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고은채와 함께 나타났을 때 백연신은 일부러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하지만 그것도 한지영의 얘기를 듣고는 완전히 무너졌다.“하지만 고은채 씨와...”임유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야. 지금 상황으로는 그게 가문을 되찾는 일인 것 같기는 하지만.”“네 말은 백연신 씨가 가문을 돌려받기 위해서 고은채 씨를 선택했다는 거야?”“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임유진은 그 말에 입을 꾹 닫고 생각에 잠겼다.백연신이 정말 가문 때문에 한지영을 포기한 거라고?그러면 한지영에게는 뭐라고 할 생각인 거지?강지혁은 불안해 보이는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병실 안.한지영과 백연신은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무슨 이유 때문인지 한지영은 백연신이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는데도 어쩐지 그가 엄청 멀게만 느껴졌다.백연신을 만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거리감이었다.“기사 내용... 정말 사실이에요?”한지영은 깨어난 지 벌써 며칠이나 되었지만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하지만 여전히 말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백연신은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조용히 ‘응.’이라고 대답했다.이에 한지영의 몸이 움찔 떨렸다.“정말... 다른 여자랑... 결혼하기로 했어요...?”한지영은 백연신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백연신은 천천히 한지영의 병상 곁으로 다가오더니 두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턱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한지영은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지영아,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전에는 너랑 함께 하는 것 정도는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결과적으로 너는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어.”백연신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다정하고 또 부드러웠다.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차갑기 그지없었다.“너도 알다시피 나는 백씨 가문의 사생아야.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항상 아주 당연하
한지영은 힘겹게 손을 들더니 백연신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습관이 될 정도로 많이 만졌던 얼굴이다.이미 질리도록 봤음에도 여전히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던 얼굴이다.그런데 그랬던 얼굴이 지금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한지영은 처음 기사 내용을 봤을 때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백연신의 말을 듣고도 눈물 한 방울 없이 평온한 채로 있었다.백연신이 오기 전에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뒀던 것일까?“알겠어요. 헤어져... 줄게요.”한지영은 그의 볼을 만지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그의 입술을 만졌다.“연신 씨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랄게요.”한지영은 눈물을 훌쩍이는 이별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미치도록 사랑했던 사람을 원수 보듯 하고 싶지 않았다.아무리 이 관계가 백연신이 일방적으로 끊은 관계라고 해도 그래도 그녀는 평화롭게 헤어지고 싶었다.정말...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첫 번째 남자였으니까.백연신과는 그저 원하는 바가 달랐을 뿐이다.백연신은 그저 그녀가 주는 사랑보다 자신이 얻는 것이 더 소중했던 것뿐이다.한지영의 담담한 말에 백연신의 몸이 굳어버렸다.그녀는 울면서 그를 붙잡지도 않았고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 있냐며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두어 번의 질문으로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그렇게 그와의 헤어짐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좋아해야 하는 게 맞다.그녀가 별다른 집착 없이 헤어져 줘서 고마워해야 하는 게 맞다.하지만 후련하고 고맙기는커녕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듯 고통스럽기만 했다.한지영은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라겠다고 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이루어지는 날은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고은채를 선택한 순간부터 백연신은 자기 인생이 이대로 영원히 어둠에 갇힐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공수진은 수중에 들린 검사 결과지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내가 임신이라고?!’그녀는 이 상황이 믿
게다가 근 몇 년간 이경빈은 공수진과 잠자리를 한 적이 없다.3개월 전 이경빈이 술에 잔뜩 취한 채 들어왔을 때 잠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기만 술에 취한 이경빈이 계속해서 탁유미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그날은 그렇게 물 건너 가버렸다.하지만 공수진은 이경빈의 술주정을 듣고도 그의 옆에서 잠을 청했다.그때처럼 이경빈에게 술을 먹여 둘이 잠자리를 한다고 해도 아이의 출산 시기와 맞지 않기에 어차피 금방 들통나게 된다.공수진은 뱃속에 자리 잡은 아이보다는 이씨 가문 안주인 자리가 더 중요했다.“그럼 결혼식 올리기 전에 빨리 애 지워버려. 결혼하기 전에 잠시 여행이라도 갔다 오겠다고 하면 별 의심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거다.”공수진의 아버지인 이한철이 말했다.그 말에 공수진은 생각에 잠겼다.어차피 아이는 무슨 일이 있든 지워야 한다.하지만 그전에 배 속의 아이를 이용하면 탁유미를 향한 이경빈의 마음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다.“엄마, 아빠,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공수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부모님께 방금 떠오른 기가 막힌 생각을 공유했다....임유진은 병상 위에서 열심히 음식을 먹는 친구를 바라보았다.그날 백연신이 병실에서 나온 후 임유진과 한씨 부부는 한지영이 상처를 받은 게 아닌가 싶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심지어 임유진은 미리 강지혁에게 만약 한지영이 정말 충격으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바로 의사에게 연락하도록 얘기해놓기도 했다.하지만 막상 병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지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얘기했다.“나 조금... 피곤해. 먼저 잘게...”그러고는 정말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그리고 다음 날인 지금, 한지영은 어제와 다를 것 하나 없이 행동했고 치료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하지만 그녀가 밝아 보일수록 임유진은 마음이 불안해졌다.“왜... 그렇게 봐?”한지영이 물었다.이제 그녀는 어느 정도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 괜찮아?”병실에는
