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 사람도 곁에 없고 결혼도 끝나버린 마당에 이 쓸모없는 물건을 굳이 계속 가지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남설아는 단숨에 반지를 빼내어 던지듯 남도일에게 건넸다.“이게 집보다 훨씬 비싸요. 팔아서 삼촌 마음대로 써요.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마요.”“설아, 이럴 줄 알았다! 네가 이렇게 철이 들었을 줄이야. 네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나 아니겠어? 걱정 마,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삼촌이 꼭 지켜줄게.”“보아하니 요즘 살도 많이 빠졌더라. 삼촌이 맛있는 거 사줄까? 우리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자.”그가 갑자기 친절을 베풀자 남설아는 순간 주저했다.사실 어릴 적엔 정말 그와 가장 가까웠다.항상 삼촌을 따라다녔고 그때만큼은 누구보다 의지하던 존재였다.문득 시선이 벽에 걸린 오래된 가족사진으로 향했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 끼 정도는 괜찮겠지.’그러자 남도일은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남설아의 손목을 붙잡고 집을 나섰다.그의 시선은 오로지 저녁 식사에만 쏠려 있었고 남설아의 손에 남은 상처도, 무릎에 흐르는 피도,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았다.처음에는 단순히 가까운 곳에서 대충 한 끼 때우는 줄 알았다.그런데 막상 도착한 곳은 고급 레스토랑이었다.남설아는 순간적으로 손목을 뿌리치고 한 발짝 물러섰다.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남도일을 노려보았다.“돈 없다면서요? 그런데 이런 데서 밥을 먹겠다고요?”남도일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고작 밥값 정도야 내가 감당할 수 있지. 너는 내 하나뿐인 외조카잖아? 삼촌이 제대로 대접해야지.”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설아를 안으로 끌어들였다.문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익숙하게 VIP 룸 번호를 불렀다.그 말을 들은 직원은 잠시 남설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그런 다음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안내했다.순간 남설아의 등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직원의 눈빛이 어딘가 이상했고 이 분위기도 이상
“네 삼촌이 나한테 4억을 빚졌어. 그래서 널 대신 넘기겠다고 하더군!”원길호의 눈빛엔 탐욕이 가득했고 거칠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손을 뻗어 그는 남설아의 턱을 움켜쥐고 찬찬히 얼굴을 살폈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으며 비웃었다.“좀 마른 게 흠이긴 한데 그래도 얼굴은 괜찮네. 4억으론 좀 아까운걸?”“아, 아니에요! 제발 함부로 굴지 마요! 제가 줄게요. 4억, 제가 마련할 수 있어요!”“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요!”눈물이 한순간에 쏟아졌다. 목소리는 떨렸고 두려움에 몸까지 굳어버렸다. 반사적으로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어 마구잡이로 화면을 눌렀다.핸드폰이 바뀌었어도 시스템 설정은 동일했다. 배서준이 긴급 연락처로 등록되어 있었고 통화가 자동으로 연결됐다.하지만 여러 번 시도해도 돌아오는 건 ‘연결할 수 없습니다’라는 차가운 안내음뿐이었다.원길호는 남설아가 도움을 요청하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전화기에서 반복해서 들려오는 기계음에 비웃음을 터뜨렸다.“애송아, 아무도 널 구하러 올 사람 없나 보네?”남설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원길호는 짜증이 난 듯 거칠게 그녀의 옷깃을 잡아챘다. 그러더니 단숨에 테이블 위로 내동댕이쳤다.그 바람에 탁자 위에 있던 그릇과 젓가락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남설아는 바닥에 내리 찍힌 통증에 몸을 움츠렸지만 그보다 더 절박한 상황이 닥쳐오고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녀는 벽 쪽으로 움츠러들었다.“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발, 제가 돈 줄게요. 정말로 줄 수 있어요!”그녀는 단출한 셔츠 한 장만 걸친 상태였는데 원길호의 거친 손길에 단추가 튕겨 나갔다. 앞쪽이 벌어지면서 하얀 피부가 드러났고 그녀 특유의 은은한 향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여자의 향기 때문일까 원길호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다시 다가가더니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돈? 돈은 이미 많아. 난 지금 너를 원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압적인 키스가 쏟아졌다.“안 돼요!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날 놔줘요!”남설아는 숨이
