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아내는 재벌 상속녀였다

버림받은 아내는 재벌 상속녀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By:  똑딱팸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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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3주년 기념일 밤. 서윤이 기다리던 레스토랑에 태준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가 향한 곳은 아내가 아닌 첫사랑 윤채린이었다. 게다가 채린의 목에는 태준이 특별한 사람을 위해 준비했다던 바로 그 루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 순간, 서윤이 꿈꾸던 미래는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진짜 배신은 이제부터였다. 태준은 오히려 서윤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며 몰아세웠다. 증거라며 내민 사진 속에는 낯선 남자와 함께 있는 서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믿어 주기는커녕 의심부터 하는 남자. 그제야 서윤은 깨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결혼은 애초에 혼자만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사랑이 배신으로 변한 순간, 상처 입은 마음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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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잊힌 기념일

결혼기념일에 남편의 첫사랑을 보았다.

그 여자의 목에는 내가 사흘 내내 기사 사진을 들여다보며 탐냈던 루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청담동의 한 호텔 레스토랑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태준에게 여덟 시에 오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로 휴대전화를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모른다. 답장은 없었지만 읽음 표시는 사라져 있었다.

오늘만큼은 꼭 와 줄 거라고 믿었다. 결혼한 지 꼭 삼 년이 되는 날이었으니까.

예약 확인을 하러 온 직원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물잔은 벌써 두 번이나 채워졌고, 다른 테이블에서는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나는 아직 메뉴판조차 펼치지 못했다. 태준이 좋아하는 음식부터 주문할 생각이었다. 음식이 식어 나오는 걸 싫어하니까.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면서도 그가 끝내 오지 않을 가능성만큼은 애써 외면했다.

며칠 전 경제면에 태경그룹 후계자가 경매에서 희귀한 루비 목걸이를 낙찰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특별한 사람에게 줄 선물이라는 관계자의 말도 덧붙어 있었다.

나는 그 특별한 사람이 나이기를 바랐다. 아내라면 그런 기대를 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때 입구 쪽 직원이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태준이 들어섰다. 짙은 정장 차림에 붉은 장미 꽃다발까지 들고 있었다. 나는 무릎 위에 놓아 두었던 냅킨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그가 내 테이블 옆을 그대로 지나쳤다.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였다.

태준이 멈춰 선 곳은 맞은편 테이블이었다. 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태준이 꽃다발을 건네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윤채린이었다.

남편이 나와 결혼하기 전 사랑했던 여자.

그녀의 쇄골 아래로 붉은 보석이 반짝였다.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작은 목걸이였다. 그런데도 그 순간만큼은 레스토랑의 어떤 조명보다 눈부셨다.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사를 몇 번이고 확대해 보던 손가락이 떠올랐다. 부끄러움에 손이라도 감추고 싶었다.

태준은 채린의 의자를 빼 주었다. 내가 삼 년 동안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다정한 몸짓이었다.

어느새 나는 테이블을 짚은 채 서 있었다. 저쪽으로 가서 묻고 싶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은 하느냐고. 아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조차 불편하지 않으냐고.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손님,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실까요?”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이 내 남편이라고 소리치면, 그가 나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봐 줄까. 그 대답을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가방을 챙겨 레스토랑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두 사람은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채린은 웃고 있었고, 태준은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유리문이 닫히자 두 사람의 웃음소리도 멀어졌다.

집에 돌아오니 식탁 위에는 초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돌아온 뒤 함께 마실 생각으로 준비해 둔 와인과 잔 두 개, 작은 꽃다발까지. 혹시 밖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더라도 집에서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는 초에 불을 붙이는 대신 와인부터 따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현관에서 도어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잤어요?”

태준은 재킷을 벗으며 식탁을 힐끗 바라보았다. 잠시 멈칫했을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그는 대답하기까지 잠깐 뜸을 들였다.

“미안해요. 결혼기념일을 잊었네요.”

내가 기다렸던 말과는 너무나 달랐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채린 생일이요. 얼굴 보기로 했었거든요.”

그녀의 생일은 기억하고 있었다. 약속도 지켰다. 나와의 약속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 결혼기념일은 매번 잊으시면서 그 사람 생일은 챙기시는 거예요?”

