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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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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677화
이현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역시 수법이 범상치 않아.”이주현도 고개를 끄덕였다.“지신혜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뜨린 셈이죠.”지신혜는 자신이 언젠가 배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량천옥으로 인해 그녀는 지금 한낱 유흥업소의 접대로 전락했다.처음 지씨 가문이 파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현은 그들이 감당한 대가가 너무 미약하다고 느꼈지만 지신혜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듣고 나니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웠다.“나태범 어르신 쪽은 어떻게 됐어?”이현의 목소리는 한층 더 냉랭해졌고 그 질문에 이주현의 표정도 무거워졌다.“나태범 어르신은 계속 고은지 씨의 행방을 비밀리에 추적하고 있습니다.”“비밀리에?”“네. 나태현 씨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합니다.”이현은 말없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동자에서 차가운 눈빛이 번득였다.‘왜 몰래 찾는 거지?’고은지는 바다에서 실종되어 생사불명 상태이며 그 일로 인해 나태범은 나태현과 심하게 충돌했다. 이런 상황을 놓고 보면 나태범이 공식적으로 나서서 수색을 도왔다면 부자 간의 갈등을 완화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나태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었다.‘은지 씨가 살아서 돌아가는 걸 원하지 않는 거겠지.’이런 생각이 들자 이현의 눈빛은 더욱 싸늘해졌다. 이윽고 그는 차갑게 말했다.“처리해.”그 말에 이주현은 순간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고은지 씨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하. 늙은이가 늙은이답지도 못하군.”어차피 나태범이 가장 불안해하는 게 바로 고은지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그가 알게 된다면 그때부터가 나태범의 고통의 시작일 것이다.량천옥과 나씨 가문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명확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나태범은 모든 책임을 량천옥에게만 떠넘기고 고은지까지 미워하고 있었다.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나태범에겐 끔찍한 일이었다.“가볍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676화
고은지는 아직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기에 몸과 마음이 무거웠다. 의식은 깨어났지만 체력은 따라주지 않는 듯했다.그녀는 지친 듯 머리를 살짝 끄덕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이현은 그녀의 손등을 다정히 쓸어내리며 말했다.“그럼 조금만 더 자요.”말을 마친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눕히고 이불도 곱게 덮어주었다.그렇게 그녀가 완전히 잠들 때까지 한참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섰다.복도엔 의료진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이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가장 앞에 서 있던 교수가 재빨리 다가왔다.“이현 씨.”이현은 대답 대신 낮고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재로 따라오세요.”그 목소리엔 방금 전 고은지 앞에서 보여준 그 따뜻한 말투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서재 문이 닫히고 고요한 정적이 공간을 채웠다.이현은 책상 뒤의 대형 의자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시선을 교수에게로 향했다. 매섭고 차가운 눈빛이었다.“지금은 상태가 괜찮은 거겠죠?”교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안심하셔도 됩니다. 모든 수치가 다 정상이에요. 지금 고은지 씨는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입니다.”그 말을 들은 이현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긴장된 어깨가 겨우 조금 풀리는 듯했다.하지만 교수가 한 마디 덧붙였다.“다만 고은지 씨의 현재 컨디션은 좋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후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어떻게 관리할지는 집사와 얘기해서 결정하세요. 요 며칠은 특히 더 신경 써줘야 할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이제 나가보세요.”“네.”교수가 나가자 서재엔 다시 적막이 흘렀다.이현은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연기가 길게 뻗어나가는 와중에도 눈빛은 여전히 어두웠다.그녀가 깨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지만 지난 몇 개월 동안, 그가 어떤 시간을 견뎌왔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고은지를 데려오고 나서 많은 약과 치료법을 시도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깨어나지 않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가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675화
눈 깜짝할 사이에 석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동안에 위치한 어떤 고급 저택 안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도대체 왜 아직도 깨어나지 않는 거야?”한 남자의 분노가 실린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진정하세요. 이미 온갖 검사를 다 진행했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요. 아마 곧...”“곧 뭐?”그의 목소리엔 온기조차 없었고 살을 베는 듯한 차가움만이 가득했다.“그, 그게...”그때였다.오랫동안 잠들어있던 고은지의 귀에 그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머리가 쿵쿵 울리듯 아팠고 눈꺼풀도 아주 무거웠다.그러다 갑자기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쳤다.“깼어요. 깼다고요!”누군가가 손을 꽉 잡는 느낌에 힘겹게 눈을 떴다.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날렵하고 단정한 턱선 위로 자라난 짙은 수염 자국이었다.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이었다.“이현 씨?”그의 이름을 불러보려 한마디 내뱉는 순간, 바짝 말라서 찢어질 듯한 입술에서 고통이 느껴졌다.‘어떻게 된 거지? 왜 이현 씨가 내 앞에 있는 거야? 여기가 어디지?“말하지 마요.”이현은 그녀의 입술을 막으며 조용히 속삭였다.고은지는 힘겹게 눈을 치켜뜨고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방금 전까지 분노로 가득 차 있던 그 남자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지는 숨을 몰아쉬며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말보다 갈증이 앞섰다.“물 좀 주세요.”이현이 재빨리 사람을 불렀다.“따뜻한 물 가져와.”“아직 환자라서 갑자기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돼요.”곁에 있던 도우미가 조심스레 말하자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요.”그는 조심스레 고은지의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도우미가 그녀의 등 뒤에 베개를 받치려 다가왔지만 이현이 막아버렸다.“그냥 내게 기대게 해.”그는 자신에게 기대어 있는 고은지에게 물을 한 모금씩 천천히 건넸다.앞서 보였던 분노는 온데간데없었고 그의 눈빛엔 오직 애틋함만이 담겨 있었다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674화
