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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친정 방문

Author: 칠공주
향설각에서 나온 송완영은 담담히 손을 뺐다.

손에 닿았던 온기가 갑자기 사라지자, 양기주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힐끗 보고는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었다.

송완영은 그가 왜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달래줄 기분도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남남처럼 거리를 두고 걸었다.

문안을 드리고 돌아오는 길, 송완영은 고씨 어멈이 그녀가 만든 계화떡을 개먹이로 던져주는 것을 보았다.

그녀를 발견한 어멈은 경멸에 찬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고는 싸늘히 말했다.

“송 이랑, 마님께서는 계화떡이 너무 달아서 입맛에 안 맞으니 개먹이로 주라고 하셨습니다.”

소월은 분노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찌 저희 아씨의 성의를 이런 식으로 짓밟으십니까!”

송완영은 조용히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가자.”

가화군주가 작정하고 그녀에게 모욕을 준다면 그녀 역시 가화군주에게 행했던 호의를 거두어들일 것이다.

처소로 돌아온 송완영은 집안일을 관리하는 어멈들을 따로 불렀다.

송완영이 말했다.

“앞으로 마님 처소로 보내는 녹봉은 원래 국공부의 관례대로 보내드리고 추가로 더 보내드릴 필요 없습니다.”

가화군주는 어릴 때부터 호사를 누리면서 컸다. 허나 아버지인 형친왕이 별세한 이후로 가문은 점점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가문의 적장녀인 가령군주는 시집을 가면서 왕부의 모든 재산을 혼수로 가져갔다.

그래서 가화군주는 가져온 혼수품이 거의 없었다.

소박한 생활을 지양하는 국공부는 각 마님들의 처소로 보내는 녹봉도 제한했는데 그 정도 금액으로는 가화군주의 허영심을 채우기에 역부족이었다.

그 동안 송완영은 자신의 혼수를 축내면서 시어머니의 허영심을 채워주었다.

예전에는 양기주를 연모해서 흔쾌히 해드렸지만 가화군주는 본디 그런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양기주는 오늘따라 화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주언은 모시는 주인이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자, 등골이 오싹했다.

“주언, 요즘 점점 태만해지고 있어!”

주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양기주를 바라보았다.

양기주는 노부인 처소에서 나왔을 때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주언은 억울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도련님, 소인이 뭘 잘못했습니까?”

“일년 녹봉을 삭감하도록 해!”

주언의 형인 주성이 다가와 동생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도련님 앞에 얼쩡거리지 말고 좀 멀리 떨어져.”

주언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형에게 말했다.

“형님, 저 도련님 눈밖에 날만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눈치 빠른 주성은 주인이 왜 화가 났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너한테 부인에게 주려고 산 선물을 마님한테 가져가래?”

주언이 변명하듯 말했다.

“둘째 도련님이 저에게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제가 재물에 눈먼 놈도 아니고, 그래서 마님께 드리려 했지요. 도련님과 마님의 사이도 완화할 겸, 좋은 마음으로 한 건데 뭐가 문제인가요?”

양기주와 어머니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국공부 사람이면 다 아는 일이었다.

“괜한 짓을 했네!”

주성은 주언의 뒤통수를 힘주어 때리며 말했다.

“네가 마노 팔찌를 마님에게 드려서 마님이 그걸 혜안 아씨한테 주었고, 혜안 아씨가 부인 앞에서 자랑질하게 만들었잖아! 넌 좋은 마음에 한 일이었어도, 부인의 가슴에는 비수가 꽂혔다 이 말이야!”

주언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말했다.

“제가 부인한테 가서 해명하겠습니다!”

“뭘 해명해? 둘째 도련님이 왜 부인을 위해 준비한 생일 선물을 버렸는지 해명하려고?”

주성은 한심한 표정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양기주와 송완영 사이는 말 한마디로 풀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기주는 주성 형제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점점 더 짜증이 치밀었다. 병서를 펼쳤지만 한 글자도 써내려갈 수 없었다.

한편, 처소로 돌아온 송완영이 옷을 갈아입는데 대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와서 마차가 준비되었다고 고했다.

예법대로라면 첩실은 마음대로 외출이 불가하고 친정에 방문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노부인이 그녀에게 정실의 대우를 해주면서 매달 하루는 친정에 돌아가서 하룻밤 자고 올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그녀가 마차에 오르려는데 양기주가 다가왔다.

송완영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친정에 간다며? 안 타?”

‘설마 나랑 같이 가려고? 하지만 어제는 분명….’

