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8화. 하나는 알겠어다음 날 아침, 수경이 눈을 떴을 때 명우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이불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었다. 수경은 침대에 앉은 채 한동안 그 빈자리를 봤다. 명우가 일어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늦게 잠든 탓인지, 명우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한 탓인지 알 수 없었다.부엌에서는 직원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회장님은 일찍 나가셨어요. 식사는 안 하신다고.""……그래요."수경은 식탁에 앉았다. 직원이 국그릇을 내려놓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본부장님은 오늘 아침 안 드시나요? 방에 안 계셔서요."수경은 수저를 들다가 멈췄다.직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 집의 아침은 늘 그렇게 돌아갔다. 명우는 먼저 나가고, 태헌은 조금 늦게 내려와 커피만 마시거나 간단히 먹고 나갔다. 그 순서를 매일 지켜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물을 만한 질문이었다."당분간 집에 없을 거예요."수경은 그 말을 하고 나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실감했다."아, 출장 가셨구나. 그럼 방 정리는…….""그냥 두세요.""네?""방은 그냥 그대로 두세요."직원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경은 국을 한 숟갈 뜨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출장이라는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정정할 말이 없었다.낮 동안 수경은 집 안에서 할 일을 찾았다. 화분에 물을 주고, 미뤄둔 서랍 정리를 했다. 손이 비면 휴대전화를 들었다. 해원과의 대화창을 열었다.[밥은 먹었어?]썼다가 지웠다.[어제는 잘 들어갔어?]그것도 지웠다. 어제 현관에서 조심해서 가라고 한 게 마지막이었다. 그다음 말을 무엇으로 이어야 할지 몰랐다. 평소처럼 밥 먹었느
Last Updated: 2026-10-10
Chapter: 107화. 잠못이루는 밤해원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식탁에는 아무도 없었다.서재 문이 닫혀 있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수경은 그 문 앞을 지나 식탁으로 갔다. 손대지 않은 음식이 그대로 식어 있었다. 직원은 이미 퇴근했고, 치울 사람은 수경밖에 없었다.수경은 그릇을 하나씩 겹쳤다. 국그릇, 밥그릇, 반찬 접시. 해원의 앞접시에서 손이 잠깐 멈췄다. 명우가 덜어준 반찬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해원이 좋아한다며 명우가 일부러 준비하라고 했던 반찬이었다.수경은 그 접시를 다른 그릇 위에 올렸다. 버리지도, 랩을 씌우지도 못하고 개수대 옆에 내려놓았다.물을 틀었다. 설거지를 시작했다가 그만두었다. 손이 젖은 채 개수대 앞에 서 있었다. 서재 쪽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차라리 큰 소리가 났으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한참 뒤 서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 태헌이었다. 명우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명우는 나오지 않았다.수경은 행주에 손을 닦으며 거실로 나왔다. 2층으로 올라간 태헌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수경은 계단 아래에 서 있다가,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는 게 이상해서 소파 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앉지는 않았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다시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태헌이 내려오고 있었다. 한 손에 가방이 들려 있었다. 출장 갈 때 쓰던 크지 않은 가방이었다. 재킷도 입고 있었다.수경은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태헌도 계단 아래에서 수경을 발견하고 걸음을 늦췄다. 거실 한가운데, 몇 걸음 떨어진 자리였다. 어제 저녁 현관에서 마주쳤을 때와 비슷한 거리였다. 그때 태헌은 해원에게 가고 있었다. 지금은 이 집을 나가고 있었다.수경은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그 가방이 대답이
