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잠시 뒤 진하를 태울 차가 도착하자 시준은 직접 현관까지 배웅했다. 진하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는 기사가 도착했는지 확인하고 차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서연은 거실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남편이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세심함이었다.진하가 떠난 뒤 시준은 집 안으로 돌아왔다.서연은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지만, 시준은 그녀를 지나 서재로 향했다.“시준 씨.”그가 걸음을 멈췄다.“나한테는 물어볼 게 없어요?”시준은 천천히 돌아보았다.“또 뭘 물어봐야 하는데?”“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요. 진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왜 나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였는지…….”시준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먼저 진하를 때렸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그건 알아요. 하지만…….”“그만 좀 해!”시준이 거실 테이블을 발로 밀었다.테이블이 바닥을 긁으며 밀려났고, 그 위에 놓인 꽃병이 넘어졌다. 물이 쏟아지며 흰 백합이 바닥으로 흩어졌다.서연은 놀라 뒷걸음질 쳤다.시준은 흐트러진 꽃을 내려다보다가 서연을 노려보았다.“내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아?”“…….”“하연이가 죽었어. 그런데 넌 내가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네 억울함만 이야기하고, 진하까지 때렸어.”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나보고 대체 어쩌라는 거야!”서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을 거죠?”시준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믿을 만한 말을 해.”서연은 한참 동안 남편을 바라보았다.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그녀는 더 이상 남편을 붙잡지 않았다.다만 시준이 서재 문을 열기 직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지금 나를 아내로 보고 있어요? 아니면 하연이를 죽인 사람으로 보고 있어요?”시준의 손이 문고리 위에서 멈췄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지금 내가 널 아내로 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서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시준은 그런
시준이 서연의 말을 잘랐다.그는 진하를 자신의 등 뒤로 물러서게 한 뒤 서연을 노려보았다.“하연이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짓까지 해? 넌 정말 미안한 마음도 없어?”서연은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내가 왜 미안해야 하는데요? 하연이를 죽이지 않았다고요!”“그럼 네 차에서 피가 왜 나왔는데!”시준의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찢었다.“하연이가 죽기 전에 왜 너랑 싸웠고, 왜 네 차가 사라졌냐고! 아무것도 설명 못 하면서 억울하다는 말만 하면 내가 널 믿어야 해?”서연은 입술을 떨었다.“나도 모르니까…….”“또 모르지!”시준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넌 언제나 모르고, 기억 안 나고, 억울하다고만 하지. 내가 언제까지 그 말을 들어 줘야 해?”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진하의 붉어진 뺨을 촬영했다.서연의 얼굴이 굳었다.“지금 사진까지 찍는 거예요?”“증거 남기는 거야.”“내가 억울하다고 할 때는 증거를 봐 주지도 않으면서…….”“네가 방금 사람 때린 건 내가 직접 봤어!”시준은 휴대전화를 내렸다.“진하야, 병원 가자. 진단서도 받아 두고.”진하는 고개를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 오빠. 서연이한테 불리해질 수도 있잖아.”“지금 네가 저 사람 걱정할 때야?”시준은 곧바로 수행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김 실장, 진하 씨 집까지 모셔다드릴 차 보내. 그리고 오늘 오전에 보안업체에서 대문 CCTV 원본 받아 놔. 방금 전 영상까지 전부.”서연은 남편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자신에게는 경찰이 확인할 자료라며 CCTV를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런데 진하가 맞는 장면은 직접 확보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시준 씨, 그 영상에 진하가 나한테 한 말은 안 남아요.”시준은 통화를 끝내고 서연을 돌아보았다.“그래도 네가 때린 건 남겠지.”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시준은 진하를 현관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의 팔을 받쳐 주며 신발장 옆 의자에 앉히려는 모습은 지나치게 다정했다.서연이 뒤따라 들어가자 시준이 날
서연의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진하의 어깨를 밀어냈다.“그만하라고 했잖아!”진하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연의 손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이렇게 화를 내니까 사람들이 널 무서워하는 거야.”“네가 먼저…….”“하연이한테도 이랬어?”서연은 그대로 굳었다.진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하연이가 네 과거를 오빠한테 말하겠다고 했을 때도 이렇게 소리 질렀어? 아니면 더 심한 짓을 했어?”“유진하!”“왜? 네가 안 죽였다며. 그럼 왜 이렇게 흥분해?”진하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혹시 하연이가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듣고 싶어?”서연의 손끝이 떨렸다.진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새언니가 너무 무섭다고 했어.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겠다고.”“그만해.”“그리고 오빠한테 꼭 말해 달라고 하더라.”“아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며!”서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진하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서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너 아까 분명히 그랬어. 하연이가 시준 씨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 그런데 지금은 꼭 말해 달라고 했다고?”진하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처음에는 말하지 말라고 했지.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마음이 바뀌었어.”“삼 분 십이 초 동안?”“서연아, 사람 마음이 바뀌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진하는 서연을 빤히 바라보았다.“넌 아직도 그 애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서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네가 거짓말하고 있는 거야.”그 말을 들은 진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서연은 한 걸음 다가섰다.“하연이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면 왜 처음부터 똑바로 이야기하지 않았어? 경찰한테도 그 말을 했어? 아니면 지금 나한테만 하는 말이야?”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유진하, 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서연이 다시 묻자 진하는 오히려 웃음을 흘렸다.“그래서 네가 뭘
