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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정담
경화궁 상궁 한영이 폐하의 승은을 입고 하룻밤 사이에 연속 세 계급을 건너뛰어 귀인이 되었다는 소문은 하루아침에 후궁 전체에 퍼졌다. 비빈들은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점은 영귀인이 그나마 본분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 스스로 한 궁의 주인이 될 기회를 거절하고 경화궁에 머물기로 했다고 전해졌다.

아마 그것마저 안 했더라면 조정에서 폐하의 심지를 어지럽히는 요물이라고 영귀인을 탄핵하라는 상소문이 올라왔을 것이다.

영귀인은 최대한 겸손하게 처신했지만 황제의 포상은 그리 겸손하지 못했다.

비록 한영이 지내는 곳이 편전이기는 했지만 아주 우아하게 꾸며졌고 황제의 하사품도 쉴 새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경화궁의 주인인 온희정은 그것들을 다 불태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황제의 하사품 말고도 각 궁의 비빈들도 선물을 보내왔다.

한영은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선물만 받고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냈다.

한영의 신변을 돌보는 궁녀는 란심이었다. 한영이 황제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보내온 사람이었다.

란심은 전에 경화궁에서 잡일이나 하던 아이였다.

품성이 단정하고 침착하고 부지런한 성격에 주인에게 아부하지 않는 사람이라 온귀비 앞에서 한번 실수를 저질렀다가 물매를 맞고 신자고로 유배되었던 아이였다.

란심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새 주인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마마, 찾아온 비빈들을 모두 문전박대하면 후궁에서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요?”

한영은 금가루가 함유된 부용고 상자를 열고 연고를 손으로 찍어 목덜미에 발랐다. 하얀 목덜미에는 황제가 남긴 흔적들이 가득 남아 있었다.

10년 동안 사무쳤던 고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어젯밤 소문현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한영은 거울에 비친 아름다운 얼굴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수인은 굳이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 법이야.”

“네 사촌 오라비가 어의원에서 일한다고 들었어. 넌 아무도 모르게 그리로 가서 일시적으로 두드러기가 돋는 약을 가져와. 두드러기를 핑계로 잠시는 시침을 피해야겠어. 그리고 다른 애들에게도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지내라고 경고하고.”

그 말을 들은 란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마마는 왜 폐하의 총애를 스스로 걷어차려는 거지?’

란심은 한참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마, 한창 폐하께서 마마를 총애하실 시기 아닙니까. 지금 기회를 잘 잡지 않으면 남 좋은 노릇만 하는 거 아닌가요?”

한영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한번의 총애는 아무것도 아니야.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더 조심해야 하는 곳이 이곳 황궁이다. 오히려 이런 시기에 기고만장해서 건방을 떨다가 한방에 훅 가는 수가 있어.”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난 한낱 궁녀의 신분에서 하룻밤 사이에 품계를 세 계급이나 뛰어올라 귀인이 되었어. 조정이나 후궁이나 불만이 많을 거야. 이런 시기에는 폐하일지라도 조심해야 하는 법인데 내가 잘난 척하고 다니면 궁지에 몰릴 수도 있어.”

란심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편전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온귀비가 시종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한영은 온귀비에게 공손히 예를 행했다.

“귀비께 인사 올립니다.”

온귀비는 번쩍 손을 치켜들었고 한영은 가볍게 그 손목을 낚아채고 상대를 밀쳤다.

“감히 반항을 해?”

지금까지 화를 꾹 참고 있던 온귀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어제 돌아온 후부터 울화 때문에 잠도 자지 못한 그녀였다.

“천한 것, 어디 내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어? 당장 무릎 꿇지 못해?”

온귀비가 큰소리로 호통쳤다.

한영은 피식 웃고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제가 아직 법도를 몰라 무례를 범했으니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온귀비는 수려한 얼굴을 빤히 노려보다가 손을 뻗어 긴 손톱을 한영의 피부에 대고 꾹 눌렀다.

그녀는 이를 갈며 말했다.

