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건우 변호사?”“어떻게 알았어?”임유진은 깜짝 놀라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강지혁이라면 이미 진작에 라온시에 있었을 당시의 일들을 조사했을 것이라며 납득했다.“맞아. 스승님과 처음 만나게 된 것도 그 사건 덕이었지. 그날 재판에서 이긴 사람은 나였어. 까마득한 후배한테 진 거라서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스승님은 화 한번 내지 않았고 오히려 날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했어.”권건우에게 있어 그날 재판은 아주 보기 드문 진 재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재판이 끝난 후 임유진의 조심스러운 인사에 호탕하게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재판에서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진상이고 진실을 향한 규명이네. 변호사가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눈과 귀를 가리고 진실까지 가려버리면 안 되지. 안 그렇나?”전부터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날 이후 임유진은 다시 한번 권건우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를 자신의 우상으로 삼았다.“김승수 씨는 공무원이었어. 재판에서 2년 반의 형을 받은 뒤에는 당연하게도 직장에서 잘렸지만.”임유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듣기로 김승수 씨의 취업을 위해 가족들이 꽤 애를 많이 썼나 보더라고. 그 과정에서 빚도 진 모양이고.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잃게 됐으니 어디라도 화풀이할 데가 필요했겠지.”사실 김승수가 원한을 품을 거라는 건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스승인 권건우까지 들먹였다는 것이다.임유진은 시선을 내린 채 고민하다 뭔가 떠오른 듯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오늘 일 기사화 되는 거 아니야? 만약 스승님 이름까지 거론되면...”“걱정하지 마. 화제 안 되게 알아서 잘 처리하라고 지시했으니까.”강지혁이 이렇게 단언한 이상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고 해도 화제가 될 정도로 퍼지지는 않을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말에 한시름 놓았지만 혹시 몰라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일이 예기치도 못한
임유진은 웃으며 얘기하다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그때 스승님 같은 사람을 변호사로 뒀다면 참 좋았을 텐데...”만약 진애령 사건 당시 권건우가 변호사로 있어 줬다면 어쩌면 3년이라는 억울한 세월은 보내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다.한편 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심장이 철렁했다.진애령 사건에 있어서는 늘 임유진에게 미안한 마음밖에 없으니까. 임유진은 그때 과거의 일은 다 용서해주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아주 잠시 닿아있는 것만으로도 못 견뎌 하며 괴로워했다.“미안해...”강지혁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임유진은 ‘미안해’라는 그 말이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바로 눈치챘다.“혁아, 진애령 씨 사건의 진실을 들었던 그날 나는 정말 많이 속상했고 또 슬펐어. 심지어 이제는 누구를 믿어야 하나 하는 마음도 들었었어.”임유진은 말을 잠시 멈춘 후 두 손으로 강지혁의 얼굴을 살포시 감쌌다.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그의 온기는 조금 차가웠다. 그리고 후회와 고통이 자리 잡은 예쁜 그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 나고 가슴이 아팠다.“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널 용서했어. 네가 그 일로 죄책감을 느끼고 수많은 후회를 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랑 함께했을 때 네가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줄 수 있겠냐며 계속해서 물어봤던 것도 다 나를 향한 죄책감이 계속해서 네 머릿속에 맴돌아서 그랬던 거였잖아.”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네가 했던 질문에 내가 번번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임유진은 아직 강지혁이 대부분의 기억을 다 되찾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강지혁은 줄곧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뭐라고... 대답했는데?”“용서하겠다고 했어.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다 용서하겠다고 했어.”강지혁의 눈빛이 다시금 흔들렸다.“그 약속 때문에 날 용서한 거야?”“아니. 그 약속뿐만이 아니라 널 사랑하니까.”흔들리던 강지혁의 눈빛이 서서히 멎어갔다
임유진은 지금도 역시 자신이 가진 모든 애정과 사랑을 다 꺼내 강지혁의 불안을 잠재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강지혁이라는 남자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하니까.입맞춤이 끝난 후 임유진은 천천히 눈을 뜨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내 진심이 조금은 통했어?”강지혁은 그 말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더 많이 사랑해줘. 내가 버릇이 나빠질 정도로 나한테 사랑을 속삭여줘.”키스 때문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척이나 유혹적으로 들려왔다.강지혁은 자연스럽게 임유진을 침대 위에 눕혔다. 눕히는 그 순간에도 그는 조금의 깜빡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다.“혁아, 웃어봐. 나는 네가 나한테 웃어주는 게 좋아.”“응.”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마음을 단숨에 훔쳐 갈 그것 같은 그런 예쁜 미소였다.강지혁은 임유진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줄 수 있다. 그게 몸이 됐든 영혼이 됐든 그녀에게 주는 거라면 뭐든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이 적을까 봐 걱정이었다.임유진은 혼이 다 나간듯한 표정으로 강지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조금 달아오른 얼굴부터 시작해 굵직한 목, 그리고 깊게 파인 쇄골까지 음미하듯 아주 천천히 입을 맞췄다.“혁아, 평생 내 곁에 있어. 나도 평생 네 곁에 있을 테니까...”강지혁은 온몸에 퍼부어진 임유진의 입맞춤을 느끼며 5년 전에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당시의 그는 음식물을 게워내며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그때는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줄 용기조차 없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이렇게도 가까이 맞닿아 있고 임유진도 매일같이 사랑을 속삭여준다. 과정이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지금 무척 행복한 상태다.‘평생 내 곁에 있어. 나는 유진이 너만 있으면 되니까...’...다음날.한지영은 출근한 후 동료 직원들이 눈만 마주치면 피하고 심지어는 자기들끼리 뒤에서 수군거리기까지 하는 아주 기이
