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오빠, 밤에는 주인님

낮에는 오빠, 밤에는 주인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By:  케사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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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남긴 12억 8천만 원의 빚을 없애는 대가로, 윤해원은 채권자 차태헌과 ‘365일 소유 계약’을 맺는다. 사흘 뒤 엄마의 재혼 상견례에서 다시 만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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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오빠는 여기서만

“일 년이면 됩니다.”

윤해원은 테이블 위의 숫자를 다시 보았다.

12억 8천만 원.

일 년 안에 갚으라는 뜻이라면 굳이 이 자리에 불러 앉힐 필요도 없었다. 한 달에 일억씩 모아도 모자라는 돈이었다.

“분할 상환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차태헌.

태원그룹 전략기획본부장. 새로 채권을 인수한 태원에셋파트너스의 실질적인 결정권자이자, 경제면에서 몇 번이나 본 얼굴이었다.

그런 남자가 일개 보증채무자를 직접 만나고 있었다.

“아니.”

해원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채권양도 통지서.

급여 및 예금채권 압류 예고.

원금에 지연이자와 비용까지 합산된 최종 채무액.

종이를 넘길 때마다 아버지가 남긴 회사의 마지막 흔적이 숫자로 바뀌었다. 태헌은 왜 보증을 섰느냐고 묻지도, 갚을 능력이 있느냐고 확인하지도 않았다.

이미 답을 전부 알고 있는 사람처럼 해원이 서류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럼 일 년 안에 이 돈을 전부 갚으라는 뜻입니까?”

“갚지 않아도 돼.”

해원의 손이 멈췄다.

태헌은 테이블 위의 서류가 아니라 해원을 보고 있었다.

“일 년 동안 내 것이 되면.”

낮고 평평한 목소리였다. 농담을 던진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끝나는 날 채권을 소멸시키지.”

해원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되묻는다고 뜻이 달라질 말도 아니었다.

“내 것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

“사람을 담보로 잡겠다는 겁니까?”

“담보는 돌려받을 생각으로 잡는 거고.”

잠깐의 틈.

“나는 일 년 동안 쓸 생각이야.”

모욕감보다 먼저 계산이 움직였다.

돈을 빌린 사람은 아버지였지만 보증서의 서명은 해원의 것이었다. 상속을 포기한다고 없어지는 빚이 아니었다. 개인회생을 신청하더라도 급여와 신용, 회사에 숨겨온 사정까지 전부 드러난다.

그때 테이블 위에 뒤집어둔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엄마였다.

[토요일 여섯 시야. 너무 격식 차리지는 말고.]

곧 사진 한 장이 더 도착했다. 연한 청색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선 엄마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이거 괜찮니? 명우 씨가 너 꼭 보고 싶대.]

상견례까지 사흘.

아버지와 이혼한 뒤 누구도 만나지 않던 엄마가 처음으로 자기 옷을 물었다.

해원은 답장 대신 휴대전화를 뒤집어놓았다.

태헌의 시선이 잠시 그 위에 머물렀다.

“거절해도 됩니까?”

“물론.”

“그러면?”

“월요일부터 원래 절차가 시작되겠지.”

급여계좌가 묶이고, 오피스텔 보증금에 압류가 들어온다.

그 뒤에도 엄마가 아무것도 모를 가능성은 없었다.

해원은 손가락 끝으로 채무액이 적힌 줄을 한 번 눌렀다.

울어도 줄어들지 않는 숫자였다.

화를 내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조건을 전부 말씀하세요.”

그제야 태헌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럴 줄 알았어.”

태헌은 서랍에서 두툼하지 않은 서류철을 꺼냈다.

첫 장에는 ‘채무 조정 및 조건부 면책 합의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 붙은 부속 합의서는 제목조차 없었다.

해원은 먼저 날짜를 확인했다.

“서명한 날부터 삼백육십오 일.”

“그래.”

“그동안 원금과 이자는 동결되고, 계약이 끝나면 채무 전액을 소멸한다.”

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적혀 있다는 듯 해원이 다음 문장을 읽기를 기다렸다.

“중도에 제가 계약을 끝내면 면책 합의도 취소.”

“그날까지 줄어든 빚은 없어.”

삼백육십사 일을 버티고 마지막 날 그만두어도 12억 8천만 원은 그대로 돌아온다.

해원은 부속 합의서로 넘어갔다.

차태헌이 직접 내린 명령에 복종한다.