그녀는 냉담한 어투로 거절했다.

“소첩이 어찌 감히 도련님의 시간을 뺏겠습니까. 소첩은 도련님의 정실도 아니니 자격이 없지요.”

양기주의 안색이 음침하게 굳었다.

“왜? 친정에 외간남자라도 숨겨뒀어?”

어처구니없는 말에 송완영도 화가 치밀었다.

“그건 도련님께서 바라던 바가 아닙니까. 제가 외간사내와 사통한 증거를 잡으면 저를 집안에서 내쫓을 명분이 생기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서 눈물이 나왔다. 정실은 출처서라도 받을 수 있지만 첩실은 쫓겨나도 아무런 보장을 받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양기주와 혼인하고 국공부의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며 작은 실수 한번 한 적 없었다. 그들의 혼인은 폐하의 첩지로 이루어졌으니 양기주가 그녀를 두고 유혜안을 정실로 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스스로 떠난다면 양기주에게도 부담을 덜어주는 격이었다.

양기주가 억지를 부렸다.

“역시 외간남자를 숨겨두고 있었네. 그럼 내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확인해야겠다!”

말을 마친 그는 재빨리 마차에 올랐다.

“오라버니.”

이때, 그의 앞으로 다가온 유혜안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오라버니, 송 이랑과 외출하시려던 참이었나 봐요?”

“무슨 일이지?”

양기주가 물었다.

유혜안은 송완영의 눈치를 살피고는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별일은 아니고, 아버지께서 오늘 휴식이라 오라버니랑 같이 집에 가보고 싶어서요. 아버지께서 오라버니께 친히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그녀의 아버지 유경년은 3년 전 횡령죄로 3품 관원에서 6품 지방관리로 좌천을 당했다가 얼마 전에 양기주 덕분에 원래 관직으로 복귀한 사람이었다.

양기주는 주저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마차를 준비하라 하마.”

‘역시 이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유혜안뿐이구나.’

유혜안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도 송혜안에게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송 이랑. 오라버니께서 저랑 집에 같이 가는 것 때문에 화나신 거 아니죠?”

겉보기에는 예의를 차린 것처럼 보여도 사실 상 그녀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

송완영은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혜안 아씨의 곁에 있어주는 건 도련님의 본분이지요.”

그녀는 점점 더 떠나기로 한 결정이 확고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양기주의 귀에 너무도 거슬리게 들렸다. 그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미 마차에 오른 송완영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유혜안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제가 또 말실수를 한 건가요? 송 이랑께서 기분이 매우 안 좋아 보이네요.”

양기주는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 사람은 신경 쓸 것 없어.”

“오라버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송 이랑이랑 잘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유혜안은 마치 자신이 이 집안의 정실이 된 것처럼 굴었다.

“송 이랑이 조용히 본분만 잘 지키면, 저희 둘이 같이 오라버니를 내조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양기주의 답을 기다렸다.

한참 침묵하던 양기주의 시선이 유혜안이 하고 있는 마노 팔찌에 닿았다. 흐린 날임에도 맑은 붉은색은 유난히 빛이 났다.

“팔찌 색상이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구나. 앞으로는 하고 다니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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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공주 전하, 소인 잠시 실례하겠습니다.”양기주가 앞으로 나서더니 장공주에게 예를 행했다.그의 출현은 팽팽한 긴장감을 그나마 덜어주었다.“소인 부인 송씨와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장공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송완영을 계속 자리에 남겨두었다가는 또 무슨 얘기를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그날 일은 절대 기주에게 알려져서는 안 돼!’송완영은 비웃음을 머금었다.연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양기주가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다.위압감 넘치는 눈으로 자신의 뒤통수만 노려보고 있는데 신경이 안 쓰였을 리 없었다.그녀가 장공주와 가화군주에게 갖은 수모를 당할 때는 침묵을 지키더니 아끼는 사촌 여동생이 궁지에 몰리자 바로 나서서 분위기를 무마했다.가화군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양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혜안뿐이었다.그러나 이제는 예전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고 이 상황이 우스울 뿐이었다.장공주 화원의 뒷산, 그들은 산 정상의 좁은 동굴로 들어갔다.바깥의 시끄러운 소리가 잦아들자 둘 사이의 팽팽한 분위기가 더 깊어졌다.양기주의 시선이 송완영에게 고정되었다.희미한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부드러운 흑발과 붉은 입술이 윤기 있게 반짝이고 있었다. 며칠 전 병에 시달려 시들어가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그녀는 마치 전장에서 승리한 여장군처럼 의젓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연회가 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송완영은 장공주와 가화군주에게 망신을 주고 은근히 유혜안을 조롱하기까지 했다.‘내 부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당당해졌지?’송완영은 조용히 양기주의 질책을 기다렸으나, 그는 입을 열자마자 뜻밖의 질문을 했다.“왜 거짓말을 했지?”만약 이 자리에서 그녀의 거짓을 간파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직 양기주뿐이었다.무릎의 흉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능통한 의술 실력을 가진 심여옥이 주고 간 옥용고를 발랐더니 보름도 되지 않아 흉터는 천천히 사라졌다.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그 상