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식탁 위로 밀어 놓았다. 안에는 십억 원짜리 자기앞수표가 들어 있었다.

“갖고 싶은 거 사세요. 오늘 일은 제가 미안하니까.”

나는 수표에 적힌 숫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 돈이면 내가 이 집에서 보낸 삼 년의 시간까지 계산할 수 있다는 뜻일까.

“제가 원하는 게 돈인 것 같으세요?”

“그럼 뭡니까?”

“당신이 와 주는 거요. 같이 밥 한 끼 먹는 거요. 그게 그렇게 어려우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울고 싶지 않아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태준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그런 결혼은 아니었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서윤 씨.”

그가 드디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여전히 그 한마디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태준은 식탁 위의 수표를 턱짓했다.

“서윤 씨도 돈 보고 저와 결혼한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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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잊힌 기념일
결혼기념일에 남편의 첫사랑을 보았다.그 여자의 목에는 내가 사흘 내내 기사 사진을 들여다보며 탐냈던 루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그날 저녁, 나는 청담동의 한 호텔 레스토랑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태준에게 여덟 시에 오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로 휴대전화를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모른다. 답장은 없었지만 읽음 표시는 사라져 있었다.오늘만큼은 꼭 와 줄 거라고 믿었다. 결혼한 지 꼭 삼 년이 되는 날이었으니까.예약 확인을 하러 온 직원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물잔은 벌써 두 번이나 채워졌고, 다른 테이블에서는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나는 아직 메뉴판조차 펼치지 못했다. 태준이 좋아하는 음식부터 주문할 생각이었다. 음식이 식어 나오는 걸 싫어하니까.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면서도 그가 끝내 오지 않을 가능성만큼은 애써 외면했다.며칠 전 경제면에 태경그룹 후계자가 경매에서 희귀한 루비 목걸이를 낙찰받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특별한 사람에게 줄 선물이라는 관계자의 말도 덧붙어 있었다.나는 그 특별한 사람이 나이기를 바랐다. 아내라면 그런 기대를 해도 되는 줄 알았다.그때 입구 쪽 직원이 허리를 숙였다.“어서 오십시오, 대표님.”태준이 들어섰다. 짙은 정장 차림에 붉은 장미 꽃다발까지 들고 있었다. 나는 무릎 위에 놓아 두었던 냅킨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그가 내 테이블 옆을 그대로 지나쳤다.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였다.태준이 멈춰 선 곳은 맞은편 테이블이었다. 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태준이 꽃다발을 건네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윤채린이었다.남편이 나와 결혼하기 전 사랑했던 여자.그녀의 쇄골 아래로 붉은 보석이 반짝였다.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작은 목걸이였다. 그런데도 그 순간만큼은 레스토랑의 어떤 조명보다 눈부셨다.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사를 몇 번이고 확대해 보던 손가락이 떠올랐다. 부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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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사진 속 남자
“돈 보고 결혼했다고요?”되묻는 내 목소리조차 낯설게 들렸다. 태준은 대답 대신 내가 마시던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한 모금 입에 댔다가 천천히 내려놓는 동안, 나는 그가 말을 거두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건 사과가 아니었다.“나한테 사랑하는 척할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척한 적 없어요.”“아직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네요.”태준은 봉투 하나를 더 꺼내 식탁 위에 던졌다. 안에 들어 있던 사진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나는 발치에 뒤집혀 있던 사진 한 장을 주워 들었다.레스토랑에서 중년 남자와 마주 앉아 있는 내 모습이었다. 다른 사진에는 그 남자가 내 어깨를 감싸고 뺨에 입을 맞추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아버지였다.서림그룹 회장 한도현. 태준이 단 한 번도 장인으로 만나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나는 사진 속 아버지의 옆얼굴을 손끝으로 쓸었다. 오랜만에 딸을 만났다며 평소보다 환하게 웃으셨던 날이었다. 그날의 다정한 모습이 남편의 손에서는 불륜의 증거가 되어 있었다.사진은 멀리서 찍은 듯 화질이 거칠었다. 유리창에 반사된 조명 때문에 아버지 얼굴의 절반은 흐릿하게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소매 끝을 한 번 접어 올리는 버릇도, 식사를 마친 뒤 늘 내게 건네던 손수건도.태준은 그런 것들을 알 리 없었다. 