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차명희가 보낸 상자는 아이 키만 했다.
현관 앞에 놓인 상자를 본 시우는 눈을 크게 떴다.
“내 거야?”
배송기사가 서명을 요구했다. 발신인은 태강문화재단이었고, 품목에는 ‘교육용 완구 세트’라고 적혀 있었다.
서연은 상자를 들이지 않았다.
“반송할게요.”
“엄마, 뭔데?”
“시우한테 보내온 선물.”
“열어보면 안 돼?”
“누가 보냈는지 알고 나서 정해야 해.”
서연은 발신인을 숨기지 않았다.
“아빠 엄마가 보냈어.”
시우는 상자보다 서연 얼굴을 먼저 봤다.
“엄마 싫어하는 사람?”
“응.”
루미에르 회의실 화면에는 서울 시내 최고급 예식장 열두 곳이 떠 있었다.태강호텔 그랜드볼룸, 라온호텔 스카이라운지, 한강 위에 지은 수상 연회장까지.민지수가 첫 번째 사진을 넘겼다.“수용 인원은 천이백 명이고, 천장 높이는 열다섯 미터입니다. 플라워 설치만 사흘 가능하고요.”서연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하객 서른 명인데 천이백 명 자리가 왜 필요해?”“회장님 쪽에서 참석하고 싶다는 분만 추려도 서른 명은 넘을 텐데요.”도진이 회의 테이블 끝에서 말했다.“초대하지 않을 거야.”직원들의 시선이 모였다.“이번 결혼식을 인사 자리로 만들 생각 없어. 업무상 축하해야 하는 사람은 회사로 보내면 돼.”민지수는 태강호텔 사진을 닫고 다음 장소를 띄웠다.“그럼 여기는요? 한강 야경이 좋고, 전체 대관도 가능해요.”“배 타야 돼?”시우가 물었다.“아니. 물 위에 떠 있는 건물이야.”“나는 멀미해.”두 번째 장소도 탈락했다.열두 곳을 다 보고도 결정하지 못하자 최은채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규모가 작아도 괜찮으면 제가 아는 곳이 하나 있어요.”화면에 오래된 유리 온실이 나타났다.도심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강변 식물원 안, 기부금으로 보수한 작은 온실이었다. 한쪽 벽은 담쟁이가 감싸고 있었고, 안에는 긴 테이블 네 개가 전부였다.“모연온실이라고 해요. 원래 시민 정원이었는데 주말에만 소규모 예식을 받아요. 최대 마흔 명이고, 음식은 외부 케이터링을 써야 합니다.”은채는 대관료와 취소 규정, 접근성 자료까지 함께 띄웠다. 온실 입구에는 낮은 경사로가 있었지만 화장실까지 가는 길 일부가 자갈이었다. 하객 중 지팡이를 쓰는 사람이 있어 이동판을 빌려야
다음 날 저녁, 식탁 위에는 계약서 대신 노란 메모지가 놓였다.차도진은 펜을 들고 진지한 얼굴로 제목부터 적었다.‘결혼식 조건.’결혼 자체의 조건은 전날 이미 각자 적어왔다. 재산은 원칙적으로 분리하고, 양육비와 생활비는 현재 합의를 유지하며, 혼인신고 뒤에도 루미에르 지분과 경영에 태강이 관여하지 않는다. 도진의 태강 지분이 시우에게 자동으로 이어지는 구조도 만들지 않기로 했다.두 사람은 법률상담을 받아 혼전계약 초안을 만들 예정이었다. 사랑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돈과 권한이 감정을 대신 결정하지 못하게 경계를 보이는 일이었다.오늘 메모지는 그보다 작은, 그래서 두 사람에게 더 낯선 결혼식의 조건이었다.한서연이 맞은편에 앉으며 눈썹을 올렸다.“정말 적게요?”“빠뜨리면 안 되잖아.”“이사회 회의도 아니고.”“그래서 더 중요해.”시우는 두 사람 사이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엄마가 결혼 이야기를 꺼낸 순간부터 방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서연이 첫 번째 손가락을 폈다.“회사 홍보에 이용하지 않기.”도진이 적었다.“기사 배포도 없고, 독점 사진도 없어요.”“알겠어.”“태강호텔 패키지 상품으로 만들 생각도 하지 말고요.”“그건 생각도 안 했어.”“예전의 당신이라면 했을 것 같아서.”도진은 변명하지 않고 다음 줄을 비웠다.“두 번째는?”“양가 어른이 주인공인 결혼식은 싫어요. 누가 어느 자리에 앉고, 어느 집안이 먼저 입장하는지 따지는 것도.”“그럼 가족석을 없애자.”시우가 손을 번쩍 들었다.“나는 가족석 앉을 건데.”서연이 웃으며 아이의 손을 내렸다.“시우 자리는 제일 먼