“나연 씨한테는 호텔이 모텔 같은 개념인가 보죠?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다 화끈해지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네요.”한지영은 표정 변화하나 없이 바로 되받아쳤다.이에 조나연은 얼굴을 확 일그러트리더니 목소리 톤을 높였다.“임자 있는 사람이랑 파렴치한 짓이나 하는 주제에 지금 누굴 욕해요?!”“그럼 대놓고 나한테 이상한 프레임 씌우려는 사람한테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듣기만 할 줄 알았어요?”한지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백연신 씨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럼 호텔에는 왜 갔어요? 방에는 또 왜 그렇게 오래 머물렀는데요? 그리고 왜 들어갔을 때랑 나왔을 때 옷이 달라요? 증거가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대체 내가 무슨 이상한 프레임을 씌웠다는 건지 모르겠네요.”앙칼진 조나연의 목소리에 동료 직원들이 하나둘 가까이 다가왔다. 다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조나연과 다를 것 없는 의견이라는 눈빛이었다.“옷이 더러워져서요. 사진 제대로 안 봤어요? 호텔로 들어갈 때 옷에 뭐가 잔뜩 묻어있잖아요. 그리고 백연신 씨는 줄곧 로비에 있었고 나만 올라갔어요. 믿기 힘들면 CCTV라도 돌려보던가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거짓말! 둘이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위로 올라가 놓고 어디서 거짓말이에요?”한지영은 조나연의 말에 차갑게 웃었다.“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꼭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처럼. 혹시 이 사진 나연 씨가 찍은 거 아니에요? 나 골탕 먹이려고?”조나연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아, 아니... 나는 그냥... 그럴 것 같아서.”“그냥 그럴 것 같아서? 그럼 나도 나연 씨가 일부러 내 사진을 찍어서 사내 게시판에까지 올렸다고 멋대로 생각해도 되겠네요?”한지영의 추궁에 동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조나연에게로 집중됐다. 다들 한지영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조나연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이내 한지영을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함부로 모함하지 말아요. 나는
하지만 아무리 무서워한다고 한들 이 상황에서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기자들의 추궁 속에서 그녀를 데리고 자리를 벗어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한지영은 가방을 손에 꽉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그때 시끄러운 엔진소리와 함께 승용차 여러 대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차 안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내리더니 금세 기자들과 한지영 사이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한지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곧이어 또다시 한 차량이 다가오더니 익숙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빠르게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지영은 차에서 내린 백연신을 보고 금세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백연신과 연관된 일인데 이렇게 되면 당사자 두 명이 다 한자리에 있게 되는 거니까.‘이 사람은 내가 왜 기자들한테 둘러싸였는지 모르는 거야? 지금 나타나면 일이 더 복잡해지기만 하잖아!’백연신은 빠르게 걸어와 이윽고 한지영 바로 앞에까지 도착했다.한지영은 이에 거리를 두려는 듯 뒷걸음질을 쳤지만 두 걸음도 채 못 디디고 그의 손에 잡혀 차량 쪽으로 끌려가게 되었다.백연신이 한지영의 손을 잡는 그 순간 수많은 플래시와 함께 기자들의 질문 소리가 다시금 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런 그들의 외침에도 한지영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또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지금은 대체 어떤 행동을 하는 게 맞는 건지 같은 이성적인 사고조차 하기 힘들었다.그러다 차에 올라타고 백연신이 기사에게 출발하라는 말이 들리고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방금 연신 씨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는 해요?!”한지영이 외쳤다.“알아.”백연신은 한지영의 손을 놓으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 노을이 차창을 뚫고 들어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붉은색이 한층 씌워졌는데도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해 보였다.‘지난번에도 이렇더니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야?’한지영은 백연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에는 참지 못
하지만 한지영의 말에도 백연신은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나랑 엮이고 싶지 않았으면 아까 네 손을 잡고 차로 끌고 왔을 때 내 손을 뿌리치고 내 뺨을 내려쳤어야지. 안 그래?”“그게 무슨...!”한지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백연신을 노려보았다.“백연신 씨가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날 찾으러 온 거 여자친구는 알아요?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래요?!”백연신은 그 말에 울컥한 듯 똑같이 목소리를 높였다.“나는 걔가 오해하든 말든 상관없어. 애초에 그 여자한테는 아주 조금의 마음도 없으니까!”한지영은 벙찐 얼굴로 백연신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참 뒤에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그럼 고은채 씨와는 정말 비즈니스로만 묶인 사이라는 거예요?”백연신은 입술을 꾹 닫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이에 한지영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백연신이 아무리 가문의 일로 고은채와 손을 잡았다고는 하나 함께 한 지 5년도 지났고 슬슬 결혼 얘기도 들렸기에 당연히 어느 정도는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는 줄 알았다.