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현민호가 눈을 감자 다니는 작은 수면등을 켠 채 나가지 않고 서 있었다.“그럼 우리 방으로 가서 이야기 좀 하자.”“오늘은 그냥 좀 자자.”다니가 민호의 티셔츠를 잡아당기며 인상을 썼다.현민호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쉬었다.“하.”[최여사]한쪽에서는 휴대전화가 반짝이고 있었다.민호는 조용히 동하의 얼굴을 잠시 보고 조심스럽게 바닥에 발끝을 디뎠다.샤워 후 덜 마른 머리 때문에 깔아 둔 수건에 휴대전화를 싸서 동하가 깨지 않게 방을 나왔다.그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다니는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거실 시계는 아직 10시도 안 된,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현민호는 터벅터벅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작은 위스키병을 따 한 모금 마시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자야 해. 나 한계야.’현민호는 갑자기 등장한 생모와 형 때문에 주변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았다.아버지, 최 여사, 생모까지 작당해서 자신을 속였다.세상이 뒤틀리고 있었고, 감정이 사라져 약을 먹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을 지경이었다.머릿속이 텅 비고, 가슴은 수술 후처럼 텅 비어 가는 느낌을 견디고 있었다.그 상태로 돌아가면 회사 일도, 동하도, 그리고 다니도 지킬 수가 없었다.폐 수술로 피우지 않던 담배라도 배워 볼까 생각 중이었다.그 와중에 휴대전화는 계속 반짝였다.‘하, 나 좀 그냥 두면 안 되나.’현민호는 최민주가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한 번도 통화하거나 만나지 않았다.‘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내 마음도 모르겠는데.’주변에서 재촉하는 사람들이 싫었다.[최여사]“흠.”그의 손가락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민호, 너 지금 어디야?“왜 그러시는데요?”-내가 전화한 게 몇 번째인지 알아? 왜 안 받아?“바빴어요.”-바빠? 내가 지금 무슨 심정으로 지내는지 알기나 해?현민호는 입을 다문 채 피곤한 듯 벽에 기대 섰다.-너 정말 이럴 거야?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내가 너를
리나는 계속 울리는 문자에 인상을 썼다.[맥주창고로 와. 기다리고 있어.][리나야, 난 괜찮아. 너만 있으면 버틸 수 있어.]메시지가 쌓이자 무음으로 돌린 리나가 휴대전화를 백 안에 넣었다.남자들끼리의 대화가 이어지자 조용히 먼저 일어나기로 했다. 같은 빌딩에 있으니 김정호를 돌려보낼 요량이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이야기가 마무리되고 현 대표도 기정준 실장과 더 이야기할 것 같아 리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왔다.맥주창고에 들어서자 맥주를 마시고 있던 김정호가 손을 들었다.“정호 오빠, 왜 왔어. 지금 아버지와 오빠가 근처에 있어.”“보고 싶어서. 주말이니까 우리 집에 가자. 내가 너 주려고 이것저것 장도 봐 두었어.”“오빠, 우리 오빠 만났었다며? 뭐라 그래?”“뭐라든 상관없어. 백주대낮에 납치라도 하겠나. 괜찮아. 그리고 대영은 아직 현 대표가 있는데 나를 자르기라도 하겠어.”민리나는 막상 김정호를 마주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올라왔다.정호가 손을 잡고 손등에 부드러운 키스를 하자 리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곧 손을 뺐다. 주말이라도 회사 근처였다.그리고 공부만 열심히 하고 회사 일만 한 김정호가 나이에 비해 순진한 것도 왠지 부담이 되었다.우연히 집에서 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연애를 한다고 했지 결혼할 마음도 없는데 오빠들이 너무 오버였다. 하지만 현민호라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아무리 훈남인 정호도 현민호를 마주한 뒤에 보면 왕자와 집사를 보는 느낌이었다.속물이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명품이 겉돌지 않게 입을 수 있는 사람은 현민호였다.‘오빠, 그냥 좀 조용히 사귀자.’…어른들까지 접대해야 하는 긴장된 술자리는 8시 정도에 끝났다.아침에 만진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지만 현 대표의 자세는 여전히 반듯하고 예의 바른 자세였다. 민 회장이 연로해서 그 정도에 끝난 것이었다.기정준은 동양의 제안에 나름 호의가 담겨 있다며 친분이 중요하다고 현민호에게 다시 가르쳤다.현민호는