“대표님 결혼식은 누가 맡았어요?”한서연은 샴페인 잔을 내려놓다 말고 맞은편 신부를 바라봤다.막 최종 시식을 끝낸 고객은 케이크 시트보다 그 질문에 더 관심이 많은 얼굴이었다. 옆에 앉은 예비 신랑도 슬쩍 몸을 기울였다.“제가 맡았죠.”“직접요?”“그때는 제가 플래너였으니까요.”서연은 웃으며 메뉴표를 넘겼다.“오늘은 두 분 결혼식 얘기부터 마저 하죠. 부모님용 한식 코스는 버섯 알레르기만 다시 확인하면 될 것 같아요.”고객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회의를 끝내고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민지수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그럼 두 번째는요?”“뭐가?”“대표님 두 번째 결혼식이요.”서연이 버튼을 누르던 손을 멈췄다.“일이 없니?”“지금 퇴근 중인데요.”“그럼 퇴근에 집중해.”문이 열리자 민지수는 피식 웃으며 먼저 내렸다.“회장님은 집중하고 계시던데.”“뭘.”“반지 매장 홈페이지요. 지난주부터 브라우저 맨 위에 고정돼 있어요.”서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지수와 헤어진 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도 그 말이 귓가에 남았다.차도진은 약속한 대로 회사 앞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주차구역 끝, 방문 차량 칸에 세워둔 차 옆에서 시우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은 트렁크를 열어놓고 납작한 상자와 씨름하는 중이었다.“이쪽이 위라니까.”“아빠가 아까도 위라고 한 데가 밑이었잖아.”“설명서 그림이 반대로 인쇄된 거야.”“설명서 탓하면 안 된다고 엄마가 그랬어.”서연이 다가서자 시우가 먼저 발견하고 달려왔다.“엄마, 우리 책장 샀어.”“내가 산 거 아니야.
세 달의 시험기간은 큰 사건 없이 지나갔다.그래서 서연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봤다.도진은 바쁜 날에도 방문 취소를 비서에게 대신 알리지 않았다.시우가 떼를 써도 무조건 사주지 않았고, 서연이 화가 났을 때 해결책부터 내놓지 않았다.한 번은 둘이 크게 다퉜다.태강 계열 호텔에서 루미에르에 우선계약을 제안했고, 도진이 이해충돌 심사를 통과한 뒤 제안서를 전달한 일이었다.서연은 자신에게 특혜로 보일 수 있는 계약을 왜 애초에 검토했냐고 화냈다.도진은 회사와 루미에르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설명했다.말이 길어질수록 두 사람 목소리가 높아졌다.예전 같으면 도진은 ‘합리적인 선택’이라며 밀어붙였고, 서연은 대화를 포기했을 것이다.이번에는 도진이 멈췄다.“지금은 서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그래서요?”“한 시간 뒤에 다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도망가는 게 아니라, 자료 없이 제 판단만 옳다고 말하는 걸 멈추려고요.”서연은 화가 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한 시간 뒤 도진은 계약을 루미에르에 직접 주는 대신 공개입찰로 바꾸는 안을 가져왔다. 서연은 태강 심사위원에서 도진과 특수관계인을 제외하는 조건을 추가했다.루미에르는 입찰에 참여했고, 최종적으로 탈락했다.평가표에서 루미에르는 기획 점수가 가장 높았지만, 전국 지점 운영 인력이 부족했다. 서연은 평가위원에게 항의하지 않고 공개된 감점 근거를 직원들과 검토했다.“도진 씨 회사라서 더 엄격하게 본 것 아닐까요?”민지수가 묻자 서연은 외부 감사위원의 평가까지 확인했다. 다른 업체에도 같은 인력 기준이 적용돼 있었다.“그럼 우리가 다음 입찰 전까지 보완할 부분이네.”도진은 탈락 사실을 서연에게서 들은 뒤 담당 부서에 별도 질