그린빌까지 갔다가 란완 리조트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다.한참을 생각하던 배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형이 데려다주는 게 나을 것 같아요.”“왜요 갑자기?”진윤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배준우는 망설임 없이 이유를 밝혔다.“은영이가 임신했거든요. 요즘 좀 예민하기도 해서 최대한 빨리 돌아가서 은영이 곁에 있어 주고 싶어요.”그건 변명도 핑계도 아닌 사실이었다.사실 배준우는 더 이상 나태현이 하는 짓을 보고 있기가 버거웠다. 고은지를 향한 나태현의 차가운 태도, 그리고 그녀가 량천옥의 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모든 인연을 잘라내던 무정함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런 사람이 지금 와서 후회에 잠긴 얼굴로 고은지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모습이라니... 참 보기 민망했다.게다가 배준우는 다른 것보다도 고은영 곁을 지키는 게 제일 중요했다.“그래요. 그럼 먼저 들어가세요.”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 말이 떨어지자 배준우는 차를 세우고 나태현을 진윤에게 맡긴 채 떠났다.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배준우의 눈빛엔 씁쓸함이 스쳤다. 나태범의 두 아들로서 그들의 감정이 얼마나 복잡한지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동안에 있는 나태웅이 겪고 있는 일까지 생각하면 그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진윤은 나태현을 그린빌로 데려다주었다. 그곳은 넓은 구조의 고급 아파트였다.인테리어는 깔끔했고 집 상태도 깨끗한 걸로 보아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관리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집엔 아무도 없었다.나태현은 소파에 축 늘어진 채 중얼거렸다.“은지야, 은지야...”진윤은 이마를 짚었다.‘이러니 배준우도 도망치듯 가버리지.’그는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며 나태현을 바라보았다.“그렇게 중요했으면 왜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거냐?”차라리 고은지가 나태현 곁에서 행복하게 살았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진윤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그가 들은 데 의하면 고은지는 그동안 너무나도 많은 걸 감당해 왔다.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673화
“은영아, 나야...”전화 너머로 들려온 조보은의 목소리는 억눌린 울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고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을 뿐이었다.그녀는 조보은과 아무런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를 끊어버리려고 손가락을 움직였다.그러나 조보은은 그녀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다급히 외쳤다.“끊지 마, 제발 끊지 말아 줘. 은영아... 제발...”고은영은 눈살을 깊이 찌푸렸다. 그녀는 더 이상 조보은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러자 조보은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내 목소리 듣기 싫어한다는 거 나도 알아. 근데... 오늘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 은영아, 부탁이야. 나 이제는 정말 갈 데가 없어.”그 말에 고은영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내 기억이 맞다면 너 예전에 언니한테도 연락했었지?”“맞아, 했어. 하지만 은지는...”조보은의 말끝에서 분노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녀는 억지로 감정을 눌러 담고 더 초라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정우가... 정우 가슴에 종양이 생겼대. 수술비가 꽤 많이 들어... 은영아, 제발 정우 좀 살려줘. 정말 기댈 데가 없어서 그래.”‘정우?’그 이름이 귀에 꽂히는 순간, 고은영의 표정은 더욱 싸늘하게 굳어졌다.그녀와 고은지가 조보은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낸 건 오래전 일이지만 진짜 힘들었던 건 조보은이 서정우를 낳고 난 이후부터였다.조보은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는데 아들인 서정우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지금 이 순간, 조보은은 전화기 너머에서 처량한 척 흐느끼고 있지만 고은영에게 있어서 서정우는 결코 좋은 동생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은영아, 네가 날 미워하는 거 알아. 하지만 정우는...”“사람마다 짊어진 운명이 있어. 그 운명은 받아들여야 해.”조보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녀에게 조보은은 이미 오래전에 마음 속에서 지운 존재였
그날밤, 상사의 아이를 임신했다 제1672화
이렇게 보면 나태웅과 나태현은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한 셈이었다.나씨 가문과는 더 이상 어떤 연도, 감정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나태웅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었지만 안지영은 특별한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게 결국 나태범에 대한 인과응보겠네.”과거에 있던 일들은 모두 나태범이 뒤에서 판을 설계하고 뒤에서 조종한 것이었고 모든 화살이 량천옥을 향한 것도 그가 한 짓이었다. 그 일에 있어서 량천옥은 억울한 피해자임에도 말이다.허나 나태범은 그 나이를 먹고도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랄하고 완고하게 모든 것을 자신 뜻대로 휘두르려 들었다.“정말, 자업자득이야.”그날의 기억이 스치자 안지영은 이를 악문 채 단호하게 말했다.그러자 고은영도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맞아, 자업자득이지.”“그런 집안에 태어난 것도 나태현이나 나태웅에겐 진짜 불행이겠네.”안지영은 코웃음을 치자 고은영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불행...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나태웅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나태현은 그 집안의 그림자 아래서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해야 했다.“그만하자. 더 얘기해 봤자 뭐 하겠어.”안지영은 손을 내저으며 말을 털어냈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씨 가문의 망했다는 소식은 그녀를 속 시원하게 만들었다. 그 오만하던 나태범의 모습만 떠올려도 아주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침묵이 흐르자 안지영이 입을 열었다.“희주 쪽은 어때? 별다른 소식 없어?”분위기를 전환해보려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들이 애초에 가벼운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황에 있음을 실감했다.그녀의 질문에 고은영은 짧게 대답했다.“아직 찾고 있어.”그러자 안지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요즘은 량천옥 씨도 안 보이던데?”그 질문은 고은영조차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글쎄... 나도 못 봤어. 그 사람은 늘 자기 일에만 집중하니까. 사실 나랑 량천옥 씨 사이에 연결고리는 언니뿐이었으니까... 언니가 없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