“네가 이런 재주를 가진 애였을 줄은 왜 몰랐을까? 한영아, 참으로 지독히도 속내를 숨기고 있었구나!”

란심은 경악한 눈으로 서서히 주인의 얼굴을 파고드는 온귀비의 손톱을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마마는 궁녀 출신이라 지금 달려가서 지원군을 불러올 사람도 없는데….’

아무리 봐도 온귀비는 오늘 작정하고 온 것 같았다.

온귀비는 싸늘한 눈으로 한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증오심을 불태웠다.

‘왜 하필이면 죽은 그 여자를 이리도 닮았지?’

그녀는 그제야 한영이 늘 옷은 소박하게 입으면서 얼굴에 두터운 분을 바르고 다닌 이유가 진짜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얼굴을 가지고 총애를 못 받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안 돼! 절대 이 천한 것이 내 머리 위에 기어오르는 꼴은 못 봐!’

만약 이 얼굴을 망쳐버린다면….

어차피 한영은 한낱 귀인일 뿐이고 그녀는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귀비였다.

지금의 신분과 지위로 하등한 비빈 따위를 처리하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온귀비는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가 한영의 얼음장 같은 눈빛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에 담긴 증오심을 알아본 온희정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한영은 한치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온귀비를 노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온귀비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해봐. 넌 못하잖아. 내 얼굴이 망가지면 너도 못 살아. 선황후에 대한 폐하의 마음을 과소평가하지 마.”

온귀비는 비틀거리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오만방자하던 표정은 어느새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한영은 그런 온귀비를 빤히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신 소양군주는 비록 단왕부와 혼인한 몸도 아니지만 폐하는 즉위 후에 그분을 황후로 책봉하셨지요. 지금의 황후마마 역시 선황후의 사촌동생 아닙니까. 폐하께서 얼마나 돌아가신 분을 연모하면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온귀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얘가 어떻게 이걸… 어떻게 이걸 알고 있지?’

한영은 냉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온희정 네가 나를 이 내관의 노리개로 보낸 것도 겉보기에는 이득을 보기 위해 보낸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소양군주와 닮은 것을 알고 질투해서 그런 것 아니냐?”

말을 마친 한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왜 눈이 멀어서 10년 동안이나 너 같은 것을 주인으로 모셨을까?”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쉰 후에 평소의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예를 행했다.

“폐하께서는 어젯밤 귀비께 경화궁에서 한동안 반성하고 있으라 하셨지요. 오늘 소란이 벌어진다면 어제처럼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온귀비는 이를 갈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귀띔해줘서 고맙구나. 네 소원대로 높이 올라갈 날을 기대하고 있으마. 하지만 촌닭이 아무리 화려한 장신구를 휘두른다고 영원히 봉황이 될 수 없는 법이야.”

한영은 웃으며 대꾸했다.

“마마, 농이 지나치시군요. 제가 촌닭이면 상주현에서 올라온 마마는 집에서 키운 닭인가요? 그런데 오늘 날 귀비가 되셨으니 닭이 도를 득하여 하늘로 날아오른 경우 아닙니까.”

“너!”

온귀비는 길게 심호흡한 후, 씩씩거리며 편전을 떠났다.

한영은 멀어지는 귀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손톱자국이 선명한 얼굴을 매만지며 냉소를 지었다.

‘겨우 이 정도에 돌아간다고? 그럼 이제 내 차례야.’

다시 의자로 돌아와서 앉은 한영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란심에게 말했다.

“참으로 어여쁜 얼굴이지 않니. 이 얼굴이 망가지면 폐하는 어떤 반응일까?”

“마마!”

놀란 란심이 비명을 질렀다.

한영은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더니 말했다.

“온귀비가 제 발로 찾아와 내게 수모를 주고 갔는데 나라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니?”

다음 날 이른 아침, 새된 비명이 경화궁에서 울려퍼졌고 잠시 후, 소문현은 어의를 대동하고 경화궁에 당도했다.

