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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4화

Author: 서한월
유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할머니, 고모할머니도 가셨어요... 이미 알고 있죠?”

말을 끝내고 나서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기도 했고, 목이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할머니랑 고모할머니는 이제 같이 있으니까... 안 외롭겠죠?”

그 뒤에 이어질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히 마음속에 있었다.

‘나는 너무 외로워... 너무 보고 싶어.’

유하는 미소를 지은 채 들꽃을 든 손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어 묘비에 살짝 닿게 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고모할머니가 마지막에 한 말이 이거였어요. 저한테... 할머니께 꽃 한 송이 전해 달라고.”

눈물이 눈가에 차올라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도 부족하고, 무슨 말을 해도 넘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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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857화

    너무 아팠다.유하의 눈가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 손은 여전히 승현의 가슴 위에 얹혀 있었지만, 끝내 밀어내지는 못했다.유하는 이를 악물었다.“난 너랑 같이 죽기 싫어. 남들이 알면 무슨 사랑해서 같이 죽은 줄 알 거 아냐? 그런 관계로 엮이기 싫어. 죽고 싶으면 너 혼자 죽어. 나까지 끌고 가지 마.”“그래.”승현은 웃었다.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그럼 집에 가자. 집에 밥도 다 돼 있어.”“집에 가서 밥 먹자.”...유하는 절벽 바닥에서 위로 겨우 끌어올려졌다.가까스로 절벽 가장자리에 제대로 섰다.이미 어두워진 뒤였다.아래를 내려다보니 새까맣게 가라앉아,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 같았다.다리에 힘이 빠졌고, 몸도 따라 흔들렸다.‘내가 미쳤었나?’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이렇게 오래.유하는 뒤로 물러나려다 몸이 휘청했다.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던 탓에 하체가 다 저려 있었다.조금만 움직여도 감각이 몰려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옆으로 쏠렸다.하지만 바닥에 쓰러지지는 않았다.몸을 붙잡아 세워준 뒤,승현은 그녀 앞에 반쯤 쪼그려 앉아 어깨를 두드렸다.“타.”유하는 가만히 있었다.승현이 웃었다.“왜, 우리 여보도 자기 남편 힘들까 봐 배려해 주는 건가? 난 뭐 괜...”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현은 낮게 숨을 내뱉었다.유하가 남자의 등에 세게 몸을 던지듯 엎드리며 머리를 한 번 내리쳤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승현은 낮게 웃었다.유하의 다리를 뒤에서 끌어 올려 허리에 고정하고, 그대로 그녀를 업었다.한 걸음 한 걸음, 흔들림 없이 산길을 내려왔다.논길을 지나, 작은 언덕 위의 집까지 그대로 업고 갔다.멀리서부터.유하는 멍해졌다.수십 년 동안 쓰이지 않던, 유하와 고모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집에서 어느새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집 안에는 불도 켜져 있었다.나무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 대나무 평상 옆에 상이 놓여 있었다.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이 가득 차 있었다.“산 올라가기 전에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856화

    승현은 오래전부터 알았다.자신은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다정하고 완벽한 연인이 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걸.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승현은 유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지금이 딱 그랬다.유하가 느끼는 고통, 가족을 잃고 세상과 분리된 듯한 감각, 정신을 붙잡은 채 조용히 무너져 내리는 상태를 승현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그 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어디서부터 위로해야 하는지도, 어디서부터 말려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아주 잠깐, 청산이라는 이름이 떠올랐다.그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하지만 생각은 거기까지였다.승현은 인정할 수 없었다.유하를 청산에게 넘겨주는 것도, 유하를 놓아주는 것도.유하가 지금 이만큼 무너져서 살고자 하는 마음조차 희미해졌다는 걸 알면서도, 승현은 유하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그래서 결국 생각을 바꿨다.그리고 답을 찾았다.설득할 수 없다면, 위로할 수 없다면, 막을 수 없다면...그럼 함께 가면 된다고.살아도 함께, 죽어도 함께.곰곰이 생각해 보면, 승현은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가문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해왔다.자기 인생의 선택권까지 내놓으면서.그 대가에는 승현의 결혼도, 승현의 사랑도 포함되어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의 연인, 그의 아내, 그의 유하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잃고 완전히 절망해 있는데, 그가 내밀 수 있는 것은 너무도 적었다.목숨 하나뿐이었다.그마저도 유하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목숨.하지만 승현은 그런 사람이었다.그에게 사랑은 이것뿐이었다.이 사랑은 아프고 숨 막혔지만, 그가 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것이었다.목숨과 심장과 영혼을 한꺼번에 내놓는 방식.뼈를 뽑고 골수를 파내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내미는 것.그래도 그것은 사랑이었다.모든 걸 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 뒤틀린 사랑.유하는 거절할 수 없었다.승현은 그녀가 거절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정 거절하고 싶다면, 원하지 않는다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855화

