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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거짓된 마음

Author: 칠공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송완영은 멍하니 팔찌를 바라보았다. 이 팔찌는 지극히 진귀한 남산옥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5년 전, 아버지와 함께 산적 토벌에 공을 세우면서 폐하께서 포상으로 내린 귀한 옥이었다.

능양공주가 이 옥을 마음에 들어해서 몇 번이나 달라고 청했지만 매번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 이걸 팔찌로 만들었을까?

송완영은 기분이 미묘했다.

양기주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잠시 감상하듯 바라보더니 담담히 한마디 했다.

“꽤 어울리는군.”

정신을 차린 송완영은 팔찌를 도로 빼서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게 뭐 하자는 거지?”

양기주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생일은 이미 지났으니 선물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늦은 생일 선물과 애정은 가장 쓸모없고 하찮은 것이었다.

양기주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도로 껴.”

그는 강압적인 말과 함께 거칠게 옥팔지를 그녀의 손목에 끼워주었다.

“내일 아침 할머니한테 가서 보여드려야 내가 좀 편할 것 아니야. 할머니가 네 생일도 안 챙긴다고 얼마나 잔소리를 퍼붓는지 알아?”

송완영은 거친 손길에 빨갛게 된 손목을 바라보며 웃음이 나왔다.

값 비싼 선물과 거짓된 마음, 그녀를 대하는 그의 방식은 여전히 한결 같았다.

한때는 양기주는 그저 겉만 차갑고 속은 따뜻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그가 줬던 몇 안 되는 선물을 보물처럼 아꼈던 때가 있었다.

거짓된 마음을 진심으로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럼 내일 노부인께 보여드리고 돌려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그가 주는 선물을 받지 않을 것이다.

양기주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한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올려 강제로 시선을 맞추었다.

“송완영, 대체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이유가 뭐야?”

그가 분노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렵장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는 마치 겁에 질린 고슴도치처럼 그가 조금만 건드려도 경계를 세웠다.

송완영은 그의 눈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눈빛은 처량했다.

“고집이 아닙니다. 그냥 저에게 속하지 않은 것에 기대를 갖지 않기로 한 것이지요.”

그녀는 잔뜩 찌푸린 양기주의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도 포함해서요.”

양기주의 눈빛에서 순간 착잡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와 혜안이는….”

“송 이랑, 안에 계시나요?”

갑자기 마차 밖에서 유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가 망가져서 그러는데 혹시 같이 타고 돌아가도 될까요?”

양기주의 다리에 앉아 있던 송완영은 다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사내의 힘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허리춤을 지분거렸다.

한편, 밖에 있는 유혜안은 그녀가 대답이 없자 마차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송완영은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다급히 양기주를 밀쳤다.

양기주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더욱 과감하게 그녀의 몸 곳곳을 만졌다.

대낮에 마차 안에서 이러고 있으니 그녀는 노리개가 된 듯한 굴욕감이 들었다.

그녀는 살짝 분노한 얼굴로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이거 놓으십시오! 여긴 길거리란 말입니다!”

“우린 혼례를 올린 부부 아니더냐?”

양기주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뭘 두려워하는 거지, 부인?”

부인이라는 단어가 귓가에서 맴돌자 송완영의 얼굴은 금새 빨갛게 물들었다.

“혜안 아씨가 이걸 보고 상심하면 어쩌시려고요?”

양기주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으면서 마차 안을 감돌던 야릇한 분위기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유혜안은 밖에서 계속 마차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기주 오라버니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설마… 아버지와 몇 마디 나누고 급히 떠난 이유가 송완영 때문이었어?’

그런 의심이 들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차 창가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스륵 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가림막이 먼저 올려졌다. 순간 유혜안은 양기주의 준수한 얼굴을 마주했다.

“오라버니…”

유혜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역시나 송완영을 쫓아온 거였어!’

“올라와!”

양기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안 그래도 좁은 마차는 유혜안까지 오르자 더욱 비좁아졌다.

유혜안은 송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을 하고 단정하게 양기주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귓불이 빨갰다.

