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소영훈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처음에 다쳤을 때 치료가 제대로 안 돼서 나이 들면서 점점 걷기가 힘들어졌다고 하셨어.”임유진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그런데 말을 하던 중, 강지혁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입술은 굳게 다물렸고 눈동자엔 묘한 긴장감이 떠올랐다.“왜 그래? 어디 아파?”임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아니...”강지혁은 깊게 숨을 들이쉰 뒤 천천히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너 먼저 자. 갑자기 생각난 일이 좀 있어서... 서재 가서 잠깐만 처리하고 올게.”그는 말을 마치고 급히 방을 나섰다.서재에 들어서자, 강지혁은 문을 꽝 닫은 뒤, 무겁게 등을 기대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조금 전, 그의 머릿속을 불현듯 스쳐 지나간 건, 과거 구치소에서 김재호 비서와 나눈 대화였다.“아, 그리고요. 계속 어머님 찾고 계시잖아요? 제가 그 일과 관련해서 단서 하나 더 드릴게요. 예전에 아버님 돌아가신 직후에, 강문철 회장님이 어머님을 찾아냈대요. 그러고는 사람 시켜서... 어머님 발목 인대를 끊으라고 했어요. 원래는 완전히 폐인 만들 생각이었는데, 어머님이 운 좋게 도망치셨대요...”“한쪽 발목의 인대가 부러졌다고... 그게 우연일 리는 없잖아...’게다가 사모님은 강지혁 자신이 기억하는 어머니와 전혀 닮지 않았다. 외모는 물론이고, 풍기는 분위기까지 단 한 가지도 겹치는 게 없었다.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는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테니까.책상 앞으로 다가간 강지혁은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고 비서. 사람 하나 좀 알아봐 줘야겠어. 그 사람과 관련된 이력 전부.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통화가 끝난 후, 강지혁은 천천히 손끝으로 조심스레 가슴을 눌렀다.셔츠 안쪽, 피부 위엔 아직도 흐릿한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건... 아주 오래전, 그의 어머니가 남겨놓은 상처였다.강지혁은 사모님이 제발 자기 어머니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어머니라면... 그때
그녀는 아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두 명의 손주 역시... 단 한 번이라도 눈으로 보고, 품에 안아보고 싶었다.오늘 강씨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 사모님의 가슴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한때, 누구보다 간절히 이 집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하지만 그토록 원하던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날들은, 언제나 강문철 회장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들어야 했던 순간들이었다.그토록 간절히, 단 한 번이라도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가기 위해... 그녀는 심지어 강선우의 마음마저 거래의 대상으로 삼았다.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강문철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냉철하고 잔혹한 인물인지결국 그 선택은 강선우를 무너뜨렸고, 자신 또한 함께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그 사람은 당신을 용서할 거야.”권건우는 조용히 아내를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신을 정말로 사랑했다면, 이렇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모른 척하진 못할 거야.”권건우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오른쪽 다리 인대가 끊긴 상태였고얼굴도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그럼에도 그는... 이상하게도 아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결혼한 지 20년.그녀는 결혼 전, 자신의 과거를 처음부터 끝까지 권건우에게 털어놓았다. 누군가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진실들... 하지만 권건우는 한 번도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그리고 권건우는 알고 있었다. 아내의 마음 한구석에 평생 동안 자리 잡고 있는 두 사람...한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 강선우.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단 한 번도 품에 안아보지 못했던 아들, 강지혁이었다.아내는 한 번도 권건우의 앞에서 강선우와 아들의 이름조차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번 S 시에 오기 직전, 마침내 진실을 그에게 고백했다.“강지혁은... 내 아들이에요. 그리고 그 아이의 아버지는... 강선우고요.”“이번에 다리 수술만 잘 끝나면 바로 돌아가자.”