그와 함께 앉아 아버지 이야기를 나눌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나는 세어 본 적조차 없었다.“이 사진, 어디서 났어요?”“그게 중요해요?”“중요하죠. 누가 무슨 의도로 보냈는지 알아야 하잖아요.”“사진 속에 당신이 있는 건 맞잖아요.”태준은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비아냥거렸다.“저런 나이 많은 남자가 취향인 줄은 몰랐네요.”뺨을 맞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사진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분은 우리…….”그때 태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 윤채린이라는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나를 향하던 눈빛에서 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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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루비보다 차가운 말
민주는 정말 십 분 만에 도착했다. 현관 앞에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차 키를 흔들었다.“잘 차려입었네. 오늘은 네 남편 얘기, 욕할 때만 하는 거야. 알았지?”그 말에 겨우 웃음이 났다. 집 안에서 잔뜩 굳어 있던 얼굴이 아플 정도였다.계단을 내려가던 민주가 화단 옆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이건 뭐야? 누가 떨어뜨렸나?”검은색 보석함이었다. 뚜껑에는 태준이 루비 목걸이를 낙찰받았던 경매사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나는 무심코 상자를 열었다. 안쪽 벨벳 천에는 다이아몬드 귀걸이 한 쌍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태준이 집을 나서다 떨어뜨린 걸까. 누구에게 주려던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채린의 목에 걸려 있던 루비 목걸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아내에게는 수표를 건네고, 그 여자에게는 직접 고른 보석을 선물하는 남자.혹시 귀걸이 뒤에 편지라도 들어 있을까. 잠깐이나마 내 이름이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그 기대를 애써 밀어냈다. 확인하고 나서 또다시 실망하는 게 두려웠다.민주가 상자를 받아 들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버려.”“뭐?”나는 보석함을 닫아 현관 옆 쓰레기통에 넣었다.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민주는 잠시 나를 바라봤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일단 가자. 여기 공기부터 벗어나야겠어.”차는 한강변을 따라 달렸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도, 이 집도 아닌 곳.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 없이 편히 숨 쉴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민주가 나를 데려간 곳은 청담동의 한 명품 매장이었다. 예전부터 함께 드나들던 곳으로, 늦은 시간에도 별도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예약해 둔 모양이었다.직원이 내 이름을 확인한 뒤 안쪽 라운지로 안내했다. 은은한 가죽 향과 잔잔한 음악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진열대에 놓인 가방들을 바라보자 결혼 전의 일상이 떠올랐다. 가격표보다 색감과 소재를 먼저 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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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아내의 자리
다음 날 오후, 나는 채린이 정한 카페로 향했다. 밤새 몇 번이나 휴대전화를 확인했지만 태준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다.채린은 카페 안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녀의 목에는 오늘도 루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와 주셨네요. 앉으세요.”나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떨리는 손을 보이고 싶지 않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문자로 보낸 말, 무슨 뜻이에요?”“말 그대로예요.”“태준 씨 아이란 걸 어떻게 확신하세요?”채린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마치 내가 어리석은 질문이라도 한 것처럼.“제가 귀국한 날 오빠와 함께 있었거든요. 그날 밤 집에 안 들어오셨죠?”기억이 났다. 태준은 늦는다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회사에 일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남겨 둔 국을 두 번이나 데웠다. 다음 날 돌아온 그는 피곤하다며 곧장 방문을 닫아 버렸다.“그날 두 분이 함께 잤다는 말씀이세요?”“직접 말해 드려야 알아들으시겠어요?”채린은 찻잔을 감싸 쥐었다. 나를 바라보는 동안에도 입가의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어젯밤 태준이 내게 사진을 던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친정아버지와 식사한 것조차 죄가 되는 내게, 그는 대체 어떤 얼굴로 이 여자를 만났을까.“그래서 저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서윤 씨가 자기 처지를 제대로 알았으면 해서요. 오빠가 누구를 원하는지는 이미 보셨잖아요.”채린의 손가락이 목걸이 줄을 가볍게 쓸었다.“어제 레스토랑에 혼자 앉아 계신 것도 봤어요.”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고, 결국 혼자 가방을 챙겨 나가던 모습까지 그녀는 전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알면서도 일부러 그러신 거예요?”“제 생일이었잖아요. 제가 피할 이유라도 있었나요?”채린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산부인과 진료 확인서였다. 나는 이름과 날짜, 임신 확인 문구를 차례로 읽었다.종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락거렸다. 임신 사실을 확인하는 서류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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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돌아갈 곳
