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그 시각, 북악산 자락에 있는 평창동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한옥 저택.수십 년 동안 권력자들이 은밀히 드나들었던 그 집은, 밤이 깊어질수록 더 음산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공서린이 누구 딸인지 아십니까.’강민재가 던진 그 한 문장은, 막 조여들던 모든 판을 단숨에 뒤집어 버렸다.그는 즉시, 대법원과 대검의 핵심 라인에 연락을 돌렸다.“5년 전 사건입니다. 증거 불충분으로 막으세요. 청와대 하명 수사, 정치 보복 프레임으로 밀어붙이란 말입니다. 강민재가 무너지면 다음은 당신들 차례야.”수십 년간 정재계를 장악해 온 그의 검은 인맥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강민재 하나를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그놈이 입을 열면 그동안 어둠 속에 묻어두었던 이름들이 줄줄이 딸려 나올 터였다.국회의원 몇 명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법조계와 재계, 언론까지.수십 년 동안 서로의 약점을 쥔 채 만들어온 거대한 사슬이었다.그 사슬의 끝에는 자신이 있었다.강민재는 그중 가장 약한 고리였고, 지금 검찰은 바로 그 고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끊어내든지, 다시 단단히 묶어놓든지.선택지는 둘뿐이었다.그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공대현이 제 딸을 지키겠다고 칼을 뽑았으면, 그 칼이 누구 목을 겨누고 있는지도 알아야지.”찻잔이 탁자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동시에 야당인 국민당도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강민재 의원 수사는 공대현 대통령이 가족 비리를 덮기 위해 벌인 정치 보복입니다! 살아 있는 친딸을 죽은 사람으로 위장하고, 신분 세탁까지 시켰습니다!”국민당은 사건의 본질인 기술 유출과 살인 미수를 지워버린 채, ‘대통령의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자극적인 프레임으로 여론을 몰아갔다.언론은 연일 청와대를 공격했고, 야당은 특검과 탄핵을 거론하며 공세 수위를 높였다.결국, 사법부 역시 거센 압박을 버티지 못했다.강민재 측이 청구한 구속적부심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그리고 이튿날 새벽.법원은 강민재의 석방을 결정했다.“도주
청와대 외곽 검문소부터 관저 입구까지, 차량은 몇 차례나 신원 확인을 거쳐야 했다.삼엄한 경호 속에서도 수혁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어제 병실에서 약속한 대로 수혁이 대통령 공대현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관저 내실 문이 열리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공대현이 수혁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왔나.”“예, 대통령님.”짧은 인사였지만, 두 사람의 시선에는 이미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공대현은 수혁의 핏기 없는 얼굴과 피로가 내려앉은 눈가를 잠시 바라보다가 낮게 물었다.“지안이는 좀 어떤가.”수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지금은 많이 안정되었습니다.”공대현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아이는 원래 겉으론 멀쩡한 척을 잘하는 아이야. 속이 무너져도 내색을 안 하지.”잠시 침묵이 흘렀다.“차 대표.”공대현의 시선이 수혁에게 향했다.“우리 딸… 잘 부탁하네.”그 한마디에는 대통령이 아닌,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무거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수혁은 고개를 숙였다.“그래, 이제 날 만나려고 했던 이유를 말해 보게.”수혁은 탁자 위에 준비해 온 서류 봉투를 내려놓았다.“이것입니다.”공대현이 서류를 꺼냈다.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공대현의 얼굴은 생각이 읽히지 않았다.겉으로는 무덤덤하고 차분해 보였다.“그러니까, 지안이도 이렇게 하는 것에 동의를 했다는 것인가.”“예, 동의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기획안에는 서린 씨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습니다.”“그렇구만.”공대현은 다시 기획안으로 시선을 내렸다.“나는 그 아이가 또 세상 앞에 서는 게 두렵네.”수혁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겨우 살아 돌아온 아이야. 그런데 또 그날의 일을 끄집어내고, 제 상처를 온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니…… 아비로서는 말리고 싶어.”“저도 같은 마음입니다.”수혁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말려 봤지만, 자신의 손으로 끝내고 싶어 합니다.”공대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서린 씨가 싸우겠다면 싸우게