등 뒤로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남설아는 다른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온몸을 비틀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던 중 본능적으로 다리를 들어 올려 원길호의 급소를 가격했다.“끄윽!”원길호가 순간적으로 몸을 웅크리는 틈을 타 남설아는 재빨리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마침내 열린 문 너머로 탈출의 희망이 보였다.그러나 바로 그 순간 머리카락이 세차게 잡아당겨 졌고 이어지는 원길호의 손길이 거칠게 뺨을 내리쳤다.“계집애, 죽고 싶어 환장했냐?”“살려주세요!”“놔요! 제발, 놓으라고요! 건드리지 마요!”눈앞에 탈출구가 보이는데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남설아는 문틀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는 힘껏 버텼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살려달라고? 이 가게는 전부 내 거야. 누가 널 구해주겠는데?”“고분고분하면 좋게 넘어갈 일을 괜히 어렵게 만드는구나. 어디 한 번 맛 좀 봐야 정신 차리겠어?!”원길호는 이를 갈며 그녀의 손을 밟았다.거친 신발 밑에서 손등이 짓눌려 떨렸다. 하지만 손을 놓는 순간 희망도 사라질 걸 알기에 남설아는 끝까지 버텼다.“그래, 그렇게까지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다면 나도 상관없어.”원길호는 비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채를 세차게 잡아챘다. 손이 문틀에서 떨어지는 순간 남설아는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두피가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남설아는 이를 악물고 다시 바깥으로 기어가려 했다. 문까지 겨우 몇 발짝 거리였다. 그 마지막 희망을 놓칠 수 없었다.“정말, 내가 본 여자 중에서 가장 지독하게 버티는군.”원길호는 허리띠를 풀어가며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단숨에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놔줘요!”남설아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원길호는 이미 인내심을 잃은 상태였다.머리카락을 다시 잡아 올리더니 그는 연이어 뺨을 후려쳤다. 뺨에 화끈한 통증이 번졌다.그리고 곧바로 원길호는 그녀를 테이블 위에 거칠게 던졌다.그의 손이 무자비하게 옷을 헤집었다. 차가운 공기가 닿는 순간 남설아
하지만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남설아는 스스로 억눌렀다.울 자격조차 없는 자신이 무슨 권리로 그의 품에 기대 울 수 있단 말인가?강연찬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조수석에 앉혔다. 얼굴을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웅크린 남설아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그만 울어. 병원부터 가자.”“나... 지금 너무 처참하지 않아?”남설아는 이미 답을 알면서도 그렇게 물었다.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지만 그 안에는 씁쓸한 자조가 가득했다.그러나 강연찬은 단호하게 말했다.“괜히 버티려 하지 마. 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이 말을 하면서 그는 일부러 오디오의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흑흑!”결국 남설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수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오열했다.강연찬은 묵묵히 운전대를 잡았다.커다란 음악 소리 속에서도 그녀의 울음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절망과 슬픔이 뒤섞인 흐느낌이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이를 악물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돌아올걸.’남설아가 이런 일을 겪게 놔둘 바엔 차라리 모든 걸 내팽개치고서라도 곁에 있어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 도착했다.남설아는 이미 울음을 멈추고 차분해진 상태였다.조용히 문을 열고 내리려던 순간 강연찬이 한걸음에 다가오더니 다시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나 혼자 걸을 수 있어. 그러니까...”“닥치고 가만히 있어.”강연찬은 단호하게 말을 끊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병원 안으로 걸어갔다.곧바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찌르자 남설아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익숙하지만 너무나도 싫은 냄새였다.곧이어 간호사와 의사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상처 위로 소독약이 떨어지는 순간 남설아는 반사적으로 강연찬의 손을 꽉 붙잡았다.이내 수많은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그들은 대학 동기였는데 강연찬은 대학교 2학년 때 유학을 떠났다.그때부터 그녀가 마음에 품었던 감정들은 영영 묻혀버렸다.그러다 배서준을 만나 배나은을 가지게 되었다.그렇게 미처 꺼내 보지도 못한 사랑은
