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태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해원은 바닥에 앉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다. 지금 이럴 때냐고 할 수도 있었고, 괜찮다고 달래며 도로 소파 위로 끌어올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 해원은 아마 순순히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해원이 원한 게 아니었다.태헌이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해원을 내려다보는 눈이 조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걱정하던 얼굴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 위로 익숙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손."해원은 두 손을 그의 무릎 위에 올렸다. 태헌은 그 손을 잡지 않고 손바닥이 위로 오게 뒤집어 놓기만 했다. 차가운 손끝이 그대로 드러났다."차네."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헌도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의 엄지가 해원의 손바닥 가운데를 천천히 눌렀다가 떼어냈다. 한 번, 또 한 번. 해원은 그 손가락이 닿는 자리만 봤다. 그러다 보니 차 안에서 엄마 얼굴을 보던 감각이 조금씩 흐려졌다."고개 들어."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태헌은 해원의 턱을 손가락 두 개로 받쳐 조금 더 올렸다. 그 상태로 눈을 맞췄다. 해원은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울었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태헌의 손이 턱을 놓지 않았다."보고 있어."해원은 보고 있었다.숨이 조금씩 느려졌다. 오늘 하루 종일 무엇을 봐야 할지, 누구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누구의 얼굴을 피해야 할지 해원이 정해야 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볼 곳은 하나였고, 그걸 정한 건 태헌이었다. 그 단순함이 이상할 만큼 몸을 풀어놓았다.태헌의 손이 턱에서 뺨으로 옮겨갔다. 눈가에 남은 자국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달래는 손길은 아니었다. 자기 것을 확인하는 손이었다."이리 와."해원은 무릎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의 다리 사이,
수경이 집 현관문을 열었을 때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명우는 소파에 기대 앉아 주말 뉴스를 보고 있다가 수경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벌써 왔어? 저녁까지 있다 온다며.""응. 그냥."수경은 신발을 벗으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지 않게 나와서 오히려 스스로 놀랐다."해원이는? 잘 있고?"명우는 별 뜻 없이 물었다. 해원의 집에 다녀오는 날이면 늘 하던 질문이었다. 수경은 거실로 들어가다 잠깐 멈췄다."응. 잠깐 보고 왔어.""가져갔던 건 줬어?""줬어."명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수경은 가방을 식탁 의자에 걸어두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거실에 남아 명우 옆에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결혼하고 나서 명우에게 무언가를 숨긴 건 처음이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해원을 보고 온 것도, 쇼핑백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들만 골라 말하는 게 이렇게 쉽다는 게 이상했다. 수경은 정수기 앞에 서서 컵에 물을 받았다가 마시지도 않고 내려놓았다.그때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태헌이었다. 방에서 나와 부엌 쪽으로 오다가 수경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복도와 부엌 사이, 몇 걸음 떨어진 자리였다.수경은 그를 봤다. 태헌도 수경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아까 복도에서 "지금은 네 얘기 듣고 싶지 않아"라고 한 게 수경 자신이었다. 태헌은 그 말을 지키고 있었다.거실에서 명우의 목소리가 들렸다."태헌아, 너 저녁 먹을 거야?""아직 생각 없습니다."태헌이 거실 쪽으로 대답했다.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수경은 그게 더 견디기
수경은 한동안 창밖만 보고 있었다. 주차장 천장의 형광등 하나가 깜빡였다가 다시 켜졌다. 해원은 그 불빛이 몇 번 흔들리는 동안 엄마가 무언가를 차례대로 세고 있다는 걸 느꼈다. 상견례, 결혼 준비, 결혼식, 그리고 그 뒤의 날들."그럼 그때부터야?""…….""상견례 때부터 둘이 그런 사이였냐고."해원은 고개를 저었다가 멈췄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그때 이미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 같은 관계였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이었다. 해원이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 닫는 사이, 수경이 먼저 다음 말을 꺼냈다."그럼 내가 결혼했을 땐……."수경은 그 문장을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번에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내가 명우 씨랑 결혼한 뒤에도 계속 만났어?"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엄마를 봤다. 부정하려면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엄마 얼굴을 보고 있으니 아니라는 말이 목에서 올라오지 않았다.수경이 눈을 감았다.해원은 엄마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다 알지는 못했다. 그래도 짐작할 수 있는 날이 하나 있었다. 수경이 가장 많이 웃었던 날. 딸과 새 아들이 될 사람을 나란히 두고, 이제 정말 가족이 됐다고 믿었던 날.그날 해원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엄마의 웃는 얼굴을 봤다. 그리고 그 전날 밤과 그다음 날들을, 엄마는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엄마, 미안해."말이 나왔지만 너무 작았다. 수경은 눈을 뜨지 않았다. 해원은 그 말이 아무것도 덮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더 말했다."미안해."수경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해원을 보지는 않았다. 운전대 가운데 로고 언저리를 보며, 무언가 붙잡을 곳을 찾는 사람처럼 물었다.