유혜안은 소매 안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송완영은 앉을 생각도 않고 마치 바람 피우다 걸린 정인을 바라보듯 그들을 노려보는 유혜안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양기주의 옆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으로 가서 앉자, 그제서야 유혜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양기주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양기주의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송완영은 오히려 자신이 외부인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보고 있기 힘들어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라버니도 차에 계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양기주는 희비를 알 수 없는 담담한 표정으로 유혜안이 잡고 있던 팔을 뺐다.

“혜안아, 여기 밖이야.”

유혜안은 잠깐 당황하더니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일깨워 주셔서 감사해요, 오라버니. 떨어져서 3년이나 지냈는데도 습관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네요. 앞으로는 저에게 너무 잘해주지 마시고 가끔은 이렇게 꾸중도 해주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사실 상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친근했는지 자랑하고 있었다.

양기주는 차마 그녀를 나무랄 수 없어서 잔잔한 미소만 지었다.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그 눈빛은 송완영이 지난 3년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받아본 적 없는 눈길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못난 자신을 비웃었다.

가는 내내 유혜안은 마치 그녀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끊임없이 자신과 양기주의 어린 시절 얘기를 꺼냈다.

말수가 적은 양기주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적절한 응답도 해주었다. 마치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는 듯이.

한참 시끄러움을 꾹 참고 있던 송완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도련님은 언제 유가로 가서 혼담을 꺼낼 계획인가요?”

유혜안의 웃음소리가 멈추었고 양기주는 분노한 눈으로 송완영을 빤히 노려보았다.

“너희 집에 가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급해?”

송완영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도련님과 혜안 아씨는 오랜 시간 정을 쌓아왔고, 이제 결실을 맺을 때가 되었으니 저도 도련님의 혼례에 약소하지만 힘을 보태고 싶어 드린 말이었습니다.”

그녀가 출첩서를 갖고 떠난다면 두 사람 사이를 막고 있던 장애물도 사라지게 되는 격이었다.

양기주는 그녀의 얼굴에서 한치 거짓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그녀를 빤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송완영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지금 네 신분으로는 내 혼사에 간섭할 자격이 없어.”

양기주의 매정한 목소리가 마차 안에 울렸다.

그에게 그녀는 언제까지나 첩일 뿐이었다.

정실은 존중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니 유혜안에게 밖에서는 예법에 주의하라며 일깨워주면서도, 그녀에게는 노리개 갖고 놀듯이 가볍게 굴었다.

송완영은 서글픈 눈물을 머금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통제를 잃은 마차가 그들의 마차를 향해 미친듯이 질주해 왔다. 마부는 마차가 통제를 잃자,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차 두 대가 부딪치고 마차 벽이 부서지며 송완영은 그대로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양기주를 향해 소리쳤다.

“도련님,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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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공주 전하, 소인 잠시 실례하겠습니다.”양기주가 앞으로 나서더니 장공주에게 예를 행했다.그의 출현은 팽팽한 긴장감을 그나마 덜어주었다.“소인 부인 송씨와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장공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송완영을 계속 자리에 남겨두었다가는 또 무슨 얘기를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그날 일은 절대 기주에게 알려져서는 안 돼!’송완영은 비웃음을 머금었다.연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양기주가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다.위압감 넘치는 눈으로 자신의 뒤통수만 노려보고 있는데 신경이 안 쓰였을 리 없었다.그녀가 장공주와 가화군주에게 갖은 수모를 당할 때는 침묵을 지키더니 아끼는 사촌 여동생이 궁지에 몰리자 바로 나서서 분위기를 무마했다.가화군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양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혜안뿐이었다.그러나 이제는 예전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고 이 상황이 우스울 뿐이었다.장공주 화원의 뒷산, 그들은 산 정상의 좁은 동굴로 들어갔다.바깥의 시끄러운 소리가 잦아들자 둘 사이의 팽팽한 분위기가 더 깊어졌다.양기주의 시선이 송완영에게 고정되었다.희미한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부드러운 흑발과 붉은 입술이 윤기 있게 반짝이고 있었다. 며칠 전 병에 시달려 시들어가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그녀는 마치 전장에서 승리한 여장군처럼 의젓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연회가 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송완영은 장공주와 가화군주에게 망신을 주고 은근히 유혜안을 조롱하기까지 했다.‘내 부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당당해졌지?’송완영은 조용히 양기주의 질책을 기다렸으나, 그는 입을 열자마자 뜻밖의 질문을 했다.“왜 거짓말을 했지?”만약 이 자리에서 그녀의 거짓을 간파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직 양기주뿐이었다.무릎의 흉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능통한 의술 실력을 가진 심여옥이 주고 간 옥용고를 발랐더니 보름도 되지 않아 흉터는 천천히 사라졌다.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그 상