채린과 헤어진 뒤 차를 몰고 성북동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아도 익숙한 길이었다. 눈에 익은 담장이 보이자 자연스레 속도를 늦췄다. 경비실에서 차를 확인한 뒤 곧바로 문이 열렸다.삼 년 동안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태준에게 적당한 이유를 둘러댔다. 친구를 만나러 간다거나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한 번도 자세히 묻지 않았다.아버지는 거실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계셨다. 비서가 내 짐을 받으려 했지만, 나는 괜찮다며 가방을 품에 끌어당겼다.“웬일이냐. 바쁜 남편께서 친정에 다녀오라고 허락이라도 하셨어?”늘 그렇듯 반기는 말부터 건네지는 않으셨다. 나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오늘 여기서 자고 싶어요.”아버지가 찻잔을 내려놓으셨다.“밥은 먹었고?”“생각 없어요.”“얼굴이 반쪽이 됐구나. 그 집은 사람을 굶기니?”걱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괜찮다고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굴고 싶지는 않았다.“태준 씨한테 여자가 있어요.”차를 따르던 아버지의 손이 멎었다. 하지만 놀란 기색은 오래가지 않았다.“그럴 줄 알았다.”그 한마디에 목이 메었다.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으려고 찾아온 곳에서, 이번에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확인받는 기분이었다.“오늘은 그 말씀 안 하시면 안 돼요?”“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네가 좋다고 고집해서 성사시킨 결혼이야. 강 회장한테까지 네 신분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지.”나는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아버지와 태준의 할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셨다. 두 분의 허락을 얻은 뒤에도 내가 끝까지 내세운 조건은 하나였다. 서림그룹 외동딸이라는 사실을 태준에게 알리지 않는 것.집안 이름을 듣고 달라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에게만은 그저 나 자신으로 사랑받고 싶었다.“그 조건에 동의하신 건 아빠잖아요.”“네가 돌아올 때 이런 얼굴일 줄 알았으면 허락하지 않았어.”아버지가 시선을 피하셨다. 그 말에 담긴 감정을 읽는 일은 어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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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이혼할래
그날 밤 나는 친정 침대에서 잠들었다. 자다가도 몇 번이나 눈을 떴다. 옆자리의 인기척을 살피는 버릇은 잠자리가 바뀌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불을 켜고 나서야 더는 태준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휴대전화를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쌓여 있었다. 전부 태준에게서 온 전화였다. 결혼한 뒤 처음으로 그의 전화를 받지 않은 밤이었다.아침에는 강재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아버님께 얘기 들었어요. 괜찮습니까?]재현은 아버지와 투자 관련 일을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몇 차례 식사 자리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데, 내 이야기를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 주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아 있었다. 그가 태준과 같은 집안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괜찮아요. 제가 정리할게요.]답장을 보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혼자 다 감당하려고 하지 마요.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요.”“고마워요. 그런데 오늘은 제가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남편 만나러 갑니까?”“네. 짐도 좀 챙겨 오려고요.”재현은 주소를 물었다. 혹시 힘든 일이 생기면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가 끝내 주소를 받아 적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오늘 대화가 어떻게 끝날지 나 역시 장담할 수 없었다.회사에는 오전 반차를 냈다. 팀 채팅방에 급한 자료가 있는 위치를 남기자 지은이 나머지는 맡겠다고 답했다. 나는 고맙다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화면을 닫았다.출근하지 않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동료들이 부러웠다. 내 사정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서랍에서 가방을 꺼냈다. 어젯밤 입었던 옷에는 카페의 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손목에 걸고 있던 머리끈을 풀어 머리를 다시 묶으며 거울을 들여다봤다. 울었던 흔적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잊지 않게 해 주지는 못했다.집에 도착했을 때 태준은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평일 오전에 회사에 가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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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가져갈 것은 하나뿐