지정한 시간과 장소로 간다.

계약 관계를 제삼자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짧은 문장들이었다.

정확해서 오히려 해석할 여지가 없었다.

“명령의 범위는요?”

“내가 정해.”

“그럼 무엇이든 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까?”

“네가 무엇이든 할지는 네가 정하고.”

해원이 시선을 들었다.

“거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한 번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고, 계약을 끝낼 수도 있어.”

“대신 빚이 돌아오겠죠.”

“선택에는 결과가 있으니까.”

공평한 선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선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해원은 다시 문서를 읽었다.

제삼자에게 양도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계약 이행에 참여시킬 수도 없었다. 해원의 직업과 가족을 직접 훼손하는 명령은 제외되어 있었다.

“사람을 소유한다는 계약은 법적 효력이 없어요.”

“알아.”

태헌은 지나치게 쉽게 인정했다.

“그런데도 서명하라고요?”

“네 몸을 법원에 청구할 생각은 없어.”

그의 손가락이 첫 장의 채무 면제 조항을 짚었다.

“법적으로 효력이 있는 건 이쪽이고.”

“그럼 부속 합의서는 무슨 의미죠?”

“네가 선택했다는 기록.”

“왜 저입니까?”

처음으로 거래 조건이 아니라 자신에 관해 물었다.

태헌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았다.

“갖고 싶으니까.”

그 말뿐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무엇을 보고 그랬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해원은 가족 관련 조항에서 손을 멈췄다.

“제 어머니에게는 절대 알리지 마세요.”

“네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채무를 이유로 어머니나 어머니가 만나는 분에게 접근해서도 안 됩니다.”

태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펜을 들었다.

계약 및 채무를 이유로 계약 당사자의 가족에게 청구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

그가 직접 문장을 적고 서명했다.

“됐어?”

해원은 추가된 조항을 두 번 읽었다.

엄마는 여기서 빠진다.

엄마가 겨우 시작한 결혼도,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도 이 방 안의 거래와는 무관해진다.

적어도 일 년 동안은.

해원은 펜을 들었다.

이름 석 자를 쓰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윤해원.

태헌이 그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차태헌.

해원은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앉아.”

몸이 먼저 멈췄다.

아직 의자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해원은 태헌을 바라보다가 다시 앉았다.

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돌아온 그가 해원 앞에 멈췄다. 가까이 서자 의자에 앉은 해원의 시선보다 그의 허리가 먼저 들어왔다.

“거기 말고.”

태헌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

해원은 방금 서명한 계약서를 보았다.

종이 위의 ‘복종한다’는 문장은 납작했다.

무릎을 꿇으라는 말은 그렇지 않았다.

바닥에는 짙은 회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무릎이 닿아도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모욕적이었다.

해원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한쪽 무릎을 먼저 굽히고, 이어 다른 쪽을 바닥에 댔다.

시선이 태헌의 구두 끝과 같은 높이까지 내려갔다.

태헌은 곧바로 손을 뻗지 않았다.

해원이 스스로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제야 두 손가락이 턱 아래에 닿았다.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앞으로 내 명령에 대답할 때는 알겠습니다가 아니야.”

해원은 그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 힘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그럼 뭐라고 합니까?”

“누구 말을 듣는지 붙여.”

부속 합의서 마지막 줄에 적혀 있던 사적 호칭이 떠올랐다.

해원은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태헌은 재촉하지 않았다.

턱을 든 채로, 해원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네.”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해원은 다시 말했다.

“네, 주인님.”

태헌의 엄지가 턱 아래를 한 번 천천히 눌렀다.

“잘하네.”

그 손은 곧 떨어졌다.

굴욕적이어야 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런데 ‘잘하네’라는 짧은 인정이 몸 안의 전혀 다른 곳에 남았다.

태헌이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검은색 휴대전화를 가져왔다.

“받아.”

해원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전화기를 받았다.

화면이 켜졌다.

연락처도, 메시지도 없었다.

저장된 번호는 하나뿐이었다.

태헌이 자기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해원의 손 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발신자명이 떠올랐다.

주인.

“계약 기간에는 항상 켜둬.”

태헌이 말했다.

“울리면 받아.”

사흘 뒤.

해원은 엄마와 함께 태원가 본저의 현관을 통과했다.