  • 그만하겠습니다, 세자   제23화 더 이상 못 참아

    장공주는 송완영에게 자신의 본분을 잊지 말라고, 상인의 딸 따위가 장공주의 정문으로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한바탕 모욕을 줄 생각이었다.그런데 하필이면 태자가 나타나 그녀의 편을 들어주며 자신의 집사에게 곤장을 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태자가 한때 송완영의 집을 찾아가 혼사를 제안한 사실을 고모인 장공주는 알고 있었다.양기주에게 시집을 간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 태자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으니 장공주 입장에서는 여우가 따로 없었다.“너처럼 출신이 비천한 여인은 아버지의 희생으로도 첩실의 자리에 마땅하나, 폐하께서는 너희 송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측실의 자리를 윤허했다. 네가 주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응당 폐하께 과분한 자리라고 간청하고 본분에 맞게 첩실의 자리로 만족해야 하겠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혜안이가 착해서 그나마 널 봐준 것이지 다른 여인이었으면 택도 없어.”양기주는 송완영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장공주가 두 번이나 유혜안과 그의 혼인을 언급했음에도 송완영은 한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마치 자신이 무시당한 것 같아서 부아가 치밀었다.연회는 장공주와 가화군주가 송완영을 모욕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송완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저는 아버지의 위패를 들고 폐하를 찾아가 국공부와 혼인시켜달라고 폐하께 간청을 올린 적 없습니다. 그건 장공주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갑작스러운 반박에 장공주마저 당황했다.연회의 열기가 순식간에 가라앉고 귀부인과 귀족 여식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정신을 차린 장공주가 버럭 화를 냈다.“무엄하다! 감히 내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다니!”송완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당당히 장공주와 시선을 마주했다.“3년 전 5월 초, 장공주께서는 청색 두루마리를 입은 어린 태감을 저희 집으로 보내 폐하께서 저를 부르시니 아버지의 위패를 안고 입궁하라고 전하였습니다. 저는 그 태감을 따라 집을 나왔고 그

  • 그만하겠습니다, 세자   제22화 이제 정실을 들여야지 않겠니?

    4년 전, 그녀의 집으로 찾아와 혼담을 건네던 때와 똑 같은 모습이었다.그때 송완영은 어쩌다가 태자의 눈에 들었는지 몰라 당혹스럽고 의아하기만 했다.그녀처럼 집안이 탄탄치 않은 출신이 태자의 첩실이 된다는 것은 크나큰 은혜였으나, 태자는 무려 그녀에게 측비의 자리를 제안했다.갑작스럽게 찾아온 부귀영화에 혹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간곡히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태자도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집을 빠져나갔고 그날 일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황실 체면도 지키면서 그녀의 명성에도 누가 되지 않았다.송완영은 그런 태자가 존경스럽고 감사했다.하지만 소리없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 최대한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연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었지만 장공주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장공주의 지위가 있으니 아무도 감히 연유를 묻지 못했다. 그녀는 황제의 동복 누이로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평소 미남을 좋아하는 그녀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스무 명 넘은 남첩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경성의 세가들은 대부분 그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연회 분위기는 장공주의 싸늘한 표정 때문에 무거운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바위를 사이에 둔 남자 구역은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태자가 상석에 앉고 양기주는 그의 왼쪽 자리를 차지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영평 후작의 적자 도영이 도착했다. 그는 대범하게 태자께 늦었다며 사죄를 드렸다.태자도 그의 죄를 묻는 대신,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주며 농을 걸었다.“너는 벌써 온 정신이 옆 여객들 구역에 팔려 있으니 이 정도면 늦은 편도 아니지.”도영은 미인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묘한 발언을 했다.“뭐 볼 게 있겠습니까? 경성의 귀족가 여식들 중에 송완영의 미모를 따라갈 자가 있어야지요. 시집을 잘못 간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술잔을 든 양기주는 오늘따라 술맛이 쓰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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