    승현은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손은 놓지 않았지만, 유하를 절벽에서 끌어내지도 않았다.대신 손을 잡은 채로, 절벽 가장자리에 함께 앉았다.그리고 웃으며 말했다.“딱 좋네. 여기서 해 지는 거 보자.”“이 손 놔.”유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승현은 멀어지는 하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타오르던 빛을 잃고 천천히 가라앉는 해를 향한 시선이었다.유하를 옆에 둔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밀어도 돼.”‘밀어?’유하는 바로 옆에 있는 절벽을 흘끗 보았다.지금 이 상태에서 조금만 몸을 비틀어도, 손을 뿌리치는 정도의 움직임만 있어도 이 거리라면 승현은 그대로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다.이 높이면 무사할 수 없었다.‘무슨 소리야?’그 생각이 그대로 말이 되었다.“무슨 뜻이야?”승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유하를 보았다.산 위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절벽은 바로 뒤에 있었지만, 얼굴에는 아무렇지 않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담담해서 오히려 말이 더 날카롭게 꽂혔다.“뜻은 그거야.”“지금 나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밀어. 그러면 손 놓을게.”“태건이도 여기 있잖아. 증인 서 줄 거야. 내가 발 헛디딘 거고, 넌 잘못 없어.”“미쳤어...”유하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둘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하늘이 서서히 주황빛으로 물들고 완전히 해 질 무렵이 되자 공기도 가라앉았다.이곳에서 내려다보니, 박씨 가문의 집마다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있었다.유하는 멍해졌다.꽉 잡힌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와 끈적거렸다.불쾌해서 손을 살짝 움직였지만, 오히려 더 세게 잡혔다.“이거 놓으라고.”오래 앉아 있던 탓에 짜증이 섞였다.“놓으면 그다음엔 뭐 할 건데?”승현은 해에서 시선을 떼고 유하를 똑바로 바라봤다.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너랑 무슨 상관이야!”“하...”승현이 짧게 웃었다.가늘게 휘어진 눈매가, 석양빛을 받아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목소리는 낮고 느렸다.한숨처럼 흘러나왔다.“상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854화

    유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할머니, 고모할머니도 가셨어요... 이미 알고 있죠?”말을 끝내고 나서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기도 했고, 목이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할머니랑 고모할머니는 이제 같이 있으니까... 안 외롭겠죠?”그 뒤에 이어질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그 말은 분명히 마음속에 있었다.‘나는 너무 외로워... 너무 보고 싶어.’유하는 미소를 지은 채 들꽃을 든 손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어 묘비에 살짝 닿게 했다.그리고 웃으며 말했다.“고모할머니가 마지막에 한 말이 이거였어요. 저한테... 할머니께 꽃 한 송이 전해 달라고.”눈물이 눈가에 차올라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그녀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하지만 이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무슨 말을 해도 부족하고, 무슨 말을 해도 넘칠 것 같았다.유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조용히 절을 했다.땅을 짚고 일어나는 순간, 정면에서 바람이 불어왔다.밀밭이 크게 일렁였고, 묘비 앞의 들꽃도 가볍게 흔들렸다.코끝으로 밀 향이 밀려들었다.어릴 적 마당에서 말리던 곡식 냄새와 같은 향이었다.잘 마른 햇볕의 냄새였다.유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밀밭 사이를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뒤돌아보지 않았다.그래서 보지 못했다.여자의 뒤를 계속 따라오며,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승현이 묘비 앞에 멈춰 서서 잘 여문 황금빛 밀 이삭 하나를 내려놓는 모습을.들꽃 옆에 가지런히 놓고, 무릎을 꿇어 몇 번 깊이 절을 한 뒤에 일어섰다.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걱정 마세요.”...묘지에서 내려온 뒤, 유하는 산으로 향했다.고향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유하는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돌산을 올랐다.돌산이라는 이름 그대로 풀이나 나무는 거의 없고 온통 돌뿐인 산이었다.예전에는 광산으로 쓰이던 곳이라, 곳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853화