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벨소리가 끊긴 뒤 메시지가 도착했다.'서연아, 오빠랑 이야기 잘했어? 걱정돼서 연락했어.'잠시 뒤 두 번째 문자가 도착했다.'혹시 아까 내가 한 말 때문에 마음 상했다면 미안해. 하연이 생각만 하면 나도 자꾸 감정적이 돼.'서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그런데 세 번째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손끝이 멈췄다.'나 아직 집 근처야. 잠깐 얼굴 보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서연은 창가로 다가갔다.대문 너머 도로에는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지만,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할 말 있으면 문자로 해.'답장은 거의 즉시 도착했다.'오빠한테는 말 못 할 얘기야.'서연은 화면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남편 앞에서 한없이 다정했던 여자가 이제 와서 비밀스럽게 만나자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그러자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하연이가 마지막으로 나한테 한 말, 사실은 더 있어.'서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서연이 코트를 집어 들자 서재 문이 열렸다.시준이었다.“어디 가?”“진하가 집 앞에 있대요. 하연이 마지막 통화에 관해서 할 말이 더 있다고 해서…….”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내가 진하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내가 부른 게 아니에요. 진하가 먼저 연락했어요.”서연이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 주자 시준은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손을 내밀었다.“전화 줘.”“왜요?”“내가 직접 이야기할 테니까 넌 나가지 마.”서연은 휴대전화를 품 쪽으로 당겼다.“하연이가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나한테 직접 이야기하겠대요. 당신이 전화하면 또 말을 바꿀지도 모르잖아요.”“내 말이 우스워?”시준이 성큼 다가왔다.“진하까지 괴롭히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어. 그런데 또 만나서 무슨 짓을 하려고?”“당신은 왜 내가 진실을 확인하려고 할 때마다 막아요? CCTV도 못 보게 하고, 내
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벨소리가 끊긴 뒤 메시지가 도착했다.'서연아, 오빠랑 이야기 잘했어? 걱정돼서 연락했어.'잠시 뒤 두 번째 문자가 도착했다.'혹시 아까 내가 한 말 때문에 마음 상했다면 미안해. 하연이 생각만 하면 나도 자꾸 감정적이 돼.'서연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그런데 세 번째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손끝이 멈췄다.'나 아직 집 근처야. 잠깐 얼굴 보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서연은 창가로 다가갔다.대문 너머 도로에는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지만,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할 말 있으면 문자로 해.'답장은 거의 즉시 도착했다.'오빠한테는 말 못 할 얘기야.'서연은 화면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남편 앞에서 한없이 다정했던 여자가 이제 와서 비밀스럽게 만나자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그러자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하연이가 마지막으로 나한테 한 말, 사실은 더 있어.'서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서연이 코트를 집어 들자 서재 문이 열렸다.시준이었다.“어디 가?”“진하가 집 앞에 있대요. 하연이 마지막 통화에 관해서 할 말이 더 있다고 해서…….”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내가 진하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내가 부른 게 아니에요. 진하가 먼저 연락했어요.”서연이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 주자 시준은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손을 내밀었다.“전화 줘.”“왜요?”“내가 직접 이야기할 테니까 넌 나가지 마.”서연은 휴대전화를 품 쪽으로 당겼다.“하연이가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나한테 직접 이야기하겠대요. 당신이 전화하면 또 말을 바꿀지도 모르잖아요.”“내 말이 우스워?”시준이 성큼 다가왔다.“진하까지 괴롭히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어. 그런데 또 만나서 무슨 짓을 하려고?”“당신은 왜 내가 진실을 확인하려고 할 때마다 막아요? CCTV도 못 보게 하고, 내
시준은 카드를 다시 꽂아 놓더니 소파 위에 놓인 서연의 휴대전화를 가리켰다.“전화 가져와.”“……뭐라고요?”“하연이랑 마지막으로 통화한 기록하고 메시지 전부 확인해야겠어.”“경찰한테 이미 제출했어요.”“내가 보겠다고!”서연이 움직이지 않자 시준은 직접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잠금 풀어.”“시준 씨…….”“몇 번 말하게 할 거야?”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받아 잠금을 풀었다.시준은 통화 기록부터 확인한 뒤 하연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훑어 내려갔다.“그날 하연이가 먼저 전화한 거예요. 내가 화낸 건 맞지만 죽이겠다고 협박한 적은 없어요.”시준은 아무 대답 없이 화면을 넘기다가 며칠 전 하연이 보낸 메시지에서 손을 멈췄다.'새언니, 오빠가 알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어요?'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이건 뭐야?”“삼 년 전 일 때문이에요. 하연이가 그 일을 다시 꺼내면서 당신한테 말하겠다고 했어요.”“왜 이제 와서?”“나도 몰라요. 갑자기 그 얘기를 하면서 나한테 거짓말쟁이라고 했다고요.”시준은 휴대전화를 쥔 채 서연을 올려다보았다.“그래서 화가 났겠네.”“화는 났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시준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삼 년 전에도 난 네가 그런 거짓말까지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서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시준은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메시지 하나라도 지우지 마. 통화 기록도 그대로 두고.”“내가 증거를 없앨까 봐요?”“네가 무슨 짓을 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그는 테이블 위 노트북을 가리켰다.“컴퓨터도 건드리지 마. 경찰이 확인할 때까지 그대로 둬.”서연은 휴대전화를 끌어안았다.시준은 그녀의 눈물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서재로 향했다.서재 문이 닫힌 뒤 서연은 한동안 거실에 서 있었다.문틈으로 시준의 통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변호사와 경찰, 차량 감식이라는 단어가 간간이 들렸지만, 서연을 걱정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