그는 복도를 가로질러 곧장 편전으로 갔다. 안에서는 한영의 구슬픈 흐느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소문현은 길게 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얇은 비단천으로 얼굴을 가린 한영이 침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고 주변에 시중을 들던 시종들은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소문현이 침상으로 다가가자 한영은 그대로 그의 품에 뛰어들어 흐느꼈다.

“폐하! 신첩을 살려주십시오!”

한영은 울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잡아당겼다.

순간 소문현의 안색이 급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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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지금 총애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살 길을 찾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얘기를 홍이에게 한들, 알아들을 리 없었다.한영은 고집스럽고 과묵한 홍이가 예전의 자신을 너무 닮아서 안쓰러웠다.그래서 자신을 구원한답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홍아, 궁을 나가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문 앞까지 간 홍이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작은 소리로 답했다.“말씀만으로 감사합니다, 영빈 마마.”말을 마친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한영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돌려 편전으로 돌아갔다.란심은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며 조용히 물었다.“마마, 홍이 걔가 또 뭐라고 했기에 기분이 이리도 저조하십니까?”“소인 지금 당장 가서 따져야겠어요. 마마가 걔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온귀비가 득세했다고 은인도 몰라본답니까?”“돌아와!”한영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거울 속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지 그녀의 얼굴은 그녀마저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변해 있었다.“성주에게 말해서 뭐 좀 알아볼 게 있다고 전해.”“무슨 일인데요?”란심이 다급히 물었다.한영은 창문을 통해 내전 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작게 말했다.“홍이의 어머니에 대해 좀 알아봐.”“예.”란심은 밖으로 나가 성주를 찾았다.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부러운 눈을 하고 내전을 바라보는 금희의 모습이 보였다.란심은 미간을 확 찌푸렸고 소리를 듣고 뒤돌아선 금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란심 언니,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세요?”란심은 잠깐 스친 의심을 거두고 답했다.“마마의 심부름하러 가. 넌 주방에 가서 보신탕이 다 끓었는지 보고 오렴. 너무 오래 끓이면 맛없어.”“예, 지금 가요.”금희는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주방 쪽으로 갔다. 그녀는 질투심을 넘어 증오가 치솟았다.란심과 성주, 그리고 금희까지 셋은 모두 온실에서 궂은일을 하던 하등 궁인들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란심과 성주는 영빈의 눈에 들어 지금은 신변 시중을 들게 되었다.‘대체 내가

  • 궁녀의 역습   제24화

    “닥쳐!”온희정은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한영을 응시했다.2년 전 그 아이는 금기어였다.그 순간 한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예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추측이었다. ‘2년 전 그 아이의 죽음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온희정이 손귀비와 손을 잡은 이유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이지, 그 아이의 죽음을 영원히 덮어버리기 위한 것일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온희정은 죽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내기 싫어했다.‘사산… 사산이라….’한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온희정을 바라보았다.온희정은 그 눈빛이 사냥감을 쫓는 늑대의 눈빛처럼 느껴졌다.잠시 감정을 추스른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나를 배신한 비천한 시종이야. 난 절대 널 살려두지 않을 거야!”한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것 참 유감이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한영은 천천히 뒤로 물러선 후, 예를 행하고 밖으로 나갔다.안에서 물건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그 성격 못 고쳤네. 이 정도로 저리 화를 내다니.”그녀는 고개를 들고 먹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았다. 춥고 텁텁한 겨울 날씨는 사람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들었다. 굳이 한 명이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라면 싸늘한 겨울날이 제격인 것 같았다.한영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나무상자를 들고 들어오는 홍이와 마주쳤다.홍이는 그녀를 알아보고 다급히 예를 행했다.한영은 그런 홍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홍아, 내 기억이 맞는다면 네 어머니가 남강의 노비 출신이었지?”홍이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한영은 계속해서 말했다.“남강에는 여인이 단기간에 용모나 체형을 바꿀 수 있는 비술이 있다지?”그러자 홍이가 바짝 긴장하더니 상자를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선제인 성조 황제는 한 궁녀에 의해 저주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래