Last Updated: 2026-10-10
Chapter: 106화. 집에서 나왔어명우는 그 대답을 한동안 아무 데에도 놓지 못했다.없습니다.목소리는 낮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변명도, 덧붙이는 말도 없었다. 명우가 물은 그대로, 정확히 그만큼의 대답이었다.명우는 아들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 모서리가 보였다. 내일 오전에 봐야 할 보고서였다. 오늘 저녁만 해도 그게 이 방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그럼."명우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그럼 상견례 날은. 그럼 결혼식 날은. 그럼 저녁마다 같은 식탁에서 해원이에게 반찬을 건네던 손은.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것을 물어도 같은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처음부터 없었다고. 명우가 이 집에 만들었다고 믿었던 것이, 아들에게는 한 번도 그런 모양이었던 적이 없었다고.명우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지를 수도 없었다. 식탁에서 아들에게 쏟아냈던 분노가 이번에는 목에 걸린 채 내려가지도, 올라오지도 않았다. '없습니다'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헌은 그 말을 숨긴 채 매일 이 집에서 살았다. 명우는 그 얼굴을 보고도 아무것도 몰랐다."내가."명우는 책상 의자를 당겨 앉았다. 서 있을 힘이 갑자기 빠졌다."내가 너를 안다고 생각했다."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말이 없는 건 원래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속을 안 보여주는 것도. 그래도 거짓말은 안 하는 놈이라고.”명우는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었다.서재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웃음 같은 숨이 새어 나왔다. 웃음은 아니었다.서재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벽시계 초침이 몇 바퀴를 도는 동안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헌은 문 앞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슨
Last Updated: 2026-10-09
Chapter: 105화. 없습니다. 식탁 위에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명우는 수경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대신 식탁을 내려다봤다. 식어버린 국그릇과 손대지 않은 반찬 접시들. 그 사이 어딘가를 한참 보고 있었다. 해원은 명우가 무언가를 정리하려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무엇부터 정리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수경도, 태헌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해원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아직 식탁 위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태헌 씨 혼자 한 일이 아니에요. 그 말을 꺼낸 순간에는 숨이 트였는데, 지금은 그 말 때문에 오히려 숨이 막혔다.한참 뒤 명우가 고개를 들었다. 해원을 봤다."오늘은 돌아가."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차갑지도 않았다. 다만 피곤했다.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려고 하자 명우가 먼저 말을 이었다."지금은 더 못 듣겠다."그 말에 해원은 입을 다물었다. 내쫓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명우는 지금 이 식탁 위에 올라온 것들을 한꺼번에 다 들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들의 거짓말, 아내의 침묵, 그리고 아들 편에 서서 끼어든 해원까지."……네."