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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정담
편벽한 곳에 위치한 장서각 밖에서는 쓸쓸한 바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장작이 타면서 열기가 올라와 좀 더 후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선경이니?”

소문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갑자기 뛰어온 여인은 완전히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꽤나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 그래서 이게 헛된 꿈일까 봐, 두려웠다.

“말해!”

소문현은 점점 짜증이 치밀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하지만 한영은 사실을 고할 수 없었다. 여기서 사실을 고한다면 구족을 멸할 대죄였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온귀비를 보좌하며 황실의 비밀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는 그녀였다.

언젠가 우연히 온귀비를 따라 양심전에 갔다가 초상화 하나를 본 적이 있었다.

그날 처소로 돌아온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두려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의 맨얼굴은 초상화 속의 여인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조용히 지냈고 절대 황제 앞에서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황제의 눈에 든다면 절대 이 궁을 떠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약혼녀가 급발작으로 사망한 이후, 소문현은 꽤 긴 시간동안 슬픔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점차 바람둥이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영은 황제의 마음 속에 아직도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은 갖지 못하는 것을 더 열망하기 마련이고 황제도 결국에는 사람이었다.

현재 소문현은 많이 취한 상태였고 한영이 그렸던 모든 조건이 맞춰졌다.

한영은 오늘 황제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천 후궁을 거느린 황제라지만 황궁의 비빈들은 궁중법도의 틀에 갇혀 예의만 중시할 뿐이고 황제에게는 색다른 자극이 필요할 것이다.

한영은 도망치지 않고 황제의 품에 안겨 사내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제가… 당신이 찾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발 도와주세요!”

그녀는 가녀린 목소리로 유혹하듯 말했다.

“선경아, 선경아!”

소문현의 눈빛이 혼탁해지더니 신음을 내뱉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결국 그는 한영을 안고 내실로 들어갔다.

한영의 하얗고 긴 팔은 소문현의 건장한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런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난 이 지긋지긋한 황궁을 벗어날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어느새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도주한 것을 발견한 온귀비와 이 내관이 언제 이곳으로 찾아올지 기대가 되었다.

그녀는 이곳으로 오면서 수많은 흔적을 남겼다.

역시나 온귀비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두 시진 후, 장서각 밖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 내관의 앙칼진 목소리가 후끈 달아올랐던 방 안의 분위기를 깨뜨렸다.

이제 술이 조금 깬 소문현은 자신의 품에 안겨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인을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황당하군!’

분명 멋도 모르고 장서각에 잘못 발을 들인 궁녀일 텐데 그 궁녀를 밤새 품은 꼴이라니.

하지만 여인의 얼굴이 그녀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소문현은 손을 뻗어 한영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한영의 경직된 몸과 바짝 긴장한 얼굴은 사내의 보호욕구를 자극했다.

아니나다를까, 소문현의 눈빛이 점차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때마침 바깥의 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려왔다.

“귀비 마마, 한영 그것이 아마 안에 있을 겁니다! 애들 말을 들어보니 사내의 소리도 들렸다네요!”

온귀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궁의 법도를 어지럽혔으니 이는 죽을 죄에 해당한다! 내 심복일지라도 예외는 없어! 여봐라! 수색을 시작하거라!”

누군가가 장서각의 문을 발로 차고 안으로 들어왔다.

온귀비는 음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이런 변수가 생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한영을 감시하라고 보낸 은지는 돌에 맞아 죽고 시신은 바위 뒤에서 발견되었다.

한영의 부모와 동생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내관이 화가 많이 났다는 점이었다.

온귀비는 그제야 한영이 뭔가를 눈치채고 도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거나 더 이상의 변수를 막기 위해서는 한영을 잡아 제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잡아서 이 내관에게 노리개로 보낸다면 어쩌면 틀어진 계획을 정상궤도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온귀비와 이 내관은 바깥에 호위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성큼성큼 내실로 들어왔다.

