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5년 전, 조작된 불임 진단과 외도 누명으로 사랑했던 남자에게 버림받은 한서연. 홀로 낳아 키운 아들 우진이 희귀병으로 쓰러지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선진재단의 지원을 찾는다. 그런데 후계자를 입양하려던 재벌 총수 차도현이 우진을 눈여겨보고, 자신을 쏙 빼닮은 아이에게 점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버린 여자와 탐내던 아이, 그리고 뒤늦게 드러나는 5년 전의 진실...
View More5년 전 늦은 가을밤, 서울 성북동 선진그룹 본가 대저택 앞에는 살을 에는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임신 6주 차 초음파 사진 봉투를 품에 안은 서연은 흠뻑 젖은 채 대문 앞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감청색 수트를 입은 차도현이 우산을 쓴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걸어 나왔다.
"도현 씨…… 제발 내 말 한 번만 들어줘요. 나 딴 사람 만난 적 없어요. 이 아이, 진짜 도현 씨 아이예요."
서연이 피가 배어 나오는 손끝으로 도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도현은 망설임도 없이 서연의 손을 구둣발로 거칠게 쳐냈다.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도현의 목소리는 낮고 딱딱했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구겨진 비뇨기과 차트와 조작된 호텔 출입 사진을 꺼내 서연의 얼굴을 향해 내던졌다.
"선천성 무정자증. 난 의학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야. 병원장 직인이 찍힌 이 차트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검사가 잘못된 거예요!"
"서린 호텔 스위트룸에 다른 사내와 드나든 사진까지 내 손에 들어왔어. 내 뒤통수를 치고 딴 놈 씨를 내 핏줄로 둔갑시켜 선진가 안주인 자리를 꿰차려 해?"
도현의 얼굴에는 배신감과 확신이 뒤섞여 있었다. 눈앞의 차트와 사진이 모두 조작됐다는 사실을, 당시의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저택 현관 쪽에서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강 여사와 오유라가 입가에 웃음을 걸고 걸어 나왔다.
"도현아, 저런 천박한 사기꾼 년과 무슨 말을 더 섞니? 경비들 불러서 당장 끌어내라."
강 여사의 표독스러운 목소리에 이어 오유라가 가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서연 씨, 도현 씨가 불임 판정을 받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면서 어떻게 이래요?"
서연은 울음을 참으며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도현은 차갑게 등을 돌렸다.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띄지 마. 다음에 또 이따위 사기극을 벌이면 네 아버지 목숨줄부터 끊어놓을 테니까."
철컥, 육중한 대문이 닫혔다. 바로 그날 밤,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서연의 아버지는 선진그룹 명의 치료비와 전원 지원이 끊긴 뒤 끝내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던 택시를 검은 SUV가 두 차례 들이받고 달아난 것도 그날이었다. 경찰은 빗길 사고 가능성을 먼저 봤지만, 서연은 운전석 옆에서 오유라의 경호원을 닮은 얼굴을 분명히 보았다.
***
5년 뒤, 서울 선진의료원 응급의료센터.
"선생님! 혈압 계속 떨어집니다! 산소포화도 82%예요!"
간호사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환자 감시 모니터의 경보음이 요란하게 귓전을 때렸다. 메디컬 임상 코디네이터로 일하며 홀로 아들을 키워온 서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처치실 침대로 달려갔다. 침대 위에는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네 살배기 아들 한우진이 누워 있었다. 도현을 그대로 빼닮은 날카롭고 짙은 눈매를 가진 아이.
"엄마…… 나 숨쉬기 힘들어……."
우진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서연의 손을 꼭 쥐었다.
"우진아! 엄마 여기 있어, 정신 차려야 해!"
서연의 눈에서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졌다. 소아청소년과 교수가 어두운 안색으로 차트를 넘기며 서연을 바라보았다.
"급성 면역 이상으로 골수가 심하게 억제됐습니다. 혈소판 수치가 계속 떨어지고 있어 긴급 성분수혈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아이 혈액형이 Rh 음성 AB형이고, 항체 조합까지 까다롭다는 겁니다."
