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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구박

Author: 칠공주
송완영은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근래 밤중에 비가 많이 내려서 등 뒤에 난 상처뿐만 아니라 가슴에 난 상처까지 아파서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렵게 잠에 들었더니 혼란스러운 꿈이 찾아왔다. 양기주가 나타나 뜨겁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침상에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녀를 소중하게 보듬어주는 그 손길에 송완영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그런 열기는 곧이어 싸늘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귓가에 그의 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측실이라고 해도 결국엔 첩이야. 미색으로 사내를 홀리는 첩. 정실 부인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혜안이 뿐이야.”

무정한 말이 그녀의 가슴을 옥죄었다.

다음 날 아침, 송완영은 앙칼진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가화군주 신변의 고씨 어멈이 기세등등하게 정원으로 들어오더니 소리쳤다.

“송 이랑, 마님께서 계화떡이 드시고 싶다 하니 얼른 준비해서 가져가세요!”

가화군주가 송완영을 경멸하니 아랫사람들이 그녀를 존중할 리 없었다.

소월은 따뜻한 물을 갖고 침방에 들어가 송완영의 시중을 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제 겨울이 금방 지나가서 계화 나무에 싹도 얼마 돋지 않았는데 마님께서 계화떡을 내놓으라니. 일부러 아씨를 곤란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눈치 빠른 남주가 말했다.

“혜안 아씨가 어제 우리 아씨 앞에서 둘째 도령이 선물한 마노 팔찌를 자랑했다가 노부인께 한소리 들었잖아. 그래서 마님께서 노부인께 뭐라 하지는 못하고 우리 아씨한테 화풀이하시는 것 아니겠어?”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은 게 아니었다. 겨울에 연잎 죽을 내놓으라거나 여름철에 굳이 매화차를 마시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가화군주의 수법을 잘 알고 있는 송완영은 당황하지 않고 세수를 끝낸 후에 남주에게 분부했다.

“작년 가을에 말린 계화가 조금 있으니 그거로 만들면 돼.”

송완영이 계화떡을 들고 향설각에 걸음했을 때, 하늘에서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 상을 차리던 고씨 어멈은 그녀를 보더니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마님께서 들어오시라는 말씀이 없으셨으니, 송 이랑은 정원에서 기다리세요.”

소월이 우산을 펼치고 송완영에게 비를 막아주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어멈이 그녀와 어깨를 부딪쳤다.

어멈은 바닥에 떨어진 우산을 발로 밟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이고,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송 이랑께서는 온화하고 사려 깊은 분이니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겠지요?”

소월이 분개하며 소리쳤다.

“고의로 부딪친 거잖습니까!”

송완영은 그런 소월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얄팍한 수에 당한 것이 벌써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가화군주는 예법을 모른다며 그녀를 꾸중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인 점은 이런 수모를 참아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비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그녀는 하는 수없이 옷소매로 계화떡을 가렸다.

갑자기 비가 멈추어서 고개를 올렸더니 언제 온 것인지, 양기주가 우산 하나를 들고 등 뒤에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의 그는 순백의 두루마리에 백옥이 박힌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귀티가 넘치는 그 모습은 왕년에 송완영을 설레게 했던 모습과 똑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마음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도련님께 문안드립니다.”

그녀는 공손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예를 올렸다.

옅은 화장에 연분홍색 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청초하고 아름다웠지만 푹 젖은 머리카락으로 인해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양기주는 그녀가 들고 있는 계화떡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머니께서 밖으로 나오셔서 간식을 드실 것도 아닌데, 가져왔으면 안으로 들어가야지 뭐 하러 밖에서 비를 맞고 있어?”

말을 마친 그는 그녀를 이끌고 내전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어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마님께서는 아직 송 이랑께 들어오라는 언질이 없으셨습니다.”

양기주는 분노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하찮은 아랫것 따위가 어느 안전이라고 건방을 떠는 것이냐! 내 부인이 내전으로 들어가는데 네게 허락을 받아야 해?”

겁에 질린 어멈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양기주는 잘 걸렸다 싶었다.

“여봐라!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개새끼를 당장 쫓아내고 곤장을 쳐라!”

한창 안에서 구경 중이던 가화군주가 그제야 밖으로 나왔다.

