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버지가 남긴 12억 8천만 원의 빚을 없애는 대가로, 윤해원은 채권자 차태헌과 ‘365일 소유 계약’을 맺는다. 사흘 뒤 엄마의 재혼 상견례에서 다시 만난 그.
View More식사가 이어졌다.수경은 태헌에게 회사 일이 많이 바쁘냐고 물었고, 태헌은 평소처럼 대답했다. 명우가 결혼 준비 이야기를 꺼내자 수경은 아직 정할 게 많다며 웃었다.태헌은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해원만 조용했다.음식을 조금씩 먹기는 했지만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수경이 딸에게 괜찮으냐고 묻자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맛있어.”태헌은 그 모습을 봤다.해원은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편할 것이다. 사흘 전에 무릎을 꿇었던 남자와 엄마의 결혼 이야기를 들으며 식사하고 있으니까.그런데 수경은 아무것도 몰랐다.명우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태헌이가 올해 서른다섯이지. 해원이는 스물여덟이라고 했나?”“응. 그럼 일곱 살 차이네.”수경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웃었다.“태헌 씨가 오빠네.”해원의 젓가락이 멈췄다.태헌도 해원을 봤다.“이제 태헌 오빠라고 해야겠어.”수경에게는 별다른 뜻이 없는 말이었다. 앞으로 가족이 될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명우도 웃고 있었다.태헌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사흘 전, 해원은 그의 집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네, 주인님.”망설이다가 겨우 입에 올렸던 호칭이었다. 태헌이 직접 가르친 이름이었고, 해원은 그걸 두 번이나 불렀다.그런데 지금은 엄마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오빠라고 불러야 했다.태헌은 해원의 대답을 기다렸다.해원은 수경을 봤다. 엄마가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결국 입을 열었다.“태
해원이 펜을 내려놓았다.계약서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윤해원. 차태헌.해원은 서류를 한 번 더 내려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앉아.”해원의 움직임이 멈췄다.태헌은 그녀가 다시 의자에 앉는 걸 지켜봤다. 계약서에 서명한 뒤 처음으로 내린 명령이었다. 해원은 잠시 그를 바라봤지만 이유를 묻지 않았다.태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왔다.해원 앞에 멈춰 섰다.“거기 말고.”태헌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바닥.”해원의 시선이 그의 구두 끝으로 내려갔다.이번에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태헌도 기다렸다.계약서에는 자신의 명령에 복종한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서명하는 것과 실제로 무릎을 꿇는 건 다른 일이었다. 해원이 어디까지 받아들일지는 태헌도 알지 못했다.해원은 잠시 계약서를 돌아봤다.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한쪽 무릎을 먼저 굽혔다. 이어 다른 쪽 무릎을 카펫에 댔다.태헌은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좋았다.이 여자가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십이억 팔천만 원의 채무를 두고 조건을 따지던 여자가, 이제는 그의 명령을 듣고 있었다.아직 누구도 그녀를 그의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 전에, 이 여자는 그의 앞에 먼저 무릎을 꿇었다.태헌은 해원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그제야 손을 뻗어 턱을 들어 올렸다.“앞으로 내 명령에 대답할 때는 알겠습니다가 아니야.”해원이 그를 올려다봤다.“그럼 뭐라고 합니까?”“누구 말을 듣는지 붙여.”
이틀 동안 해원은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출근하고, 신부 어머니의 네 번째 컨셉 변경을 받아내고, 퇴근해서 호텔로 갔다. 태헌과 저녁을 먹고, 같이 잤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예전'이라는 말은 이틀 내내 머릿속 한쪽에 걸려 있었다. 목요일 밤, 해원은 침대 끝에 앉아 다음 날 입을 블라우스 단추를 채워 옷걸이에 걸고 있었다. 태헌은 소파에서 노트북을 덮는 중이었다. 해원은 옷걸이를 옷장에 넣고 돌아섰다. "저 계약 전에 본 적 있죠?" 태헌이 고개를 들었다. 해원은 그 얼굴을 봤다. 놀란 기색은 없었다. 언젠가 이 질문이 올 줄 알았던 얼굴이었다. "응." 부정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해원을 더 가라앉게 했다. "언제요?" "세빈호텔. 거래처 결혼식." 해원은 잠깐 기억을 더듬었다. 세빈호텔 그랜드볼룸이라면 라비엘이 자주 맡는 곳이었다. 일 년에 몇 번씩 갔다. 그중 어느 날인지 해원은 알 수 없었다. "음향 끊겼던 날." 태헌이 덧붙였다. 그제야 기억났다. 신부 입장 음악이 끊겨서 음향실로 걸어가던 날. 선배가 자기가 가겠다는 걸 해원이 가져갔던 날. 그날 하객석에 누가 있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저는 본부장님 못 봤는데요." "봤어. 너는 나를 못 본 거고." 해원은 그 말을 한동안 곱씹었다. 자기에게 태헌을 처음 만난 날은 계약하던 날이었다. 집무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남자. 그게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헌에게는
문성재는 이틀 만에 방법을 찾아왔다. "다음 달 입찰까지 안 기다리셔도 됩니다. 금융사 쪽이랑 따로 얘기해서 윤해원 건 포함해서 몇 건만 먼저 넘겨받는 걸로 했습니다. 묶음 정리를 빨리 하고 싶은 건 그쪽도 마찬가지라서요." "조건은요?" "그렇게까지 당기시면 값은 조금 더 쳐줘야 합니다. 입찰로 갔으면 덜 줬을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성재가 잠깐 말을 멈췄다. 수익이 안 나는 채권을, 값을 더 주고, 서둘러서 사겠다는 의뢰인이었다. 그래도 성재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일주일 뒤, 성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윤해원 건 넘어왔습니다. 오늘부로 태원에셋파트너스가 채권자입니다." 태헌은 책상 위에 펼쳐둔 서류를 덮었다. "수고했어요." "추심은 기존 일정대로 이어갑니까? 전 채권자 쪽에서 독촉을 몇 번 넣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대로 이어받으면 다음 단계가 지급명령이고요." "기존 추심은 전부 멈추세요." "독촉도요?" "네. 연락도 하지 말고, 서류도 보내지 마세요." 성재는 이번에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확인할 것만 확인했다. "채권양도 통지는요? 그건 보내야 합니다. 채권자가 바뀌었다는 건 알려야 하니까요." "그건 정상적으로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 뒤로는 그냥 들고만 계시는 겁니까?" 태헌은 잠깐 생각했다. "압류 예고 서류는 준비해 두세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멈추라고 하시면서요?" "보내지는 말고. 서류만 만들어서 저한테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채무자 연락은 제가 합니다." 통화가 끝났다. 해원의 채권은 이제 태헌이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추심을 멈춘 건 진심이었다. 다른 채권자가 해원의 회사로 서류를 보내거나 월급을 건드릴 일은 없었다. 그 권한을 가진 사람이 태헌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리고 압류 예고 서류는 해원에게 보낼 게 아니었다. 해원 앞에 놓을 서류였다. 태헌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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