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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카피바라 1호
장재경은 심은하에게 문자를 보낸 뒤 샤워하러 갔다. 그러나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을 때까지도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했다.

예전이었다면 심은하는 장재경의 문자를 받자마자 바로 답장을 보냈을 것이다. 지금 장재경은 새우껍질을 깐 손이 매우 간지러웠고 자꾸 긁어서 붉은 흔적까지 남았다. 그러나 라서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걸 보았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심은하였다면 안절부절못하면서 마음 아파했을 텐데 말이다.

‘아니지.’

마음 아파하는 것보다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는 것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심씨 가문에서 투자를 받지 못할 수도 있게 되니 말이다. 심은하가 단순히 돈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해도 장재경은 그런 반응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오늘 몇 번이나 심은하에게 심한 말을 했던 걸 떠올린 장재경은 사람을 달래는 데 소질이 없음에도 결국 먼저 심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곧 들려오는 안내음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진짜 화가 났다는 거지.’

심은하가 그의 번호를 차단해 버릴 줄은 몰랐다. 오늘 밤 그녀가 곁에 없어서인지 장재경은 왠지 모르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일 회사에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이제는 정말로 자야 했다.

장재경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이튿날 운전해서 회사로 향하는 길에 장재경은 길가에서 눈에 익은 사람을 보았다. 3년 내내 봐왔으니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에게 다가가 아는 척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입은 빨간 치마는 너무도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잠깐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릴 것만 같았다. 장재경은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간 뒤에야 확신했다.

“심은하!”

장재경은 심은하를 위아래로 여러 차례 훑어보았다. 예전에 그는 화려한 색을 가장 싫어했는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보기 좋았다.

“너 그 치마 입으니까...”

심은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장재경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심은하는 평소에 늘 들어왔던 그 말을 내뱉었다.

“싸구려 같아?”

그녀가 조금이라도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거나 진한 립스틱을 바르면 장재경은 아주 가차 없이 평가를 내렸고 심은하는 이미 그것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심은하는 이제 남의 평가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곧 있으면 구청에 도착한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는 주재원의 아내가 될 것이다. 주재원이 장재경의 말을 다 무시하라고 했으니 심은하는 그의 말대로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시해도 괜찮은 말들인 것도 맞았다.

심은하의 말을 들은 장재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수도 없이 내뱉었던 말인데 심은하가 그렇게 얘기하니 뭔가 어색하고 이상했다.

“아니. 예쁘다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늘 그의 앞에서 청순한 척하던 심은하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걸 보니 꽤 놀라웠고 또 아름다웠다.

장재경에게서 칭찬을 듣는 건 보기 드문 일이었으나 이젠 상관없었다.

“헤어져 놓고 이제 와서 칭찬하는 거야?”

심은하는 오늘 아침 고데기로 공들여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빨간 치마를 입은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워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고 카메라로 대충 찍어도 화보처럼 보일 듯했다.

장재경은 자신이 칭찬해 주면 심은하가 기뻐할 줄 알았다.

그래서 차갑게 대꾸하는 심은하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장재경은 창문에 팔을 올리며 밖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늘 장난기 가득하고 가벼워 보이던 그가 보기 드물게 라서윤에게만 보여주던 애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화 안 풀렸어? 알겠어. 장난 안 칠게. 어디 가는 거야? 내가 데려다줄게. 오늘 다시 짐 챙겨서 집으로 돌아와.”

‘장난?’

3년 내내 견뎠던 모욕과 폭언을 떠올린 심은하는 그것을 단순히 장난이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아니.”

심은하는 손으로 구청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혼인신고 하러 가. 이제 곧 도착할 거야.”

장재경은 웃음기가 더욱 진해졌고 호흡도 조금 가빠졌다. 그는 웃음을 참으려다가 사레가 들려서 기침을 몇 번 한 뒤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혼인신고는 안 돼. 오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오지 않았거든. 다음에 하자. 내 차 안 탈 거지? 난 회사에 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

심은하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대충 손을 흔든 뒤 곧장 구청 쪽으로 걸어갔다.

심은하가 정말로 차에 타지 않자 회사에 급한 볼일이 있던 장재경은 이내 차를 타고 떠났다.

장재경은 기분이 꽤 좋았다. 심은하가 여전히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심은하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돌아온다면 장재경은 기꺼이 그녀에게 흰 원피스들을 버려도 된다고 할 것이다.

흰 원피스는 역시 라서윤이 입어야 예뻤다.

심은하는 본인이 입고 싶은 걸 입으면 되었다.

“저거 장재경 차예요?”

심은하가 도착했을 때 주재원은 이미 구청 앞에 서 있었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장재경의 차를 본 주재원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심은하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혼인신고 하러 왔다고 했어요.”

“장재경이 뭐라고 안 했어요?”

“주민등록증을 가져오지 않아서 다음에 같이 오자던데요.”

심은하는 조금 전 둘이 나눈 대화를 그대로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주재원은 줄곧 표정을 굳히고 있다가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미소 때문에 엄숙하고 차가워 보이던 그에게서 친근함이 느껴졌다.

심은하는 본인이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문 속의 난폭하고 폭력적인 남자는 두 번째 만남에서도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즐겁게 웃었다. 물론 장재경 덕분이기도 했다. 그의 말이 꽤 웃겼기 때문이다.

“저런 멍청이는 무시해요. 우리는 이만 가요.”

주재원은 자신의 결혼 소식을 들은 장재경의 표정이 기대됐고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만 해도 속이 시원했다. 주재원은 난폭하고 매정한 사람이긴 하지만 적어도 떳떳했다.

반대로 장재경은 겉으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굴지만 사실은 굉장히 쪼잔하고 음흉하게 뒤에서 수작을 부렸다. 주재원조차 장재경의 수작질에 당해서 손해를 본 적이 있었다.

이번에 그는 장재경의 여자를 빼앗고 당당하게 그녀를 데리고 다닐 것이다.

주재원은 그제야 옆에 있는 심은하에게 관심을 가졌다.

눈에 확 띄는 화려한 옷차림과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외모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웠다.

흰 원피스를 입어야 예쁘다고 하는 걸 보면 장재경은 정말로 보는 눈이 없었다.

30분 뒤, 주재원과 심은하는 혼인신고를 마쳤다.

심은하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장재경과 3년 동안 만나면서 이루지 못했던 일을 겨우 두 번 본 사이인 주재원과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혼집은 아직 정리가 덜 돼서 며칠 뒤에야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당분간은 은하 씨 집에서 지내도록 해요.”

집에 심현수가 있다는 걸 떠올린 심은하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몇 년 동안 견뎌왔는데 며칠쯤이야 얼마든 견딜 수 있었다.

“네. 혹시 결혼한 뒤에 일을 하거나 공부해도 되나요?”

심은하가 망설이다가 물었다.

“장재경이 못 하게 했던 거예요?”

“네.”

심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재경은 아예 그녀를 집에 가둬두고 자기 시중만 들게 하려고 했다. 심은하는 대학교 때 피아노를 전공했었고 교향악단의 수석 자리도 노려볼 수 있었는데 장재경이 그걸 원치 않았다. 그리고 장재경이 집이 시끄러운 게 싫다고 해서 심은하는 3년 내내 피아노를 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젠 피아노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주재원이 장재경의 말은 전부 무시하라고 했으니 어쩌면 앞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주재원은 웃지 않았으나 꽉 다문 입술에서 장재경을 향한 그의 경멸이 느껴졌다.

“심은하 씨, 명심해요. 여자의 커리어에 간섭하는 건 찌질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난 나와 주씨 가문에 폐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은하 씨가 뭘 하든 상관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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