현관에서 기다리던 직원이 두 사람의 외투를 받아 들었다. 이름을 묻지도 않았다. 안쪽의 긴 식탁에는 이미 네 사람분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엄마와 자신이 이 집의 손님으로만 취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었다.

“긴장돼?”

해원이 묻자 한수경이 작게 웃었다.

“조금.”

수경은 웃으면서도 해원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연한 청색 원피스는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잘 어울렸다.

아버지와 이혼한 뒤 누군가를 만나러 가며 이런 표정을 짓는 엄마를 본 적이 없었다.

“명우 씨는 좋은 사람이야.”

“알아.”

“본 적도 없으면서 뭘 알아.”

“엄마 얼굴 보면 알지.”

수경의 웃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

해원은 따라 웃었다.

가방 안쪽에는 검은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다.

전원이 꺼지지 않았는지 벌써 세 번이나 확인한 전화였다.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차명우가 직접 현관까지 나왔다.

기사를 통해 본 태원그룹 회장과는 인상이 달랐다.

그는 해원보다 먼저 수경을 바라봤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윤해원입니다.”

“수경 씨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명우는 해원의 직업도, 아버지 회사도 먼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자리가 부담스러웠을 텐데 와줘서 고마워요.”

도움을 주겠다는 말도, 이제 한 가족이니 편하게 굴라는 말도 없었다.

해원이 경계할 만한 선 앞에서 정확히 멈추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12억 8천만 원의 빚이 있다는 것.

그 빚을 없애는 대가로 어떤 계약을 했는지.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딸이 어떤 물건이 되었는지.

“아들도 곧 내려올 겁니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명우가 말했다.

“회사 일이 조금 늦어졌다고 해서.”

해원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에 앉은 뒤에도 대화는 수경과 명우가 주로 이어갔다. 두 사람은 해원에게 결혼 날짜나 앞으로의 호칭을 강요하지 않았다.

명우가 묻는 것은 일이 바쁜지, 음식은 입에 맞는지 같은 것뿐이었다.

긴장이 조금씩 풀릴 무렵 다이닝룸 문이 열렸다.

먼저 보인 것은 손이었다.

길고 반듯한 손가락이 문 가장자리를 밀었다.

사흘 전 해원의 턱을 들어 올렸던 손.

검은 휴대전화를 건넸던 손.

해원의 손가락이 물잔을 쥔 채 굳었다.

차태헌이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집무실에서 보았던 정장보다 조금 편한 차림이었다.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도 하나 열어두었다.

그런데 해원을 보는 눈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놀람도, 당황도 없었다.

“늦었습니다.”

태헌이 명우에게 짧게 사과했다.

명우가 그를 수경 쪽으로 불렀다.

“인사해. 내 아들 차태헌이야.”

수경이 환하게 웃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태헌은 수경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해원은 겨우 물잔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이쪽은 수경 씨 딸.”

명우가 해원을 바라봤다.

“윤해원 양.”

태헌의 시선이 다시 해원에게 닿았다.

그가 테이블을 돌아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해원은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사흘 전 자신을 바닥에 무릎 꿇린 남자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손을 내밀고 있었다.

태헌의 거짓말을 밝히는 순간 자신이 무엇까지 설명해야 하는지도 함께 떠올랐다.

해원은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윤해원입니다.”

손바닥이 맞닿았다.

태헌의 손은 사흘 전과 같은 온도였다.

악수가 끝나기 직전, 엄지가 해원의 손등을 한 번 눌렀다.

가족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작게.

계약을 잊지 말라는 것처럼.

태헌이 해원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가 다시 시작됐지만 해원은 음식 맛을 느끼지 못했다.

태헌은 수경의 질문에 예의 있게 답했고, 명우가 꺼낸 회사 이야기도 평소처럼 받아냈다.

해원에게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무관심이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 나이 차이가 어떻게 되지?”

명우가 문득 물었다.

“태헌이가 서른다섯입니다.”

수경이 해원을 보며 계산했다.

“그럼 일곱 살 차이네.”

그녀의 얼굴에 조금 안심한 듯한 웃음이 번졌다.

“태헌 씨가 오빠네.”

해원의 손이 멈췄다.

“이제 태헌 오빠라고 해야겠어.”

수경은 아무것도 모른 채 딸과 태헌을 번갈아 보았다. 명우도 재촉하지 않고 웃고 있었다.

태헌만 대답을 기다렸다.

집무실에서 해원이 ‘주인님’을 입에 올릴 때까지 바라보던 것과 같은 눈이었다.