“대표님, 하지만 지금 상황은…….”“더 이상 널 그놈들의 먹잇감으로 내줄 순 없어. 절대 안 돼.”수혁은 서린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네가 카메라 앞에 선다고 생각해 봐. 기자들이 네가 겪은 진실에 관심이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살아 돌아왔냐, 왜 속였냐, 아버지가 시켰냐…… 넌 그 폭력적인 플래시 세례와 질문들을 맨몸으로 다 받아내야 한다고.”“제가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제 이름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요.”“내가 감당 못 해.”수혁이 이를 악물었다.그의 눈빛에 일렁이는 고통스러운 빛에 서린은 말문이 막혔다.“네가 상처받고 세상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난도질당하는 꼴, 내가 못 본다고.”서린을 보는 수혁의 눈이 흔들렸다.“넌 이제 겨우 살아 돌아왔어. 하루도 안 됐다고.”수혁의 시선이 서린의 붕대 감긴 손목으로 떨어졌다.“그런데 눈 뜨자마자 또 혼자 앞에 나가서 다 맞겠다고?”“대표님…….”“이번에는 그러지 마. 네가 막아야 할 일도 아니고, 네가 책임져야 할 일도 아니야.”수혁은 잡고 있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적어도 이번만큼은 우리한테도 널 지킬 기회를 줘.”수혁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눌렀다.“지금 당장 네가 나가서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아.”“하지만 전 증거가…….”“사람들은 팩트보다 자극적인 소재를 좋아하고,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만 믿으려고 하잖아.”서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수혁이 서린의 입술을 엄지로 쓸며 말을 이었다.“지금 대중들은 저놈들이 짜놓은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네가 하는 모든 말을 ‘권력자 딸의 구차한 변명’으로 소비할 뿐이야.”수혁의 말에 유정이가 거들었다.“그래 지안아. 지금 네가 나가면 저놈들만 좋아해. 여론 싸움 질질 끌면서 빠져나갈 구실만 만들어 주는 거라고.”그렇다.강민재 측은 이미 완벽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그럼…… 이대로 저 가짜 뉴스들이 사실이 되도록 가만히 보
씻고 돌아온 수혁이 서린의 옆에 앉았다.“배 안고파?”“배고파요.”“뭐 먹고 싶어?”“순두부요.”“순두부?”“네. 저번에 일출보러 갔던 날, 대표님이 사 주신 그 순두부요.”수혁의 눈빛이 잠시 부드럽게 흔들렸다.작은 산 아래에 자리한 식당에서 먹었던 그 순두부.[최순자 손순두부]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는 순두부를 수혁이 서린의 그릇에 덜어주며 두부가 몸에 좋다고 했던.“당장 사 오라고 하면 사 올 수도 있는데.”“저 그거 때문에 살았어요. 대표님이 그 순두부를 사 주시면서 해 주셨던 말. 그리고 일출 보러 가서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했잖아요.”“그랬지.”“이번에는 진짜로 죽으려고 했거든요.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그랬는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혁이 벌떡 일어나 서린을 끌어안았다.“다신 그런 생각 하지 마.”쉰 목소리였다.“나 진짜 미쳐버리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알아?너 놔두고 그렇게 출장 간 머저리가 나였다고.심장이 조이고 피가 마른다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알았으니까.수혁의 품 안에서 서린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랬는데... 그래서... 그렇게 살고 싶어졌어요.”서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이제 그렇게 살려고요.”수혁이 안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그리고 두 손으로 서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들어 올렸다.“그래.”수혁의 눈빛이 깊게 흔들렸다.“꼭 그렇게 살게 해 줄게. 나만 믿어.”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서린은 웃었다.환하게.그 미소를 바라보던 수혁의 얼굴이 천천히 서린에게 가까워졌다.서린도 피하지 않았다.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순간—똑, 똑.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서린이 놀라서 눈을 떴다.수혁이 입술을 떼며 혀를 찼다.쯧-"들어오세요."도윤이 문을 빼꼼히 열었다.“매형, 아니 대표님. 아니 이제 매형이지. 매형, 유정이 누나가 온대요.”수혁이 고개를 푹 숙인 서린을 살포시 안으며