“확인이라니요?”내가 캐리어를 당기기도 전에 어머니가 손잡이를 낚아챘다. 안에 넣어 둔 블라우스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가사도우미는 난처한 표정으로 문가에 서 있었다.“집에 있던 귀한 물건이 섞여 있을 수도 있잖니.”어머니는 아주 당연한 절차라도 설명하듯 말했다.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옷부터 주웠다.“제 옷이에요. 제가 가지고 온 것들이고요.”“그건 봐야 알지. 나갈 때는 다 자기 거라고 하더라.”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삼 년 동안 어머니 앞에서 말을 골라 하던 버릇이 여전히 입술을 붙잡았다. 듣기 좋은 대답을 찾느라 정작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어머니 물건 가져갈 생각 없어요. 손 놓으세요.”“어디서 배운 버릇이니?”계단을 올라온 태준이 방문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사이가 틀어졌어도 이건 아니라고, 남의 짐을 뒤지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태준은 나와 어머니 사이에 멈춰 섰다.“엄마, 그냥 놔둬.”그게 전부였다. 어머니 손에서 캐리어를 빼앗지도, 바닥에 떨어진 내 옷을 주워 주지도 않았다.“네가 이러니까 얘가 기고만장하지. 나중에 재산이라도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어머니는 캐리어 안쪽 지퍼까지 열어젖혔다. 가사도우미가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사람까지 이 장면에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나가 계세요. 제가 할게요.”도우미가 망설이자 나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문이 조용히 닫혔다.바닥에는 잠옷 사이로 작은 작업 도구 주머니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부터 주워 가방 안쪽에 넣었다. 어머니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결혼 전부터 쓰던 도구 하나를 챙기면서도 마치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서 있어야 했다.“가진 것 없이 들어왔으면 나갈 때도 조용히 나가야지.”어머니의 말이 방 안에 울렸다. 나는 캐리어 지퍼를 닫고 그 위에 손을 얹었다.“제가 뭘 가져간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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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남편의 형
문가에는 강재현이 서 있었다.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 멈췄다. 태준이 재현을 바라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향한 경계심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억눌러 온 감정을 간신히 누르고 있는 얼굴이었다.“여긴 어떻게 왔어요?”“연락이 안 돼서요. 아래에서 소리가 들리더군요.”재현의 시선이 캐리어 손잡이를 붙잡은 어머니의 손으로 향했다.“오랜만입니다. 여전하시네요.”어머니의 입매가 굳었다. 그제야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이유를 묻기도 전에 태준이 비웃듯 웃었다.“설마 이 사람한테까지 연락했어? 이제는 내 형이야?”형.나는 재현과 태준을 번갈아 바라봤다. 같은 성이라는 사실만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관계였다.재현이 태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재현을 피하듯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을 보고서야 내가 이 집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 실감했다.“무슨 말이에요?”“몰랐다는 얼굴은 하지 마. 사진 속 남자에, 이제 내 형까지. 대체 몇 명이야?”재현이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섰다.“함부로 말하지 마.”“우리 부부 일에 끼어든 사람이 할 말인가?”“부부 일이라는 말로 사람을 모욕할 권리까지 생기는 건 아니야.”태준의 시선이 재현의 손에 닿았다. 그저 내 캐리어 옆에 놓여 있을 뿐인 손이었다. 그런데도 태준은 그것마저 못마땅한 듯 바라봤다.“형은 원래 남의 것에 관심이 많았지.”재현이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얘기는 네 어머니께 해. 우리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아버지 곁에 들어오신 분이 누구였는지 잊었나 보네.”방 안이 조용해졌다.어머니가 캐리어에서 손을 뗐다. 나는 놓칠 뻔했던 손잡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태준에게 다른 어머니를 둔 형이 있다는 사실도, 그 집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전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재현이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미안한 기색이 스쳤지만, 지금 설명할 수 없다는 걸 나도 알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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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서류가 도착한 날
