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35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0 08:24:00
창밖으로 희미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서린은 빈 와인병을 곁에 둔 채, 차가운 거실 바닥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밤이었다.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던 그날.

그리고, ‘공서린’으로 태어나 도망치듯 떠났던 시간들.

그 모든 기억이 핏빛처럼 되살아났다.

서린은 굳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제 호텔 로비에서 강민재의 그림자만 보고도 숨이 막혀 무너져 내렸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는… 다시는, 도망치지 않아.”

서린은 욕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찬물을 틀어 얼굴에 끼얹었다.

얼음장 같은 물이 피부에 닿자 몽롱했던 정신이 서늘하게 날을 세웠다.

물기를 닦아내고 고개를 든 거울 속에는, 두려움에 떨며 애원하던 과거의 공지안은 없었다.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감정을 완벽하게 지워낸 차갑고 단단한 공서린만이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어제의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해. 나는 공서린이야.’

공지안이라면 또 도망쳤을 것이다.

사람을 믿고,

상처를 숨기고,

혼자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64화.

    집무실 안에서는 공대현이 직접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아버지.”“어, 그래 도윤아 뭐 다른 소식이라도 있어?”“그게 아니라, 방금 매형한테서 연락이 왔는데요, 검찰이 강민재 공개수배까지 들어갈 거래요.”“뭐-?”“중앙지검장님을 직접 만났나 봐요. 그런데 영장 청구가 윗선에서 막힐 수도 있―”“알았다.”도윤의 말을 끊은 공대현은 즉시 중앙지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곧바로 연결됐다.“내용은 들었네.”공대현이 인사도 없이 대뜸 한 말에 중앙지검장이 놀랐다.― 대통령님? 이 일을 벌써 알고 계셨습니까?“배지 먼저 떼고 보내려고 했는데 시간이 급박해졌어.”― 아...예.“뒷일은 내가 책임집니다. 걱정 말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당장 수배령 내리겠습니다.대한민국의 가장 거대한 공권력 두 개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오직 강민재 한 사람을 잡기 위해.하지만, 정작 세상이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좁혀오고 있다는 사실을,강민재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그는 별장 근처의 한적한 읍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서린이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구토만 반복하자, 억지로라도 먹일 죽과 수프 종류를 잔뜩 담고, 자신이 먹을 식재료까지 챙기기 위해서였다.마트 계산대 위, 벽걸이 TV에서는 가요무대가 재방송되고 있는데, 아래 뉴스 속보 띠가 흘러가고 있었다.하지만 강민재는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느라 화면을 보지 못했다.[속보/ 현역 국회의원 강민재 공개수배]강민재가 계산을 마치고 마트 문을 나서는 순간, 화면에는 가요무대가 뉴스 속보로 바뀌었다.화면에는 강민재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떠 있었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마트 밖으로 걸어 나왔다.주변을 한 번 훑어본 뒤, 대포차에 올라탔다.잠시 후, 계산대 직원이 무심코 TV를 올려다보았다.화면 속 남자의 얼굴과 방금 전 계산을 마치고 나간 손님의 얼굴이 겹쳐졌다.직원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그가 황급히 마트 밖을 바라봤지만, 검은 세단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63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장검사실 문이 열렸다.문턱을 넘는 순간, 공기가 단번에 바뀌었다.창문은 블라인드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고, 외부의 빛과 소음은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그 안으로, 수혁이 들어섰다.손에는 묵직한 서류봉투가 들려 있었고, 그의 뒤를 민우가 따라 들어왔다.“어서 오게.”김 지검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았다.“예, 지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청해 법무법인 정민우 변호사입니다.”두 사람은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김 지검장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맞잡았고, 곧바로 소파 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자, 앉으시죠.”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방 안의 공기는 다시 한 번 조용히 가라앉았다.잠깐의 정적.김 지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들어볼까요.”“과연 공개수배까지 갈 수 있는 사안인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혁이 들고 있던 가방을 조용히 열었다.그리고 안에 들어 있던 서류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단단히 내려놓았다.툭.가벼운 소리였지만, 방 안의 공기를 가르는 듯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수혁이 입을 열었다.“이 사건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수혁이 고개를 들고 김 지검장의 눈을 마주 보았다.“한도전자의 반도체 핵심 기술이 정치권과 결탁해 해외로 유출됐습니다.”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민우가 그 옆에서 자료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베트남 현지에 설립된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자금이 세탁됐습니다.이건 그 장부 원본입니다.”또 다른 파일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그리고 이건… 전임 법인장의 유품에서 나온 녹음 파일입니다.강민재 의원의 육성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김 지검장의 눈빛이 서서히 굳어졌다.기술 유출 경로, 자금 흐름, 정치권 개입 정황,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국가적 손실 규모까지.수혁이 기술적인 부분을 짚으면,민우가 그것이 국가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냉정하게 덧붙였다.두 시간이 지나도록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62화.