남설아는 뼈가 부러진 통증이 온몸을 찌를 듯했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때 강연찬이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네 폰 계속 울리고 있어.”화면을 내려다보자 걸려온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남설아는 비웃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옆으로 던져버렸다.‘필요할 때는 없더니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어?’반면 배서준은 통화가 일방적으로 끊어진 화면을 보며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정말 끝까지 건방지군. 예전부터 내가 베푼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더니 이제는 대놓고 무시하는 건가.’그때, 비서인 천기준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대표님, 말씀하신 사항 다 조사해 왔습니다.”천기준은 머뭇거리며 조사 자료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사망 진단서, 화장 증명서, 병원 기록까지 모두 확인했습니다. 아가씨는... 확실히 세상을 떠났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천기준은 한발 물러섰다.혹여나 폭풍이 몰아칠까 봐 미리 거리를 두려는 것이었다.배서준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책상 위의 서류들을 급히 뒤적이며 사실을 확인하더니 얼굴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곧이어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탁 던지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어쩜 이렇게 빨리!”나은이가 골육종을 앓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떠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이제야 떠오른 기억들이 차갑게 가슴을 내려 앉혔다.그날 남설아가 이혼을 조건으로 단 한 달만 나은이와 함께 있어 달라고 했던 일, 그녀가 그토록 애원하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되었다.“남설아 지금 어디 있어?”배서준은 차갑게 비서에게 시선을 돌렸다.그러자 천기준은 급히 태블릿을 열어 위치를 확인했다.“지금... 제일병원에 있습니다.”“바로 제일병원으로 가지.”배서준은 더 이상 서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아이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조차 관심이 없었다.만약 그때 1억 2000만 원이 있었다면 배나은은 그렇게 빨리 떠
“그때 떠난 걸 평생 후회했어. 이제는 네 곁에 있고 싶다.”“설아야, 네가 아무 말도 안 해도 괜찮아. 하지만 제발 날 밀어내진 마.”강연찬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깊었다.과거에는 자존심이 강해 끝내 자신의 마음을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놓쳐야 했다.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감정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놓치지 않겠다고 그는 결심하고 있었다.강연찬의 진심 어린 말에, 아니면 어린 시절의 감정이 다시 떠올라서일까.남설아의 차가웠던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렸다.그녀는 이미 자신의 인생이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도 운명은 다시 한번 기회를 주듯 그를 눈앞에 데려다 놓았다.그때였다.“남설아, 애가 죽었는데 넌 아주 한가하구나. 벌써 새 남자랑 붙어?”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문 앞에 서 있는 건 배서준이었다.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한 채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바보가 아닌 이상 그 눈빛 속에 담긴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그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단숨에 깨부수며 냉소적으로 비웃었다.그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남설아의 심장을 파고들었다.순간 남설아는 숨이 멎을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그녀는 한 번쯤 상상해봤다.‘나은이가 세상을 떠난 걸 알면 서준 씨는 후회할까? 아니면 슬퍼할까?’하지만 그가 보여준 건 아무런 감정도 없는 냉정한 무관심뿐이었다.마치 죽은 아이가 그의 딸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나가요.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까.”배서준의 차가운 시선이 강연찬에게 향했다.그는 앉아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봤다.예전부터 학교에서 남설아와 천생연분이라 불리던 그녀의 대학 선배였다.지금 이렇게 둘이 같이 있는 것 자체가 거슬렸다.하지만 강연찬은 단 한 번도 배서준을 쳐다보지 않았고 그저 남설아를 바라볼 뿐이었다.곧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연찬은 그제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배서준을 신경 쓰지 않은
“애초에 네가 온갖 수단을 써서 얻은 아이잖아. 스스로 못난 탓에 건강한 아이 하나 제대로 낳지 못한 거지 나한테 화풀이할 이유가 어디 있어?”배서준은 고개를 살짝 돌렸지만 여전히 냉정했다. 오히려 남설아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네가 그때 어떻게 뻔뻔하게 내 침대에 올라왔는지 또 어떻게 교묘하게 나를 이용해서 이 아이를 낳았는지.”“아이를 그렇게 좋아한다면... 좋아. 다시 하나 만들어주면 되잖아.”그 말과 함께 배서준은 성큼 다가와 남설아의 턱을 움켜쥐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끔찍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러웠다.남설아는 상상조차 못 했다. 이토록 혐오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하여 온 힘을 다해 배서준을 거칠게 밀쳐냈다.“우린 이미 이혼했어요. 제발 자존심 좀 챙겨요!”배서준은 자신이 먼저 다가갔음에도 밀쳐질 거라곤 예상조차 못 했다.눈빛에 불쾌함이 번졌다.“남설아, 우린 아직 이혼 서류에 도장 안 찍었어. 