다만 정말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라 헤어짐이 달갑지 않았고 마음도 많이 아팠다.하지만 한지영은 헤어짐으로 인한 고통보다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친구와 가족들이 더 소중했다.그들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기에, 그들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해주는지 알기에 한지영은 하루라도 빨리 완치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유진아, 나는 이제 연신 씨를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버릴 거야... 그리고 천천히 연신 씨와의 모든 추억을 내려놓을 거야. 미움도 분노도 배신도... 다 내려놓을 거야. 우리가 헤어진 건... 그냥 가치관 때문이니까.”임유진은 그 말에 코가 찡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백연신을 저주할 만도 한데 그녀는 그저 내려놓겠다고만 했다.한지영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씩씩하게 이겨내 가고 있었다.오후가 되고 탁유미도 한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그녀는 한지영과 백연신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가 한지영이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랑하는 사람을 내려놓는다는 건,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그래서 탁유미는 한지영이 정말 대견해 보였다.한지영은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피곤하다며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지영 씨는 정말 강한 사람인 것 같아요. 엄청 힘들고 속상할 텐데 그걸 이겨내려고 하고 있잖아요.”탁유미가 말했다.“네, 맞아요. 지영이가 평소에는 철없는 애 같아도 맺고 끊는 것에는 언제나 확실한 애였어요. 그런데 솔직히 아직도 조금 걱정이 돼요. 백연신을 내려놓겠다고는 했지만 사랑했던 사람을 내려놓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임유진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한지영을 바라보았다.그녀도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이 있기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지금은 힘들겠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거예요. 그리고 내려놓아야만 다시 새 인생을 살 수 있으니까요.”탁유미의 말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언니는 이제 정말 괜찮은 거예요?”탁유
“그러니까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후회 같은 거 하지 말고 마지막 순간까지 잘 살고 가려고요. 이번 생에는 지독하게 엮었으니 다음 생에는 서로 만날 일 없겠죠.”탁유미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임유진은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녀는 이대로 탁유미를 보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탁유미를 살게 할 생각이었다....병원에서 나온 후 임유진은 GH 그룹으로 향했다.경비원과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임유진이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를 알아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일전 건물 앞에서 강지혁을 만나게 해달라고 장장 몇 시간을 밖에 서 있었으니까.게다가 만나주지 않을 것 같던 강지혁도 결국에는 고이준을 보내 그녀를 대표이사실로 불러들였다.하지만 그때 강지혁을 만났다고 해서 오늘도 강지혁이 허락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임유진은 안에 들어선 후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전화를 걸려던 찰나 고이준이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와 얘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고 비서님!”고이준을 부르자 고이준은 그녀를 발견하고 빠르게 다가왔다.“사모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사모님이라는 호칭에 경비원과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물론이고 고이준 옆에 있던 직원들도 깜짝 놀랐다.“혁이 보러 왔는데 전화한다는 걸 깜빡한 거 있죠.”“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이니 제가 대표님 사무실까지 모시겠습니다.”고이준의 태도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고이준은 옆에 있는 직원에게 두어 마디 건네더니 임유진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그러고는 직접 층수까지 눌러주었다.고이준은 그저 일개 비서에 불과하지만 강지혁의 직속 비서이기에 평사원은 물론이고 임원진들도 고이준에게 만큼은 예의를 갖췄다.즉 회사 내부에서 고이준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할 수 있는 건 강지혁밖에 없다는 소리였다.그런데 그런 고이준이 부름 한 번에 망설임 없이 뛰어가고 예의를 갖춰 직접 모시기까지 하니 직원들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오게 된 지금, 그런 감정 같은 건 전혀 없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다가가 보니 상당히 많은 서류가 이곳저곳 흐트러져있었다.강지혁이 이 책상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멋대로 그려지는 듯했다.그때 흐트러진 서류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진가원]이라고 적혀 있는 서류 봉투가 보였다.