  • 궁녀의 역습   제23화

    젊은 황제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온희정의 턱을 잡았다.“너도 짐의 양심전에 지금 묵고 있지 않느냐?”소문현은 상공을 찬란하게 수놓은 불꽃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불꽃놀이는 참으로 오랜만이구나.”“폐하!”온희정은 다급히 황제를 불렀다. 어렵게 승은을 입었는데 열기가 이리도 빨리 식고 있으니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소문현은 옷가지를 걸치며 그녀에게 말했다.“짐은 영빈에게 가봐야겠다. 그 녀석 못하는 게 없어. 짐의 양심전을 불태우기 전에 가서 말려야겠으니 넌 이만 경화궁으로 돌아가거라.”온희정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이 내관은 온희정과 함께 양심전을 나섰다. 멀리서 소문현이 한영과 함께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장난치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온희정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네년은 곧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다음 날, 온희정이 다시 경화궁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후궁 전체에 퍼졌다.각 궁의 비빈들은 분분히 선물을 보내왔다. 왕황후는 친히 오지는 않았지만 사람 키만한 산호를 보내왔다.온귀비가 다시 경화궁의 주인이 되었으니 경화궁에 주거하는 비빈으로서 한영은 편전에만 숨어 있을 수 없었다.한영은 조용히 앉아 싸늘한 표정으로 손귀비와 온희정의 담화를 듣고 있었다.손귀비는 옆에서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는 한영을 힐끗 보고는 웃으며 온희정의 손을 잡았다.“돌아온 걸 축하하네. 아무리 다른 애가 총애를 받고 있었다 해도 한낱 폐하의 장난감에 지나지 않지.”한영은 말없이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 손귀비는 침착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다.“영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한영은 웃으며 답했다.“귀비 마마든 아니면 다른 비빈들이든 저희는 모두 폐하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온귀비께서는 공들인 화접무로 폐하를 기쁘게 해드렸으니 저희 후궁들도 본보기로 삼아야지요.”손귀비는 굳은 표정으로 잡고 있던 온희정의 손을 놓았다.한영의 한마디로 손귀비에게

  • 궁녀의 역습   제22화

    양심전은 후끈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온희정은 소문현의 품에 안겨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왜 그러느냐, 희정아.”소문현은 온희정을 품에 안으며 물었다.온희정은 눈물을 닦고는 웃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기뻐서요. 폐하께서 신첩을 용서해 주시고 화를 풀어주셔서 너무 기뻐서요.”“신첩,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말을 마친 온희정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소문현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짐의 귀비는 그동안 철이 많이 든 모양이구나.”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맞춤하려다가 퍼렇게 부은 손가락을 보고 동작을 멈추었다.동상을 입은 가녀린 손가락에 그의 손길이 닿자 온희정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소문현이 당황하며 그녀에게 물었다.“이게 어찌 된 일이지?”온희정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폐하, 별일 아닙니다. 신첩은 동사서에서 추위에 좀 떨어도 괜찮습니다. 폐하만 신첩의 죄를 사하여 주시면 신첩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추위에 떨어?”소문현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동사서가 다른 비빈들이 사는 궁전보다는 못하더라도 냉궁은 아니었다. 냉궁이라 하더라도 후궁의 비빈들이 동상을 입을 정도로 보급이 형편없지는 않았다.“이 내관!”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 내관이 안으로 들어오자 소문현은 싸늘한 어조로 분부했다.“할 일도 제대로 안 하는 동사서의 쓸모없는 노비들을 모두 처형시켜!”“예!”지시를 받은 이 내관은 조용히 물러갔다.온희정의 눈빛에 통쾌함이 스쳤다. 그녀가 동사서로 간 이후로 권세만 따르는 궁인들은 모두 온희정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들은 그녀에게 먹다 남은 밥을 주는 것은 물론, 목탄도 최소한으로 보급했다.소문현은 안쓰러운 얼굴로 온희정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내일부터는 동사서로 돌아갈 필요 없어.”온희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소문현은 웃으며 농을 걸었다.“왜? 동사서에서 나와 짐의 곁에 있는 게 싫으냐?”온희정은 기죽은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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