법적으로는 여전히 부부라고. 그런데 왜 이렇게 새삼스럽게 순결한 척이야?”분명 원하는 게 이것이었을 텐데 막상 주면 거부하는 건 또 무슨 심리란 말인가.“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나은이가 당신 같은 아빠를 둔 게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일이에요. 꺼져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요!”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이 사람에게는 자신도, 배나은도 단 한 순간도 ‘인간’으로 여겨진 적이 없다는 것을.아니, 어쩌면 개 한 마리보다도 못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눈앞이 아득해졌다.하지만 한편으로 다행이었다. 배나은이 더 이상 이 더러운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남설아,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게 좋을 거야.”배서준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는 눈앞의 여자를 비웃듯 바라보았다.어차피 그는 남설아가 결국 돌아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기어 와서 날 즐겁게 해. 그러면 건강한 아이 하나 더 만들어줄게.”마치 은혜를 베푸는 듯한 태도였다.그 모습을 보자 남설아는
이건 노골적인 협박이었다.남설아는 배서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입 밖으로 낸 말은 반드시 실행하는 인간이었다.그렇기에 바로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서며 강연찬 앞을 가로막았다.“그만해요! 이 사람한테 손대지 마요!”“명령하는 거야? 남설아, 네가?”배서준이 비웃듯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이 여자가 자기 앞에서 다른 남자를 감싸고 도는 모습이 너무나도 거슬렸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배서준 씨, 우리 문제예요. 제발 다른 사람 끌어들이지 마요!”“우리 문제라는 거 알면 됐어.”배서준은 냉소를 지으며 강연찬과 남설아를 훑어보았다.날카로운 눈빛이 두 사람을 베듯 스쳐 가더니 그는 갑자기 강연찬의 어깨를 세게 밀치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남설아는 곧장 강연찬을 돌아보며 다급하게 말했다.“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선배가 위험해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난 저 사람 안 무서워.”강연찬이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그는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참이었다.하지만 외국에서 연구하며 여러 개의 특허를 획득했고 이미 자기만의 기반을 닦아놓은 상태였다.배서준이 원하는 걸 빼앗아 갈 수는 있어도 그가 가진 특허까지 뺏을 수는 없었다.“아니야, 선배. 배서준은 냉혈한이야. 자기 친자식조차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라고. 난... 선배를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그러니까 우린...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남설아는 고개를 떨구고 억지로 말을 내뱉었다.그러나 강연찬은 마치 듣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네 삼촌, 손가락 하나 잘리고 감옥에 갔어. 3, 5년은 못 나올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장례식장 쪽에서 연락이 왔어. 나은이 장례 일정 정해야 한다고. 날짜 정하면 내가 준비할게.”남설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단 하루, 단 하룻밤 잤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거지?’“선배,
“네.”남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해요. 이 일은 최대한 시끄럽게 만들어요. 배서준이 모두의 표적이 되도록 말이에요.”“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처리하겠습니다.”천기준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남설아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싸늘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배서준, 당신이 의리를 저버렸으니 나도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야.’곧이어 배서준이 리조트에서 서유라와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소문이 각종 언론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여론은 순식간에 들끓었고 배서준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무능하다’, ‘책임감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배서준, 진짜 너무하네!”“회사는 지금 무너지고 있는데 밖에서 여자나 만나고 앉았어?”“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표 자리에 앉혔는지 이해가 안 가.”“저 사람한테 회사를 맡긴 게 큰 실수였지.”“이참에 그냥 물러나게 해야 돼!”결국 회사는 긴급 주주총회를 소집했다.얼마 전, 배서준이 자신의 자금을 담보로 위기를 넘기겠다고 한 뒤 감쪽같이 사라졌고,오히려 남설아가 한발 물러나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간신히 버텨온 상황이었다.하지만 정작 의사결정을 할 실권자는 자리에 없고 남은 이사들은 완전한 권한도 없는 상태라 회사 운영은 갈수록 마비되어가고 있었다.