해원은 의자를 뒤로 밀었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해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동안 명우가 태헌을 봤다."태헌이 너는 남아."해원의 걸음이 멈췄다.어제 해원 집 복도, 엘리베이터 앞이 떠올랐다. 엄마는 복도 끝의 태헌을 보며 너만 와, 라고 했다. 그날은 해원이 엄마를 따라갔고 태헌이 남았다. 오늘은 해원이 이 집을 나가고, 태헌이 남는다.해원은 맞은편을 봤다.태헌은 의자에 앉은 채 해원을 보고 있었다. 명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해원과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Last Updated: 2026-10-09
Chapter: 104화. 처음 뵙겠습니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명우는 태헌을 보고 있었다. 방금 들은 말을 머릿속에서 다시 맞춰보는 얼굴이었다. 만나고 있다. 해원이와. 그 두 문장이 이어 붙는 모양을 명우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식탁 위에서는 국그릇의 김만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해원은 명우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바뀌는 순간을 봤다. 소리를 지르기 직전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표정이 한 겹씩 지워지는 쪽이었다. 조금 전까지 반찬을 덜어주며 웃던 사람이, 회사 회의실에서나 지을 것 같은 얼굴로 아들을 보고 있었다."언제부터야."질문은 해원이 아니라 태헌에게 향해 있었다. 명우는 해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태헌은 바로 대답했다."상견례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명우의 손이 식탁 위에서 멈췄다."상견례 전."명우가 그 말을 되풀이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해원은 명우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알 수 있었다. 수경이 어제 차 안에서 떠올렸던 것과 같은 장면이었다. 식당의 긴 테이블, 처음 인사를 나누는 자리. 그리고 자기 아들이 해원에게 손을 내밀며 했던 말.처음 뵙겠습니다.명우는 그 장면을 수경보다 짧게 떠올렸다. 길게 곱씹지 않았다. 다만 태헌을 보는 눈빛이 한 번 더 식었다."그 자리에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구나."태헌은 부정하지 않았다."……네.""둘이."명우는 그 한마디만 하고 말을 멈췄다. 해원을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해원은 그 말이 자신에게도 떨어졌다는 걸 알았다."그 뒤로는."명우가 다시 물었다."우리가 결혼한 뒤에도."태헌은 잠깐 옆자리를 봤다. 수경이 아니라 해원 쪽이었다. 해원은 그 시선을 받았다. 태헌이 다시
Last Updated: 2026-10-08
Chapter: 103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본가 앞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일곱 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해원은 택시에서 내려 대문 앞에 섰다. 몇 번이나 와본 집이었다. 결혼식 뒤에도 몇 번 이 집에서 식사했다. 그때마다 크게 긴장한 적은 없었다. 엄마가 사는 집이었고, 엄마가 편해 보이는 집이었다.해원은 초인종을 눌렀다.잠시 뒤 문이 열렸다. 집안일을 봐주는 직원이 해원을 알아보고 반갑게 고개를 숙였다."오셨어요.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네. 안녕하세요."인사는 평소처럼 나왔다. 그런데 신발을 벗는 동안 손이 조금 느려졌다. 현관 한쪽에 태헌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제 해원의 집 현관에 있던 그 구두였다.거실로 들어서자 명우가 소파에서 일어났다."왔구나. 들어와, 들어와."명우는 해원 쪽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 얼굴에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제 통화할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퇴근하고 바로 온 거야? 배고프겠다.""조금요.""잘됐네. 오늘 음식 신경 좀 쓰라고 했어. 너 좋아하는 것도 해두라고 했고."명우는 그 말을 하며 식탁 쪽을 가리켰다. 자랑하는 말투였다. 해원은 그쪽을 봤다. 식탁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가운데 놓인 접시 몇 개 사이로, 예전에 이 집에서 맛있다고 한 번 말했던 반찬이 보였다. 명우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해원의 목을 조였다."감사합니다.""감사는 무슨. 앉아. 여보, 해원이 왔어."명우가 부엌 쪽을 향해 말했다.수경은 부엌 입구에서 직원과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해원과 눈이 마주친 건 아주 잠깐이었다.
