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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정담
한영이 술잔을 비우자 그제야 온귀비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귀비가 옆에 있던 궁녀에게 눈짓을 하자 궁녀가 다가와 한영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상궁 마마, 시간도 늦었으니 제가 대궐 밖까지 모시겠습니다.”

한영은 온귀비에 큰절을 올리며 작별인사를 한 뒤에 귀비의 심복인 은지를 다라 경화궁을 나섰다.

복도 모퉁이를 지나자, 한영은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상궁 마마, 왜 그러십니까?”

은지가 다급히 물었다.

“내 비녀가 안 보이는데? 혹시 오다가 떨어진 것 아니야? 난 이쪽을 찾아볼 테니 은지 넌 저쪽으로 가서 좀 찾아보렴.”

한영이 사방을 둘러보며 다급히 말하자 은지도 덩달아 비녀를 찾기 시작했다.

귀비의 지시는 이 내관의 사람이 태화 연못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한영을 그곳까지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은지는 시끄러운 일을 만들기 싫어 한영이 하자는 대로 따라주었다.

한편, 한영은 몰래 큰 돌멩이를 하나 챙겼다.

은지는 조급한 마음에 다급히 말했다.

“상궁 마마, 이곳에 떨어뜨린 게 확실한가요? 왜 아무리 찾아도….”

탁!

은지는 경직된 자세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온화하고 단정하던 한 상궁이었는데 마치 지옥에서 돌아온 악귀의 얼굴을 하고 등 뒤에 서 있었다.

뜨거운 피가 은지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은지는 말도 못하고 입만 뻐금거리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한영은 처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희가 날 내보내주지 않겠다면 칼춤을 시작하지. 너부터 시작이야!”

그녀는 피 묻은 돌덩이를 풀밭에 버리고 은지를 거대한 바위 옆으로 끌고가서 숨긴 후에 재빨리 경화궁으로 돌아갔다.

사람을 잡아먹는 궁궐을 더 이상 나갈 수 없다면 그녀는 이곳에 남기로 했다.

‘온희정, 내가 다시 돌아올 줄은 절대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오늘은 나이가 찬 궁녀들이 궁을 떠나는 날이었다. 대제는 매년 이날이 되면 나이 든 궁녀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출궁하기 전에는 작별연회를 베풀어서 사방이 어수선하니 한영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최음제의 약효가 점점 올라오고 있었다. 한영이 빠르게 움직이는 바람에 약효는 더 빨리 퍼지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통증을 빌어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한영은 경화궁의 화원으로 들어가서 몸을 숨겼다. 이곳 경화궁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곳이었다. 오고 가는 나인들이 그녀를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상궁의 신분을 가진 그녀에게 차마 이유를 묻지 못하고 공손히 길을 비켜주었다.

한영은 온실에서 꽃을 가꾸고 있는 어린 내관 성주를 찾았다.

예전에 한영 덕분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기에 이 중요한 시기에 해볼만한 도박이었다.

“상궁 마마!”

성주는 다급히 일어나며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출궁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한영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가진 재물을 모두 성주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일단 내 말만 들어. 너에게 부탁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

겁에 질린 성주는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였다.

한영은 자신의 신분패를 그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이건 내가 출궁할 때 쓰던 신분패야. 첫 번째로 넌 지금 당장 궁을 나가 동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내 부모님에게 어디 숨을 곳을 찾아 피신하라고 전해.”

“고향으로 돌아가시면 안 돼. 꼭 내가 먼저 찾아갈 때까지 안전한 곳에 숨어 있으라고 해. 이 재물들은 내가 너에게 주는 보수야. 이걸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 병든 어머니의 치료비로 써도 돼. 이 일은 절대 귀비 마마께 알려져서는 안 돼!”

성주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한영은 손을 뻗어 성주의 옷을 벗겼다.

“상궁 마마?”

놀란 성주가 비명을 질렀다.

한영의 몸은 점점 통제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네 옷 한 벌만 빌려줘. 넌 돌아가서 새로 갈아입고. 내가 입고 있던 옷은 돌과 묶어서 태화 연못에 버려.”

“성주야.”

한영은 절박한 표정으로 성주에게 말했다.

“만약 이 일이 들통나면 너와 나 둘 다 죽은 목숨이야.”

성주는 겁이 났지만 생명의 은인인 한영의 부탁을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성격이 나약하고 순진한 그는 한때 이 내관의 눈 밖에 나서 맞아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만약 한영이 나서서 그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도 없었다.