거기에 이번 스캔들까지 터지자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이게 지금 어느 땐데 여자를 챙겨?! 본인 위치도 잊었나?!”“천 비서님, 배 대표님 떠나기 전에 천 비서님한텐 아무 말도 안 하고 갔어요?”천기준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사실 함께 일한 지 오래됐지만 배서준이 모든 걸 공유하진 않았다.“지금 당장 리조트로 가서 배 대표님 데려와요!”한 이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든 끌고 와야 해요. 회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네, 이사님. 바로 다녀오겠습니다.”천기준은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정신적으로 남 대표님한테 매일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두 사람을 만나러 내가 가야 한다고? 이게 대체 무
“서준아, 제발 이번만은 내 말 들어줘, 응? 그냥 나를 위해서 우리 미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잠깐이라도 푹 쉬면 안 돼?”서유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배서준을 올려다봤다.그 애처로운 눈빛에 배서준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렸다.“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결국 배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서유라는 곧장 환하게 웃으며 배서준을 꼭 껴안았다.“역시 나를 제일 아껴주는 사람은 서준이 너야.”배서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안아주었지만 눈빛은 복잡하기만 했다.회사의 상황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남설아와 송우민의 공격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고 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 중이었다.시장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고 내부는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대로라면 배건 그룹은 정말 그의 손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서유라의 모습을 보면 차마 그녀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배서준의 가슴속은 끝없는 갈등과 번민으로 뒤엉켰고 도대체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그때, 그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이번엔 천기준이었다.배서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천기준의 목소리엔 조급함과 절박함이 가득 묻어났다.“지금 회사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에요. 주주들도 다 대표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나, 나도 지금...”배서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서유라가 손을 뻗어 전화기를 낚아챘다.한편, 천기준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통화 종료’ 소리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그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리찍을 듯 내려놓으며 이를 악물었다.“이 서유라란 여자는 정말 재앙이라니까!”천기준은 이를 갈듯 말했다.“배 대표님도 왜 저 여자 말만 듣는 건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르나?”곁에 있던 다른 비서도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천 비서님,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요? 주주들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하죠?”“설명할 방법이 어딨어요...”천기준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
“네, 송 대표님!”모두가 힘찬 목소리로 외쳤고 회의실 안은 결의에 찬 열기로 가득 찼다.송우민의 지휘 아래 남설아의 회사는 굶주린 늑대처럼 배건 그룹의 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들어갔다.배건 그룹의 주가는 연일 하락했고 시가총액은 크게 줄어들며 내부 분위기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흩어진 조직력에 동요하는 임직원들 사이로 불만이 번졌고 결국 주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배서준에게 줄줄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배 대표님,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한 주주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회사 상황이 완전히 개판이에요! 더 늦으면 정말 끝장납니다!”“맞아요, 대표님! 이대로 가다간 정말 회복 불가능합니다!”또 다른 주주도 강하게 덧붙였다.“지금 당장 돌아와서 진두지휘하셔야 합니다!”끊임없이 쏟아지는 전화에 배서준은 머리를 싸매고 이마를 짚었다.그 역시 당장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문제는 서유라였다.그녀는 절대 그를 보내려 하지 않았다.“서준아, 가지 마...”