좋아하는 거야?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해원은 복도 끝을 한 번 봤다. 태헌은 아직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따라오지도, 문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채였다. 문이 가운데서 맞물리자 그 모습이 사라졌다.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수경은 층수 표시판만 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아까부터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해원은 그 쇼핑백에 뭐가 들었는지 알 것 같았고, 동시에 전혀 모를 것 같았다. 반찬일 수도 있고, 지난번에 말했던 이불 커버일 수도 있었다. 평소 같으면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이게 뭐야?" 하고 물었을 것이다. 지금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수경이 먼저 내렸다. 해원은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수경의 차는 입구에서 가까운 기둥 옆에 서 있었다. 평소처럼 대충 세워둔 게 아니라 주차선에 반듯하게 맞춰져 있었다. 딸 집에 오는 날이면 늘 그랬다.수경이 운전석 문을 열었다. 해원은 잠깐 망설이다가 조수석에 탔다.문이 닫히자 주차장의 소음이 한꺼번에 멀어졌다. 수경은 쇼핑백을 뒷좌석에 내려놓고 운전대에 두 손을 얹었다. 시동은 걸지 않았다.해원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무슨 말이라도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설명하겠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까 복도에서 한 말을 다시 한번 해야 할지. 어떤 말을 골라도 첫마디부터 틀릴 것 같아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수경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운전대를 쥔 손가락이 몇 번 움직였다가 다시 멈췄다. 옆 칸에 차 한 대가 들어와 서더니 운전자가 내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둘 다 그쪽을 보지 않았다.해원은 수경이 무엇부터 물을지 짐작해보려 했다. 언제부터냐고 물을 것 같았다. 아니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도 아니면 방금 본 게 뭐냐고 다시 확인할지
“엄마.” 해원의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 해원과 태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해원의 허리에 있던 태헌의 손은 이미 떨어져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조금 전 장면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해원은 자기 입술이 아직 뜨거운 것도, 둘 사이가 너무 가까웠던 것도 뒤늦게 의식했다. 태헌이 한 걸음 물러났다. 해원은 그대로 서 있었다. 이미 늦었다. 수경은 전부 봤다. “엄마, 그게…….” 말을 꺼냈지만 뒤가 이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수경이 천천히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몇 걸음 오다가 다시 멈췄다. “너희가…….” 말이 끊겼다. 수경은 태헌을 봤다. 그리고 다시 해원을 봤다. “방금…….” 이번에도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해원은 엄마 얼굴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덜 무서웠을 것 같았다. 수경은 아직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수경이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잠깐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수경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바로 내렸다. 다시 해원을 봤다. “내가 잘못 본 거야?” 해원의 입술이 움직였다.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잘못 봤다고 하면 됐다. 순간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고, 오해라고 둘러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경이 다시 물었다. “……잘못 본 거 아니지?” 해원은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아주 작게 대답했다. “응.” 수경의 표정이 굳었다. 그 뒤로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해원은 수경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수경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너희…….” 이번에도 한 번 멈췄다. “무슨 관계야?” 해원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옆에 태헌이 있다는
해원이 눈을 떴을 때 태헌은 아직 자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침대 끝까지 와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늦게 들어왔고, 자정이 가까워서야 잠들었다. 일요일이라 둘 다 오전 일정도 없었다. 해원은 옆으로 누운 채 잠든 태헌을 잠시 보다가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씻고 나온 뒤 냉장고를 열어봤다. 제대로 해먹을 만한 건 별로 없었다. 계란 몇 개와 우유, 식빵이 전부였다. 해원은 식빵을 꺼내다가 결국 배달 앱을 켰다. 한참 메뉴를 보고 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요?” 태헌이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주방으로 들어왔다. “응.” “뭐 드실래요?” “아무거나.” 해원이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그 말 제일 어려운데.” 태헌이 냉장고를 열었다. “먹을 거 없네.” “그래서 보고 있잖아요.” 태헌은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시더니 해원 옆에 섰다. “국밥.” “일어나자마자요?” “점심때 다 됐어.” 해원은 메뉴를 바꿔 가까운 식당에서 국밥을 주문했다. 음식이 오는 동안 거실을 조금 정리했다. 어제 벗어둔 옷을 치우고, 소파 위에 놓인 가방도 방으로 옮겼다. 태헌은 식탁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해원이 물었다. “오늘 진짜 일정 없으세요?” “응.” “회사도요?” “전화 오면 받는 정도.” “그럼 조금 더 있어도 되겠네요.” 태헌이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 세 시에 오신다며.” “네.” “그 전에 갈 거야.” “왜요?” “아침부터 여기 있으면 이상하잖아.” 해원은 잠깐 생각했다. 수경은 태헌이 해원 집에 드나드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예전부터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고, 식사나 부탁 때문에 들르는 일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일요일에 전날 입었던 옷 그대로 집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면 얘기가 달랐다. “그건 그렇네요.” 해원은 별다른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배달이 도착했다. 둘은 식탁에 마주 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