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한영은 온귀비의 심복이었다. 그녀는 냉궁 신세였던 온답응을 보좌하여 갖은 고생을 겪으며 귀비의 자리까지 올렸다. 그렇게 10년이 지나 출궁할 나이가 되었고 그녀는 이제 가족들과 상봉하여 평온한 삶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믿었던 온귀비는 그녀의 가족들을 몰살하고 그녀에게 약을 먹여 내관의 노리개로 보냈다. 회한을 안고 회귀한 한영은 귀비가 주는 약을 마시고 황실 서고의 문을 열었다. 어차피 사내와 밤을 보내야 한다면, 가장 존귀한 이를 택하겠다.
view more한영은 란심과 함께 경화궁 편전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황제는 매일 경화궁에 왔지만 온희정을 보러 내전으로 갔다.좋은 점이라면 그녀는 조용히 자기 시간을 보낼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한영은 열쇠를 성주에게 맡겨 정 부인의 심복의 손에 전하도록 했다.성주도 근래 한영의 권세를 빌어 적지 않은 인맥을 만들었다.그는 경화궁에서 한영의 시중을 드는 것 외에도 온실 일도 맡아서 하고 있었다.황궁의 내시들은 일정 시간이 되면 물자를 구매하러 황궁을 나가게 되어 있다. 한 달에 한 번 비료를 사러 출궁했는데 지금이 월초라 출궁하기에 적당한 시기였다.한영은 성주에게 주의점을 알려준 후에 란심에게 향을 피우게 하고 책상 앞에 마주앉았다.그동안 그녀는 열심히 조명순의 글을 연습하고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서툴렀지만 그럴수록 더욱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도 듣지 못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에야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놀랄 것 없어. 짐이다.”귓가에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고 용연향의 진한 향기가 주변을 감쌌다.소문현은 한영의 손을 잡고 한지에 획을 그으며 말했다.“이 글은 이렇게 써야 더 힘이 있어 보이고 보기 좋아.”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귓가에 전해졌다.한영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소문현은 한영의 이런 순수한 모습이 좋았다.목탄을 태우고 있어서 방 안 분위기는 아주 후끈후끈했다.한영은 얇은 흰색 소복만 입고 있어서 영롱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소문현은 그녀의 목덜미에 코끝을 대고 향을 맡으며 낮게 말했다.“참으로 향기롭구나. 뭘 발랐기에 이리도 향기로울까?”“폐하!”불편함을 느낀 한영은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뺐다.지난번 연회에서 소문현이 온희정의 손을 잡고 연회장을 나간 이후로 사람들은 한영을 비웃었다.하지만 황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의도 없이 온희정을 다시 경화궁 주인의 자리로 복귀시키고 예전 얘기는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제가 이걸 알 수 있었던 것은 왕빈과 온희정이 절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온희정 신변의 개가 아닙니까. 당연히 사전 조사를 해야 했지요.”한영은 순비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제가 아는 사실만 말했을 뿐입니다. 다른 건 마마께서 스스로 알아보세요. 아주 황당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순비는 손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그리고 한영을 노려보며 그녀에게 물었다.“넌 뭘 하고자 하는 거지?”한영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마마의 복수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마마를 냉궁에서 나와 원래의 자리로 복귀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저와 거래를 하는 게 어떠십니까?”순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지?”한영은 순비처럼 통쾌한 여자가 좋았다. 과거 그녀가 온희정을 위해 냉궁 탈출 작전을 짜고 온희정을 순비의 곁으로 보낸 사람이 한영이었다.그러니 이 여인의 복수를 돕고 싶었다.그게 자신을 돕는 길이기도 했다.한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은화가 필요합니다. 아주 많이요!”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정 부인은 강남 수로를 개통하신 분이고 동해 해운 무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셨지요. 강호의 사람들마저 존중하며 부인이라고 따르던 분이셨으니 분명 자신의 사람을 남기셨을 겁니다.”“다만 마마는 궁 안에, 그들은 밖에 있고 모두가 마마께서 황자를 시해하여 어머니까지 피 말려 죽였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사람들이 마마에게서 등을 돌린 거지요.”“저는 마마가 지니고 다니던 물건이 필요합니다. 어머님의 심복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도움을 요청할 것입니다. 저는 궁녀라 돈도 없고 신변에 믿을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온희정을 죽이려면 마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순비는 싸늘한 목소리로 비꼬듯 말했다.“공짜로 다 달라는 말이구나!”한영이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마마는 제 제안을 받아주실 거잖습니까.”순비는 뭔가 허점이라도 찾으려는 듯,