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상대와는 애초에 결혼 얘기도 오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그런데 백연신은 방금 고은채에게는 조금의 마음도 없다고 외쳤다.‘그럼 둘은 대체...’한지영은 생각에 잠긴 채로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차량이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당분간 시끄러워질 거니까 괜찮아 질 때까지 당분간 피신해있어.”백연신이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피신은 무슨. 나 집에 갈래요. 빨리 차 세워요!”“네가 무사하길 바라서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하자는 대로 해.”“내가 무사하길 바란다고요?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날 데려가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때는 무사해지는 거예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대체!”한지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추궁했다.“널 위해서라잖아.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 말대로 해줄 수는 없어?”“
“...나랑 엮이는 게 그렇게도 싫어?”백연신은 힘들게 말을 내뱉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한지영을 위해 하루빨리 모든 일을 해결하고 다시 그녀를 원래 있어야 할 그의 옆자리에 돌려놓으려고 했는데 그가 미친 듯이 사랑하는 이 여자는 더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다는 말만 해대고 했다.“당연한 걸 왜 물어요?”한지영이 되물었다.“우리는 헤어질 때도 깔끔했고 헤어지고 나서도 지금껏 아무런 질척임 없이 깔끔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이래요? 왜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거냐고요!”주먹을 꽉 쥔 탓에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데도 백연신은 아프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계속해서 힘을 가했다.‘하... 갑자기 왜 이러냐고? 네가 너무 보고 싶었으니까!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모든 걸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으니까!’백연신은 지난 5년간 한지영이라는 여자가 하루도 보고 싶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S 시에 도착한 그 날 그렇게도 오랜 시간 잘 참아 놓고 결국에는 한지영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하마터면 5년간 계획했던 모든 걸 다 날려버릴 뻔했지만 다행히 계획이 크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날 믿어줘. 너한테 상처 준 사람들은 그 누구 하나 빠짐없이 다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까. 그리고 너를 향한 유언비어도 더 이상 생겨나지 않게 할 거야. 만약 며칠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상황이 다를 게 없으면 그때는...”백연신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그때는 네 소원대로 더 이상 나랑 엮이는 일 없게 할게.”만약 해결했음에도 상황이 전과 달리진 것이 없다면 그건 그가 실패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니까.한지영은 쓸쓸한 그의 미소에 심장이 욱신거렸다.“대체 뭘 하려는 건데요? 이제 와서 대체 뭘 원하는 거냐고요!”헤어진 마당에 아직도 뭔가가 있는 듯이 구는 백연신이 한지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나는... 내가 원하는 건...”백연신은 말끝을 흐리며 한지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명백한 갈망과 욕망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키스가 드듸어 끝났을 때 백연신은 서서히 입술을 떼며 한지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정말 더는 내 곁에 안 있을 거야?”한지영은 백연시의 목소리에 간신히 다시 정신을 차리며 무섭게 그를 노려보았다.연인이 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헤어져 주지 않을 거라고 했던 남자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지금의 백연신은 그녀만 바라보고 사랑해주던 남자가 아니고 툴툴거리면서도 그녀를 따라 덕질을 해주고 함께 막장 드라마를 봐주던 남자 아니다.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를 제일 필요로 했던 순간에 잔인하게 그녀에게 헤어짐을 고한 그런 사람이다.애초에 두 사람은 함께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네.”백연신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그럼 누구 곁에 있을 건데? 연우진?”“그럴 수도 있죠. 우진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우진 씨랑 함께 있으면 편하고 즐거워요. 백연신 씨는 고은채 씨와 결혼해도 되고 나는 우진 씨랑 함께하면 안 돼요?”한지영이 빈정거리며 되물었다.“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연우진 곁에 있겠다고? 네가 정말 연우진한테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멋대로 키스했을 때 입술을 깨물던가 했을 거야. 아니야?”“멋대로 생각하지 말아요!”“연우진은 알아? 우리가 그때 얼마나 뜨거웠는지? 네가 나랑 무슨 짓까지...”짝!“그만 못해요? 백연신 씨가 지금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한지영의 고함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한지영은 손바닥에 찌릿한 느낌이 들고서야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백연신의 얼굴은 완전히 옆으로 돌아가 있었고 그의 창백한 볼 위에는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찍혀있었다.잠시 후 백연신은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리며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마주한 그의 두 눈은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미안해. 네 말 대로 지금의 나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그는 말을 하며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며칠이면 되니까 이곳에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고.”백연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