Last Updated: 2026-10-08
Chapter: 외전 7화. 기념일은유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 안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신발을 벗다가 잠깐 멈췄다.강혁은 주방에 있었다.셔츠 소매를 걷은 채 테이블 위에 그릇을 놓고 있었다.은유가 가방을 내려놓았다.“오늘 일찍 오셨어요?”“응.”“연락하시지.”“왜.”“저도 일찍 올 수 있었는데요.”강혁이 은유를 한번 봤다.“왔잖아.”“그렇긴 한데.”은유가 주방으로 갔다.테이블에는 이미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거창한 건 아니었다.둘이 평소 집에서 자주 먹는 것들.그런데 한쪽에 작은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은유가 바로 그걸 봤다.“저건 뭐예요?”“뭐.”“저거요.”강혁이 시선을 따라갔다.“디저트.”“그건 저도 알아요.”은유가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작은 케이크가 두 조각 들어 있었다.은유가 한쪽을 보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이거 제가 좋아하는 건데.”“응.”“일부러 사오셨어요?”“지나가다.”은유가 강혁을 봤다.“거짓말.”강혁이 의자를 빼며 말했다.“밥 먹어.”은유는 앉지 않았다.“주인님.”“왜.”“뭐 있어요?”“뭐가.”“오늘.”강혁이 은유를 봤다.“오늘이 왜.”은유가 눈을 가늘게 떴다.“그걸 제가 묻고 있잖아요.”“아무것도 없어.”“그런데 디저트를 사오셨다고요?”“먹으라고.”“평소에는 제가 사오잖아요.”강혁이 의자에 앉았다.“그래서 오늘은 내가 샀어.”은유는 한동안 그를 봤다.강혁은 태연하게 젓가락을 들었다.은유도 결국 맞은편에 앉았다.“진짜 아무것도 아니에요?”“응.”“생일도 아니고.”“알아.”“무슨 기념일도 아니고.”강혁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은유가 그걸 봤다.“잠깐.”강혁이 다시 반찬을 집었다.“왜.”은유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지금 왜 멈추셨어요?”“안 멈췄어.”“멈추셨잖아요.”“밥이나 먹어.”은유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뭔데요.”“은유야.”“네.”“먹어.”이번에는 조금 달랐다.은유는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대
Last Updated: 2026-09-24
Chapter: 외전 6화. 질투 아니시고요?회식이 끝난 건 열 시가 조금 안 돼서였다.은유에게서 문자가 왔다.[이제 끝났어요.]강혁은 이미 근처에 와 있었다.짧게 답했다.[앞이야.]가게 맞은편에 차를 세웠다.몇 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강혁은 운전석에 앉은 채 그대로 봤다.은유는 네댓 명 사이에 있었다.평소 집에서 보던 모습과 조금 달랐다.머리는 목덜미 가까이 묶여 있었고,코트 단추는 반쯤 풀려 있었다.옆에 있던 여자가 뭔가 말하자 은유가 바로 웃었다.다른 사람이 말을 얹자 이번에는 은유가 먼저 한마디 했다.사람들이 같이 웃었다.강혁은 가만히 보고 있었다.은유가 저렇게 크게 웃는 걸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그런데 자기가 모르는 얘기로,자기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건 조금 달랐다.그때 누군가 편의점에서 나와 봉투를 열었다.간식 몇 개를 나눠주는 모양이었다.남자 직원 하나가 은유 쪽으로 과자를 내밀다가 멈췄다.“아, 은유 씨 이거 안 먹지.”은유가 봤다.“이제 기억하시네요.”“몇 달을 같이 밥 먹었는데 그걸 모르겠어요?”남자가 다른 걸 골라 건넸다.은유가 받아 들었다.“이건 먹어요.”“그건 알죠.”별것 아닌 대화였다.강혁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 순간 은유가 도로 쪽을 봤다.강혁과 눈이 마주쳤다.표정이 바로 밝아졌다.은유가 옆 사람들에게 짧게 뭐라고 말하고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이쪽으로 걸어왔다.조금 전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웃던 얼굴 그대로였다.조수석 문이 열렸다.“많이 기다리셨어요?”“아니.”은유가 차에 타며 안전벨트를 맸다.“오늘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요.”강혁이 시동을 걸었다.“응.”차가 출발했다.은유는 아까 받은 과자를 무릎 위에 올려놨다.“이거 드실래요?”강혁이 한번 봤다.“안 먹어.”“맛있는데.”“너나 먹어.”은유가 봉지를 뜯었다.한입 먹고 창밖을 봤다.“오늘 팀장님이 진짜 웃겼거든요.”강혁은 앞을 봤다.“뭐가.”은유가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누가