“지금… 뭐라고 했느냐?”그렇게 묻는 순비의 눈시울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포대기에 싸인 그 아이를 처음 봤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이가 참 순해서 울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잠시 후, 산파가 아이를 안고 소문현에게 보여주더니 순비가 황자를 질식시켜 죽였다고 고하고는 기둥에 머리를 박고 자결했다.온희정은 울다가 쓰러졌고 아이의 목에는 사람의 손가락 자국이 확인되었다. 완벽하게 앞뒤 상황이 맞아떨어졌고 순비는 원래대로라면 사형감이었다.소문현은 당장에서 검을 빼들고 순비를 죽이려 했지만 순비의 심복인 최 상궁이 그 칼을 받아내고 즉사하면서 상황이 일단락되었다.농후한 피 냄새에 소문현은 그제야 이성을 되찾았다. 2년 전은 만이족이 변방을 침공하고 있을 때였다. 전방의 전사들에게 겨울옷과 보급을 지원하는 사람이 정 부인이었다.소문현은 채찍으로 정여울을 한바탕 때린 후, 그녀의 다리를 분질러서 다시는 춤을 못 추게 하고 냉궁으로 보냈다.다리를 다친 순비는 냉궁에서 통증을 참으면서 괴이한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게 어언 730일이 지났다.그런데 한영은 그녀에게 사실 그녀는 가장 무고한 피해자였다고 말해주고 있었다.순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나는… 난….”한영은 계속해서 차를 따르며 그녀에게 물었다.“2년이나 지났는데 가족들에게서 소식을 보내온 적은 있나요?”순간 순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가슴을 부여잡았다.한영은 경외심을 담은 얼굴로 찻잔을 공손히 들어 바닥에 뿌렸다.“이 잔은 마마의 어머님께 바칩니다. 정 부인은 여호걸이셨어요. 2년 전 만이족 침공 때 어머니께서는 직접 보급 물자를 가지고 변방으로 나가셔서 전장 병사들의 곤경을 해결해 주셨지요.”“정씨 가문이 오늘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님 덕분이 아니라 어머님의 뛰어난 능력 덕분입니다.”“안타깝게도 어머님은 사람을 잘못 고르셨어요. 모든 것을 아버님에게 믿고 맡기셨지요. 마마께서 궁에서 변을 당한 후에 어머님께서는 최선을 다해 마마를
황제는 상단 수장인 정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가끔 완빈의 처소로 가서 머물렀다. 정씨 가문은 돈이 부족한 집안이 아니기에 완빈은 궁에서 꽤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온희정과 꽤 친한 편이었다.과거 순비를 지옥으로 떨어뜨린 사람은 온희정이었다.온희정은 복중 황자의 목숨을 갖고 판을 설계했고 순비는 역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소문현은 후대와 인연이 없는 모양이었다. 즉위한지 10년이 되도록 덕비의 소생인 장공주를 제외하고는 왕황후의 황자가 사산하였고 온희정이 순비가 목을 비틀어 죽였다고 지목한 황자까지 합하면 현재 살아 있는 황자가 없었다.그리하여 어떤 잘못이든 용서받을 가능성이 있지만 유독 황자에 관련된 사건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었다.순비는 그렇게 냉궁으로 보내졌다. 사형을 당하지 않은 이유는 정씨 가문이 대제의 반 가까이 되는 자금 흐름을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순비는 너무 솔직해서 가끔 말실수도 하긴 했지만 꽤나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기에 소문현도 그녀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애초에 온희정은 순비의 자태를 모방하여 황제의 눈에 들게 된 것이었다.한영은 온희정 냉궁 탈출 작전의 첫 번째로 순비와 친구가 되는 것을 제안하고 순비처럼 솔직하고 사랑스러운 방향으로 밀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한영이 회상에 잠긴 사이, 뒤돌아선 순비는 초췌한 얼굴로 한영을 바라보았다. 너무 야위어서 관절마디도 다 변형한 상태였지만 그녀는 아픔을 참으며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여인곡을 추었다.과거 그녀는 이 여인곡으로 소문현의 눈에 들어 소양궁에 거주하게 되었다.그런데 지금은 모든 게 허상 같았다.순비는 한영을 빤히 노려보다가 싸늘한 웃음을 터뜨렸다.“누군가 했더니, 온희정의 개잖아? 너도 승은을 입었다지?”한영은 반박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가 상자를 열고 다기를 순비의 앞에 꺼내놓았다.순비는 잠시 당황하나 싶더니 냉소를 지었다.“온희정이 나 비웃으라고 너를 보냈어? 재수 없는 기운이라도 달고 돌아가면 어쩌려고?”