변호사 사무실에서 상담 순서를 기다리던 중, 재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태준이와 저는 아버지가 같습니다. 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쪽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셨고요.”나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알고 나니 닮은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표정만큼은 전혀 달랐다.“왜 말씀 안 하셨어요?”“그 집안과 왕래를 끊은 지 오래됐습니다. 아버님과 함께 일하게 된 뒤에도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고요.”“제가 태준 씨 아내라는 건 알고 계셨죠?”“네. 그래서 더 조심했어야 했습니다.”핑계를 늘어놓지 않는 사과였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은 그 얘기까지 감당하기가 벅차요. 나중에 들을게요.”“괜찮습니다. 대신 한 가지는 말씀드릴게요.”재현이 내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태준이가 쉽게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협의가 어렵다면 다른 절차도 준비해야 해요.”나는 접수창구 옆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집을 나왔으니 절반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잠시 후 직원이 내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함께 상담실로 들어갔다. 재현이 소개한 이정훈 변호사는 자리를 권한 뒤 내 이야기를 차분히 받아 적었다. 결혼 기간, 자녀 유무, 현재 거주지.누군가 내 결혼을 감정이 아닌 사실에 근거해 물어보는 일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자녀는 없고, 오늘부터 별거를 시작하신 거군요.”“네. 오늘 짐을 가지고 나왔어요.”“재산 관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혼인 중 형성된 재산이나 생활비와 관련된 자료를 가지고 계신가요?”나는 가방 위에 손을 얹었다.“그 사람 돈은 받고 싶지 않아요. 그냥 정리하고 싶어요.”변호사는 곧바로 동의하지 않았다.“감정과 별개로 권리와 책임은 먼저 확인하셔야 합니다. 오늘 당장 포기하겠다고 결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그 말에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조금 풀렸다.책상 위에 놓인 펜을 들어 상담 기록의 이름 칸에 서명했다. 손끝이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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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붙잡을 구실
서윤이 전화를 끊었다. 통화 종료 화면이 뜬 휴대전화를 바라보면서도 나는 한동안 그것을 귀에서 떼지 못했다.이혼하자는 말은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변호사 이름이 적힌 서류가 책상 위에 놓이기 전까지는.그녀가 정말 나를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결혼은 할아버지가 정한 일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한 번만 만나 보라고 했다. 서윤은 내 앞에서 잘 웃었다. 집안 배경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원하는 것을 길게 늘어놓지도 않았다. 나는 그 조용한 태도를 속셈이 분명한 여자의 여유라고 여겼다. 태경이라는 이름만 얻으면 충분한 여자라고.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그녀에게 차갑게 굴었던 이유도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집에 불이 켜져 있는 풍경이 익숙해졌다. 늦게 귀가하면 데워 놓은 국이 있었고, 숙취로 누워 있으면 서윤이 물수건을 갈아 주었다. 집사에게 맡기라고 해도 그녀는 굳이 직접 했다.귀찮다고 말하면서도 손을 밀어낸 적은 없었다. 잠결에 그녀가 자리를 뜨면 나도 모르게 눈을 뜨곤 했다.내 마음을 인정해 보려고 한 적도 있었다. 먼저 같이 저녁을 먹자고 말하고, 다음 주말에는 일정을 비워 보려고 했다. 그런 말을 하면 서윤이 얼마나 기뻐할지 알고 있었다.두 달쯤 전, 모르는 번호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낯선 남자가 서윤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창에 비친 조명 탓에 남자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서윤이 웃는 모습만은 선명했다.나는 보낸 사람에게 답하지 않았다. 사진이 어디서 났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느낀 모욕감이 다른 모든 의문보다 앞섰다.그날 밤 술을 마셨다. 서윤에게 직접 묻기 전에, 그녀에게서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부터 겁이 났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호텔 침대 옆에는 채린이 있었다.그녀는 내가 불러서 왔다고 했다. 함께 밤을 보냈다고도 했다. 기억은 중간에서 뚝 끊겨 있었다. 셔츠는 의자에 걸려 있었고, 채린은 울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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