별채 안쪽,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정갈하게 정리된 탁자 위에 두 개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었다.하나는 강지혁의 아버지, 또 하나는 강문철 회장의 것이었다.그 위패들을 본 순간, 사모님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향 올릴게.”그녀는 위패 앞에 놓여 있던 아직 쓰이지 않은 향을 꺼내 들고 불을 붙여 조심스럽게 향을 올렸다.작은 불꽃이 향 끝을 물들이자, 이내 하얀 연기가 천천히 공기 속으로 피어올랐다.곁에 있던 권건우도 무언가 억눌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함께 향을 올렸다.“사모님, 괜찮으세요?”임유진은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괘...괜찮아. 그냥 네 시아버지 생각하니까 너무 안타까워서...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사모님은 낮고 무겁게, 마치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시아버님은 시어머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셨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는 삶에 대한 의지도 잃으셨던 것 같아요. 아마 그분께는... 죽음이 해방이었을지도 몰라요.”임유진은 조용히 속마음을 털어놓았다.하지만 그 해방의 이면에는 살아남은 자들이 떠안아야 할 고통과 슬픔이 너무도 깊게 남았다.“네 시아버님... 어떻게 돌아가셨지?”사모님의 물음은 한층 더 조심스럽고 떨렸다.“길가에서... 얼어 죽으셨어요. 그때 혁이가 시아버님 유골을 안고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었죠.”그 말을 듣는 순간, 사모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순간 몸이 휘청거렸고, 권건우가 급히 아내를 부축했다.“왜 그래, 어디 불편해?”“응, 좀... 어지러워요. 나... 호텔로 돌아가서 쉬고 싶어요.”사모님은 힘없이 대답했다.“그럼 제가 기사님께 연락해서 호텔로 모셔다드릴게요.”임유진은 두 사람과 함께 별채를 나섰다....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사모님은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그동안 가슴 깊이 눌러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그녀는 소리 내어 울었다. 오열
임유진은 소영훈의 말을 들은 순간, 그가 수술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이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하지만... 사모님이 젊은 시절, 발목 인대가 끊어진 적이 있었다는 건 뜻밖이었다.‘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런 짓을 한 걸까?’‘만약 일부러였다면... 왜?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사모님 같은 사람에게 그런 잔인한 일을 했던 걸까?’권건우 부부는 수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은 뒤, 집으로 돌아가 다시 상의하고 결정하기로 했다.그런 그들을 임유진은 자연스럽게 강씨 저택으로 초대했다. 점심을 준비해 둔 탓도 있었고, 두 어르신을 더 편히 모시고 싶었다.저택에 들어서자, 권건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이야... 정말 대단한 집이군.”넓고 고풍스러운 내부에 감동한 듯, 그의 눈은 여기저기를 바쁘게 살폈다.반면, 그의 아내는 거의 말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뒤따를 뿐이었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했지만, 눈빛엔 무언가 오래된 기억이 스치듯 깊은 그늘이 비쳤다.그러던 중, 강지혁과 임유진의 침실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나... 이 방, 잠깐 볼 수 있을까?”“물론이죠.”임유진은 환한 미소로 문을 열었다.“여기가 저랑 혁이 방이에요.”사모님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벽 쪽에 연결된 작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살짝 열자, 또 다른 방이 드러났다.“저 방은 예전에 제가 쓰던 방이에요.”임유진이 뒤따라 설명했다.“지금은 옷이랑 개인적인 물건들만 보관하는 용도로 써요.”사모님은 그 구조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나지막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이런 구조... 참 따뜻하네.”식사를 마친 후에도 임유진은 두 사람을 데리고 저택 안팎을 둘러보았다.정원을 지나 별채 쪽으로 향하던 중, 사모님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다.“여기는...?”“여기는 영정을 모시는 별채예요.”임유진의 목소리가 조금 조심스러워졌다.“혁이 아버지가 아주