해원은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태헌…… 오빠.”

입안에 남은 호칭이 낯설었다.

태헌은 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익숙해지죠.”

가족들에게는 배려처럼 들릴 말이었다.

해원에게는 아니었다.

“그러면 식사 끝나고 태헌이가 집을 좀 보여주면 되겠군.”

명우가 말했다.

“수경 씨가 들어오면 해원 양도 자주 올 텐데.”

“그러죠.”

태헌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순간 가방 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해원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넣어 검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발신자는 하나뿐이었다.

주인.

화면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빠는 여기서만 불러.]

해원은 반사적으로 맞은편을 보았다.

태헌은 명우와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식사 끝나면 동관 이층까지 따라와.]

곧 마지막 문장이 나타났다.

[거기서는 제대로 불러.]

태헌의 손가락이 식탁 위를 한 번 두드렸다.

해원은 검은 화면을 쥔 채 그 손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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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미경
미경
업테이트가 애가타네요…ㅎㅎ
2026-09-26 08:33:05
1
1
니니0
니니0
재밌어요~ 즐거운 시간~
2026-09-21 15:31:27
1
1
금빛ㅊㅊ
금빛ㅊㅊ
작가님~ 다음편주세용~
2026-09-16 14:48:26
2
1
123 Chapters
1화. 오빠는 여기서만
“일 년이면 됩니다.” 윤해원은 테이블 위의 숫자를 다시 보았다. 12억 8천만 원. 일 년 안에 갚으라는 뜻이라면 굳이 이 자리에 불러 앉힐 필요도 없었다. 한 달에 일억씩 모아도 모자라는 돈이었다. “분할 상환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차태헌. 태원그룹 전략기획본부장. 새로 채권을 인수한 태원에셋파트너스의 실질적인 결정권자이자, 경제면에서 몇 번이나 본 얼굴이었다. 그런 남자가 일개 보증채무자를 직접 만나고 있었다. “아니.” 해원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채권양도 통지서. 급여 및 예금채권 압류 예고. 원금에 지연이자와 비용까지 합산된 최종 채무액. 종이를 넘길 때마다 아버지가 남긴 회사의 마지막 흔적이 숫자로 바뀌었다. 태헌은 왜 보증을 섰느냐고 묻지도, 갚을 능력이 있느냐고 확인하지도 않았다. 이미 답을 전부 알고 있는 사람처럼 해원이 서류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럼 일 년 안에 이 돈을 전부 갚으라는 뜻입니까?” “갚지 않아도 돼.” 해원의 손이 멈췄다. 태헌은 테이블 위의 서류가 아니라 해원을 보고 있었다. “일 년 동안 내 것이 되면.” 낮고 평평한 목소리였다. 농담을 던진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끝나는 날 채권을 소멸시키지.” 해원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되묻는다고 뜻이 달라질 말도 아니었다. “내 것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 “사람을 담보로 잡겠다는 겁니까?” “담보는 돌려받을 생각으로 잡는 거고.” 잠깐의 틈. “나는 일 년 동안 쓸 생각이야.” 모욕감보다 먼저 계산이 움직였다. 돈을 빌린 사람은 아버지였지만 보증서의 서명은 해원의 것이었다. 상속을 포기한다고 없어지는 빚이 아니었다. 개인회생을 신청하더라도 급여와 신용, 회사에 숨겨온 사정까지 전부 드러난다. 그때 테이블 위에 뒤집어둔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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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시 불러
휴대폰 화면에는 마지막 문장이 그대로 떠 있었다. [거기서는 제대로 불러.] 해원은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무릎 위에 엎어놓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저를 들었다. 국을 뜨고, 삼키고, 다시 내려놓았다. 평소와 같은 동작을 틀리지 않는 데만 신경 썼다. 맞은편에 앉은 태헌은 차명우의 말을 들으며 가끔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해원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집이 넓어서 나도 아직 헷갈리더라.” 수경이 웃으며 말했다. “아까 방을 잘못 찾아서 한참 헤맸어. 해원이는 더하겠다.” “동관은 처음 오면 찾기 어렵습니다.” 태헌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해원의 손끝이 멈췄다. 동관. 휴대폰에 적혀 있던 것과 같은 장소였다. 차명우가 대수롭지 않게 태헌을 보았다. “태헌아, 네가 해원이한테 집 좀 보여줘라. 앞으로 자주 올 텐데 길은 알아둬야지.” “그러죠.” 태헌은 기다렸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냅킨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이었다. “가시죠, 윤해원 씨.” 수경이 작게 웃었다. “이제 곧 오빠가 될 사람인데 아직도 윤해원 씨가 뭐니.” 태헌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해원도 웃지 못했다. 무릎 위에 둔 휴대폰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헌은 먼저 다이닝룸을 나섰다. 