Last Updated: 2026-09-20
Chapter: 외전5화. 다시?강혁이 먼저 은유를 봤다.소파에 기대앉은 은유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강혁은 그대로 두고 한동안 노트북 화면을 넘겼다.그러다 불렀다.“은유야.”“네?”“씻고 와.”은유가 휴대폰 화면을 껐다.강혁 쪽을 한번 봤다.방금 전까지는 평소랑 다를 것 없는 저녁이었다.배달 음식 먹고, 설거지하고.은유는 소파에 늘어져 있었고 강혁은 옆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그런데 목소리가 달랐다.아주 많이는 아니고.그래도 은유는 알아들었다.자리에서 일어났다.“네.”욕실로 가다가 돌아봤다.“주인님도요?”“나중에.”“알겠어요.”욕실 문이 닫혔다.곧 물소리가 났다.강혁은 노트북을 덮었다.침실로 들어가 서랍 하나를 열었다.안쪽에 정리된 도구들 사이를 훑다가 길고 가느다란 케인을 꺼냈다.한 번 손에 쥐어봤다.익숙한 무게였다.침대 옆에 내려놓았다.⸻은유가 나온 건 십여 분 뒤였다.머리카락 끝에서 아직 물이 떨어졌다.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강혁을 보고 방 안으로 들어오던 은유가 케인을 발견했다.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강혁이 말했다.“옷 벗어.”은유 얼굴에 남아 있던 생활의 표정이 사라졌다.“네, 주인님.”옷을 하나씩 벗었다.강혁은 재촉하지 않았다.은유가 다 벗고 서자 케인을 들었다.“앞으로.”두 걸음.“팔 위로.”은유가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팔꿈치를 펴고 손을 모았다.강혁이 일어나 가까이 섰다.손으로 한쪽 팔을 살짝 밀었다.“조금 더.”은유가 맞췄다.“그대로.”“네.”케인이 허공을 갈랐다.얇은 바람 소리.은유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첫 타격은 종아리에 떨어졌다.찰싹.“읏.”무릎이 흔들렸다.은유는 그대로 섰다.강혁도 바로 다음을 치지 않았다.은유가 한번 숨을 뱉고 다시 들이마셨다.두 번째.이번에는 첫 자리보다 위였다.찰싹.은유가 입술을 깨물었다.머리 위로 올린 팔이 팽팽해졌다.“괜찮아?”“네, 주인님.”대답은 빨랐다.숨은 아니었다.강혁이 케인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Last Updated: 2026-09-14
Chapter: 외전 4화. 속초“주인님.”강혁이 소파에서 고개를 들었다.은유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화면을 몇 번 넘기다가 말했다.“우리 어디 좀 갈래요?”강혁이 잠깐 봤다.“어디.”“바다요.”“갑자기?”“바다 보고 싶어요.”은유가 화면을 보여줬다.속초 숙소 사진이었다.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여기 괜찮아 보여요.”강혁이 휴대폰을 받아 한 번 봤다.“이번 주말?”“네.”“가.”은유가 눈을 깜빡였다.“이렇게 바로요?”“가고 싶다며.”“생각 좀 하실 줄 알았어요.”“왜.”은유가 웃었다.“아니에요.”강혁이 다시 화면을 봤다.“여기 말고.”“왜요?”“주차 불편해.”“그걸 먼저 보세요?”“그럼 뭘 봐.”“바다요.”강혁이 은유를 봤다.“바다는 다 있잖아.”“속초 숙소에 바다가 다 있어요?”“바다 보러 간다며.”은유가 웃음을 참다가 결국 터뜨렸다.“진짜 낭만 없으세요.”“지금 알았어?”“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어요.”강혁이 다른 숙소를 몇 개 넘겼다.은유가 옆으로 붙었다.“이건요?”“방 작아.”“둘인데요.”“짐 있잖아.”“하룻밤인데요.”“그래도.”은유가 강혁 어깨에 기대 화면을 같이 봤다.몇 개를 더 넘기다가 강혁이 하나를 눌렀다.“여기.”은유가 사진을 확대했다.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큰 창.침대 하나.작은 테이블.“좋은데요.”“응.”“비싸네요.”“그래서?”은유가 강혁을 봤다.“그냥 말한 건데요.”“예약해.”“제가요?”“네가 가고 싶다며.”은유가 웃었다.“네.”그렇게 주말 일정이 정해졌다.⸻토요일 아침.은유가 평소보다 먼저 준비를 끝냈다.작은 여행 가방을 현관에 세워놓고,강혁이 나오길 기다렸다.강혁이 차 키를 들고 나오다가 가방을 봤다.“그게 다야?”“하룻밤인데요.”“지난번엔 훨씬 많았잖아.”“그땐 거의 이사였잖아요.”강혁이 피식 웃었다.은유가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뭐 드실래요?”“뭐가.”“가는 길에요.”“아침 먹었잖아.”“휴게소요.”“벌써?”은유가
