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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왜냐하면 아우와 제수씨는 그분의 장인 장모거든.'

용성우는 어안이 벙벙한 두 사람을 쳐다보며 드디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오늘 그는 실로 돈 보따리를 건네러 온 것이다. 손태석과 진숙영의 비위를 잘 맞출 수만 있다면 그분을 위해 큰 공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주군 앞에서 돈이 대수란 말인가?

줄만 잘 탄다면, 그분 말 한마디에 하루아침에 10조, 20조도 벌 수 있었다.

"다들 이의 있나?"

용성우의 지시에 따라 계약서가 회의실 대형 스크린에 공개되었다. 손중천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본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없으면 이대로 계약하지."

사람들이 스크린 속 조항들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손태석과 진숙영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감독한다는 글자를 읽은 이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이건 치명적인 유혹인 동시에 날카로운 못이 되어 모든 이들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댔다.

손영 그룹의 오너와 고위급 임원들은 모두 이 계약서가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즉시 모두들 손태석과 진숙영의 눈치를 보며 몸을 숙여야 했다.

계약이 성사되는 대로 두 사람을 쫓아내려던 계획은 실행하기도 전에 물거품이 되었다.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5조라는 거액과 차후의 추가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당연히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혹 불만이 있는 건가?"

사람들의 표정을 확인한 용성우가 코웃음 쳤다.

"그렇다면 계약은 없던 일로 하면 되겠군. 하면 아우와 제수씨는 우리 용운 그룹으로 모셔가도록 하겠네. 물론 5조짜리 프로젝트는 여전히 두 사람이 책임지고 말이야. 돈 좀 만져보겠다고 혈안이 된 다른 회사는 많으니까. 널린 게 협력 파트너 아니겠나?"

예리한 말들이 비수가 되어 사람들에게 푹푹 내리꽂혔다.

용성우의 태도는 손중천과 손혜린의 모든 환상을 단숨에 깨뜨리는 것이었다.

이젠 결정을 내릴 시간이었다. 거절하면 몇조의 이윤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지켜봐야만 한다. 이류에서 일류로 거듭나려던 손씨 집안의 희망도 함께 사라질 테지. 그러나 계약서에 사인한다면 손태석과 진숙영의 지위가 하루아침에 높아진다. 예전처럼 밥 먹듯이 무시하고 괴롭힐 수도 없다. 손중천과 손혜린도 감히 건드리지 못할 권력이 그들의 손에 쥐어질 것이다.

이 계약서는 두 사람의 비싼 액막이 부적이나 다름없었다.

손혜린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으며 손태석과 진숙영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엔 이 계약서는..."

"자네가 뭔데?"

용성우는 그녀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심산으로 싸늘하게 반문했다.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게 하는 것인가? 이번 계약은 우리 아우하고만 진행할 거라니까. 저 여자는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와 담판 지으려는 건가? 이렇게 하지, 투자금을 10조로 하고 저 여자를 내 눈앞에서 당장 치워버리게."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회의실 안에 용성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회의실 내부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손혜린은 바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붉게 달아오른 낯빛은 어느새 보라색으로 변해버려 마치 돼지 간을 떠올리게 했다.

저가 뭐라고 감히 용성우와 대거리를 하겠는가. 사람들 앞에서 망신당한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10조의 투자금과 손에 거머쥐게 될 몇조의 이윤이 그녀의 뺨을 찰싹찰싹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마찬가지로 낯빛이 어두운 손중천을 바라보던 용성우가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르신도 별말씀 없는 걸 보니 우리 용씨 집안은 손영 그룹에 아무것도 아닌가 보오. 혹은 내가 별 볼 일 없는 늙은이로 보이든지. 그럼 나도 더는 두말 하지 않겠네. 10조는 없던 일로 하세."

용성우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주변에 있던 용운 그룹 사람들도 뒤따라 일어섰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떠날 것처럼 보였다.

마음이 조급해진 손중천이 벌떡 일어서며 그들을 말렸다.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가 손혜린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버럭 호통쳤다.

"손혜린... 아니지, 진혜린! 오늘부로 네 성은 몰수다. 네겐 어울리지 않는 성이야. 부사장 직함도 태석이에게 넘기거라. 지금 당장!"

손혜린은 거센 폭우를 조우한 듯 하염없이 비틀거렸다. 새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이었다.

이토록 중요한 자리에서, 그것도 용씨 집안 가주 앞에서 이런 말을 꺼냈으니 절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미래는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건 절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손혜린은 더는 손혜린으로 머무를 수 없었다. 손씨 집안의 지위도 잃었고 손영 그룹 부사장이라는 직함도 사라졌다. 빈털터리로 쫓겨나게 생겼다. 이대로면 그녀의 인생은 끝장이었다.

"어르신..."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손중천을 쳐다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가 간절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이번 한 번만..."

"당장 꺼지거라!"

손중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한번 호통쳤다.

"아직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 진혜린, 넌 더 이상 손씨 집안 사람이 아니야. 부사장도 아니니 이 자리에 있을 자격조차 없지. 뭣들 하는 게야, 당장 여기서 끌어내지 않고."

열몇 명의 보안요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손혜린을 끌어냈다, 아니, 그녀는 이제부턴 진혜린이었다.

가차 없이 회의실에서 끌어내려진 진혜린은 바로 손영 그룹 건물 밖으로 내쫓겼다. 낡아빠진 짐짝처럼 진혜린이 계단 아래로 던져졌다.

털썩-

무참하게 내던져진 그녀는 바닥에 벌렁 나자빠졌다. 온몸의 뼈가 부러진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안돼... 이럴 순 없어!"

진혜린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협력, 복수, 계약... 모든게 꿈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이젠 완전히 끝이었다.

"왜! 대체 왜! 이럴 순 없다고... 당장 돌려내!"

바닥에 엎드린 그녀는 울부짖으며 난동을 부렸다.

용성우가 손태석에게 힘을 실어주는 한 그녀가 재기할 가능성은 없었다. 이번 계약은 그녀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

은빛 아파트 내부.

손가을은 아이를 품에 안은 염구준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구준 씨. 엄마 아빠가 만약 계약을 성사해도 손혜린이 가만히 놔둘 것 같진 않은데... 혹시 두 분을 해고하진 않을까?"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염구준이 옅게 미소 지었다.

손혜린은 무슨. 지금쯤 아마 손중천에게 쫓겨나 성씨도 바뀌었을 것이다. 이젠 진혜린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희주와 놀아주던 염구준이 손가을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예전에 탔던 차가 그 빨간 포르쉐였지? 쫓겨나면서 차까지 빼앗겼던 거야? 당신이 잃어버렸던 모든 걸 되찾아 주겠어. 가자."

염구준이 손가을의 희고 가는 손을 잡았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두 사람이 거실을 벗어났다.

"구준 씨... 우리 어디 가?"

문을 닫은 손가을이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으나 염구준은 그저 웃을 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빛나고 있었다.

손가을에게 새 포르쉐를 사준 뒤 손영 그룹에 가서 장인 장모를 모셔 올 계획이었다.

......

얼마 뒤, 택시가 교외의 포르쉐 전시장 앞에 멈추었다.

"여기야."

아이를 안은 염구준이 손으로 전시장을 가리키며 막 차에서 내린 손가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퇴역 정착금이 이제야 들어와서. 당신 포르쉐 좋아해? 마음대로 골라."

손가을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어여쁜 얼굴에 행복이 피어오르는 듯싶었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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