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5년 전 끝난 결혼을 뒤로하고 대한민국 최고의 웨딩플래너가 된 한서연. 어느 날 그녀에게 역대급 VVIP 결혼식 의뢰가 들어온다. 그런데 신랑은 자신을 버린 전남편 차도진. 서연은 완벽한 비즈니스 미소로 그의 결혼식을 맡고,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에는 애써 묻어둔 감정과 긴장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View More강남 테헤란로의 한복판, 사선형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하얗게 부서졌다. 대한민국 상위 0.1%의 VVIP들만이 문을 두드릴 수 있는 하이엔드 웨딩 디렉팅 에이전시 ‘루미에르’.
그곳의 대표 한서연은 서류철을 넘기던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차분하면서도 명료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그랜드 볼룸 메인 플라워는 네덜란드 경매장에서 직수입한 화이트 수국과 은방울꽃으로 전면 교체해. 버진로드 단상 높이는 3cm 더 올리고, 핀 조명 룩스는 10% 낮춰서 신부의 실크 베일 라인을 극대화하도록.”
“네, 대표님. 방금 플로리스트 총괄팀과 무대 연출팀에 전달 완료했습니다.”
민 실장이 고개를 숙이며 재빠르게 태블릿을 조작했다. 서연의 눈빛은 한 치의 오차나 타협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날카롭고 완벽했다.
5년 전, 찢겨진 혼인관계증명서 한 장과 조작된 증거들 앞에서 단돈 몇 푼의 위자료조차 쥐지 못한 채 쫓겨나야 했던 시절의 흔적은 이제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홀로 아이를 품에 안고 낯선 땅에서 피를 깎는 노력 끝에 일궈낸 루미에르는, 이제 재계와 정계의 거물들이 수개월 전부터 줄을 서서 예약하는 독보적인 브랜드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때, 민 실장이 다소 긴장된 기색으로 결재판을 조심스럽게 서연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대표님, 조금 전 태강그룹 비서실에서 직통 라인으로 긴급 의뢰가 접수되었습니다. 올해 하반기 재계 최대 규모의 비공개 정략결혼식입니다.”
‘태강그룹.’
그 단어가 집무실의 정적을 가르는 순간, 서연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서류 모서리에서 미세하게 굳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표정은 깊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신랑 측 혼주가 누구지?”
“태강그룹 차도진 회장 본인입니다. 신부는 신우그룹의 외동딸 윤세아 이사고요. 총예산은 백지수표 수준으로 전권 위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차도진.
5년 전, 가문의 안위와 그룹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가 꾸며낸 가짜 위자료 계약서와 합성 사진을 빌미로 자신을 냉혹하게 내팽개쳤던 남자.
밤 9시, 서연은 서경민과 함께 경찰서에 들어갔다. 앞서 보낸 녹음과 기사 자료에 설명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연주도 자신이 원해서 연락을 끊었으며 누구에게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러 왔다.현관 옆에서 기다리던 기자가 서연을 알아봤다. 질문이 겹쳤다.“신부에게 잠적을 권유한 게 맞습니까?”“50억 원 배상 요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서연은 서경민을 봤다. 그는 제출할 자료가 든 서류철을 챙기고, 길게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연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제 이야기는 제가 할게요.”서연은 그녀를 중앙으로 밀거나 카메라 쪽으로 돌려세우지 않았다. 연주가 멈춘 자리에 나란히 섰다.“저는 한서연 대표님이 시켜서 연락을 끊은 게 아닙니다. 예식 준비 과정에서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한 기자가 공방의 위치를 물었다. 서경민이 생활 장소에 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다고 했다.“그럼 결혼은 예정대로 합니까?”“하지 않습니다. 오늘 상대방에게 제 뜻을 직접 전했습니다.”연주는 다음 말을 꺼내기 전에 한 번 숨을 골랐다.“제 의사인데도 계속 누군가 시킨 일이라고 하지 말아주세요.”그 말을 마친 연주가 물러났다. 서연은 공개된 녹음의 앞뒤가 잘렸다는 사실만 설명했다. 전체 통화는 7분 40초였지만 기사에는 15초만 실려 있었다.“당사자와 직접 준비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말에서 뒷부분이 빠졌습니다. 원본과 기사의 차이는 대리인을 통해 전달하겠습니다. 개인적인 상담 내용까지 모두 공개하지는 않을 겁니다.”“누가 편집한 겁니까?&rd