    공대현의 시선이 천천히 정무수석에게 향했다.정무수석은 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야당에서는 분명 ‘대통령이 현역 의원을 증거도 없이 납치범으로 몰아간다’고 공격할 겁니다.”경호실장이 곧이어 말을 했다.“예, 언론도 납치 사건보다 대통령의 수사 개입에 집중하게 될 겁니다. 오히려 수색에 혼선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정무수석은 대통령이 그녀와 무슨 관계이기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아니, 묻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공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린이를 내 딸이라고 하지 않는 이상, 이게 최선이란 건가.탁―공대현의 손끝이 회의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반드시 찾아.”그 한마디에 상황실 안의 모두가 숨을 삼켰다.한편, 관저 안의 윤정희 여사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아이가 또 그 놈의 손에 떨어졌다.그때 지켜 주지 못한 죄책감까지 덮치니 그녀의 심장은 너덜너덜하게 찢겨 나갔다.물 한 모금 넘기지 못했다.“엄마, 꼭 찾을 거야. 그 때와는 달라.”도윤이 어머니의 차가운 손을 주무르며 달랬다.베트남에서 전세기를 띄워 서울에 도착한 수혁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는 사무실에 틀어박힌 채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벌써 이틀째였다.테이블 위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도시락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눈에는 핏발이 섰고, 단정했던 셔츠는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사무실 한쪽에는 컴퓨터가 여러 대 켜져 있었고, 정보팀 직원 몇 명이 숨을 죽인 채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아직도 못 찾았어?!”수혁이 책상을 내리치며 포효했다.“용역들 수십 명 풀고 도로 CCTV 다 해킹해서라도 찾으란 말이야! 그 큰 차가 증발이라도 했어? 어디로 사라졌냐고!”민우가 창백해진 얼굴로 수혁을 말렸다.“수혁아, 진정해. 의심 가는 폐쇄 회로 구간 전부 이 잡듯 털고 있어. 근데 핸드폰까지 끄고 움직여서 핑이 안 잡혀.”“진정? 이틀이야! 내가 한국 비운 그 짧은 시간에 그 새끼가……!”수혁은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61화.

    철썩— 쏴아아.낡은 목조 건물 특유의 퀴퀴한 나무 냄새와 짠내가 섞인 공기가 숨결로 스며들었다.“으음…….”서늘한 공기와는 다르게,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포근하고 따뜻했다.서린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렸다.시야가 흐릿했다.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입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다리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겨우 초점을 맞춘 시야에, 낯익은 박공지붕과 낡은 실링팬이 들어왔다.고개를 돌리자 벽면을 가득 채운 통유리창 너머로, 잿빛 겨울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여기가 어디지.”어디서 봤더라.이 공기, 이 냄새.저 바다와……벽에 걸린 그림.오래전에 내가 선물했던……그림이다.그렇다면, 이곳은.“왜…… 여기야.”지끈거리는 머리를 엄지로 누르며 기억을 더듬었다.결혼식장. 화장실. 달콤하고도 시큼한 약품 냄새.그리고― 강민재.기억의 파편들이 맞춰졌다.“헉……!”순간, 서린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올 뻔했다.서린은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달그락.그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서린은 문 쪽을 바라보았다.앞치마를 두른 강민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전복죽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어? 일어났어, 지안아?”강민재가 놀란 듯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고 황급히 다가왔다.지나치게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마치, 주말 아침 늦잠 잔 아내를 깨우러 온 남편처럼.“조심해야지. 아직 약기운이 안 빠져서 어지러울 텐데.”그가 서린의 어깨를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손대지 마!!”서린이 남은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뿌리쳤다.강민재의 손이 허공에 맴돌다 멈췄다.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쯧쯧—.”그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으며 혀를 찼다.“목소리 나오는 거 보니까 다행이네. 무리하지 마.빈속이라 힘들 텐데 밥부터 먹자. 너 전복죽 좋아하잖아.”다정한 목소리로 죽 그릇을 들고 한 수저 떠서 서린의 입가까지 바짝 들이밀었다.“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서린의 입술이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60화.