Rh 음성 AB형. 국내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드문 혈액형. 서연이 아는 사람 가운데 같은 혈액형을 가진 이는 단 한 명, 차도현뿐이었다.
결혼식으로부터 3년이 지난 봄, 도현은 작은 의자 앞에서 잠깐 멈췄다."앉을 수는 있겠어?"서연이 묻자 그가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혔다. 초등학교 교실의 의자는 어른에게 낮았다. 도현은 허리를 펴보려다 포기하고 책상 아래 두 발을 가지런히 넣었다.앞줄의 우진이 돌아봤다."아빠, 시끄럽게 움직이지 마. 수업 시작해."여덟 살이 된 아이는 예전처럼 작은 가방을 아빠에게 맡기지 않았다. 가끔은 손을 잡으려다 친구가 보이면 슬쩍 놓기도 했다. 도현은 이제 그 손을 다시 붙잡지 않았다.칠판에는 가족과 함께한 일을 소개하는 순서가 적혀 있었다. 서연은 연구소에 휴가를 냈고, 도현도 같은 시간에 다른 일정을 잡지 않았다. 우진의 첫 공개 수업이었다.아이들은 사진이나 그림을 한 장씩 들고 나왔다. 어떤 아이는 할머니와 간 시장 이야기를 했고, 다른 아이는 동생과 싸웠다가 과자를 나눠 먹은 일을 이야기했다.우진이 들고 나온 것은 기다란 기차 선로 사진이었다."이건 우리 집에서 만든 거예요."도현이 서연을 봤다. 오래전 쟁반 위에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길었다. 집의 거실과 방 사이를 돌아오는 선로였다."길은 제가 그렸고, 엄마가 종이집을 만들었어요. 아빠는 다리 잡아줬어요. 손 놓으면 자꾸 무너져서요."친구들이 웃었다. 선생님이 사진 한쪽을 가리켰다."여기는 왜 길이 끊겼을까?""화장실 가야 해서요. 이어버리면 밟고 지나가야 되잖아요."이번에는 뒤에 앉은 어른들도 웃었다. 우진은 설명을 마친 뒤 사진 아래의 세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한우진, 한서연, 차도현. 셋이 만들었어요."서연은 박수를 치다가 도현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그는 사진을 보느라 박수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잘했지?""네. 당신도. 다
"아빠. 엄마 생일인데 왜 내 기차를 예약해?"우진이 도현의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가렸다. 화면에는 기차 모양 식당에서 생일파티를 할 수 있다는 사진이 떠 있었다.도현은 몇 초 동안 화면을 보다가 예약 창을 닫았다."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엄마 생일이라니까."지적은 정확했지만, 우진이 꺼낸 선물 계획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커다란 로봇을 사서 엄마가 힘들 때마다 짐을 들어주게 하겠다는 것이었다."그 로봇이 정말 짐을 들 수 있어?"도현이 묻자 우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아직은 못 들어."둘은 식탁에 나란히 앉아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서연은 연구소에서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고 했다. 부자는 저녁을 맡겠다는 말만 해놓은 상태였다."엄마는 노란 꽃 좋아해. 밤 들어간 빵도."도현이 말하자 우진이 새 종이에 꽃을 그렸다."그건 나도 알아. 꽃 아빠한테 줬잖아.""응. 이번에는 엄마 것도 사자.""빵은 복숭아랑 같이 안 만든 건지 물어봐."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같이 먹을 것은 늘 확인했다. 우진은 꽃 아래에 커다란 상자를 그리다가 연필을 멈췄다."엄마는 뭐 할 때 좋아해?""연구 얘기 할 때. 책 읽을 때.""내가 잘 때도 좋아하던데."도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진은 자기가 무슨 웃긴 말을 했는지 모른 채 고개를 갸웃했다.***서연이 퇴근했을 때 집은 유난히 조용했다.현관에는 노란 꽃이 꽂힌 작은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새로 산 병이 아니라 서연이 물꽂이할 때 쓰던 것이었다. 옆에는 우진의 글씨로 '생일 축하해, 한서연'이라고 적힌 카드가 세워져 있었다.서연은 꽃잎을 건드리려다 손부터 씻으러 갔다. 거실에서 도현이 고개를 내밀었