  • 그만하겠습니다, 세자   제23화 더 이상 못 참아

    장공주는 송완영에게 자신의 본분을 잊지 말라고, 상인의 딸 따위가 장공주의 정문으로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한바탕 모욕을 줄 생각이었다.그런데 하필이면 태자가 나타나 그녀의 편을 들어주며 자신의 집사에게 곤장을 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태자가 한때 송완영의 집을 찾아가 혼사를 제안한 사실을 고모인 장공주는 알고 있었다.양기주에게 시집을 간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 태자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으니 장공주 입장에서는 여우가 따로 없었다.“너처럼 출신이 비천한 여인은 아버지의 희생으로도 첩실의 자리에 마땅하나, 폐하께서는 너희 송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측실의 자리를 윤허했다. 네가 주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응당 폐하께 과분한 자리라고 간청하고 본분에 맞게 첩실의 자리로 만족해야 하겠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혜안이가 착해서 그나마 널 봐준 것이지 다른 여인이었으면 택도 없어.”양기주는 송완영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장공주가 두 번이나 유혜안과 그의 혼인을 언급했음에도 송완영은 한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마치 자신이 무시당한 것 같아서 부아가 치밀었다.연회는 장공주와 가화군주가 송완영을 모욕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송완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저는 아버지의 위패를 들고 폐하를 찾아가 국공부와 혼인시켜달라고 폐하께 간청을 올린 적 없습니다. 그건 장공주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갑작스러운 반박에 장공주마저 당황했다.연회의 열기가 순식간에 가라앉고 귀부인과 귀족 여식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정신을 차린 장공주가 버럭 화를 냈다.“무엄하다! 감히 내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다니!”송완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당당히 장공주와 시선을 마주했다.“3년 전 5월 초, 장공주께서는 청색 두루마리를 입은 어린 태감을 저희 집으로 보내 폐하께서 저를 부르시니 아버지의 위패를 안고 입궁하라고 전하였습니다. 저는 그 태감을 따라 집을 나왔고 그

  • 그만하겠습니다, 세자   제22화 이제 정실을 들여야지 않겠니?

    4년 전, 그녀의 집으로 찾아와 혼담을 건네던 때와 똑 같은 모습이었다.그때 송완영은 어쩌다가 태자의 눈에 들었는지 몰라 당혹스럽고 의아하기만 했다.그녀처럼 집안이 탄탄치 않은 출신이 태자의 첩실이 된다는 것은 크나큰 은혜였으나, 태자는 무려 그녀에게 측비의 자리를 제안했다.갑작스럽게 찾아온 부귀영화에 혹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간곡히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태자도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집을 빠져나갔고 그날 일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황실 체면도 지키면서 그녀의 명성에도 누가 되지 않았다.송완영은 그런 태자가 존경스럽고 감사했다.하지만 소리없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 최대한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연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었지만 장공주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장공주의 지위가 있으니 아무도 감히 연유를 묻지 못했다. 그녀는 황제의 동복 누이로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평소 미남을 좋아하는 그녀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스무 명 넘은 남첩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경성의 세가들은 대부분 그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연회 분위기는 장공주의 싸늘한 표정 때문에 무거운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바위를 사이에 둔 남자 구역은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태자가 상석에 앉고 양기주는 그의 왼쪽 자리를 차지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영평 후작의 적자 도영이 도착했다. 그는 대범하게 태자께 늦었다며 사죄를 드렸다.태자도 그의 죄를 묻는 대신,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주며 농을 걸었다.“너는 벌써 온 정신이 옆 여객들 구역에 팔려 있으니 이 정도면 늦은 편도 아니지.”도영은 미인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묘한 발언을 했다.“뭐 볼 게 있겠습니까? 경성의 귀족가 여식들 중에 송완영의 미모를 따라갈 자가 있어야지요. 시집을 잘못 간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술잔을 든 양기주는 오늘따라 술맛이 쓰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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