“기주야, 자고로 양반이란 넓은 아량을 베풀어야 하는 법이거늘. 어찌 나이도 많은 어멈에게 그리 각박하게 구는 것이냐?”

하지만 양기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비 묻은 신발이 내전 바닥을 더럽히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저 어멈의 신발에 진흙이 묻은 것을 보고 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우려하여 내쫓은 것인데, 제가 잘못을 하였습니까?”

공손한 말투에서 그의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가화군주는 아들과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양기주가 어렸을 때, 가화군주는 첩실과 기싸움을 하느라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한번은 국공을 홀린 시종을 잡는다고 한 살 된 양기주를 뒷산에 버려두고 가서 한 겨울에 아이가 얼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노부인은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가화군주에게 분노하여 양기주를 데려다가 신변에 두고 키우게 되었다. 나중에 가화군주가 잘못을 깨닫고 어떻게든 아들과의 사이를 완화하려 했지만 그때 양기주는 훌쩍 커버린 뒤였다.

가화군주가 이토록 송완영을 반대하는 이유는 노부인의 기세를 꺾고 아들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어쨌거나 노부인이 마음에 들어한 사람은 가화군주에게 적이었고, 그녀는 노부인이 혐오하는 사람에게만 정을 주었다.

가화군주는 이런 일로 아들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네 생각대로 처리하렴.”

그녀의 표독한 시선이 송완영에게 닿았다.

양기주는 몸을 비틀어 송완영을 가리고 어머니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예전이었다면 그의 이런 모습에 감격했겠지만 지금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얼마 전, 양기주가 친우인 온유백에게 불평을 토로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른 척하면 할머니는 내가 처도 지키지 못한다고 나무라실 텐데, 나라고 별 수가 있나!”

그때 송완영은 양기주의 눈에 가득 담긴 혐오와 짜증을 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그가 그녀를 위해 한 일들이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화떡을 식탁에 내려놓자, 가화군주는 양기주와 유혜안을 자리에 앉히고 송완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가화군주에게 그녀는 서서 시중을 드는 시종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 저는 완영이랑 같이 할머니께 문안드리러 가야 합니다.”

열심히 양기주의 앞접시에 반찬을 챙겨주던 유혜안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아들과 유혜안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싶었던 가화군주는 간곡히 만류했다.

“어머님은 기상이 늦으시니 아침 먹고 가도 늦지 않아. 정 마음이 불편하면 송 이랑한테 먼저 가라고 하면 되지 않니.”

양기주가 담담히 말했다.

“그건 예법에 맞지 않아요.”

유혜안은 송완영의 손을 잡고 내전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 역시나 송완영 저년을 신경 쓰고 계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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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공주 전하, 소인 잠시 실례하겠습니다.”양기주가 앞으로 나서더니 장공주에게 예를 행했다.그의 출현은 팽팽한 긴장감을 그나마 덜어주었다.“소인 부인 송씨와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장공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송완영을 계속 자리에 남겨두었다가는 또 무슨 얘기를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그날 일은 절대 기주에게 알려져서는 안 돼!’송완영은 비웃음을 머금었다.연회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양기주가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다.위압감 넘치는 눈으로 자신의 뒤통수만 노려보고 있는데 신경이 안 쓰였을 리 없었다.그녀가 장공주와 가화군주에게 갖은 수모를 당할 때는 침묵을 지키더니 아끼는 사촌 여동생이 궁지에 몰리자 바로 나서서 분위기를 무마했다.가화군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양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혜안뿐이었다.그러나 이제는 예전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고 이 상황이 우스울 뿐이었다.장공주 화원의 뒷산, 그들은 산 정상의 좁은 동굴로 들어갔다.바깥의 시끄러운 소리가 잦아들자 둘 사이의 팽팽한 분위기가 더 깊어졌다.양기주의 시선이 송완영에게 고정되었다.희미한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부드러운 흑발과 붉은 입술이 윤기 있게 반짝이고 있었다. 며칠 전 병에 시달려 시들어가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그녀는 마치 전장에서 승리한 여장군처럼 의젓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연회가 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송완영은 장공주와 가화군주에게 망신을 주고 은근히 유혜안을 조롱하기까지 했다.‘내 부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당당해졌지?’송완영은 조용히 양기주의 질책을 기다렸으나, 그는 입을 열자마자 뜻밖의 질문을 했다.“왜 거짓말을 했지?”만약 이 자리에서 그녀의 거짓을 간파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직 양기주뿐이었다.무릎의 흉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능통한 의술 실력을 가진 심여옥이 주고 간 옥용고를 발랐더니 보름도 되지 않아 흉터는 천천히 사라졌다.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그 상