명우와 수경이 지켜보는 동안, 해원은 태헌과 한 걸음 거리를 두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동관으로 이어지는 복도에 들어서자 아래층의 대화 소리가 멀어졌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태헌이 복도 초입에서 멈췄다. “늦었어.”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식탁에서 차명우에게 대답하던 공손한 말투가 아니었다. 해원은 주위를 살핀 뒤 그에게 다가갔다. 태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들어와.” 짙은 나무로 마감된 서재였다. 책상과 소파,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외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해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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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말버릇부터
일주일 동안 차태헌은 해원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대신 검은 휴대폰으로 짧은 지시만 세 번 보냈다. [입주는 월요일.] [차량은 오후 세 시에 도착해.] [육 주치만 챙겨.] 해원은 마지막 문장을 받은 뒤 캐리어 하나를 더 꺼냈다. 정말 필요한 것만 고르자 짐은 두 개로 끝났다. 옷과 화장품, 노트북, 업무 자료. 육 주 뒤 다시 나올 사람의 짐이었다. 월요일 오후 세 시 정각, 검은 세단이 해원의 집 앞에 도착했다. 기사가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는 동안 해원은 현관문을 잠갔다. 도어록이 닫히는 소리를 확인하고도 열쇠를 가방 안쪽에 넣지 않았다. 손에 쥔 채 차에 올랐다. 태원가 저택의 본관 현관에는 수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짐이 이것뿐이야?” 수경이 캐리어 두 개를 번갈아 보았다. “충분해.” “그래도 더 가져오지. 필요한 거 생길 때마다 가지러 가기도 번거롭잖아.” “회사 다니는 데 필요한 건 다 챙겼어.” 해원은 기사가 내려놓은 업무용 가방을 직접 들었다. 수경은 더 권하지 않았다. 대신 해원의 팔을 잡고 본관 안으로 이끌었다. “엄마는 본관에서 지낼 거야. 다이닝룸이랑 거실도 이쪽에 있고.” 두 사람은 본관 뒤편의 연결 통로를 지나 동관으로 향했다. “동관 이층은 태헌이가 쓰고 있어. 서재도 있고, 방도 있고.” 수경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해원이 네 방도 그쪽이야.” 계단을 오르자 길지 않은 복도가 나왔다. 관리 책임자가 오른쪽 방문을 열었다. “이쪽입니다.” 침실과 드레스룸, 작은 거실이 한 공간처럼 이어진 방이었다. 이미 필요한 가구와 침구가 전부 준비되어 있었다. 수경이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어때? 너무 호텔 같아서 불편하려나?” “괜찮아.” 해원은 방보다 복도 맞은편의 닫힌 문을 보았다. 수경이 그 시선을 따라갔다. “저기가 태헌이 방이래.” 그녀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바로 앞이니까 엄마도 마음 놓이네. 필요한 거 있으면 오빠한테 말하면 되고.” 해원은 대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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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미쳤어
해원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먼저 보였다. 잠시 뒤 몸을 옆으로 돌리려다 멈췄다. 엉덩이가 침대에 눌리자 둔한 통증이 올라왔다. 지난밤의 일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태헌의 다리 위에 엎드렸던 자세. 처음 떨어진 손바닥. 팬티가 내려간 뒤 맨살에 닿았던 소리와 열감. 그리고 끝났다는 말을 듣고도 다음 타격을 기다렸던 순간. 해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걷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허리를 숙이거나 다리를 움직여도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샤워실로 들어가 잠옷을 벗었다. 뜨거운 물이 등에 닿고 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물줄기가 엉덩이에 닿자 따끔한 열감이 피부 아래에서 되살아났다. 해원은 수온을 조금 낮췄다. 샤워를 마친 뒤 거울 앞에 등을 돌리고 섰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전날처럼 손바닥 모양이 선명하게 남아 있지는 않았다. 피부에 옅은 붉은 기가 퍼져 있을 뿐이었다. 손끝으로 눌러보자 압통이 느껴졌다. 오늘 하루면 사라질 정도였다. 아픈 이유는 분명했다. 그런데 기다린 이유는 여전히 계산되지 않았다. 태헌이 손을 멈췄을 때 안도했어야 했다. 끝났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그의 다리에서 일어났어야 했다. 해원은 그러지 않았다. 다음 타격이 올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몸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엉덩이가 아니라 아랫배가 미세하게 굳었다. 해원은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미쳤어.” 짧게 뱉고 수건을 집어 들었다. 계약 기간은 아직 일 년 가까이 남아 있었다. 어젯밤 한 번으로 뭘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원은 화장대 앞에 앉으려다가 멈췄다. 결국 서서 기초 화장품을 바르고 화장을 마쳤다. 흰 블라우스와 짙은 회색 정장을 입었다. 머리카락을 묶고 업무용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평소 쓰는 휴대폰을 챙긴 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검은 휴대폰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와 있지 않았다. 해원은 두 휴대폰을 가방의 서로 다른 칸에 넣었다. 그때 평소 쓰는 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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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앉아