서유라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배서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나 너무 힘들어. 옆에 있어 줘야 버틸 수 있어.”“유라야, 네가 힘든 거 알아. 하지만 회사도 지금...”배서준은 난처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몰라! 나한테 중요한 건 네가 곁에 있어 주는 거야! 너 없이 나는 단 하루도 못 버텨!”서유라는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그런 말 하지 마.”배서준은 가슴 아프다는 듯 그녀를 껴안았다.“널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지. 하지만 회사 쪽 상황도 정말 더는 미룰 수가 없어.”“결국 날 버릴 거지? 날 두고 가겠다는 거잖아!”서유라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말했다.“내 몸은 누가 챙겨? 나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해... 넌 가면 안 돼!”“유라야, 그러지 마.”결국 배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좋아, 당분간은 여기 있을게. 회사 일은 전화랑 화상회의로 처리할 테니까 괜찮지?”“진짜지?”서유라는 눈물로 젖은 눈을 들
“과거 일은 이제 그만 잊자.”배서준이 말했다.“우린 앞으로 나아가야 해.”“하지만 자꾸만 생각나.”서유라의 목소리엔 억울함과 미련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때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은 분명 나였을 거야. 설아 씨가 아니라.”“유라야...”배서준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말을 잇지 못했다.“예전엔 이런 생각도 했었어. 우리가 그때 헤어지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세상엔 만약 같은 건 없잖아. 놓쳐버린 건 그냥 놓쳐버린 거지.”“아니야, 우린 아직 끝난 게 아니야.”배서준이 갑자기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이렇게 다시 함께하고 있잖아.”“그렇지만 우리 사이엔 너무 많은 게 가로막고 있어.”서유라가 조용히 말했다.“너무 많은 사람과 일들이 있었잖아. 우리가 과연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왜 안 된다는 거야?”배서준은 반문했다.“우리가 서로를 여전히 사랑한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릴 막을 수 없어.”“하지만 설아 씨는...”서유라는 말을 흐렸다.“그 여자는 우리 사이를 막는 존재가 될 수 없어.”배서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모든 건 내가 처리할 테니까.”강연찬의 부상은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고 남설아는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병실을 지켰다.혹시 작은 이상이라도 생길까 눈을 떼지 못했다.다행히도 강연찬은 체력이 좋아 며칠간의 휴식 끝에 일상적인 활동이 가능해졌다.그날, 강연찬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아 문서를 들여다보며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그때 수프를 들고 방으로 들어온 남설아가 그의 얼굴을 보고 다가가 물었다.“선배, 무슨 일 있어? 회사에 문제 생겼어?”“배건 그룹의 재무제표에 좀 이상한 점이 보여.”강연찬은 문서를 남설아에게 건넸다.“여기, 그리고 여기. 명백한 허점이 있어.”남설아는 문서를 받아 들고 꼼꼼히 살펴봤다.볼수록 놀라움이 커졌다.이 허점들은 누가 의도적으로 만든 게 분명했고 금액 또한 심각할 정도로 컸다.배건 그룹이 휘청일 정도였
“그래서?”남설아가 물었다.“내가 생각한 건 그 양아치들이 숨어 있는 곳을 몰래 장악한 다음, 경찰에 익명으로 제보해서 전부 한꺼번에 잡히게 만드는 거야.”강연찬은 행동이 빨랐다.증거를 확보하자마자 곧장 경찰에 넘겼고 경찰은 즉시 출동해 그 일당을 전원 검거했다.조사 과정에서 경찰은 그들 계좌에 최근 거액의 입금 내역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경로를 추적한 끝에 그 돈이 서유라의 동생 서도현의 계좌에서 송금된 것임이 밝혀졌다.이 소식을 들은 모두가 충격을 받았고 송우민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서도현 그 멍청한 놈, 지난번 당한 걸로는 부족했나 보지. 이번엔 확실하게 값을 치르게 해주지.”그의 눈엔 분노가 타올랐다.지금이라도 당장 모든 걸 불태워버릴 듯한 기세였다.“우민아, 진정해.”남설아가 그의 손을 잡고 진정시키려 했다.“너 화난 거 나도 알아. 나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지금은 서유라와 정면으로 부딪힐 때가 아니야.”“하지만...”송우민이 뭔가 말하려는데 남설아가 먼저 말을 이었다.“네가 날 위해 복수하고 싶어 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배서준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배건 그룹을 장악하는 거야.”남설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하고 흔들림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수수의 복수를 할 수 있고 서유라와 서도현에게도 제대로 된 대가를 치르게 만들 수 있어.”“그럼 그 서도현이라는 놈은 그냥 이렇게 놔두자는 거야?”송우민은 여전히 쉽게 수긍하지 못한 표정이었다.“그럴 리 없지.”남설아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경찰에 맡길 거야. 법적으로 죗값을 받게 만들 거고 난 그 과정을 끝까지 지켜볼 거야.”남설아의 눈빛에 다시금 날이 섰다.“절대로 서도현이 빠져나가게 두지 않을 거야. 끝까지 추적할 거야. 반드시 법정에 세우고야 말 거라고.”“이게 지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이야.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 계획 전체를 망칠 순 없잖아.”“알겠어.”송우민은 마지못해 한숨을 쉬고 고