    수혁은 우선 남은 일처리를 마저 하기로 했다.하지만 서류 처리를 지시하고 서명을 하는 내내, 수혁의 신경은 온통 묵묵부답인 핸드폰에 쏠려 있었다.‘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수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국에 있는 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검은 세단 안에서는 강민재가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은 채 핸들을 잡고 있었다.조수석에는 약기운에 깊게 가라앉은 채, 의식을 잃은 서린이 앉아 있었다.신호에 걸릴 때마다 고개를 돌려,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그녀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지안아. 넌 잘 때가 제일 예뻐.”그의 얼굴은 오랜 여행을 떠나는 연인처럼 평온하고 들떠 있었다.뒷좌석에는 예식장 주차장에서 빼앗아 배터리를 분리해 버린 서린의 핸드폰이 나뒹굴고 있었다.“진즉에 이랬어야 했는데, 내가 널 너무 봐 준 것 같다.”강민재는 서린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이제 우리 예전으로 돌아가자.”“너는 예전처럼, 내 옆에서 나만 보면 돼.”암호를 걸었다는 것은 USB의 복사본이 있다는 이야기다.그렇다면, 나는 더 강력한 무기를 옆에 두어야 했다.차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충남의 어느 해안가 마을로 접어들었다.철썩, 처얼썩—.일정한 간격으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그리고 코끝을 맴도는 특유의 낡은 목조 건물 냄새와 바다 짠내.마을을 빙 돌아서 숲에 둘러싸인 한적한 도로를 쭈욱 달렸다.강민재의 검은 세단이 멈춰 선 곳은, 해안가 절벽 위에 지어진 외딴 별장이었다.녹슨 철문이 뒤에서 묵직하게 닫혔다.5년 전. 강민재가 국회의원 보좌관이던 시절, 남들의 눈을 피해 지안과 처음으로 ‘밀월여행’을 왔던 곳.그때도 겨울이었다.둘이 장을 봐 와서 늦은 저녁을 해 먹고, 밤새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함께 잠들었던 곳.지안은 다음 날 아침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서서 한참을 웃었었다.강민재에게 이곳은 5년이라는 시간이 멈춰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그러니 다시 시작하기에는

  •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159화.

    결혼식을 며칠 앞 둔 어느 날의 아침.강민재는 의원실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일정을 검토하고 있었다.그때, 책상 위에 엎어둔 개인 핸드폰이 날카롭게 진동했다.[어르신]강민재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이른 아침의 호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그는 즉시 비서관들을 밖으로 내보낸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예, 어르신.”— 윤리 위원회가 있는 건 알고 있나?인사도 없이 날아든 어르신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찼다.“... 예?”— 혁신위원장이 윤리위원회 소집령을 내렸다.“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강민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건은 바로 강민재 의원 국회의원직 박탈.“뭐라고요?”강민재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널 당에서 완전히 쳐내겠다는 소리야. 제명 처리하고 검찰에 넘기겠다고, 당내 핵심들이 벌써 합의를 끝냈어. 놈이 뿌린 찌라시가 명분이 됐고, 혁신위원장이 총대를 멨다.휘청-한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눈앞이 아찔해졌다.방탄조끼가 벗겨지는 순간, 끝이다.— 내가 널 언제까지 봐줘야겠나? 정치판에서 오물 묻은 놈은 필요 없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줘야 하나?“어, 어르신!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확실하게 방어하겠습니다!”— 오래전의 그 USB. 가져와.어르신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게 검찰로 넘어가면, 네놈 횡령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한테까지 불똥이 튀어. 그 먼지 한 톨이라도 남기면, 네 배지가 아니라 네 놈 목숨이 날아갈 거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사흘 안으로 그 증거물 회수해.— 그게 네가 살 유일한 길이야.— 아니면, 내 선에서 먼저 처리한다.뚝.전화가 끊어졌다.강민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손에 쥔 핸드폰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아—.”강민재는 핸드폰을 들어서 화면을 보다가, 책상 위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두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당에서 나를 제명시키겠다고?’그동안 대한당에서 개처럼 굴러가며 이 자리를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