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가 배서준이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남설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알았어요.”남설아는 담담하게 한마디만 하고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비서는 남설아의 냉정한 표정을 보며 섬뜩함을 느꼈다.그는 오랫동안 남설아 곁을 지켜왔지만 이렇게 차가운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응급실 불이 마침내 꺼졌다.의사가 마스크를 벗고 나와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앞에 서 있었다.“의사 선생님, 우리 아들 괜찮은 거죠?”윤화진이 달려가 의사의 팔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의사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환자는 중상을 입었고 머리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하지만요?”윤화진의 목소리가 떨렸다.“하지만 후유증이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확한 상태는 더 지켜봐야 합니다.”의사는 그렇게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윤화진은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천기준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배서준은 병상에 누워 있었다.머리에는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서준아! 내 아들아!”윤화진은 침대로 달려가 오열했다.서유라도 병실 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의식을 잃은 배서준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서준아, 제발 눈 좀 떠봐...”그녀는 배서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윤화진이 그녀를 세게 밀어냈다.서유라는 바닥에 넘어졌다.그녀는 더 이상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벽 구석에 주저앉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여기가... 어디지?”배서준이 흐릿한 목소리로 물었다.“서준아, 너 깨어났구나! 드디어 정신을 차렸어!”윤화진은 감격한 표정으로 침대 앞으로 달려갔다.배서준은 윤화진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엄마... 여기 왜 있어요?”“서준아, 너 교통사고 났던 거 기억 안 나?”윤화진이 말했다.“교통사고...?”배서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나... 내가 누굴 구하려다 그랬던 거 같은데...”그리고 곧 남설아가
그녀는 이번에는 반드시 남설아를 제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중간에 변수가 생겼다. 배서준이 남설아를 구하려고 나설 줄은 몰랐다.서유라는 보안요원들에게 둘러싸인 배서준을 보며 분노와 억울함으로 가득 찼다.“남설아, 왜 너는 죽지 않는 거야!”그녀는 쉰 목소리로 낮게 저주를 내뱉었다.곧 구급차와 경찰차가 현장에 도착했다.의료진은 다친 배서준을 신속하게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남설아는 한쪽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배서준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녀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더는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이 말이다.“대표님, 저희는...”비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남설아는 고개를 돌려 단호하게 말했다.“갑시다.”그녀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현장을 떠났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배서준의 생사는 이제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서유라는 경찰이 도착한 것을 보고 더더욱 당황했다.현장의 혼란을 틈타 조용히 차에서 빠져나와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병원, 응급실 앞.공기마저 얼어붙을 듯한 침묵 속 긴장감이 감돌았다.윤화진은 병원 복도를 끊임없이 오가며 굽 높은 구두 소리가 바닥에 울렸다.“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 우리 서준이... 아무 일 없겠지?”그녀는 두 손을 꽉 쥐었고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천기준은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게 다 남설아 그 여자 때문이야! 그년만 아니었어도 서준이가 다치진 않았을 거야!”윤화진은 걸음을 멈추고 천기준을 향해 고함쳤다.“천 비서는 늘 서준이 옆에 붙어 있었잖아! 왜 제대로 못 지킨 거야?”천기준은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며 말했다.“사모님, 일이 너무 갑작스러워서...”“변명은 필요 없어!”윤화진은 날카롭게 외치며 발걸음을 돌렸다.“난 당장 남설아한테 가서 따져야겠어. 그 여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그녀는 그대로 나가려 했지만, 천기준이 급히 그녀
차 안에서 선글라스를 낀 채 앉아 있던 서유라는 한껏 굳은 표정으로 앞서가는 차량 행렬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독기와 증오만 가득했다.서유라는 휴대폰을 들어 운전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쯤이야?”그녀의 목소리가 싸늘했다.휴대폰 너머에서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울렸다.“걱정 마세요,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곧 있으면 지정한 장소에 도착할 겁니다.”한편, 조수석에 앉은 비서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남설아를 살펴보다 힘겹게 입을 뗐다.“대표님, 방금 천 비서님께서 말씀드린 건데요...”남설아는 그의 말을 끊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어떤 위협이 오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차량 행렬은 이내 한적한 도로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양옆에서 키 큰 나무들이 햇빛을 가린 탓에 도로가 여느 때보다 음침해 보였다.그 순간, 뒤쪽에서 날카로운 엔진음이 들려왔다.검은색 세단 한 대가 미친 듯이 속도를 내며 남설아가 타고 있는 차를 향해 돌진해왔다.“쿵!”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려버렸다.남설아의 몸이 앞으로 확 쏠렸고, 순간적으로 앞 좌석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대표님!”비서가 깜짝 놀라 새하얘진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경호원들이 타고 있던 차가 재빨리 대응한 덕에 문제의 차량이 남설아를 공격하지는 못했다.하지만 그 차는 죽음을 불사하고 돌진하려는 듯 몇 번이고 더 들이받았다.남설아가 탄 차량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제든 제어를 잃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그때, 옆에서 또 다른 검은색 차 한 대가 날아오듯 끼어들었다. 마치 금방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빠르고 강하게 가해 차량을 들이받았다.“쿵!”또 한 번의 굉음이 울려 퍼지며 두 차가 충돌해 금속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가해 차량은 충돌로 인해 진행 방향이 뒤틀렸고, 남설아의 차로 향하던 궤도가 뒤틀려 도로 옆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끼이익!”날카로운 제동음이 다