Last Updated: 2026-09-13
Chapter: 외전 3화. 원래 이랬냐주말 저녁이었다.초인종이 울리자 강혁이 현관으로 갔다.문을 열자 태준이 서 있었다.한 손에는 술이 든 봉투,다른 손에는 대충 사 온 안주가 들려 있었다.“오랜만.”“들어와.”태준이 신발을 벗다가 멈췄다.현관 한쪽에 여자 구두가 몇 켤레 놓여 있었다.낯선 건 아니었다.문제는 너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는 거였다.태준이 안으로 들어왔다.거실을 한번 둘러봤다.소파 위에는 얇은 담요가 접혀 있었고,테이블 한쪽에는 작은 머리끈이 놓여 있었다.의자 등에는 여자 카디건이 걸쳐져 있었다.태준이 말했다.“나 집 잘못 찾아온 줄 알았네.”강혁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돌아봤다.“주소 알잖아.”“그 얘기가 아닌데.”“그럼 뭔데.”태준이 잠깐 강혁을 봤다.“됐다.”강혁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얼굴이었다.그때 침실 쪽 문이 열렸다.은유가 나왔다.편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다.머리는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태준을 보자 바로 웃었다.“오랜만이에요.”태준이 잠깐 멈췄다.“어.”은유가 소파 쪽으로 오다가 태준이 들고 온 봉투를 봤다.“많이 사 오셨네요.”“얘가 먹잖아.”태준이 강혁을 가리켰다.강혁이 봉투를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렸다.은유가 자연스럽게 그 안을 들여다봤다.“이건 냉장고 넣어야겠는데요.”“응.”강혁이 대답했다.은유는 병 하나를 꺼내 주방으로 가져갔다.태준이 그 뒷모습을 봤다.다시 강혁을 봤다.강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컵을 꺼내고 있었다.“너.”“왜.”태준이 입을 열었다가 말았다.“아니다.”“뭔데.”“좀 있다가.”강혁이 미간을 찌푸렸다.“이상한 새끼.”은유가 주방에서 웃었다.“태준 씨 원래 저러잖아요.”태준이 바로 은유를 봤다.“나 원래 이래요?”“조금요.”“강혁아.”“왜.”“얘 원래 나한테 이렇게 말했냐?”강혁이 컵을 내려놓았다.“뭐가.”은유도 고개를 갸웃했다.“제가 뭐라고 했는데요?”태준이 둘을 번갈아 봤다.둘 다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태준이 한숨을 쉬었
Last Updated: 2026-09-12
Chapter: 외전 2화. 오늘은 그만하세요은유가 먼저 눈을 떴다.아직 알람이 울리기 전이었다.평소 같으면 옆자리가 먼저 비어 있을 시간인데,오늘은 아니었다.강혁이 그대로 누워 있었다.은유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처음에는 그냥 더 자는 줄 알았다.그런데 이상했다.숨이 조금 무거웠다.이불 밖으로 나온 손도 가만히 있었다.은유가 몸을 돌렸다.“주인님.”대답이 없었다.조금 더 가까이 갔다.“주인님.”강혁이 그제야 눈을 떴다.“응.”목소리가 잠겨 있었다.은유가 바로 상체를 일으켰다.“왜 그래요.”“뭐가.”“목소리가요.”강혁이 미간을 한번 찌푸렸다.“자다 깨서 그래.”“아닌 것 같은데요.”은유가 손을 뻗었다.강혁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렸다.잠깐 그대로 있었다.“뜨거워요.”“조금.”“조금 아니잖아요.”강혁이 은유의 손을 잡아 내렸다.“괜찮아.”은유가 그 손을 내려다봤다.“안 괜찮은데요.”“열 좀 난다고 안 죽어.”은유가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누가 죽는다고 했어요.”강혁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은유는 이미 침대에서 내려가고 있었다.“어디 가.”“체온계 가지러 가요.”“됐어.”“안 됐어요.”은유가 서랍을 열었다.체온계를 찾아 돌아왔다.강혁이 그걸 보자 한숨을 쉬었다.“진짜 괜찮다니까.”“가만히 계세요.”은유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강혁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체온계를 귀에 가져다 댔다.삑.은유가 화면을 확인했다.“38도 넘잖아요.”“그래서.”“그래서가 아니죠.”은유가 체온계를 내려놓았다.강혁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은유가 바로 어깨를 눌렀다.“누워 계세요.”강혁이 그 손을 봤다.“은유야.”“그렇게 불러도 안 돼요.”“뭐가 안 돼.”“일어나는 거요.”강혁이 잠깐 은유를 봤다.그러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휴대폰을 집었다.화면을 켰다.은유가 그걸 보자 바로 손을 내밀었다.“주세요.”“왜.”“뭐 하시려고요.”“확인만.”“뭘요.”“메일.”은유가 강혁 손에서 휴대폰을 빼갔다.강혁의 눈