해원이 다이닝룸 문을 열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향했다. “잘 잤어?” 수경이 먼저 물었다. “응.” 해원은 식탁으로 다가갔다. 차명우가 상석에 앉아 있었고, 수경은 그 오른편이었다. 태헌은 맞은편에 앉아 태블릿으로 기사를 읽고 있었다. 남은 자리는 태헌의 옆뿐이었다. 해원은 의자로 가지 않고 창가의 커피포트 앞에 섰다. “커피부터 마실게.” “빈속에 커피 마시지 마.” 수경이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 아침 먹고 마셔.” “물만 조금 마시고.” 해원은 유리병을 들어 잔에 물을 따랐다. 천천히 마시는 동안에도 태헌은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해원아.” 수경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어디 불편해?” “아니. 괜찮아.” 그제야 태헌이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가 옆에 있는 의자를 잡아 뒤로 빼냈다. “앉아, 해원아.” 다정한 오빠의 말투였다. 하지만 해원의 몸은 그 말을 다른 방식으로 알아들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의자 앞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앉으려 했지만 엄마가 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속도로 몸을 내렸다. 엉덩이가 의자에 닿는 순간 둔한 통증이 올라왔다. 해원은 물잔을 입에 가져갔다. 차가운 물을 한 모금 삼켰다. 태헌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지도, 모른 척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잘 잤어?” 해원은 잔을 내려놓았다. “응.” 그의 눈을 보며 호칭을 붙였다. “오빠.” 수경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며칠은 어색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친해졌네.” 태헌은 아무 대답 없이 커피포트를 들었다. “마실래?” “네.” 해원은 대답한 뒤 잠시 멈췄다. 수경과 차명우가 듣고 있었다. “응. 고마워, 오빠.” 태헌이 해원의 잔에 커피를 따랐다. 검은 액체가 차오르는 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식사가 절반쯤 끝났을 때 수경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해원아, 엄마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해.” “결혼식 말이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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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본부장님
“그래서 무슨 사이인데?” 오후 세 시 오십 분. 태원그룹 본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연이 물었다. 해원은 올라가는 층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엄마가 결혼할 분 아들이야.” 다연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왔다. 닫힌 문 위로 숫자가 빠르게 바뀌는 동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곧 오빠가 되는 사람이네.” “응.” “네가 그 결혼식을 맡아도 괜찮겠어?” “일은 일이야.” 다연은 잠시 해원을 보다가 다시 앞을 향했다. “알았어.” 엘리베이터가 목적 층에 멈췄다. “그럼 나도 회사에서는 모르는 사람으로 대할게.”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안내를 받아 복도 끝 소회의실로 향했다. 유리벽 너머로 길게 뻗은 사무공간이 보였다. 책상마다 태원그룹 로고가 새겨진 서류철이 놓여 있었고 직원들이 바쁘게 오갔다. 회의실 문 앞에서 해원이 태블릿과 서류를 다시 확인했다. 신랑 차명우. 신부 한수경. 예식까지 사십 일. 최종 승인자 차태헌. 예상했던 이름이었다. 문이 열리자 긴 탁자 안쪽에 앉아 있던 태헌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옆에는 태원그룹 홍보실 팀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해원은 태헌과 같은 식탁에 앉아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앉으라고 명령했던 사람. 해원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옆자리에 앉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던 사람. 그러나 지금의 태헌에게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반듯하게 맨 넥타이와 잠긴 재킷, 빈틈없이 정돈된 서류. 그는 해원의 오빠가 아니라 태원그룹 전략기획본부장이었다. 해원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비엘 프라이빗 윤해원입니다.” 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태헌입니다.” 그의 손이 해원의 손을 잡았다. 짧고 정확한 악수였다. 어젯밤 그녀의 옷을 직접 정리해주었던 손이 지금은 손끝만 가볍게 잡았다가 놓였다. 다연도 차례로 인사를 마쳤다. 네 사람이 자리에 앉자 홍보실 팀장이 준비한 자료를 탁자 가운데 펼쳤다. 태헌은 해원과 한 자리 비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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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잘했으니까
