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때 다른 한 명의 경비원이 에스컬레이터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피가 이렇게 있는데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두 분 말고 혹시 다친 사람이 더 있었던 건 아니고요?”피?한지영은 경비원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정말 핏자국이 보였다.에스컬레이터 자체가 어두운색이라 한지영과 연우진 중 그 누구도 그곳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핏자국이 있는 곳은 백연신이 제일 마지막으로 부딪힌 곳이었다. 즉, 지금 보이는 이 피는 백연신의 피라는 뜻이다.한지영은 순간 심장을 누군가에게 꽉 틀어쥐어 버린 것처럼 호흡이 가빠오고 짙은 원망이 밀려왔다.‘다쳤으면 다쳤다고 말을 하지! 아니야... 내가, 내가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봤어야 했어. 어두운색 옷을 입고 있었어서 내가 더 자세히 봤어야 했어!’집으로 돌아온 후 한지영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눈만 감으면 오늘 백화점에서 백연신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에스컬레이터 아래로 쓰러졌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때 백연신은 대체 왜 다쳤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더는 그녀와 아무런 연결고리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걸까?하지만 그런 거라면 왜 하필 그곳에 있었고 왜 몸까지 날려서 구해준 거지?갖가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튀어나오며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한지영은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꽉 감쌌다.‘이제는 두 번 다시 엮일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한지영은 어쩐지 백연신이 매우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게 다 끝난 줄 알았을 때는 갑자기 나타나서 대뜸 사랑한다고 외치고 확실히 끝맺음을 맺은 후에는 다시 또 이런 식으로 나타나서 그녀를 구해주었으니까.백연신과는 꼭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언가로 사정없이 엮여있는 것 같았다.새벽 2시.한지영은 생각만으로 벌써 2시간을 보냈다. 지금 상태로는 잠을 자긴 글렀다고 판단한 그녀는 결국 정신이라도 맑게 하기 위해 창가 쪽으로 향했다.그러고는 창문을 열려고 손을 움직이려는데 창문 너
한지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자기가 더 많이 다쳐놓고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건지.“난... 괜찮아요.”백연신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했고 미간은 잔뜩 찡그려진 채 고통을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이마에는 땀이 한층 맺혀있기도 했다.한지영은 얼른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많이 아파요? 어디 봐봐요.”백연신은 옅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난 괜찮아.”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한지영이 백연신도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백연신은 그녀의 손을 그저 흘깃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나 좋아하는 거 아니면 내 몸에 손대지 마.”“그게 무슨... 나는 그냥 백연신 씨 일으켜주려고 그래요.”“필요 없어.”백연신은 그렇게 말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지영 씨, 괜찮아요? 다친 데는요?”연우진이 다급하게 위에서 내려오며 물었다.“난 괜찮아요. 다친 데도 없고요. 나보다는...”그녀보다는 백연신이 훨씬 더 많이 다쳤다.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굴러버렸으니까.‘많이 다쳤을 것 같은데? 날 안고 떨어졌는데 멀쩡할 리가...’연우진은 그녀의 말에 그제야 시선을 돌려 백연신을 바라보았다.“지영 씨 구해줘서 고마워요.”백연신은 그 말에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더니 코웃음을 쳤다.“고맙다고?”“네, 고마워요.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연우진은 조금 어두워진 백연신의 눈빛을 보고도 전혀 시선을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기도 했다.잠깐의 대치 끝에 백연신이 먼저 눈길을 돌렸다. 그가 시선을 준 곳은 다름 아닌 에스컬레이터 위쪽으로 정확히는 자신도 놀랐는지 벙쪄 있는 조나연의 얼굴이었다.조나연은 거리가 조금 있었음에도 한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백연신의 눈빛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얼른 손을 저었다.“난 아니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난 아니라고...!”그녀는 패닉에 빠진 채로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자리를 황급히 벗어났다.“저