택시를 기다리며 다니는 민호의 얼굴을 떠올렸다.나답고 싶다며 완벽하고 고급스러운 아우라로 서 있던 그가 눈에 선했다.하지만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했다.대영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옷으로 자신이 대표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일까.화려한 옷과 고급 제품들이 잘 어울리는 타고난 몸을 가진 남자.‘민호가 움직이던 사람들이 대영빌딩을 돌아보는 것 같던데, 건물까지 같이 인수하나? 대영몰까지 인수하면 동양은 꿩 먹고 알 먹고네.’동양은 강남에 건물이 없었다. 호텔과 백화점 모두 구도심에 위치해 있었다.'5555.'택시 번호를 확인하고 다니가 차 문을 열었다.‘앗, 김 과장님?’김정호가 다니를 알아보지 못한 채 곁을 지나갔다.‘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인 거지.’다니는 그를 돌아보며 택시에 올라탔다.정신없이 걸어가는 김정호는 오늘따라 그답지 않게 초라해 보였다.‘현민호에게 맞서려고 하지 말고 리나를 잡아요.’다니는 쇼핑몰로 들어서는 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대영빌딩까지 함께 매각하는 방안을 동양 측에서 준비해 왔다.동양백화점이 빌딩을 인수하고, 별도로 대영어패럴의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이었다.현민호에게도 좋은 거래였다.대표의 인센티브를 보장하는 방안도 제시되었다.인수후 1년 만에 늘어난 가치의 3퍼센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 부분은 동양의 사모님이 가지고 있는 현성 지분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제안되었다.빌딩 매각으로 대영의 현금이 늘고 부채비율이 낮아지면, 지분 60%를 보유한 현성화학에도 유리했다.동양은 호텔과 리조트, 백화점과 쇼핑센터에 집중하기로 한 상황이었다.민리나는 오랜만에 화려하게 꾸미고 높은 힐을 신었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잘생기고 유능한 남자 옆에 있었다.대화를 하며 까닥거리는 그의 긴 손가락을 생각없이 지켜보니 가슴 가득 행복이 차올랐다.‘나 민리나야, 지금 일 배우느라 그렇게 있는 거지. 세상 물정 몰라서 구박당한 거 서러워도 이제 직원들도 나 좋아해. 민호 오빠 덕분이야.’
“민호야, 같이 가자.”다니는 민호의 팔을 붙잡고 가만히 올려다보았다.“하아, 다니야.”현민호는 한숨을 쉬며 다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변을 살피고 다니의 손을 살짝 쥐었다가 밀어냈다.“너까지 이러지 마. 난 네 말을 거절하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어. 난 네 말을 들으면 뭐라도 해야 해. 그렇게 못 한다면 나 자신이 견디질 못해.”“그런데?”“그러니 부탁해. 네가 먼저 그런 상황을 만들지 마.모든 대답이 예스가 될 수는 없는 게 세상이야. 지금이 그때이고, 나 보내 줘.”“가든 말든 마음대로 해.”다니가 그의 팔을 놓았다.“너까지 이래야겠어? 중요한 약속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고.”“그럼 어떡해. 한마디도 물어보면 안 돼? 나도 오늘 하루 종일 일했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뛰어다녔다고. 그런데 너는 행사에 오지도 않았잖아.”“세 번 물었어. 다 같은 대답이야. 지금 사과라도 하라는 거야?”“아니. 무슨 일인지 이야기라도 해 달라는 거야.”현민호는 입을 다물었다.“민호야, 내가 너한테 뭐 그렇게 큰 걸 바랐어? 바쁘면 바쁘다고 하면 되고, 못 오면 못 온다고 하면 되잖아.”“늦게라도 간다고 했잖아.”현민호가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떴다.“나 지금 정말 힘들어. 내 생각도 정리가 안 되니 다른 것들도 다 확신이 없는 상태야.”그 말에 다니가 멈칫했다.“뭐가?”“그냥. 여러 가지.”“그럼 나한테 이야기하면 되잖아.”“지금은 생각 중이야. 이야기는 그다음이고.”다니는 말없이 민호를 바라봤다.“그런데 리나하고는 같이 다닐 수 있어?”마음 한가운데 있던 가장 중요한 말을 가장 늦게 꺼냈다.“민리나가 왜 나와?”“나도 모르겠어. 네가 그렇게 차려입고 리나하고 같이 있으니까.”“일 때문에 만난 사람들이야. 옷은 내가 실수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단정하게, 나답게 입은 거야.”“그럼 일 때문에 만났다고 이야기해 주면 되잖아.”“그걸 일일이 설명해야 해? 이미 일 때문인 거 알잖아. 다른 사람들 안 보여?”