    “언제부터 따라온 거야?”안채의 나무 소파 위에 유하는 누운 채로 천장의 나무 들보를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물었다.그 옆에 앉은 사람은 승현이었다. 승현은 손으로 유하의 배를 천천히 문지르고 있었다. 정확히는 계속 뒤틀리듯 아픈 위장을 조심스럽게 풀어주듯 어루만지고 있었다. 질문을 듣고서야 승현은 숨기지 않고 말했다.“네가 떠난 그날부터.”‘그래서였구나...’‘밤마다 어김없이 몸 위로 덮여 있던 외투가...’‘이 사람은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지.’유하는 더 묻지 않았다. 왜 그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도, 왜 지금 다시 나타났는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다만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위장이 아파서 정말로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될 줄은...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이틀 동안 시골에 내려와서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기분도 엉망이었고 이런 상태에서 위장이 버틸 리 없었다.그때, 근처 마을 사람 집에서 소박한 밥을 사 온 태건이 안으로 들어왔다.아무 말 없이 상 위에 음식을 내려놓고는 그대로 나갔다.유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대신 승현이 그녀를 반쯤 안아 올리듯 끌어당기며 죽 그릇을 들어 입가로 가져왔다.낮은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따뜻한 거라도 조금 먹어. 그래야 다른 것도 할 힘이 생겨.”유하는 고개를 돌렸다.“이렇게 먹기 싫으면, 내가 먹여줄게.”승현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이번엔 유하가 움직였다. 하지만 굶어서 힘이 빠진 상태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결국 승현의 품에 기대다시피 한 채 그가 안정적으로 그릇을 받쳐 주는 동안 위장약을 섞은 죽 한 그릇을 겨우 삼켰다.딱 그 한 그릇뿐이었다.더는 들어가지 않았다.죽을 먹고 나니 위장은 한결 나아졌고 기운도 아주 조금 돌아왔다.유하는 승현에게서 몸을 떼고 조금 떨어진 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숨을 골랐다.승현은 말리지 않았다.그녀가 물러나게 두고, 자신은 근처에서 사 온 남은 아침밥을 먹었다.김치, 찐빵

  •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제852화

    다시는 없을 것이다.그리고 유민은 알고 있었다.그해 여름밤에 벌어진 모든 일들, 유하가 알지 못하는 모든 세세한 조각들, 자신이 일부러 베개 밑에 내려놓았던 돈과 열쇠까지.그 모든 것은 영원히, 정말 영원히 유민 혼자만의 기억으로 남을 거라는 걸.두 사람의 이별은 그 밤부터 시작되었다.하지만 유민은 후회하지 않았다.유민이 유일하게 후회하는 건, 언제부터인가 기억 속의 누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자신을 사랑해 주던 누나.하지만 그 뒤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유민의 미래에는 더 이상 그런 사람은 없었다.그렇게 곁을 지켜주던 존재도 없다.유민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목이 쉬도록 울고, 머리가 어지러워질 때가 되어서야 유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쪼그려 앉아 저릿해진 다리를 잠시 풀고 돌아섰다.눈에는 끝도 없이 눈물이 맺힌 채 작은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잠겨 있는 나무문 앞에 멈춰 서서 있는 힘껏 문을 두드렸다.“누나, 미안해! 미안해! 지금까지 계속, 계속 미안했어. 아빠 엄마한테도... 다 미안하고... 그리고, 고마워.”‘고마워. 내가 어렸던 그 시간을 지켜줘서...’‘미안해. 누나를 잃어버려서...’유민은 알고 있었다.유하는 잠들지 않았지만, 이 문은 이제 다시는 자신을 향해 열리지 않을 거라는 것도.그래도 멈추지 않고 두드렸다.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을.누나에게.자신의 누나에게.“누나, 꼭 행복해야 해! 꼭, 꼭 웃으면서 살아!”...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멎었다.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유하는 마당 한가운데 놓인 대나무 평상에 앉아 있었다.눈은 텅 비어 있었다.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유하에게는 이 세상에 더 이상 가족이 없었다.자기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정말로 자기 혼자였다.유하는 조심스럽게 평상 위에 몸을 눕혔다.마른 대나무가 삐걱거리며 소리를 냈다.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지만, 유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그대로 누워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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