“내가 틀린 말 했어? 허구한 날 꼬투리 잡을 거 뭐 없나 내 주변만 맴돌았잖아. 음습한 스토커처럼.”한지영의 말에 조나연은 주먹을 꽉 말아쥐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그래서 그랬니? 그래서 백연신한테 나 자르라고 했어? 나 잘리는 거 보니까 속이 시원하든?!”“아까부터 대체 뭐라는지.”한지영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정말 백연신 씨한테 너 자르라 했다고 쳐. 그럼 지금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내가 또 뭐라고 할 줄 알고? 어떻게 이번에는 아예 S 시에 발도 못 붙이게 해줘? 아니면 너희 집안까지 싹 다 망하게 해줘?”“너 이...!”“왜, 네 말대로라면 내가 말하면 백연신 씨는 뭐든 들어줘야 하잖아. 아니야?”조나연은 여전히 부들거렸지만 한지영이 정말 그럴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얼굴에 훤히 보였다.“우진 씨,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놔줘요.”한지영의 말에 연우진은 그제야 조나연의 손목을 풀어주었다.확실히 겁을 먹은 게 맞는지 조나연은 아까처럼 소리를 치지도 않고 험악한 얼굴로 달려들지도 않았다.한지영은 그녀의 얼굴을 한번 보고는 이내 연우진과 함께 뒤로 발걸음을 돌렸다.“정말 이대로 아무런 조치도 안 해도 돼요? 저 여자가 또 지영 씨를 찾아오면 어떡해요?”연우진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아마 괜찮을 거예요. 자기도 더 이상 상황이 안 좋아지기는 건 싫을 테니까요.”한지영과 연우진은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마침 두 사람이 내려가려고 할 때 에스컬레이터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현이는 귀여운 걸 좋아하니까 아래층에...”한지영이 말을 하며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내디디려던 그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퍽하고 밀어버렸다. 그리고 한지영은 갑작스러운 힘으로 무언가를 잡을 겨를도 없이 그대로 몸이 아래로 쏠려버렸다.“!”“지영 씨!”연우진이 한지영의 이름을 외치며 그녀의 손을 잡기 위해 힘껏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연우진의 옆으로 누군가의
식사를 마친 후 한지영은 윤이와 현이, 그리고 율이의 선물을 사기 위해 연우진과 함께 근처 백화점으로 들어갔다.“애가 옷을 벗을 때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멍투성이에다 상처투성이였다니까요? 아무리 입양해서 데리고 온 애라도 그렇지 이제 5살 정도밖에 안 된 애를 그렇게 때리면 돼요? 부모 얼굴 봤을 때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거 진짜 간신히 참았어요. 어떻게 그렇게 작고 예쁜 애를! 나였으면 맨날 끌어안고 사랑만 줬을 텐데.”한지영이 씩씩거리며 얼마 전에 봤던 하겸의 얘기를 꺼냈다.“지영 씨는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아요.”연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글쎄요. 이번 생에 누구 엄마가 될 기회가 있겠는지 모르겠어요.”한지영은 반쯤 포기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1년 안에 결혼한다고 해도 벌써 35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40대에도 혹은 그 이상의 나이에도 출산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산모 아이 모두 건강한 상태인 케이스가 흔한 건 아니었으니까.사실 한지영은 아이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전에도 늘 허구한 날 만약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어떤 얼굴일지 상상하곤 했다.그녀가 상상할 때마다 떠올린 아이는 속눈썹도 길고 피부도 뽀얗고 웃는 게 너무 예뻐서 한입에 넣어버리고 싶은 꼭 백연신의 어린 시절과 닮은 아이였다.그때는 당연히 아이를 가지면 백연신의 아이를 가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한지영은 생각이 또 백연신 쪽으로 튀자 얼른 고개를 저었다.그때 웬 여자 한 명이 성큼성큼 한지영 쪽으로 다가오거니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바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짝!한지영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반응도 하지도 못하고 멍한 얼굴로 뺨을 감싸기만 했다.옆에 있었던 연우진도 크게 울리는 마찰음 소리에 2초간 상황을 파악하다 낯선 여자가 또다시 한지영을 때리려 하자 그제야 얼른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이거 안 놔?!”여자는 버둥거리며 험악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노려보았다.“한지영, 해도 해