신다니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디자이너들이 준비한 옷들을 확인했다.무대 설치와 진행을 맡은 외주 업체의 정 대표와 다시 한번 무대를 확인했다.이미 메인 모델이자 신인 모델인 강하진의 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이태하 팀장은 추가 인력을 요청했다.‘무브의 모델, 대영이 고른 모델이 뜬다.’그런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당시 현 본부장과 홍보팀이 직접 고른 모델이었다.기대는 적중했지만 이렇게까지 호응이 올 줄은 예측하지 못했다.“이태하 팀장님, 입장 제한을 하든지 야외 무대를 해야 할 것 같아요.”이태하가 쇼핑센터 안을 둘러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야외는 안 돼요. 장소 사용 허가도 다시 받아야 하고, 조명이며 음향이며 전부 옮겨야 합니다.”“그렇겠죠. 그럼 입장 제한을 해야 합니다.”“문제는 강하진 씨 팬들이 계속 들어온다는 거예요. 벌써 SNS에 올라갔답니다.”다니는 무대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살폈다.강하진의 이름이 적힌 작은 플래카드까지 보였다.‘이 정도로 뜰 줄이야.’“팀장님, 쇼핑센터 관리실하고 보안팀 책임자 좀 불러 주세요.”“무슨 계획 있어요?”“여기서 사고 나면 패션쇼고 뭐고 다 끝이에요. 일단 사람부터 정리해야죠.”다니는 외주 업체에서 무대 설치와 진행을 맡은 정 대표를 찾았다.“정 사장님, 저 의자들을 뒤로 빼고 무대 양쪽에 통로를 확보해 주세요. 모델들 동선하고 관객 동선이 겹치면 안 돼요.”“의자까지 치우자고요?”“네. 어차피 앉아서 보는 패션쇼로 준비한 것도 아니잖아요. 뒤에서는 서서 보게 하고 앞쪽에만 초청객 자리를 남기죠.”다니는 다시 휴대전화를 꺼내 강하진의 매니저에게 연락했다.“매니저님, 강하진 씨 팬들이 생각보다 많이 오셨어요. 혹시 팬클럽 운영하시는 분하고 연락이 될까요?”다니는 팬클럽 운영자와 통화하며 상황을 설명했다.“팬분들이 많이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한데요. 지금 쇼핑센터 이용객들하고 동선이 겹쳐서 안전 문제가 생길 것 같아요.”“네. 그래서 운영자님께 부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현 회장이 눈물을 닦았다. 민호가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이었다.“내가 네 엄마 편에 서지 못했다.”현일두 역시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의 물잔만 바라보았다.“에단아, 네가 아주 어렸을 때는 한시도 엄마는 널 혼자 두지 않았어.”이선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려 했어. 너하고 있으려고.”이선영은 잠시 물을 마시며 숨을 골랐다.“사모님하고 이혼 절차가 거의 끝났다고, 귀국하면 결혼하라고 시어머님이 직접 연락하셔서 들어왔어.”에단이를 향한 시선을 유지한 채 말을 이어갔다.“공항에도 김 기사가 직접 데리러 왔어. 그런데 그사이 사모님이 사귀던 사람과 헤어졌고, 이혼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바꾸셨더라고.”이선영의 목소리가 목이 메여 떨렸다.“아무 것도 모르고 시댁에서 지내다 아이를 빼앗기고 말았어.”“흑흑, 엄마가 미안해.”그때 직원이 들어와 조심스럽게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접시 소리만 달그락거리며 침묵을 깨뜨렸다.아무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직원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일두가 갈비찜 접시를 자기 앞으로 당겼다.“나는 먹을 거야. 나 아침도 안 먹었어. 어머니도 그만 우세요. 다들 밥 못 먹잖아요.”이선영이 말없이 자신을 도우려는 큰아들을 바라봤다.“배고프게 자라서 음식 남기는 거 싫어해요. 제가 못 먹는 거 없이 다 잘 먹어요.”형의 말에 현민호도 더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다.어머니가 위로를 바란 것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현민호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현민호는 밥에 찬물을 부었다. 억지로 음식을 먹을 때나, 최민주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을 때 하던 행동이었다.지금도 밥을 삼키기 어려울 만큼 속이 답답했다.최민주 같으면 소리를 지를 타이밍이었다.“여기 젓갈이랑 찬물밥은 잘 어울릴 것 같아. 먹어 봐. 엄마 것도 줄게.”현민호는 귀를 막고 싶었다.미국에서 요양할 때도 이렇게 자신을 챙겼었다.아직은 용서하고 싶지도, 더는 가까워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