칸막이를 돌아서는 순간, 청자기 하나가 날아가더니 온귀비의 머리를 스치고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무엄하다!”

급기야 두루마리를 걸친 소문현이 싸늘한 눈빛을 하고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온귀비는 소문현을 본 순간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폐… 폐하! 무례를 사하여 주십시오! 신첩은 단지….”

온귀비는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횡설수설했다.

‘폐하가 왜 장서각에 계신 거지?’

이 내관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

소문현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짐이 있는 곳을 수색하러 들어오다니!”

“폐하….”

온귀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신첩이 데리고 있던 한영이가… 오늘 출궁하는 날인데 이곳에서 사내와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러던 그녀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온귀비는 고개를 번쩍 들고 경악한 눈으로 안쪽을 바라보았다.

“한영이? 너 여기서 뭐 하니?”

온귀비는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라 자신의 무례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영은 다급히 소문현의 뒤로 숨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겁에 질린 얼굴로 온귀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입꼬리는 비스듬히 올라가 있었다.

“너 당장 안 내려와? 어디 감히 폐하의 침상에!”

온귀비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이건 그녀가 바라던 상황이 아니었다.

‘왜? 왜 이렇게 된 거지?’

“이 천한 것이 감히 폐하의 침상에 기어올라가?”

온귀비는 소문현의 뒤에 숨어서 도발의 미소를 짓는 한영을 보자 완전히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녀는 지금 당장 한영을 저 침상에서 끌어내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지금의 온귀비는 더 이상 소문현 신변의 사려 깊고 말이 잘 통하는 말동무가 아니라, 질투에 눈이 먼 광년이가 되어 버렸다.

짝!

소문현이 온귀비의 뺨을 때렸다. 얼마나 힘을 세게 줬는지 찰진 소리가 났다.

온귀비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한영을 노려보았다.

‘저년 저런 얼굴을 숨기고 있었어? 평소에는 그리 얌전을 떨더니, 나마저 속인 거였어!’

“한영이?”

소문현은 묘한 눈빛으로 등 뒤의 한영을 바라보았다.

“귀비 신변의 사람이었구나?”

한영은 다급히 침상을 내려 소문현에게 큰절을 올렸다.

“폐하, 소인은 방금 작별 연회에 갔다가 술을 조금 마셨는데 취해서 그만 폐하께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소문현은 수려한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방금 전 뜨거웠던 장면들이 떠오르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온희정이 막무가내로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재미를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온귀비가 괘씸하기도 했다.

“일어나거라. 너는 짐의 승은을 입었으니 자연히 너에게 명분을 줄 것이다. 상궁 한영을 영귀인으로 봉한다!”

“뭐라고요?”

온귀비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황제의 시침을 든 궁녀라 할지라도 워낙 신분이 비천한지라 품계를 두 계급이나 건너뛰고 귀인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한영 네가 무슨 자격으로?’

왕년에 온희정은 품계가 가장 낮은 답응에서 귀인으로 책봉되기까지 장장 5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한영은 단 한번의 시침으로 귀인의 자리에 올랐으니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한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도박수의 승자는 당연하게도 그녀였다.

그녀는 재빨리 큰절을 올리며 감사를 표하려 했지만, 소문현이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폐하, 그건 아니 될 소리입니다!”

온귀비는 다급한 마음에 다가가서 소문현의 옷자락을 잡았다.

소문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평소에는 가장 사려 깊고 온순하며 말이 잘 통하던 온귀비인데 오늘따라 얄미운 행동만 골라하고 있었다.

온귀비는 소문현의 앞에 무릎을 꿇고 다급히 말했다.

“제발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폐하! 한영은 폐하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소문현은 황당해서 웃음만 나왔다.

“짐이 자격을 주었다면 그것만으로 이 아이는 자격을 갖춘 것이야!”

“폐하!”