차가 저택 현관 앞에 멈춘 시각은 오후 여섯 시를 조금 넘어서였다. 기사가 문을 열자 태헌이 먼저 내렸다. 해원도 태블릿을 챙겨 그의 뒤를 따랐다. 현관에 있던 직원이 두 사람을 맞았다. “다녀오셨어요?” “네.” 해원이 대답하는 동안 태헌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차 안에서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손은 다시 코트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해원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태원그룹 홍보실에서 온 메일이었다. 수정 조건 확인했습니다. 해당 내용으로 내부 절차 진행하겠습니다. 해원은 메일을 다연에게 전달한 뒤 태블릿을 닫았다. 오늘 해야 할 일은 끝났다. “해원아.” 앞서가던 태헌이 돌아보았다. “저녁은 일곱 시 반이야.” “응, 오빠.” 태헌은 그 대답을 듣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해원도 자기 방으로 향했다. 마주 보는 방문이 거의 동시에 닫힐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이상의 말이 오가지 않았다. 일곱 시 반. 본관 다이닝룸에는 명우와 수경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태헌도 조금 전까지 입고 있던 정장 재킷을 벗은 채 명우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왔어?” 수경이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이리 와, 해원아.” 해원이 수경의 옆에 앉자 식사가 시작됐다. 잠시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간 뒤 명우가 태헌에게 물었다. “홍보실하고 얘기는 잘 끝났어?” “네. 그룹 촬영팀은 빼기로 했습니다.” 명우가 태헌을 보았다. “네가 양보했어?” “해원이 제시한 안이 더 나았습니다.” 태헌은 대수롭지 않은 일을 말하듯 음식을 잘랐다. “그걸로 가는 게 맞습니다.” 해원의 손이 잠시 멈췄다. 차 안에서 들었던 ‘잘했어’와는 다른 말이었다. 그때는 두 사람만 있었다. 지금은 부모가 함께 앉아 있었다. 태헌은 해원을 봐줬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요구를 거둔 이유가 해원의 판단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했다. 명우가 해원을 보며 웃었다. “첫날부터 태헌이 고집을 꺾었네.” “고집을 꺾은 게 아니라 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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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동생입니다
알람이 울렸다. 해원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손에 잡힌 것은 검은 휴대전화였다. 화면을 켰다. 새로 온 메시지도, 부재중 전화도 없었다. 알람은 그 옆에 놓인 업무용 휴대전화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해원은 검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알람부터 껐다. 화면에 표시된 시각은 오전 여섯 시 사십 분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출근 준비를 마친 뒤에는 두 대의 휴대전화를 모두 가방에 넣었다. 검은 휴대전화는 다른 물건에 섞이지 않도록 안쪽 주머니에 따로 넣었다. 본관 다이닝룸에는 네 사람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해원이 자리에 앉자 태헌이 먼저 물었다. “잘 잤어, 해원아?” 어젯밤 방을 나선 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로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응, 오빠.” 해원도 평소와 똑같이 대답했다. 태헌은 더 묻지 않았다. 해원 역시 그를 보지 않고 식사를 시작했다. 수경이 해원의 접시 옆에 과일을 덜어주었다. “오늘 호텔 답사 간다고 했지?” “응. 그랜드홀하고 신부 이동 동선부터 볼 거야.” “태헌이도 가?” 명우가 대신 대답했다. “그룹 쪽 최종 승인은 태헌이가 해야 하니까 첫날은 가야지.” 태헌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오후 한 시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답사 끝나고 바로 혜주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었어?” 명우의 말에 해원이 토스트를 자르던 칼을 멈췄다. 태헌이 짧게 대답했다. “네.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수경이 명우를 보았다. “혜주 씨?” “신혜주 이사. 서원그룹 둘째야.” 명우는 별일 아닌 듯 설명했다. “태헌이하고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고, 양가에서 혼담 이야기도 오가고 있어.” 해원은 멈췄던 칼을 다시 움직였다. “그런 분이 있었구나.” 수경이 태헌을 향해 웃었다. 태헌은 굳이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냅킨을 정리한 뒤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해원은 잘라놓은 토스트를 입에 넣었다. 신혜주. 어릴 때부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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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왜 피해