“지... 혁아...”한참을 머뭇거리던 끝에야 권건우의 아내가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강지혁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한마디에 식탁 위의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고, 다시금 부드러운 공기가 자리를 잡았다.식사가 끝난 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강지혁이 운을 뗐다.“네 사모님... 나를 꽤 무서워하시는 것 같더라.”“긴장하신 거겠지. 사모님도 그러셨잖아, 평소 뉴스에서만 보던 사람을 이렇게 바로 앞에서 본 게 처음이라고.”임유진이 말하며 웃었다.“우리 사모님은 그냥 평범한 가정주부시거든. 스승님께서 다리 때문에 항상 걱정하셔서, 바깥일도 못 하시게 하고 집안일만 하셨지. 그러다 보니 사람 만날 일도 별로 없었고... 혁이 너 같은 사람을 보면 긴장하는 게 당연한 거야. 게다가 밖에서는 너에 대한 얘기도... 많으니까.”“흠, 내 얘기라... 어떤 소문들인데?”강지혁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바라봤다.그 시선에 임유진은 조금 당황하며 말끝을 흐렸다.“그게... 그러니까... 냉혹하고 무자비하다는 말도 있고... S시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세상이 요동친다, 뭐 그런... 누가 너한테 밉보이면 끝장이라는... 그런 이야기들이 돌아다니더라고...”말을 하면서도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지만, 강지혁은 오히려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그럼 네 사모님께 안심하라고 전해. 혹시나 정말 언젠가 사모님이 나를 불쾌하게 하시는 일이 있어도... 너를 봐서, 난 절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니까.”그는 손끝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물었다.“손가락은 이제 괜찮아?”“응, 이제 거의 안 아파. 내일 소영훈 선생님께 재검 받으러 갈 거야. 그때 사모님도 같이 모시고 갈 생각이야. 다리도 좀 봐 달라고.”“내가 같이 갈까?”그의 말에 임유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내가 모시고 갈게. 혁이 네가 따라오면 사모님은 더 긴장하실걸.”그녀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강지혁도 발걸음을 옮겨 뒤따랐다.그는 방금 전 권건우 변호사의 아내와 악수한 자신의 손을 힐끗 바라보더니, 생각에 잠긴 듯 앞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저 분... 뭘 그렇게 두려워하고 계신 거지?’악수를 나눈 그 순간, 그녀의 손은 분명 떨고 있었다.권건우 부부는 이미 숙소를 따로 예약해 둔 상태였고 강씨 저택에 묵을 의향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강지혁과 임유진은 그들을 호텔에 데려다주고 짐을 풀어준 뒤, 저녁에 S 시에서 손꼽히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 약속을 잡았다.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는 세쌍둥이도 모두 참석했고, 그 외에 하유은과 진해원도 함께했다.하유은은 겸이와 함께였는데, 어찌 보면 겸이는 하유은을 마치 강력 접착제처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하유은이 학교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같이 보내는 듯했다.특히 겸이의 출생 비밀이 드러난 이후엔 그 의존이 더 심해졌고, 임유진도 이에 대해 소아 심리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았다.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유착형 애착’이라 불리는 심리적 현상으로, 일종의 유아기적 보호 본능이 투사된 결과라고 했다.하유은은 과거 겸이를 진심으로 지켜줬던 거의 유일한 존재였기에, 겸이는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깊은 신뢰와 의존을 느끼는 것이었다.그리고, 진해원이 이 자리에 함께한 것은 순전히 현이가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었다.권건우는 세쌍둥이를 보며 무척 흐뭇해했고, 아이들에게 각각 세뱃돈 봉투를 건넸다.권건우의 아내는 손수 짠 매듭 줄에 금으로 만든 장수 자물쇠가 달린 귀여운 목걸이 세 개를 꺼내며 말했다.“이건 세 아이한테 주려고 준비한 거예요. 아이들이 무사히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요.”권건우도 웃으며 곁에서 덧붙였다.“이 목걸이 매듭은 네 사모님이 손수 한 땀 한 땀 짠 거란다. 꼬박 한 달 넘게 걸려서 완성했어.”임유진은 그 목걸이들을 보며 시중에 파는 것들과는 다른 섬세함과 정성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정말 감사드려요, 사모님.”임유진은 조심스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