도진은 서연 집에서 자동차로 7분 거리에 작은 아파트를 구했다.태강 소유 건물도, 펜트하우스도 아니었다.시우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평범한 주상복합이 남았다.“왜 이사해?”시우가 빈 거실을 뛰어다니며 물었다.“너희 집이랑 가까우려고.”“우리 집으로 오면 되잖아.”도진과 서연이 동시에 아이를 봤다.시우는 아무렇지 않게 방 문을 열었다.“여기 아빠 혼자 자면 무서워.”“아빠는 혼자 잘 수 있어.”“나는 가끔 무서운데.”서연은 창문 잠금장치를 확인했다.도진이 근처로 이사하는 건 두 사람이 상의해 정한 일이었다. 갑자기 한집에 들어오는 대신, 생활 반경을 맞추고 아이가 오갈 수 있게 하자는 선택이었다.아파트 계약은 도진 개인 명의로 했고 태강 지원은 받지 않았다. 서연 집과 같은 단지나 같은 동은 피했다. 가까이 살더라도 우연을 가장해 들르거나 창문을 확인할 수 없는 거리여야 했다.시우가 도진 집에서 자는 날은 월 두 번부터 시작했다. 아이용 방은 마련했지만 비싼 가구를 한꺼번에 채우지 않고, 시우가 쓰던 담요와 책 몇 권만 옮겼다. 새 물건으로 머무는 마음을 사지 않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시우는 이미 다음 단계를 생각하고 있었다.“같이 살고 싶어?”서연이 물었다.“응. 아빠가 카레도 하고.”“청소는?”“아빠가 해.”“왜?”“아빠 집 깨끗해.”도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시우 의견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원해야 합니다.”“아빠는?”“나도 원해.”서연이 그를 봤다.돌려 말하지 않은 대답이었다.“그래도 지금 당장 들어가겠다는 뜻
영화는 30년 전에 만들어진 로맨스였다.극장에는 관객이 열두 명뿐이었다.서연과 도진은 맨 뒤가 아니라 화면이 편한 가운데 자리를 골랐다. 예전에는 도진이 사람을 피하려고 늘 가장 비싼 전용관을 빌렸다. 이번에는 다른 관객과 같은 줄에서 광고가 끝나기를 기다렸다.영화 시작 직전 비서실에서 긴급 표시가 뜬 전화가 왔다. 도진은 화면을 서연에게 보여주며 물었다.“감사위원회 연락입니다. 받아도 됩니까?”“받아요. 시작까지 4분 남았어요.”도진은 복도로 나가 2분 만에 통화를 끝냈다. 내용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무음 보관함에 넣었다. 서연은 그가 일을 완전히 버리는 것으로 사랑을 증명하지 않아서 오히려 편했다.도진은 팝콘을 사도 되는지 물었고, 서연은 영화 보는 동안 소리 내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팝콘이 어떻게 소리를 냅니까?”“당신은 봉지를 계속 접잖아요.”“기억납니까?”“결혼했을 때 영화 한 번 봤어요.”“한 번뿐이었습니까?”“당신이 중간에 회사 전화 받고 나갔죠.”도진의 손이 매점 카드 앞에서 멈췄다.“오늘은 끄겠습니다.”“급한 일이 있으면 받아요. 말하고 나가면 돼.”“네.”영화는 주인공들이 수십 년 동안 오해하다 마지막에 만나는 이야기였다.예전의 서연이라면 답답하다고 했을 것이다.지금도 답답했지만, 말하지 못한 이유가 각자 있었다는 장면에서는 조금 울었다.영화 중간 주인공이 상대를 보호한다며 이별을 통보하는 장면에서 서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진이 옆을 보려다 멈추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손을 잡거나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각자 화면을 봤다.불이 켜지고 나서야 서연이 말했다.“저런 걸 왜 낭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