온귀비는 그럴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저 아이는 이 내관과 몸을 섞었던 사이입니다! 이 일이 외부로 전해진다면 폐하만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소문현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

한영도 가슴이 철렁해서 온귀비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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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지금 총애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살 길을 찾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얘기를 홍이에게 한들, 알아들을 리 없었다.한영은 고집스럽고 과묵한 홍이가 예전의 자신을 너무 닮아서 안쓰러웠다.그래서 자신을 구원한답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홍아, 궁을 나가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문 앞까지 간 홍이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작은 소리로 답했다.“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영빈 마마.”말을 마친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한영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돌려 편전으로 돌아갔다.란심은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며 조용히 물었다.“마마, 홍이 걔가 또 뭐라고 했기에 기분이 이리도 저조하십니까?”“소인 지금 당장 가서 따져야겠어요. 마마가 걔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온귀비가 득세했다고 은인도 몰라본답니까?”“돌아와!”한영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거울 속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얼굴은 그녀마저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변해 있었다.“성주에게 말해서 뭐 좀 알아볼 게 있다고 전해.”“무슨 일인데요?”란심이 다급히 물었다.한영은 창문을 통해 내전 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작게 말했다.“홍이의 어머니에 대해 좀 알아봐.”“예.”란심은 밖으로 나가 성주를 찾았다.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부러운 눈을 하고 내전을 바라보는 금희의 모습이 보였다.란심은 미간을 확 찌푸렸고 소리를 듣고 뒤돌아선 금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란심 언니,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세요?”란심은 잠깐 스친 의심을 거두고 답했다.“마마의 심부름하러 가. 넌 주방에 가서 보신탕이 다 끓었는지 보고 오렴. 너무 오래 끓이면 맛없어.”“예, 지금 가요.”금희는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주방 쪽으로 갔다. 그녀는 질투심을 넘어 증오가 치솟았다.란심과 성주, 그리고 금희까지 셋은 모두 온실에서 궂은일을 하던 하등 궁인들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란심과 성주는 영빈의 눈에 들어 지금은 신변 시중을 들게 되었다.‘대체 내가

  • 궁녀의 역습   제24화

    “닥쳐!”온희정은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한영을 응시했다.2년 전 그 아이는 금기어였다.그 순간 한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예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추측이었다. ‘2년 전 그 아이의 죽음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온희정이 손귀비와 손을 잡은 이유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이지, 그 아이의 죽음을 영원히 덮어버리기 위한 것일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온희정은 죽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내기 싫어했다.‘사산… 사산이라….’한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온희정을 바라보았다.온희정은 그 눈빛이 사냥감을 쫓는 늑대의 눈빛처럼 느껴졌다.잠시 감정을 추스른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나를 배신한 비천한 시종이야. 난 절대 널 살려두지 않을 거야!”한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것 참 유감이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한영은 천천히 뒤로 물러선 후, 예를 행하고 밖으로 나갔다.안에서 물건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그 성격 못 고쳤네. 이 정도로 저리 화를 내다니.”그녀는 고개를 들고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춥고 텁텁한 겨울 날씨는 사람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들었다. 굳이 한 명이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라면 싸늘한 겨울날이 제격인 것 같았다.한영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나무상자를 들고 들어오는 홍이와 마주쳤다.홍이는 그녀를 알아보고 다급히 예를 행했다.한영은 그런 홍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홍아, 내 기억이 맞는다면 네 어머니가 남강의 노비 출신이었지?”홍이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한영은 계속해서 말했다.“남강에는 여인이 단기간에 용모나 체형을 바꿀 수 있는 비술이 있다지?”그러자 홍이가 바짝 긴장하더니 상자를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선제인 성조 황제는 한 궁녀에 의해 저주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