Last Updated: 2026-09-10
Chapter: 64화. 자기 답을 찾아냈지안 일어났습니다. “수레입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신탁청 직원 하나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수레가 출발했습니다.”솔이 고개를 들었다.“지금요?”“예. 준비가 일찍 끝나 예정 시간보다 먼저 출발했습니다.”준경의 표정이 굳었다.솔이 바로 물었다.“어느 길로 갔습니까?”직원이 잠깐 숨을 골랐다.“왼쪽으로 간다고 들었습니다.”솔의 손끝이 멈췄다.좁은 산길.큰 돌.흔들리던 오른쪽 바퀴.쏟아지던 상자.사라지던 사람.“멈춰야 합니다.”신탁청 실무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성문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이미 지났습니다.”방금 들어온 직원이 말했다.“조금 전에 성문을 통과했다고 합니다.”준경이 바로 몸을 돌렸다.“말 준비해.”신탁청 쪽에서도 곧바로 사람들이 움직였다.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준경이 돌아봤다.“넌 여기 있어.”“사고가 나는 곳을 제가 봤습니다.”“방금 대가 치렀어.”“공작님도 마찬가지잖아요.”준경이 입을 다물었다.틀린 말은 아니었다.솔은 그대로 덧붙였다.“어디서 사고가 나는지 압니다.”준경이 솔을 잠깐 바라봤다.“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예.”두 사람이 함께 문을 나섰다.복도 끝에서 이미 말발굽 소리가 들
Last Updated: 2026-10-08
Chapter: 63화. 둘다 아닙니다. 오른쪽 길.“아닙니다. 한 번 더 보겠습니다.”상대는 바로 허락하지 않았다.“지금 상태로 가능합니까?”“예.”“알겠습니다.”솔은 오른쪽 길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뗐다.손끝이 아까보다 차가웠다.주먹을 한 번 쥐었다.아직 움직였다.아직 볼 수 있었다.솔은 눈을 감았다.⸻이번에는 들판이었다.길은 넓었다.산길처럼 비탈도 없었고, 바퀴가 걸릴 만한 큰 돌도 보이지 않았다.수레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마부가 고삐를 잡고 있었다.뒤에는 호위 둘이 말을 타고 따랐다.별일은 없었다.솔은 조금 더 보았다.수레가 작은 다리를 건넜다.다리를 무사히 지나고,다시 평평한 길로 들어섰다.그때였다.덜컹.솔의 시선이 수레 아래로 향했다.바퀴 하나가 흔들렸다.아까와 같은 쪽이었다.덜컹.한 번 더.이번에는 바퀴가 옆으로 꺾였다.수레가 갑자기 기울었다.마부가 몸을 돌렸다.말이 놀라 옆으로 뛰었다.수레가 그대로 넘어졌다.뒤따르던 호위 하나가 미처 피하지 못했다.솔이 눈을 떴다.숨이 턱 막혔다.탁자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속이 거칠게 뒤집혔다.차가움이 손끝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팔을 타고 올라왔다.
Last Updated: 2026-10-07
Chapter: 62. 시험신탁청의 작은 조사실 안에는 실무관 두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폐성에서보다 더 깊이 들어가는지만 보면 됩니까?”“아니.”탁자 위에 얇은 서류 한 장이 놓였다.“얼마나 달라졌는지 본다.”“본인은 알고 있습니까?”“모르는 것 같더군.”잠깐 침묵이 흘렀다.“무리시키지는 마십시오.”“당연하지.”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두 사람의 대화가 멈췄다.곧 문이 열렸다.솔이 들어왔다.⸻“예언입니다.”솔은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바라봤다.“지금요?”“예.”대답은 짧았다.솔은 잠깐 뒤를 돌아봤다.들어올 때 닫힌 문이 보였다.그 너머에는 준경이 있었다.혼자 있지 마.신탁청에 오기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솔이 물었다.“문을 열어두면 안 됩니까?”“안 됩니다.”“공작님이 밖에 계십니다.”“알고 있습니다.”“그런데도요?”“예.”솔은 잠깐 상대를 바라봤다.더 설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알겠습니다.”자리에 앉았다.“무엇을 보면 됩니까?”상대가 접어놓은 지도를 펼쳤다.작은 마을 하나와 그곳으로 이어지는 두 길이 보였다.한쪽은 산을 끼고 돌았고, 다른 한쪽은 들판을 가로질렀다.“오늘 오후에 수레 한 대가 이 마을로 갑니다.”손가락이 마을을 짚었다.