수요일 저녁 7시, 약속한 연수원 회의실이었다. 도진은 지수에게 시우를 부탁하고, 아이가 자기 전에 영상통화를 할 수 있게 시간을 맞춰두었다.최승혁은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연주의 팔부터 잡으려 했다. 서연이 둘 사이로 의자를 밀어놓았다.“앉아서 이야기하세요.”“백연주,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양가 어른들 앞에서 나만 우스워졌잖아.”연주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테이블 아래에 둔 두 손이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서경민이 회의 목적과 녹음 사실을 알리자 승혁은 마지못해 맞은편에 앉았다.“내가 어른들께 잘 말해줄 테니까 들어와. 스트레스받아서 그랬다고 하면 돼.”연주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 승혁이 종이를 낚아채려 하자 그녀가 자기 쪽으로 당겼다.“제 말부터 들어요.”“들으러 왔잖아. 뭘 더 해주면 돼? 드레스도 네가 고른 걸로 바꿔줄게.”승혁은 휴대전화 화면을 켜 드레스 사진을 찾았다. 연주는 그 화면을 보지 않았다.“저한테 어디 아픈 건 아닌지 물어본 적 있어요?”“지금 멀쩡히 앉아 있잖아.”“어제 제가 연락을 끊었을 때요.”승혁의 손이 잠시 멈췄다. 곧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다리를 꼬았다.“온 집안이 널 찾았어. 그걸로 부족해?”“결혼식에 늦을까 봐 찾은 거잖아요.”서연은 연주 앞의 물잔을 조금 옆으로 옮겼다. 종이를 펼칠 공간이 생겼다. 연주는 적어온 문장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들었다.“이 결혼은 하지 않을게요.”승혁이 짧게 웃었다.&ldquo
서경민은 연주가 건넨 자료를 페이지별로 나눠놓았다. 건설 계열사 인수 검토서 옆에 가족 재단의 지분 이전 약정이 놓였다. 서연은 두 문서에 반복되는 이름부터 확인했다.“여기요. 제가 결혼하면 이 지분을 넘긴다는 거죠?”연주가 빈 서명란 위를 짚었다. 서경민은 문서의 작성일과 당사자를 다시 살폈다.“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다만 이 문서가 실제로 체결됐는지, 누구에게 어떤 의무가 생기는지는 더 확인해야 합니다.”“저한테는 이미 끝난 일이라고 했어요. 제가 식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연주 씨가 서명한 건 아니고요?”“네. 날짜만 확인하라고 했어요.”연주는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방금 전까지는 파일을 열어본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눈치를 봤는데, 이제는 조항 끝까지 손가락을 따라가며 읽었다.“태어날 아이에 관한 말도 있네요. 아이를 낳을지 물어본 적도 없는데.”서연이 물잔을 가까이 놓아줬다. 연주는 컵을 잡고도 마시지 않았다.“아버지는 이 결혼이 싫다고 하면 회사 사람들 월급까지 제가 끊는 거라고 했어요.”“회사의 거래와 연주 씨의 혼인 의사는 구분해서 확인하겠습니다.”서경민이 펜을 내려놓았다.“오늘 이 자료를 다 이해해야만 거절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원치 않는 결혼이라는 말씀은 먼저 전할 수 있어요.”연주는 컵을 내려놓고 연락처 목록을 열었다. 최승혁의 이름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만나면 또 제가 예민해서 그런 거라고 할 거예요.”“그럴 때 무슨 답을 하실지 미리 적어볼까요?”서연은 양가가
서연은 처마 밑에서 우산을 접었다. 빨랫줄에는 쪽빛 천과 연한 노란 천이 걸려 있었다. 문 안쪽에서 걸쇠를 미는 소리가 났다.“대표님.”연주는 전화할 때보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문을 반쯤 열고 서연의 뒤를 살폈다. 차 앞에 서 있던 도진과 서경민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같이 온 분들은 밖에 계실 거예요. 변호사님 이야기가 필요하면 부를게요.”“네. 들어오세요.”연주가 문을 열어줬다. 서연은 그제야 안으로 들어갔다.작업대에는 젖은 천과 마른 천이 따로 놓여 있었다. 연주가 급히 의자 위의 실타래를 치우자 서연이 옆에 있던 빈 의자를 끌었다.“그건 그대로 두세요. 여기 앉으면 돼요.”연주의 손톱 아래에는 푸른 염료가 남아 있었다. 연주는 그 손을 감추려다 말고 무릎 위에 내려놨다.“사진을 보고 오신 거예요?”“소개 자료에 공방이 있더라고요. 전화가 연결돼서 다행이었어요.”“비서한테 지워달라고 했었는데. 회사 일과 관계없는 사진이라고 해서요.”연주가 입꼬리를 올렸다가 금방 내렸다.“오늘은 약속 지키려고 나왔어요. 그런데 숍으로 가는 길에 승혁 씨한테 연락이 왔어요. 정오 오찬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적어 보냈더라고요.”그녀는 가방에서 꺼낸 휴대전화를 켰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왔다. 연주가 보여준 원고에는 결혼 후 그룹 업무에서 물러나 가정에 전념하겠다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제가 한 적 없는 말이에요. 그걸 제 입으로 읽으래요.”서연은 화면을 연주 쪽으로 돌려놓았다.“그래서 이쪽으로 오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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