한영은 자신의 옷을 벗고 내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온실 옆에 있는 연못으로 가서 찬물로 얼굴의 화장을 깨끗이 씻었다.

평소에 수수했던 얼굴과는 달리 경국지색의 수려한 얼굴이 물에 비춰졌다.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 멍하니 매만졌다.

한영은 본디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태어난 여인이었다. 미인이 넘쳐나는 이곳 황궁에서도 미모로 그녀를 따라올 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녀는 가면으로 수려한 얼굴을 가리고 10년을 살았다. 긴장감에 하루도 편히 쉰 날이 없었다. 그녀의 목적은 단 하나, 나이가 차서 출궁하는 것이었다.

한영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그녀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성주를 뒤로하고 온실을 떠나 곧장 어화원에 있는 장서각으로 향했다.

그녀는 편벽한 장서각 밖에 서서 창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장서각 안에는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한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한발 한발 장서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매월 월초가 되면 경풍제 소문현은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한영은 자신이 성공할 수 있을지, 아니면 황제의 분노를 자아내서 목이 날아갈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든 늙은 내관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촛불과 가까워질수록 한영의 눈빛은 강인함으로 번뜩였다.

‘온희정, 나를 궁밖으로 내보내주지 않은 것이 평생의 후회로 남게 만들어주마.’

늙은 이태복에게 끌려가서 노리개로 사느니, 가장 존귀한 사내에게 도박수를 두고 싶었다.

‘온희정, 그렇게도 날 곁에 잡아두고 싶다면 그렇게 해줄게. 내 너를 그 자리까지 올렸다면 널 내 손으로 지옥으로 보내줄 수도 있어!’

...

장서각 내부, 경풍제 소문현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이미 비워진 술병들이 가득했다.

그는 평범한 귀공자나 입을 법한 비단옷 차림을 하고 술에 취해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술기운이 점점 올라오자 그의 의식은 이 높디높은 궁벽을 넘어 소년 시기 금방 왕으로 책봉되고 관저를 하사받은 시점으로 날아갔다.

그 뜨거운 여름날, 그는 생애에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온나라를 돌아다니며 유람했고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당시 황자였던 그는 아바마마에게 간청을 드려 그녀와 혼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장군부의 귀한 적녀로 그때의 마음이라면 평생 그녀와 백년해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변고는 일어났고 그렇게 사랑하던 소녀는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오늘이 그녀의 기일이었다.

술 취한 소문현의 두 눈에는 고통이 서렸다.

매번 선경의 기일이 되면 그는 이곳 장서각에 숨어들어 옛 정인을 그리워하며 술을 마시고는 했다.

그가 한창 상념에 잠겼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버럭 화를 내려던 소문현의 눈에 놀라울 만치 그녀를 닮은 얼굴이 들어왔다.

“선경아?”

소문현은 안색이 급변하더니 급기야 품안에 뛰어든 여인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온몸이 떨려왔다.

“선경아, 너니?”

이 순간 소문현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10년 만에 드디어 그리웠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순간 소문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선경이가 내 곁으로 돌아온 건가?’

“사… 살려주세요!”

최음제의 약효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었다.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고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귀비의 최음제 덕분에 연기가 더욱 진실되게 보인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한영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고개를 들고 젊은 황제의 옷깃을 꽉 잡았다.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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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쳐!”온희정은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한영을 응시했다.2년 전 그 아이는 금기어였다.그 순간 한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예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추측이었다. ‘2년 전 그 아이의 죽음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온희정이 손귀비와 손을 잡은 이유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이지, 그 아이의 죽음을 영원히 덮어버리기 위한 것일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온희정은 죽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내기 싫어했다.‘사산… 사산이라….’한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온희정을 바라보았다.온희정은 그 눈빛이 사냥감을 쫓는 늑대의 눈빛처럼 느껴졌다.잠시 감정을 추스른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나를 배신한 비천한 시종이야. 난 절대 널 살려두지 않을 거야!”한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것 참 유감이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한영은 천천히 뒤로 물러선 후, 예를 행하고 밖으로 나갔다.안에서 물건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그 성격 못 고쳤네. 이 정도로 저리 화를 내다니.”그녀는 고개를 들고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춥고 텁텁한 겨울 날씨는 사람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들었다. 굳이 한 명이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라면 싸늘한 겨울날이 제격인 것 같았다.한영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나무상자를 들고 들어오는 홍이와 마주쳤다.홍이는 그녀를 알아보고 다급히 예를 행했다.한영은 그런 홍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홍아, 내 기억이 맞는다면 네 어머니가 남강의 노비 출신이었지?”홍이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한영은 계속해서 말했다.“남강에는 여인이 단기간에 용모나 체형을 바꿀 수 있는 비술이 있다지?”그러자 홍이가 바짝 긴장하더니 상자를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선제인 성조 황제는 한 궁녀에 의해 저주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