진가원은 진씨 가문에서 주관하고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로 듣기로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땅 부지를 사는 데만 천억 원도 넘게 들었다고 하며 근 2년간 대외홍보에도 역시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그런데 그 중요한 서류가 왜 강지혁의 책상 위에 있는 거지?임유진이 의문을 가진 그때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고 이에 깜짝 놀란 임유진은 손에 든 서류 봉투를 그만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봉투가 열리고 안에 든 것들이 하나둘 밖으로 튀어나왔다.그리고 임유진은 그것들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봉투 안에서 나온 것들이 전부 진애령의 사진이었기 때문이었다.강지혁의 유일한 약혼녀였던 진애령 말이다.진애령의 사진이 왜 봉투 안에 들어있는 거지? 그것도 엄청 많이?진애령은 강지혁의 약혼녀로 안타깝게도 차 사고로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 사고로 임유진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하나의 교통사고로 두 사람의 운명은 한순간에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으로 흘러가게 되었다.임유진이 멍하니 사진을 구경하고 있을 그때, 강지혁이 다가와 사진을 주웠다.임유진은 허리를 숙인 채 바닥에 떨어진 사진과 서류 봉투를 줍는 그의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어...”그녀는 어쩐지 목이 말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영이 보러 병원에 갔다가 너 보고 싶어서 왔어.”“한지영은 좀 어때?”강지혁이 물었다.“괜찮아.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고 있어.”임유진은 사진들을 아무렇게나 서류 봉투에 넣어버리는 강지혁을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그 사진들은 뭐야?”“신경 쓰여?”“그거 진애령
“소민준...”강지혁의 입에서 세글자가 흘러나왔다.“만약 소민준이 그때 너를 배신 안 했으면 지금쯤 소민준과 결혼했을 수도 있었겠네?”“아니.”임유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어. 그래서 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몰랐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결혼하겠다고 해도 소민준네 집안에서 반대했을 거야.”임유진은 그때 너무 어렸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그리고 소민준도 나를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고. 호감 정도의 좋아함은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주변 여자들이랑 다르다는 신선함이 더 컸을 거야. 소민준은 나를 위해 자기 부모님의 반대까지 무릅쓸 사람이 아니야. 그건 이미 진애령 씨 사건으로 증명이 됐고. 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렇게 쉽게 버리지 않았겠지.”“만약 소민준이 부모님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널 선택했다면?”임유진은 강지혁이 엄청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세상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세상에 만약에는 없어. 그리고 나도 마치 장기 말 버리듯 날 버린 사람으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고 싶지 않고.”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꽉 쥐었다.“조금만 기다려. 소씨 가문도 곧 조용히 사라질 테니까. 그렇게도 진세령과 진세령네 집안이 좋다면 그 인간들과 같은 말로를 맞게 해야지.”임유진이 흠칫하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소씨 가문을 없애려고?”“진씨 가문은 조만간 사라질 거야. 소씨 가문은 진씨 가문과 엮여 있으니 자연스럽게 같이 사라지게 되겠지.”강지혁은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로 무서운 얘기를 꺼냈다.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으면 농담이겠거니 할 테지만 강지혁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아마 별다른 이변이 없으면 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은 정말 머지않아 조용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름이 있는 두 가문인데...’특히 진씨
“나도 혁이 널 지켜줄 거야.”임유진은 강지혁을 꼭 끌어안으며 말하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혹시 진씨 가문에서 네가 진가원 프로젝트를 방해하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된 거 아닐까? 한때 약혼녀였던 자기 딸을 생각해서라도 좀 봐달라고.”강지혁은 그 말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진씨 가문에서 진애령의 사진을 보낸 건 봐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이 아닌 그때의 일을 잊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이다....공항 VIP 라운지.백연신은 라운지 소파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수중에 들린 티켓을 바라보았다.그는 이제 몇 분 뒤면 S 시를 떠나게 된다.이미 확정된 일이지만 머릿속으로 자꾸 그날 흰색 붕대를 감은 채 창백하고도 또 평온한 얼굴로 헤어져 주겠다고, 원하는 것을 이루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했던 한지영의 얼굴이 떠오른다.원하는 것을 이루길 바라겠다라...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만약 한지영이 치료에 전념하고 무사히 퇴원해 앞으로 행복하게만 살아간다면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지금의 백연신이 바라는 건 오직 한지영의 행복뿐이니까.“설마 아직도 전 여자친구 생각해요?”그때 고은채가 다가와 그의 팔짱을 끼며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우리가 했던 약속을 잊은 건 아니죠?”“안 잊었어.”백연신이 차가운 말투로 대꾸했다.“아니면 됐어요. 한지영 씨가 무사히 살 수 있었던 게 다 내 덕이라는 거, 평생 잊어버리면 안 돼요. 연신 씨가 내 옆에 있는 게 그것 때문이라는 것도요.”고은채는 백연신의 얼굴이 어두워져 가는 걸 보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 가요. 여자친구로나 아내로나 한지영 씨보다는 내가 훨씬 낫잖아요. 나랑 결혼하면 연신 씨는 고씨 가문을 등에 업을 수 있고 회사를 더 크게 키울 수 있어요. 나는 그 과정에서 연신 씨랑 권력 다툼도 하지 않을 거고요. 연신 씨가 줄곧 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요?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