남설아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국수를 강연찬 앞에 놓아주고 그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천천히 먹어. 데일라.”부드럽게 건네는 말투는 꼭 다정한 아내 같았다.“응.”강연찬은 국수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설아야, 네가 끓인 국수 진짜 맛있다.”“맛있으면 더 먹어. 앞으로 매일 끓여줄게.”남설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지.”강연찬은 고개를 들어 남설아를 바라봤다. 눈빛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그럼 약속한 거다.”강연찬의 시선을 받자 남설아는 조금 부끄러워진 듯 고개를 숙이고 작게 말했다.“누가 선배랑 약속한대?”“하하하.”강연찬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넌 여전히 말과 마음이 다르다니까.”볼이 살짝 붉어지며 남설아는 강연찬을 째려보며 말했다.“국수나 어서 먹어. 이러다 식겠어.”“알겠어, 알겠어. 명령대로 하겠습니다.”강연찬은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이고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큼큼.”그때, 송우민이 일부러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둘 사이의 달달한 분위기를 깼다.“남설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남설아는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이미 천 비서님한테 비밀리에 연락해서 배서준이랑 서유라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했어.”“천 비서?”강연찬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그 사람 믿을 수 있는 거야?”“걱정 마, 선배.”남설아는 단호하게 말했다.“천 비서님은 예전엔 배서준 쪽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우리 편이에요. 본인이 뭘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어..”“그렇다면 다행이네.”강연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도 조심해야 해. 배서준은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니까.”“응.”남설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어.”“참, 남설아.”송우민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배서준이 서유라를 데리고 회사를 빠져나가서 어떤 프라이빗 리조트로 갔다고 해. 서유라 상태가 안 좋아져서 요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말했잖아요, 전 그런 일 한 적 없다고요!”강연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지금 이건 명백한 조작이에요!”“강연찬 씨, 진정하세요.”형사가 말했다.“저희는 절차에 따라 조사 중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전 제 변호사를 부르겠습니다.”강연찬은 단호하게 말했다.“변호사 도착 전까진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겠습니다.”강연찬의 강경한 태도에 경찰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그를 임시 유치장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남설아는 경찰서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불안감은 점점 커져갔다.혹시나 강연찬이 억울한 대우를 받고 있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대표님, 너무 걱정 마세요.”곁에 있던 천기준이 위로하듯 말했다.“강연찬 씨는 운도 따르는 분이잖아요. 분명 괜찮으실 겁니다.”“그랬으면 좋겠어요.”남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제발 큰 고통은 안 받았으면 좋겠어요.”그때, 송우민이 급히 걸어왔다.“남설아!”그가 말했다.“강연찬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 찾았어.”“정말?! 너무 잘됐네!”남설아는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어디 있어? 얼른 보여줘!”송우민은 준비해온 서류를 그녀에게 건넸다.문서를 받은 남설아는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이건...!”남설아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이게 바로 선배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야!”“맞아.”송우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 서류만 있으면 경찰에 정식으로 석방 요청할 수 있어.”“잘됐다!”남설아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지금 바로 가자.”그렇게 두 사람은 그 증거를 들고 사건을 담당한 형사를 찾아갔다.“형사님, 이게 강연찬 씨의 결백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남설아가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당장 풀어주세요.”형사는 서류를 받아 꼼꼼히 읽어보았다.하지만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이게 어떻게...”형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 자료 어디서 나신 겁니까?”