  • 그만하겠습니다, 세자   제23화 더 이상 못 참아

    장공주는 송완영에게 자신의 본분을 잊지 말라고, 상인의 딸 따위가 장공주의 정문으로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한바탕 모욕을 줄 생각이었다.그런데 하필이면 태자가 나타나 그녀의 편을 들어주며 자신의 집사에게 곤장을 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태자가 한때 송완영의 집을 찾아가 혼사를 제안한 사실을 고모인 장공주는 알고 있었다.양기주에게 시집을 간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 태자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으니 장공주 입장에서는 여우가 따로 없었다.“너처럼 출신이 비천한 여인은 아버지의 희생으로도 첩실의 자리에 마땅하나, 폐하께서는 너희 송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측실의 자리를 윤허했다. 네가 주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응당 폐하께 과분한 자리라고 간청하고 본분에 맞게 첩실의 자리로 만족해야 하겠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혜안이가 착해서 그나마 널 봐준 것이지 다른 여인이었으면 택도 없어.”양기주는 송완영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장공주가 두 번이나 유혜안과 그의 혼인을 언급했음에도 송완영은 한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마치 자신이 무시당한 것 같아서 부아가 치밀었다.연회는 장공주와 가화군주가 송완영을 모욕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송완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저는 아버지의 위패를 들고 폐하를 찾아가 국공부와 혼인시켜달라고 폐하께 간청을 올린 적 없습니다. 그건 장공주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갑작스러운 반박에 장공주마저 당황했다.연회의 열기가 순식간에 가라앉고 귀부인과 귀족 여식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정신을 차린 장공주가 버럭 화를 냈다.“무엄하다! 감히 내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다니!”송완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당당히 장공주와 시선을 마주했다.“3년 전 5월 초, 장공주께서는 청색 두루마리를 입은 어린 태감을 저희 집으로 보내 폐하께서 저를 부르시니 아버지의 위패를 안고 입궁하라고 전하였습니다. 저는 그 태감을 따라 집을 나왔고 그

  • 그만하겠습니다, 세자   제22화 이제 정실을 들여야지 않겠니?

    4년 전, 그녀의 집으로 찾아와 혼담을 건네던 때와 똑 같은 모습이었다.그때 송완영은 어쩌다가 태자의 눈에 들었는지 몰라 당혹스럽고 의아하기만 했다.그녀처럼 집안이 탄탄치 않은 출신이 태자의 첩실이 된다는 것은 크나큰 은혜였으나, 태자는 무려 그녀에게 측비의 자리를 제안했다.갑작스럽게 찾아온 부귀영화에 혹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간곡히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태자도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집을 빠져나갔고 그날 일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황실 체면도 지키면서 그녀의 명성에도 누가 되지 않았다.송완영은 그런 태자가 존경스럽고 감사했다.하지만 소리없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 최대한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연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었지만 장공주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장공주의 지위가 있으니 아무도 감히 연유를 묻지 못했다. 그녀는 황제의 동복 누이로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평소 미남을 좋아하는 그녀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스무 명 넘은 남첩을 거느리고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경성의 세가들은 대부분 그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연회 분위기는 장공주의 싸늘한 표정 때문에 무거운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바위를 사이에 둔 남자 구역은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태자가 상석에 앉고 양기주는 그의 왼쪽 자리를 차지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영평 후작의 적자 도영이 도착했다. 그는 대범하게 태자께 늦었다며 사죄를 드렸다.태자도 그의 죄를 묻는 대신,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주며 농을 걸었다.“너는 벌써 온 정신이 옆 여객들 구역에 팔려 있으니 이 정도면 늦은 편도 아니지.”도영은 미인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묘한 발언을 했다.“뭐 볼 게 있겠습니까? 경성의 귀족가 여식들 중에 송완영의 미모를 따라갈 자가 있어야지요. 시집을 잘못 간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술잔을 든 양기주는 오늘따라 술맛이 쓰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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