한지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솔직히 백연신이라는 남자를 이제는 마음에서 지울 수 있을 줄 알았다.실제로 근 몇 년간 점점 지워내기도 했고 말이다. 점점 백연신을 생각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가끔 그의 얼굴을 떠올려도 전처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래서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그라는 존재를 완전히 마음속에서 도려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더 이상 그 남자로 인한 그 어떤 마음의 동요도 일지 않을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런데 최근 들어 자꾸 머릿속으로 백연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연신이 자신을 데리고 교외 아파트로 갔던 것도, 갑자기 키스했던 것도, 백연신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했던 말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생생하게 떠올랐다.백연신 생각을 하다 잠을 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그간의 노력이 백연신의 등장 한 번으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백연신 씨와 다시 잘해볼 생각이에요?”연우진이 물었다.“고은채 씨와의 결혼도 파기됐으니 이제는 백연신 씨와 정식적인 연인이 된다고 해도 지난번 같은 일은 없을 거예요.”한지영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다시 잘해볼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확실히 알아버렸거든요. 우리 둘의 차이를. 가치관이 서로 맞지 않는 사람끼리 함께 하면 결국에는 지치고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에요. 하지만...”한지영은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꽉 맞잡으며 솔직하게 얘기했다.“하지만 백연신 씨가 여전히 좋은 건 맞아요. 그래서 우진 씨와는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런 마음으로 우진 씨를 만나는 건 우진 씨한테 너무 실례니까요.”“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연우진이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지영 씨는 처음부터 나한테 모든 걸 다 얘기해줬잖아요. 아무런 거짓도 보태지 않고. 그리고 나는 지영 씨랑 대화하는 거 즐거워서 좋았어요. 사실 나는 지금껏 여자한테 큰 관심이 없었어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한때는 내가 사실은 남자를 좋아하는
“그냥 갑자기 오고 싶어져서.”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심증만 있을 뿐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었으니까.“왜? 기분 안 좋아?”임유진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기분이 안 좋아서 여기로 온 것 같아?”강지혁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아니야?”“응.”강지혁은 임유진의 팔을 잡더니 이내 자신의 품속에 끌어안았다.“오히려 그 반대야.”“응?”“나는 지금 기분이 상당히 좋은 상태라고.”하겸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아이일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을까.임유진은 아마 그간 그토록 신경을 썼던 아이가 사실은 그녀의 아이라는 게 밝혀지면 분명히 엄청 좋아할 게 분명했다.그때는 정말 진심으로 모든 걱정을 떨쳐낸 채 환히 웃을 수 있을 것이다.임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일단 강지혁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오늘 뭐 기분 좋은 일 있었어?”“있었지. 네가 오늘 종일 내 곁에 있었잖아.”강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는 듯 임유진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아버렸다.만약 강선우가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분명히 사진 속 모습과 같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그렇게도 많은 일을 겪고도 끝내는 서로의 곁에 무사히 안착했으니까.‘아버지, 저는 유진이랑 평생 행복할 거예요. 절대 유진이가 떠나게 만들지도 않을 거고 유진이를 두고 먼저 떠나지도 않을 거예요. 절대.’...레스토랑 안.연우진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한지영을 발견하고는 물었다.“왜 그래요? 뭐 아는 사람이라도 만났어요?”“아... 아!”한지영은 그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저었다.“뒷모습이 조금 낯이 익어서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그녀는 말을 마친 후 다시 포크를 들어 고기를 입에 넣었다.“지영 씨가 봤던 사람, 백연신 씨랑 조금 닮은 것 같은데.”그때 연우진의 입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