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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카피바라 1호
라서윤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비록 겉으로는 나무라는 듯했지만 장재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3년 동안 쭉 해외에 있었는데도 아무도 그녀를 대신할 수 없었다. 장씨 가문에 시집은 못 가더라도 장재경은 앞으로도 계속 그녀를 좋아할 것이다.

“난 널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늘 차갑게 굴어.”

라서윤을 달래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심은하에게 항상 차가웠었다.

라서윤과의 재회로 잠깐 즐거웠지만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장재경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재경아, 나 새우 까 줘.”

라서윤이 젓가락으로 새우 하나를 집어 장재경의 그릇 위에 놓으면서 말했다.

장재경의 앞에서 라서윤은 늘 응석을 부리며 제멋대로 굴었고 장재경은 그런 그녀에게 기꺼이 맞춰 주었다. 그러나 오늘 장재경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그릇 위에 놓인 새우를 바라보았다. 애정 가득하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윤아, 나 해산물 알레르기 있잖아. 잊었어?”

장재경은 곱게 자랐고 해산물 알레르기가 심한 편이라서 해산물을 조금만 만져도 바로 두드러기가 생겼다. 반대로 심은하는 해산물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와 3년 동안 만나면서 밖에서조차 해산물을 먹은 적이 없었다. 혹시라도 그가 해산물의 비린내를 맡을까 봐 말이다.

“어머, 깜빡했다.”

라서윤은 귀엽게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평소처럼 장재경의 팔을 잡아당기며 애교를 부렸다.

“괜찮아. 일회용 장갑 끼고 하면 되지. 나 네일 새로 했는데 내가 이 손으로 새우 까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지?”

3년은 꽤 오랜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장재경은 라서윤의 생활 습관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라서윤은 알레르기 같은 중요한 일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그에게 해산물 알레르기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하여 새우를 까달라고 요구했다. 심은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장재경은 밖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단 한 번도 심은하를 떠올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하필 라서윤이 돌아온 지금 자꾸만 심은하가 떠오르는 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

“알겠어. 까줄게.”

장재경은 순순히 일회용 장갑을 꼈다. 라서윤은 그가 아주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라서윤이 별을 따달라고 한다면 장재경은 무슨 수를 쓰든 별을 따줄 것이다.

옆 방.

심은하는 마치 우아한 백조처럼 등을 곧게 펴고 주재원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녀를 지배했던 나약함이나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장재경이랑 3년 동안 만났다면서요?”

주재원은 심은하를 쭉 훑어본 뒤 무심하게 물었고 심은하는 그의 질문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주재원은 그녀가 장재경과 만났었다는 사실을 꺼리는 것일까?

“네. 하지만 관계를 가진 적은 없어요.”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주재원의 앞에서 감히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주재원의 실력이라면 금방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장재경과 3년 동안 만난 건 사실이지만 장재경은 라서윤을 위해 정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었다. 심은하가 아무리 노력해도 장재경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고 다른 건 다 했어도 관계만큼은 가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것이 서운했지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심은하가 초조한 얼굴로 해명하자 주재원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재원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장재경과 달랐다. 주재원 또한 나른한 분위기의 소유자였지만 장재경처럼 방탕하거나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다. 주재원은 오히려 굉장히 냉철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주재원은 변덕이 심하고 난폭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누가 이렇게 꾸며준 거예요?”

심은하가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주재원은 그 질문을 하고 싶었다.

누가 봐도 화려한 미인상인데 수수하고 밋밋한 옷을 입고 있으니 어색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런 스타일의 옷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장재경이 이렇게 입으면 예쁘다고 해서요.”

심은하는 긴장되는 마음에 옷자락을 꾹 쥐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주재원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입꼬리가 눈에 띄게 올라간 건 아니었으나 그의 눈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장재경이 한 말은 다 무시해요. 은하 씨는 앞으로 나랑 만날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장재경이 한 말은 단 한 마디도 기억하지 말아요.”

주재원의 말에 심은하는 잠깐 얼이 빠졌다.

앞으로 그와 만난다는 말은... 그녀가 장재경과 3년 동안 만나는 걸 개의치 않는다는 뜻일까?

“네, 알겠어요.”

심은하는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주재원의 태도는 난폭하지 않고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심은하는 왠지 모르게 그의 말에서 압박감이 느껴져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장재경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욱 긴장되었다.

“다른 문제가 없다면 내일 바로 혼인신고하죠.”

심은하는 옷자락을 잡고 있다가 손에 힘을 풀었는데 손바닥이 손톱에 긁히는 바람에 아파서 헛숨을 들이키게 되었다.

‘내일? 이렇게 빨리?’

“무슨 문제 있어요?”

주재원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의 피곤한 듯한 눈빛은 마치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맹수의 눈빛을 방불케 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아뇨!”

심은하는 황급히 부인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차라리 빨리 결혼하는 편이 그녀에게는 이득이었다. 심씨 가문에는 그녀의 자리가 없었고 심현수는 그녀를 하루빨리 시집보내고 싶어 했다. 장재경과 함께 산 3년 동안 심현수는 하루건너 그녀에게 언제 결혼하냐고 물었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고 심은하는 결국 장재경과 결혼하지 못했다. 심현수는 그 사실에 매우 실망했다.

주재원과 결혼한다고 해도 앞으로 늘 참고 견디면서 외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심씨 가문과 장재경에게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내일 아침 9시 구청에서 봐요.”

말을 마친 뒤 주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에는 손도 안 댄 걸 보면 오로지 결혼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온 듯했다. 심은하와 만난 뒤 곧바로 본론을 꺼내고 떠나는 점이 장재경보다 몇 배는 더 나았다.

심은하는 배가 매우 고팠기에 음식을 몇 젓가락 먹은 뒤 집으로 돌아가 심현수에게 주재원과 내일 혼인신고를 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주재원이 흔쾌히 동의했다는 사실에 심현수는 매우 놀라워했다.

“다른 남자랑 만났었던 너를 받아줄 줄은 몰랐는데. 설마 이상한 취향이 있는 건 아니겠지?”

심현수는 기분이 좋은지 심은하의 기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장재경을 떠나 더 큰 권력과 재력을 손에 쥔 주재원을 물어 왔으니 그의 딸 심은하는 꽤 쓸모가 있었다.

깊은 밤.

장재경은 라서윤을 집까지 바래다준 뒤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안은 캄캄했고 외출하기 전에 문 앞에 두었던 쓰레기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상황을 보니 심은하는 줄곧 집에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오늘 아침 심은하가 짐을 다 챙겨서 나갔다고 한 사실을 떠올린 장재경은 이마를 짚으며 헛웃음을 쳤다. 심은하가 정말로 집에서 나갈 줄은 몰랐지만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하고 금방 돌아올 것이다.

장재경은 그녀를 당분간 무시하며 차갑게 대할 생각이었으나 라서윤과 식사를 하고 난 뒤 기분이 좋지 않아 당장 심은하가 보고 싶었다.

[돌아와. 나 집에 왔어.]

한편, 심은하는 내일 혼인신고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장재경이 보낸 문자를 보았을 때 심은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복잡한 마음으로 빠르게 장재경을 차단했다.

그녀는 주재원과 내일 혼인 신고를 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장재경에게 헤어지겠다는 말도 전했고 장재경도 동의했다. 그런데 장재경이 집에 돌아왔다는 말 한마디 했다고 꼬리를 흔들며 다시 그곳에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라서윤이나 챙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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