천기준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떤 임원분들한테 연락을 드려야 할까요?”남설아는 잠시 고민에 빠지는가 싶더니 이내 낮게 대답했다.“배서준한테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는 분들 위주로 부탁해요. 특히 문영도 선생님은 꼭 만날 거예요.”“문영도 선생님은 제가 직접 찾아뵙죠.”천기준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어두운 방, 서유라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낮게 속삭이고 있었다.“내가 시킨 일, 다 이해한 거지?”휴대폰 너머로 낮게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유라 씨. 확실하게 처리할게요.”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싸늘하고 음산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걱정 마세요. 완벽한 사고로 위장해서 흔적 하나 안 남길 테니까요.”서유라는 전화를 끊고 한껏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독기 어린 눈빛으로 휴대폰 속 남설아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서유라의 얼굴은 이미 질투와 증오로 얼룩져 있었다.한편, 천기준은 업무 보고를 핑계 삼아 다시 남설아의 사무실로 들어왔다.그는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대표님, 요즘 회사 안팎으로 뒤숭숭한 것 같습니다. 외출하실 때 조심하세요.”남설아는 고개를 들어 천기준을 바라보며 예리한 목소리로 물었다.“뒤숭숭하다니요? 그게 무슨 뜻이죠?”천기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끝을 흐렸다.“별건 아닙니다. 그냥 요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보니... 혹시라도 무모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남설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천기준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조심할게요.”그녀가 더 캐묻지 않자 천기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은 업무 보고를 마치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천기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설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때, 강연찬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천 비서가 무슨 말이라도 했어?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남설아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별거 아니야. 그냥 요즘 조심하는 게
회의실 안은 숨 막힐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서유라는 배서준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성스레 화장을 하더니 저녁까지 따로 준비해 배서준의 사무실로 향했다.하지만 문 앞에 도착하자 배서준의 비서가 그녀를 막아섰다.“부대표님, 지금 대표님께서는 회의 준비 중이시라 뵙기 어렵습니다.”비서의 목소리가 차가웠다.서유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서준이한테 저녁 갖다 주러 온 거니까 비켜요. 안에서 기다릴게요.”“부대표님, 대표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비서 역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서유라는 분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애써 억눌러가며 이를 꽉 깨문 채 말했다.“난 배서준 여자친구예요. 지금 날 막겠다고요?”비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대표님의 지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서유라는 그 말에 굳은 얼굴로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문 앞에 선 그녀는 들어가지도,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저 초라하고 민망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결국, 서유라는 배서준을 만나지도 못하고 저녁 식사를 든 채 다시 허탈하게 사무실로 돌아와야 했다.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해서 참아왔던 눈물이 다시 쏟아져 나왔다.“남설아,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으면...”서유라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뿌리 깊은 원한이 서려 있었다.한편,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배서준은 책상 위에 놓인 저녁 식사를 보자마자 표정을 더 굳혔다.그는 식사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다음날, 서유라는 퉁퉁 부은 눈으로 회사에 출근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직원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거 들었어? 부대표님, 또 배 대표님한테 크게 혼났대.”“들었어. 이번엔 꽤 크게 혼났다던데. 지금 부대표 자리고 위험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더라.”“솔직히 자업자득 아니야? 설아 씨한테 잘못 걸렸잖아.”“맞긴 해, 설아 씨는 이제 배건
“서준아, 내 말 좀 들어 봐. 난 정말 몰랐어...”울먹임으로 가득한 서유라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했다.배서준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혐오감만 남은 눈빛으로 말했다.“꺼져.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그 말에 서유라는 충격받은 듯 몇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눈물은 수도꼭지라도 튼 듯 멈출 줄 모르고 흘렀다.반지는 분명 배서준의 사무실에 있었고, 그녀의 손가락에도 꼭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왜 남설아에게 줄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남설아, 분명 그 여자가 날 함정에 빠뜨린 거야.”서유라가 이를 악문 채 원망과 독기 어린 눈으로 중얼거렸다.그녀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사무실을 뛰쳐나갔다.배서준 역시 그녀의 초라하고도 힘없는 뒷모습을 지켜봤지만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동정심도 들어있지 않았다. 오직 혐오스러운 감정만 담긴 눈으로 서유라를 끝까지 바라보았다.그는 짜증 섞인 손길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천기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천 비서, 당장 이쪽으로 와.”낮고 차가운 배서준의 목소리는 딱 들어도 분노를 가까스로 참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곧장 사무실로 달려온 천기준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바닥을 발견하고 상황파악을 마쳤지만 여전히 공손한 표정으로 말했다.“부르셨어요, 대표님?”배서준은 비어 있는 서랍을 가리키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반지는 어디 있어? 이 반지가 왜 서유라 손에 들어가게 된 건지 제대로 설명해봐.”천기준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는 정말 모릅니다, 대표님. 반지를 서랍에 넣어둔 뒤로는 손도 안 댔거든요. 아마도... 사모님이 우연히 보고 가져간 것 같습니다.”“직접 와서 가져갔다고?”배서준이 차가운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내가 바보인 줄 알아? 서유라가 어떤 사람인지 천 비서도 알 거 아니야. 왜 멋대로 내 서랍을 뒤졌을 거라 생각해?”천기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변명했다.“정말이에요, 대표님.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