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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택은 내가 아니었다
그의 선택은 내가 아니었다
Author: 아령

제1화

Author: 아령
유한빈의 눈빛에는 고통과 미안함이 엉켜 있었다.

“여보, 조금만 참아 줘. 가영이는 어릴 때부터 곱게만 자랐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가영이는 못 견뎌.”

진수지는 멍하니 유한빈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웃음이 터졌는데, 눈물이 먼저 흘러내렸다.

“그럼... 나는 견딜 수 있고?”

그때 진수지는 온몸이 다 닳아 버린 듯 지쳤다.

더는 유한빈을 사랑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

법무법인 상담실에서 진수지는 준비된 서류에 차례로 이름을 적었다.

남편 서명란만 비어 있었다.

진수지는 담당 변호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남편 이름은 제가 대신 써도 되나요?”

변호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안경을 밀어 올렸다.

“본인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법적 효력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잠시 침묵한 뒤 진수지는 유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원가영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오빠, 나 서오동 그 디저트 먹고 싶어...]

진수지의 가슴을 날카롭게 ‘쿡’ 찌르는 듯했다. 그래도 목소리는 최대한 차분하게 억제했다.

“상의할 일이 있어.”

곧 유한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데? 지금 좀 바빠. 웬만한 일은 당신이 결정해도 돼.]

진수지는 다시 확인했다.

“무슨 일이든 내가 대신 결정해도 돼?”

유한빈은 가볍게 웃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당연하지. 결혼하고 집안일 중에 당신 손 안 거친 게 뭐가 있어?]

“알았어. 그럼 이번 일도 내가 결정할게.”

통화를 끊은 진수지는 고개를 숙였다. 빈칸 위에 유한빈의 이름을 한 획씩 또박또박 적었다.

서류를 챙겨 주던 변호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협의 이혼은 한 달 뒤 확정됩니다. 그 전에 마음이 바뀌시면 이혼 신청을 철회할 수 있습니다.”

진수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럴 일 없어요.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 결혼은 반드시 끝낼 거야.’

...

상담실을 나온 진수지는 곧바로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했다.

“임신중절을 하려고 왔어요.”

의사는 검사지를 훑어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수술을 진행하시겠습니까? 태아는 건강합니다.”

“네. 진행해 주세요.”

수술대 위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금속 소리가 진수지의 몸을 떨리게 했다.

진수지는 눈을 감았다. 유한빈이 자신을 따라다니던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학생회장이었던 유한빈은 단상에 올라 축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수지를 처음 보자 유한빈은 준비한 말조차 잊어버렸다.

그 뒤로 캠퍼스에서는 말이 돌았다.

경영학부에서 제일 인기 많던 선배가 후배에게 제대로 빠졌다고.

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차가운 남자가 한 여자를 꼬박 1년 동안 따라다녔다.

첫눈이 내리던 날, 유한빈은 여학생 기숙사 앞에 장미 천 송이를 세워 두고 눈 속에서 밤을 새웠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진수지가 무심코 ‘서오동 케이크 먹고 싶다’고 한 말 한마디에 도시 반대편까지 차를 운전해서 갔다.

진수지의 마음이 완전히 흔들린 건 학교 축제 무대에서였다.

진수지는 피아노 독주를 하던 중에 건반 하나가 걸려 버렸다.

행사장의 분위기가 순간 어색하게 굳어졌다.

그때 유한빈이 말없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진수지 옆에 앉은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같이 칠게.”

긴 손가락이 건반 위에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함께 〈꿈속의 결혼식〉을 끝까지 연주했다.

곧바로 관중의 함성이 천장을 뒤흔들었다.

유한빈은 진수지만 바라보며 속삭였다.

“수지야, 나는 평생 네가 아니면 안 돼.”

그렇게 진수지는 마음을 열었다.

유한빈은 약속을 지켰다. 연애부터 결혼까지, 진수지를 누구보다 귀하게 대했다.

다만 진수지가 늘 신경이 쓰였던 사람은 유한빈의 곁을 떠나지 않는 소꿉친구 원가영이었다.

“가영이는 그냥 동생이야.”

유한빈은 늘 그렇게 말했다.

“가영이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 목숨을 구해 주셨어. 가영이 집안이 무너졌는데 내가 모른 척할 수는 없어.”

진수지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어느새 원가영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림자가 되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날 동안 진수지는 원가영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지난해 생일에는 유한빈이 함께 오로라를 보러 가자고 약속했지만, 원가영이 열이 난다는 이유로 약속은 취소됐다.

결혼기념일에 진수지가 여러 가지를 준비해 두었지만, 원가영이 천둥이 무섭다고 전화하자 유한빈은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진수지가 39도 고열로 침대에 누워 있던 날, 유한빈은 원가영과 놀이공원 관람차를 타는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고 있었다.

진수지는 한 번, 또 한 번 참고 넘겼다.

이번엔 달랐다. 유한빈은 원가영을 위해 두 사람의 아이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아이도 놓아야 했다.

유한빈이라는 사람도 더는 붙잡지 않을 것이다.

수술실 불이 꺼졌을 때, 진수지는 영혼까지 함께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벽을 짚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다리는 아직 떨렸고, 아랫배에는 둔한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복도 코너를 돈 진수지는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야 했다. 눈앞의 장면이 차가운 얼음물처럼 온몸을 덮쳤다.

긴 의자 앞에서 유한빈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귀를 원가영의 살짝 나온 배에 붙인 채.

“아기가 찼어!”

원가영은 눈꼬리가 휘어지며 활짝 웃었다.

“오빠, 엄마 배를 잘 차는 아기가 똑똑하대.”

유한빈은 원가영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목소리는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부드러웠다.

“아기가 무사하기만 하면 돼.”

진수지는 손에 든 진료기록부를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는... 지금 진수지의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진수지는 달려가 따져야 했다.

유한빈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의 친자식은 차가운 기구 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냐고 물어야 했다.

처음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유한빈도 이렇게 기뻐하며 진수지를 안고 거실을 세 바퀴나 돌았다는 걸 기억하는지 물어야 했다.

하지만 진수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햇살 아래 다정하게 서 있는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분노, 억울함, 미련은 결국 깊은 피로감으로 가라앉았다.

진수지가 돌아서려던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유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유한빈의 목소리에는 놀란 기색이 섞여 있었다.

“왜 병원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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