"이거 누가 치웠어?"우진이 거실 바닥을 살피며 물었다. 서연은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아이가 가리키는 자리를 봤다. 아침에 발에 걸려 상자 안에 넣어둔 블록들이었다."엄마가 넣었어. 청소하려고.""아직 다 만든 거 아니었는데. 역이랑 철길 붙이던 거였는데."아이는 상자를 끌어당겨 뒤집었다. 완성해두었던 부분까지 풀어진 걸 보고 입이 나왔다. 서연이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그랬구나. 엄마가 물어봤어야 했는데. 미안해.""다시 만들어줘.""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여줄래?""엄마도 몰라?""응. 엄마가 봤던 건 우진이가 만든 다음이니까."우진의 얼굴에 실망이 더 짙어졌다. 마침 주방에서 나온 도현이 바닥에 앉았다. 손에는 세 사람이 마실 물이 들려 있었다."우진아, 아까 그린 그림 있지 않았어?"아이가 책상으로 달려갔다. 돌아올 때는 연필 자국이 진한 종이를 들고 있었다. 도현은 종이를 받으려다 팔꿈치로 서연의 자료를 건드렸다. 얇은 서류 더미가 거실 바닥에 흩어졌다.우진이 한동안 부모를 번갈아 봤다."우리 집 왜 이래."서연은 결국 웃고 말았다. 도현도 종이를 줍다가 고개를 숙였다."아빠까지 사고를 쳤네.""엄마는 내 철길, 아빠는 엄마 종이.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아직은."서연이 덧붙이자 우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셋은 자료부터 모았다. 서연이 페이지를 맞추는 동안 도현과 우진이 블록을 색깔별로 나눴다. 한쪽 구석의 물컵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나서야 선로를 펼칠 자리가 생겼다."식탁도 아빠 컴퓨터가 있고, 여기에는 엄마 종이가 있고. 내 기차는 어디 가?"아이의 말에 서연과 도현이 거실을 둘러봤다. 함께 살기 시작한 뒤 빈자리는 금방 사라졌다. 서
"5시에는 데리러 오셔야 합니다."정 실장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진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아빠 말고 나한테 하는 말이야. 나 책 더 보자고 할까 봐."어린이도서관에 가고 싶다는 우진의 부탁에 정 실장이 토요일 오후를 내준 참이었다. 서연은 간식과 물통이 든 가방을 건넸다."불편한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두 분도 책만 들여다보다 오시지 말고요."정 실장의 말에 도현이 눈썹을 들었다. 우진은 벌써 도서관 입구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아이를 보내고 나니 두 사람 사이가 허전해졌다. 늘 가운데 있던 손 하나가 빠진 탓이었다. 서연이 먼저 도현의 손을 잡았다."가요. 우리 늦겠다.""예약 안 했는데.""마음이요. 괜히 돌아가고 싶어지기 전에."***큰길에서 조금 벗어난 서점은 조용했다. 서연은 연구 서적 앞을 그냥 지나쳤다. 여행 에세이 한 권을 꺼내 몇 장 읽더니 도현에게 펼쳐 보였다."여기 바다 색 좀 봐요.""가고 싶어?""지금은 책으로 보려고요. 또 비행기부터 알아보지 말고."도현이 휴대폰을 넣었다. 서연은 그 동작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진짜 찾으려고 했어요?""위치만.""못 말려."그는 변명하는 대신 옆 진열대에서 다른 책을 골랐다. 서연은 그 책 표지를 보다가 조금 놀랐다. 어린 시절의 집을 기억하는 사람들에 관한 책이었다."이런 것도 읽어요?""오늘은 읽어보려고. 내가 어릴 때 살던 집은 방이 그렇게 많았는데, 생각나는 데는 별로 없거든."서연은 다시 책을 봤다. 도현은 표지 모서리를 만지다 계산대로 가져갔다.카페에서는 나란히 창가에 앉았다. 서연은 자기 몫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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