 있었다.‘그때 불쌍해 보인다고 해서 검은 머리 짐승을 거두는 게 아니었는데.’그는 생각했다. “모든 일은 내가 벌인 거니까 찢어죽이든, 뭘하든 나한테만 해.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 건드리지 말고.”지금 이런 상황에 이른 이상, 그는 더 도리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전에 이미 노대영에게 그의 출신을 말해주며 그의 아버지가 눈 깜빡하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는 변태 악마라고 말해주었으나 그는 전혀 듣지 않았기 때문에 말해봤자 쓸모가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스승과 제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