Last Updated: 2026-10-07
Chapter: 61화. 기다려 주십시오신탁청의 회신은 다음 날 아침 도착했다.솔은 마차 안에서 접힌 종이를 다시 펼쳤다.준경은 맞은편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계약은 오늘 조사 중에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준경이 시선을 돌렸다.“오늘만?”“예.”짧은 침묵이 흘렀다.솔은 다음 줄을 읽었다.“공작님은 신탁청 안까지 동행하실 수 있습니다.”“조사실은?”솔이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준경이 코웃음을 쳤다.“못 들어오게 했구나.”“예.”“마지막은.”솔은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예언은 필요하면 확인하겠다고 했습니다.”준경의 얼굴에서 남아 있던 여유가 사라졌다.“하나도 제대로 받은 게 없네.”틀린 말은 아니었다.솔은 종이를 접었다.“그래도 갑니다.”“알아.”준경은 한쪽 팔을 창틀에 걸쳤다.그러다 솔을 봤다.“지금 돌아가자고 하면?”“안 돌아갑니다.”“물어본 것뿐이야.”“저도 대답한 것뿐입니다.”준경이 잠깐 솔을 바라보다가 웃었다.“요즘 말이 좀 세졌네.”“공작님이 자꾸 그렇게 물으시니까요...”“내 탓이라고?”솔은 대답하지 않았다.마차가 속도를 줄였다.창밖으로 높은 석조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솔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준경이 그걸 봤다.“긴장돼?”“조금요.”“안
Last Updated: 2026-10-06
Chapter: 60화.혼자 있지마기다려주십시오“제가 가겠습니다.”솔의 대답이 떨어진 뒤에도 준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식탁 위에는 아직 펼쳐진 공문이 놓여 있었다.준경은 솔을 보고 있었다.“네가 결정한 거라고 했지.”“예.”“후회 안 해?”솔은 잠깐 생각했다.“아직 가지도 않았습니다.”준경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래. 그것도 맞네.”그가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조금 전까지 굳어 있던 공기가 아주 잠깐 느슨해졌다.그러나 그뿐이었다.“좋아.”준경이 말했다.“같이 가.”솔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예.”“그렇다고 그냥 들어가진 않을거야.”준경은 식탁 위 공문을 손끝으로 두드렸다.“저쪽에서 원하는 대로 네가 혼자 가서 묻는 말에 대답하고, 시키는 대로 예언하고. 그런 건 안 돼.”솔이 공문을 내려다봤다.“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그럼 정하자.”준경이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뭘 받아내야 하는지.”솔은 잠시 생각했다.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계약은 건드리지 못하게 해주십시오.”준경은 바로 대답했다.“그건 당연하고.”솔이 눈을 들었다.“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준경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내 낮게 웃었다.“그래. 계속해.”“공작님도 같이 가셔야 합니다.”
Last Updated: 2026-10-06
Chapter: 59화. 제가 가겠습니다다음 날 점심, 솔이 식당에 들어섰을 때 준경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솔은 맞은편에 놓인 접시를 보고 걸음을 조금 늦췄다.수프였다.어젯밤 준경이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잠깐 생각하다 말했던 것이었다.“정말 준비하셨습니까?”준경이 고개를 들었다.“네가 먹고 싶다며.”“그냥 말씀드린 겁니다.”“그래서 준비했는데.”틀린 말은 아니었다.솔은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수프는 아직 뜨거웠다. 숟가락으로 한 번 저으니 김이 올라왔다. 솔이 조심스럽게 한 입 먹었다.준경이 물었다.“어때.”“맛있습니다.”“그게 끝이야?”솔이 그를 보았다.“무엇을 더 말씀드려야 합니까?”“어제는 그렇게 한참 고민하더니.”“먹고 싶은 것을 물으셨으니까요.”“그래서 먹고 싶던게 맞아?”솔은 다시 한 숟가락을 먹었다.“예.”준경이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솔은 못 본 척했다.식사는 그 뒤로 별다른 대화 없이 이어졌다.준경은 중간에 놓인 고기 접시에서 한 조각을 집어 자기 접시에 가져갔다. 솔은 잠깐 그것을 보다가 물었다.“그건 어떻습니까?”“먹어볼래?”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준경이 접시를 밀었다.솔은 고기 한 조각을 가져왔다.“제 접시도 있는데요.”“그건 다른 거잖아.”먹어보니 확실히 달랐다.솔이 한 번 더 손을 뻗자 준경이 그 모습을 보았다.“맛있어?”“예.”“그럼 더 먹어.”이번에는 솔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준경의 접시에서 한 조각을 더 가져왔다.조금 전까지 준경이 먹던 접시라는 것도, 허락을 다시 묻지 않았다는 것도 가져오고 나서야 생각났다.그래도 돌려놓지는 않았다.준경 역시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저 자기 잔을 들었다.잠시 뒤 솔은 자기 앞의 빵을 반으로 갈랐다.한쪽을 먹다가 남은 반쪽을 준경 쪽으로 밀었다.준경이 그것을 내려다봤다.“왜.”“드실 겁니까?”“네 거잖아.”“배부릅니다.”“그러니까 나 먹으라고?”“싫으시면 두십시오.”준경은 잠깐 솔을 보더니 빵을 집었다.
Last Updated: 2026-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