아침 출근길에 뉴스를 접한 시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증권가 정보지는 마비가 올 정도로 불타올랐다.청와대 게시판과 한도전자 홈페이지는 접속자 폭주로 다운되어 버렸다.강민재와 여병석이 합작한 독화살은, 정확히 공대현 대통령의 심장과 수혁의 회사를 동시에 관통하고 있었다.그 시각. 서울의 대형 병원 VIP 병동.밤새 서린의 곁을 지켰던 수혁과 가족들이, 마침내 눈을 뜬 서린을 보며 안도의 눈물을 흘리던 그 따뜻하고 평화로운 순간.병실 밖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최 실장의 개인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이 새벽에 무슨…….”최 실장은 피곤한 눈을 비비며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이영호 정무수석으로부터 온 전화였다.그리고 액정 상단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수십 개의 뉴스 속보 알림들.[속보] 대통령 딸 생존 확인……[단독] 공지안, 한도전자 임원으로 재직 중……“……미친.”최 실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일순간에 싹 가셨다.손이 덜덜 떨려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정치판에서 뼈가 굵은 그였다.이 기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 타이밍에 이런 정보가 언론에 뿌려졌다는 것이 어떤 파국을 몰고 올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강민재…… 그 새끼가 기어이 동귀어진을 선택했구나.’최 실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 문을 향해 뛰어갔다.경호원들이 흠칫 놀라 길을 터주었다.벌컥!병실 문이 예고도 없이 날카롭게 열렸다.무거운 기류가 단숨에 평화를 찢고 들어왔다.병실 안은 따뜻했다.서린의 손을 감싸 쥐고 눈물을 글썽이는 윤정희 여사, 든든하게 곁을 지키고 선 차수혁과 도윤, 그리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공대현 대통령.문가에 선 최 실장의 거친 숨소리에,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던 공대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무슨 일인가.”공대현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최 실장의 사색이 된 얼굴을 본 수혁의 눈매는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좁혀졌다.강민재가 그렇게 잡혔는데 잠잠할 리가 없지.수혁은 긴장감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최 실
“어르신. 저 아직 쓸모 있습니다. 버리지 마십시오.”그리고 목소리를 더 내리깔았다.“어르신…… 공서린이 누구 딸인지 아십니까?”그 한 문장이—판 전체를 뒤집을 열쇠처럼 떨어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상대편의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도 호기심도 없었다.아무 기대도 없다는 듯.“놀라지 마십시오, 어르신. 공서린이 바로 5년 전에 죽은 공지안입니다.”강태환의 입꼬리가 비틀렸다.허황된 소리를 듣는 사람처럼, 차갑게 강민재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나하고 장난하나.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강민재는 어르신의 반응을 이해했다.당연히 믿을 수 없겠지.자신이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하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것이 있다.“정말입니다, 어르신. 저에게 증거가 있습니다. 아니, 가장 확실한 것은 유전자 검사만 해봐도 되지 않습니까.”강태환이 웃음기를 거두고 강민재를 쏘아보았다.“하나도 숨기지 말고 뱉어내.”강태환의 목소리에 핸드폰을 손에 쥔 강민재가 고개를 돌렸다.“예.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강민재가 침을 삼켰다.“공서린은 처음부터 공대현의 딸이었습니다.”취조실 안의 공기가 서서히 뒤집히고 있었다.누가 먼저 움직이느냐에 따라, 판 전체가 바뀔 수도 있었다.“죽은 게 아니라 얼굴을 바꾸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겁니다.”강민재는 잠시 숨을 골랐다.“공대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숨겼죠. 대통령이 자기 딸의 생존을 국민에게 감춘 겁니다.”―확실해?“예. 최근에 청와대 쪽 사람들이 공서린을 따로 만났습니다. 대통령 부부와 그 아들까지 전부 알고 있습니다.”―…….“이걸 그냥 부녀 상봉으로 만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강민재의 입꼬리가 비틀렸다.“하지만 대선 전부터 살아 있었다고 만들면 얘기가 달라지죠.”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강민재는 어르신의 반응을 기다렸다.잠시 후.— 푸하하하하.“어르신... 어떻습니까.”강민재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저 아직 쓸모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