  • 궁녀의 역습   제23화

    젊은 황제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온희정의 턱을 잡았다.“너도 짐의 양심전에 지금 묵고 있지 않느냐?”소문현은 상공을 찬란하게 수놓은 불꽃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불꽃놀이는 참으로 오랜만이구나.”“폐하!”온희정은 다급히 황제를 불렀다. 어렵게 승은을 입었는데 열기가 이리도 빨리 식고 있으니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소문현은 옷가지를 걸치며 그녀에게 말했다.“짐은 영빈에게 가봐야겠다. 그 녀석 못하는 게 없어. 짐의 양심전을 불태우기 전에 가서 말려야겠으니 넌 이만 경화궁으로 돌아가거라.”온희정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이 내관은 온희정과 함께 양심전을 나섰다. 멀리서 소문현이 한영과 함께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장난치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온희정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네년은 곧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다음 날, 온희정이 다시 경화궁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후궁 전체에 퍼졌다.각 궁의 비빈들은 분분히 선물을 보내왔다. 왕황후는 친히 오지는 않았지만 사람 키만한 산호를 보내왔다.온귀비가 다시 경화궁의 주인이 되었으니 경화궁에 주거하는 비빈으로서 한영은 편전에만 숨어 있을 수 없었다.한영은 조용히 앉아 싸늘한 표정으로 손귀비와 온희정의 담화를 듣고 있었다.손귀비는 옆에서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는 한영을 힐끗 보고는 웃으며 온희정의 손을 잡았다.“돌아온 걸 축하하네. 아무리 다른 애가 총애를 받고 있었다 해도 한낱 폐하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지.”한영은 말없이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 손귀비는 침착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다.“영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한영은 웃으며 답했다.“귀비 마마든 아니면 다른 비빈들이든 저희는 모두 폐하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온귀비께서는 공들인 화접무로 폐하를 기쁘게 해드렸으니 저희 후궁들도 본보기로 삼아야지요.”손귀비는 굳은 표정으로 잡고 있던 온희정의 손을 놓았다.한영의 한마디로 손귀비에게

  • 궁녀의 역습   제22화

    양심전은 후끈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온희정은 소문현의 품에 안겨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러느냐, 희정아.”소문현은 온희정을 품에 안으며 물었다.온희정은 눈물을 닦고는 웃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기뻐서요. 폐하께서 신첩을 용서해 주시고 화를 풀어주셔서 너무 기뻐서요.”“신첩,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말을 마친 온희정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소문현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짐의 귀비는 그동안 철이 많이 든 모양이구나.”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맞춤하려다가 퍼렇게 부은 손가락을 보고 동작을 멈추었다.동상을 입은 가녀린 손가락에 그의 손길이 닿자 온희정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소문현이 당황하며 그녀에게 물었다.“이게 어찌 된 일이지?”온희정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폐하, 별일 아닙니다. 신첩은 동사서에서 추위에 좀 떨어도 괜찮습니다. 폐하만 신첩의 죄를 사하여 주시면 신첩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추위에 떨어?”소문현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동사서가 다른 비빈들이 사는 궁전보다는 못하더라도 냉궁은 아니었다. 냉궁이라 하더라도 후궁의 비빈들이 동상을 입을 정도로 보급이 형편없지는 않았다.“이 내관!”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 내관이 안으로 들어오자 소문현은 싸늘한 어조로 분부했다.“할 일도 제대로 안 하는 동사서의 쓸모없는 노비들을 모두 처형시켜!”“예!”지시를 받은 이 내관은 조용히 물러갔다.온희정의 눈빛에 통쾌함이 스쳤다. 그녀가 동사서로 간 이후로 권세만 따르는 궁인들은 모두 온희정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들은 그녀에게 먹다 남은 밥을 주는 것은 물론, 목탄도 최소한으로 보급했다.소문현은 안쓰러운 얼굴로 온희정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내일부터는 동사서로 돌아갈 필요 없어.”온희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소문현은 웃으며 농을 걸었다.“왜? 동사서에서 나와 짐의 곁에 있는 게 싫으냐?”온희정은 기죽은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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