후궁의 최남단에 위치한 냉궁은 태화호 서남방향에 있었다. 주변이 황폐한 수림으로 둘러싸이고 수림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면 폐허를 연상케 하는 궁전이 하나 있었다.굳게 닫힌 대문 밖에는 두 시위가 세상 따분한 얼굴을 하고 지키고 있었다.이 안에 사는 사람은 선조 때를 포함해서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후궁들이었다.그들은 평생 궁을 나갈 수 없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곳에 갇혀 빛도 희망도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대문을 지키는 시위는 황실 수비군들이었다.이곳은 사람들에게 잊힌 외딴섬과도 같았다. 아무도 들르지 않고 재수 없다고 지나가던 길도 피해 가는 게 일반적이었다.허름한 옷을 입은 두 시위는 하품을 연신 해댔다. 냉궁에서 당직을 서다보니 콩고물이 떨어질 곳도 없었다.안에 사는 사람들은 미쳤거나 멀쩡하더라도 이미 총애를 잃은 비빈들이라 뒤져도 동전 하나 나오지 않았다.한영은 얼굴을 꽁꽁 가린 채, 냉궁 밖에 서서 란심에게 당부했다.곧이어 란심은 은화 주머니를 들고 두 시위에게 다가갔다.잠시 후, 시위들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한영에게 예를 행했다. 한영은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망토를 여미며 냉궁 안으로 들어갔다.“마마, 조심하세요!”란심은 한영의 측면에서 달려드는 미친 여자들의 공격을 막아주었다.앞장선 시위는 달려드는 늙은 비빈을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좀 조용히 있어! 또 맞고 싶어?”칠순은 넘어 보이는 그 늙은 비빈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선제 때 죄를 지어 이곳으로 오게 된 사람인데 시위에게 차이고도 허허 웃으며 바닥에 엎드리더니 몸을 기어다니는 이를 잡아 입안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한영은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그녀는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한때 온희정과 함께 이곳에 살았던 3개월을 떠올렸다. 그때는 3개월이 30년처럼 느껴졌었다.그녀는 길게 심호흡하고 역겨움을 참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시위는 공손히 그녀를 안내했다.“마마, 이쪽으로 가시지요.”한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외진 곳에 있는 한 정원으로 들어섰
그녀는 지금 총애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살 길을 찾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얘기를 홍이에게 한들, 알아들을 리 없었다.한영은 고집스럽고 과묵한 홍이가 예전의 자신을 너무 닮아서 안쓰러웠다.그래서 자신을 구원한답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홍아, 궁을 나가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문 앞까지 간 홍이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작은 소리로 답했다.“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영빈 마마.”말을 마친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한영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돌려 편전으로 돌아갔다.란심은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며 조용히 물었다.“마마, 홍이 걔가 또 뭐라고 했기에 기분이 이리도 저조하십니까?”“소인 지금 당장 가서 따져야겠어요. 마마가 걔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온귀비가 득세했다고 은인도 몰라본답니까?”“돌아와!”한영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거울 속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얼굴은 그녀마저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변해 있었다.“성주에게 말해서 뭐 좀 알아볼 게 있다고 전해.”“무슨 일인데요?”란심이 다급히 물었다.한영은 창문을 통해 내전 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작게 말했다.“홍이의 어머니에 대해 좀 알아봐.”“예.”란심은 밖으로 나가 성주를 찾았다.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부러운 눈을 하고 내전을 바라보는 금희의 모습이 보였다.란심은 미간을 확 찌푸렸고 소리를 듣고 뒤돌아선 금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란심 언니,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세요?”란심은 잠깐 스친 의심을 거두고 답했다.“마마의 심부름하러 가. 넌 주방에 가서 보신탕이 다 끓었는지 보고 오렴. 너무 오래 끓이면 맛없어.”“예, 지금 가요.”금희는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주방 쪽으로 갔다. 그녀는 질투심을 넘어 증오가 치솟았다.란심과 성주, 그리고 금희까지 셋은 모두 온실에서 궂은일을 하던 하등 궁인들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란심과 성주는 영빈의 눈에 들어 지금은 신변 시중을 들게 되었다.‘대체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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