검은 세단이 호텔 정문을 빠져나갔다. 해원은 차가 사라진 쪽을 더 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남은 수정안 정리하자.” 다연이 먼저 호텔 안으로 걸어갔다. “응.” 해원도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연회팀장에게 변경된 동선을 다시 확인하고 필요한 자료를 받아 호텔을 나왔다. 다연은 혜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해원도 아무 말 없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어서야 수정안이 완성됐다. 해원은 서비스 엘리베이터 이용 시간과 외부 업체 반입 일정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다연이 맞은편에서 문서를 읽었다. “이대로 보내도 되겠다.” “응.” “차 본부장한테 먼저 공유해줘.” 다연은 다른 팀과 회의가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남은 해원은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메일을 보내려던 손이 멈췄다. 해원은 가방 안쪽 주머니에서 검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태헌과의 대화창에는 지난 메시지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해원은 가장 아래에 새 문장을 입력했다. 수정안 정리했습니다. 전송 버튼 위에 엄지를 올렸다. 그대로 몇 초 있었다. 해원은 입력한 문장을 모두 지웠다. 화면을 끄고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노트북에서 회사 메일을 열었다. 받는 사람은 태원그룹 전략기획본부 차태헌. 제목과 본문을 차례로 입력했다. [태원호텔 예식] 신부 이동 동선 수정안 차태헌 본부장님. 요청하신 호텔 동선 수정안 송부드립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윤해원 드림. 파일을 첨부한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답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확인했습니다. 해당 안으로 진행하십시오. 발신자도, 문장도 업무용이었다. 해원은 메일 창을 닫았다. 책상 위의 검은 휴대전화에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그대로 가방 안쪽에 넣었다. 밤 여덟 시 사십 분. 해원은 다연과 사무실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있던 직원이 해원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 “저녁 준비해드릴까요?” “괜찮아요. 먹고 왔어요.”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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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착각한 게 맞아
해원은 열 시가 되기 2분 전에 방을 나섰다.맞은편에 있는 태헌의 방문까지는 몇 걸음이면 충분했다.해원은 문 앞에 서서 휴대전화의 시각을 확인했다. 숫자가 정확히 열 시로 바뀐 뒤에야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문을 열자 태헌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외출복은 갈아입었지만 잠들 준비를 한 차림은 아니었다. 낮은 탁자 위에는 손대지 않은 물잔만 놓여 있었다.태헌은 해원이 들어오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해원은 문을 닫은 뒤 그 자리에 섰다.“왔네.”“부르셔서 왔습니다.”호칭은 붙이지 않았다.태헌의 시선이 해원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이리 와.”해원은 소파 앞으로 걸어갔다.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깝지도, 대화를 나누기 어려울 만큼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해원은 그곳에서 걸음을 멈췄다.태헌이 해원을 올려다보았다.“더 가까이.”해원은 한 걸음 더 다가갔다.두 사람 사이에 남은 거리는 태헌이 손만 뻗어도 닿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곧바로 해원을 만지지 않았다.대신 짧게 명령했다.“무릎 꿇어.”해원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향했다.태헌의 다리와 그 앞에 깔린 짙은 색 카펫이 보였다.해원은 묻지 않았다.그의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카펫이 얇은 바지 너머로 무릎을 눌렀다.시야의 높이가 달라졌다.소파에 앉은 태헌의 무릎이 바로 앞에 있었고, 고개를 들어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해원은 두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태헌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오른손이 해원의 턱을 잡았다. 엄지와 검지가 턱선을 감싸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세게 쥔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해원이 얼굴을 돌릴 수는 없었다.태헌이 가까워진 해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왜 피했어.”해원은 턱을 잡힌 채 태헌을 올려다보았다.“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태헌의 눈빛이 낮아졌다.“내가 묻고 있잖아.”“알고 있습니다.”어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해원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고개도 피하지 않았다. 태헌이 명령한 자세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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