  • 궁녀의 역습   제23화

    젊은 황제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온희정의 턱을 잡았다.“너도 짐의 양심전에 지금 묵고 있지 않느냐?”소문현은 상공을 찬란하게 수놓은 불꽃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불꽃놀이는 참으로 오랜만이구나.”“폐하!”온희정은 다급히 황제를 불렀다. 어렵게 승은을 입었는데 열기가 이리도 빨리 식고 있으니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소문현은 옷가지를 걸치며 그녀에게 말했다.“짐은 영빈에게 가봐야겠다. 그 녀석 못하는 게 없어. 짐의 양심전을 불태우기 전에 가서 말려야겠으니 넌 이만 경화궁으로 돌아가거라.”온희정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이 내관은 온희정과 함께 양심전을 나섰다. 멀리서 소문현이 한영과 함께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장난치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온희정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네년은 곧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다음 날, 온희정이 다시 경화궁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후궁 전체에 퍼졌다.각 궁의 비빈들은 분분히 선물을 보내왔다. 왕황후는 친히 오지는 않았지만 사람 키만한 산호를 보내왔다.온귀비가 다시 경화궁의 주인이 되었으니 경화궁에 주거하는 비빈으로서 한영은 편전에만 숨어 있을 수 없었다.한영은 조용히 앉아 싸늘한 표정으로 손귀비와 온희정의 담화를 듣고 있었다.손귀비는 옆에서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는 한영을 힐끗 보고는 웃으며 온희정의 손을 잡았다.“돌아온 걸 축하하네. 아무리 다른 애가 총애를 받고 있었다 해도 한낱 폐하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지.”한영은 말없이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 손귀비는 침착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다.“영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한영은 웃으며 답했다.“귀비 마마든 아니면 다른 비빈들이든 저희는 모두 폐하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온귀비께서는 공들인 화접무로 폐하를 기쁘게 해드렸으니 저희 후궁들도 본보기로 삼아야지요.”손귀비는 굳은 표정으로 잡고 있던 온희정의 손을 놓았다.한영의 한마디로 손귀비에게

  • 궁녀의 역습   제22화

    양심전은 후끈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온희정은 소문현의 품에 안겨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러느냐, 희정아.”소문현은 온희정을 품에 안으며 물었다.온희정은 눈물을 닦고는 웃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기뻐서요. 폐하께서 신첩을 용서해 주시고 화를 풀어주셔서 너무 기뻐서요.”“신첩,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말을 마친 온희정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소문현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짐의 귀비는 그동안 철이 많이 든 모양이구나.”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맞춤하려다가 퍼렇게 부은 손가락을 보고 동작을 멈추었다.동상을 입은 가녀린 손가락에 그의 손길이 닿자 온희정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소문현이 당황하며 그녀에게 물었다.“이게 어찌 된 일이지?”온희정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폐하, 별일 아닙니다. 신첩은 동사서에서 추위에 좀 떨어도 괜찮습니다. 폐하만 신첩의 죄를 사하여 주시면 신첩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추위에 떨어?”소문현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동사서가 다른 비빈들이 사는 궁전보다는 못하더라도 냉궁은 아니었다. 냉궁이라 하더라도 후궁의 비빈들이 동상을 입을 정도로 보급이 형편없지는 않았다.“이 내관!”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 내관이 안으로 들어오자 소문현은 싸늘한 어조로 분부했다.“할 일도 제대로 안 하는 동사서의 쓸모없는 노비들을 모두 처형시켜!”“예!”지시를 받은 이 내관은 조용히 물러갔다.온희정의 눈빛에 통쾌함이 스쳤다. 그녀가 동사서로 간 이후로 권세만 따르는 궁인들은 모두 온희정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들은 그녀에게 먹다 남은 밥을 주는 것은 물론, 목탄도 최소한으로 보급했다.소문현은 안쓰러운 얼굴로 온희정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내일부터는 동사서로 돌아갈 필요 없어.”온희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소문현은 웃으며 농을 걸었다.“왜? 동사서에서 나와 짐의 곁에 있는 게 싫으냐?”온희정은 기죽은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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