남설아는 꿈에도 몰랐다.배서준이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비열해질 줄은.무고한 강연찬을 덫에 빠뜨리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이걸 어쩌면 좋지...”남설아는 마치 불에 달궈진 솥 위의 개미처럼 초조하게 사무실 안을 서성였다.그녀는 누구보다도 강연찬의 성격을 잘 알았다.그런 사람이 기업 기밀을 유출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고 분명 배서준이 꾸민 계략이다.“대표님, 우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천기준이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강연찬 씨를 반드시 구해낼 수 있어요.”“대표님, 지금은 침착하셔야 해요.”천기준이 진정시키려 애썼다.“우선은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요.”남설아가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 송우민이 급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남설아! 강연찬 잡혀갔다고 들었어. 무슨 일이야?!”들어서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다 배서준 그 비열한 놈이 한 짓이야!”남설아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날 무너뜨리겠다고 선배까지 끌어들였어. 기업 기밀 유출 혐의로 덮어씌운 거야. 진짜 너무 뻔뻔하지 않아?!”“그 자식,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송우민도 참지 못하고 분노했다.“가자. 당장 경찰서로 가서 따져보자. 배서준 그 자식, 자기가 진짜 법 위에라도 있는 줄 아나 본데?”송우민은 말하자마자 남설아의 손을 잡고 나가려 했다.하지만 남설아는 걸음을 멈췄다.“잠깐만.”그녀가 조용히 말했다.“지금 당장 달려가는 건 좋지 않아. 그럼 배서준만 신나게 해주는 꼴이야.”“그럼 어쩌자는 거야?”송우민이 물었다.“강연찬이 억울하게 잡혀 있는데 그냥 보고만 있어?”“그럴 순 없지.”남설아는 단호하게 말했다.“하지만 우리 쪽에서 먼저 증거를 찾아야 해. 선배가 억울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증거라니... 어디서 그런 걸 찾는다는 건데?”송우민은 고개를 저었다.“배서준 그 여우가 얼마나 치밀한데.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을 거야.
“안 돼요!”남설아는 단호했다.“확실한 증거 없이는 누구도 선배 데려갈 수 없어요!”“설아 씨, 이거 지금 공무집행 방해하시는 겁니다!”간호사가 다급해졌다.“상관없어요!”남설아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증거 가져오기 전엔 누구든 손도 못 댈 거예요!”“설아야, 이러지 마.”강연찬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당기며 말했다.“잠깐 가서 설명하면 돼. 금방 끝날 거야.”하지만 남설아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그녀의 눈빛엔 여전히 깊은 불신과 걱정이 가득했다.“정말 괜찮아.”강연찬이 조용히 위로하듯 말했다.“여기서 기다려줘. 금방 돌아올게.”“선배”남설아가 뭔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강연찬이 먼저 말을 이었다.“말 들어.”그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나 믿어줘.”남설아는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응, 기다릴게. 꼭 돌아와.”그렇게 강연찬은 경찰과 함께 병실을 나섰고 남설아의 가슴엔 불안이 가득 밀려들었다.“배서준, 당신의 진짜 비열하고 더러운 짓을 끝까지 봐줄 줄 알았어?”남설아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곧장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천기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천 비서님, 누가 선배 뒤통수쳤는지 당장 찾아봐요.”남설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세세한 내막까지 다 밝혀야 해요.”“네, 대표님. 지금 바로 조사해보겠습니다.”천기준은 긴장한 목소리로 답했다.전화를 끊은 남설아의 눈빛은 분노로 불타올랐다.한편, 강연찬이 경찰에게 끌려간 이후 배씨 가문 쪽도 평온하지 않았다.서유라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된 것이다.그녀는 병상에 누운 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렸다.“서준아... 나 너무 힘들어...”서유라는 배서준의 손을 꼭 쥐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나... 나 정말 죽는 거 아니야?”“무슨 소리야!”배서준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절대 그렇게 안 놔둘 거니까.”“근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