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모여있든 말든 저는 상관없어요. 저의 경호원들과 회사 경비실 직원들이 제가 회사에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보장할 거예요. 하지만 저한테서 답을 얻지 못하면 호영 씨에게 매달릴지도 모르니 호영 씨도 조심하세요.”고현이 연예기자를 처음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긴장하지 않았다.전호영은 그녀의 남자 친구이다.연예 기자들도 전호영의 곁을 맴돌며 혹시 그도 고현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그녀에게 구애하지 않았냐며 그에게 매달릴 것이다.전호영은 웃으며 대답했다.“저는 무서울 것 하나도 없어요. 저에게 그런 물음을 물어본다면 제가 바지를 벗겨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으면 기자들이 더는 물어보지 못할 거에요. 어차피 사람들은 우리를 동성애자라고 생각할 텐데 제가 그런 말을 하면 기자들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이미 저를 게이로 보고 있기도 하고 고현 씨가 여자인 걸 알았다고 해도 뭐 어쩔건데요? 저도 어제 금방 알았다고 말하면 기자들도 믿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고현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하긴, 전호영은 말재주가 좋아 연예 기자들은 몇 번이나 그의 손에 놀아났는지 모른다.전호영이 말하고 싶지 않으면 기자들이 제아무리 애써봤자 그의 입에서 실오라기 하나도 건질 수 없을 것이다.그리고 전호영은 화제를 돌려 연예 기자들의 주의력을 딴 곳으로 끌어가면서 기자들을 되돌려 보낼 것이다. 그러다가 기자들은 떠난 뒤에야 또 그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예전에 고현과 전호영의 일에 관해 연예 기자들에게 쫓겨 다녔을 때 연예 기자들은 모두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지언정 친근해 보이고 그들을 배척하지 않는 전호영의 주위를 맴돌지 않았다.연예 기자들은 왠지 전호영이 그들을 원숭이 놀리듯 조롱당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전호영을 찾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현은 옷을 갈아입고 욕실에서 늠름하고 멋진 예전의 모습으로 나왔다.전호영은 사랑하는 여인을 보며 휘파람을 불며 농담했다.“
고현과 전호영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큰 도련님,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집사는 계단 입구에 서서 고현에게 공손히 말했다.고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전호영과 함께 식사하러 갔다.집사는 따라가지 않았다.고현이 식사할 때, 누군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종종 스스로 가지러 가곤 했다.집사는 고현과 같은 도련님을 모시는 것이 너무 수월하다고 생각했다.“집사님은 아직 현이 씨가 여자인 줄 모르세요?”고현은 전호영을 힐끗 쳐다보더니 되물었다.“제가 여자라는 사실을 전세계 사람들에게 선언할 필요는 없잖아요?”전호영은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필요 없죠.”“얼른 아침 식사나 해요. 이따 출근해야 하니까.”“네.”전호영은 그녀를 도와 식탁 의자를 당겨주며 말했다.“제가 오늘 더 일찍 오지 못해서 아쉽네요. 좀 더 일찍 왔더라면 현이 씨에게 직접 요리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저의 별장 실내 장식이 끝나고 나서 들어가 살게 되면 매일 현이 씨에게 요리해 줄 수 있어요.”별장 한 채를 장식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들었다.그 별장은 전호영이 강성에 생활할 때 거주하는 별장이기에 그의 높은 요구 사항 때문에 장식하는 진도가 좀 느렸다.설전에 실내 장식을 마치기만 해도 빠른 편일이다.고현은 잠자코 있다가 말을 이었다.“호영 씨 때문에 제 입맛이 까다로워지면 어떡하죠?”전호영의 요리 솜씨가 좋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그녀도 그의 요리 솜씨를 인정한다.전호영이 만든 음식을 먹고 나서 고현은 호텔이나 자기 집에서 밥을 먹을 때 항상 맛이 부족하다고 느꼈다.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앞으로 부부 될 사이인데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한 가족으로 되면 매일 같이 살 텐데 현이 씨의 하루 세끼를 제가 모두 책임지면 되잖아요.”이때 고현이 갑자기 엄숙하게 그에게 물었다.“만약, 만약 제가 우리가 결혼 후에도 강성에 남아 여전히 고씨의 그룹을 운영하고 싶어 한다면 호영 씨 동의할
전호영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당연히 습관 되지 않을 거예요. 현이 씨는 평소 너무 엄숙해요. 너무 부끄러우면 방에 혼자 있을 때 연습해도 되는데. 누구도 듣지 못하면 누가 현이 씨를 비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아요.”고현은 전호영이 계속 말하는 모습을 보더니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잘라 포크로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따르릉...전호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하예정이 걸어온 전화였다.전호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예진 누나, 무슨 일 있어요?”“없어요. 그냥 호텔 문 앞에 기자들이 많다고 알려주려고요. 혹시 고현 씨가 혹시 외부에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인정하셨어요? 기자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아마도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 같아요. 하루 호텔에 와서 모여있는 거로 보면 아마 맞은편의 고성 호텔에서도 지키고 있을 거예요. 아까 일구 씨가 가봤는데 확실히 기자들이 몰려들어 있대요. 오늘 호텔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호영 씨, 어제 호영 씨와 고현 씨가 무슨 일을 벌인 거 맞죠? 소문이 어찌나 빠른지 아침에 식사하러 내려왔는데 저도 벌써 그 소문을 듣게 됐다니까요.”전호영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마치 저와 현이 씨가 어젯밤에 바람을 피우다가 잡힌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하하! 어젯밤에 저와 현이 씨가 송씨 가문 연회에 참석하러 갔거든요. 현이 씨가 드레스를 입고 참석했을 뿐이에요. 다른 건 아무 일도 없었어요.”하예진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렇군요. 축하드려요. 고현 씨가 호영 씨를 위해 치마를 입다니, 그녀가 드디어 호영 씨를 사랑하게 됐네요. 저는 두 사람의 결혼 축하주를 마시기만을 기다리면 되겠네요.”고현은 전호영에 대한 감정이 매우 더딘 편이었다.전호영이 고현을 쫓아다닌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녀는 이제야 사람들이 전호영을 오해하는 것이 가슴 아팠고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하여 고현은 자발적으로 치마를 입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녀가 원래 여자이고 전호영
하예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우빈은 말할 것도 없고 나조차도 아침에 이불 속에서 겨우 일어났어. 언니, 강성은 더 춥지? 인스타에서 보니 사람들이 눈 내리는 영상을 찍어 올렸던데. 우리 관성은 눈은 오지 않지만, 강성 쪽에 눈이 오면 우리 여기도 따라서 추워져.”관성 기온은 낮에는 10도가 넘지만, 밤에는 가장 낮아서 8~9도까지 떨어지곤 한다.이런 기온은 강성 사람들에게는 춥지 않지만, 더위에 길들여진 관성 사람들에게는 매우 추운 날씨다.“옷 좀 더 입혀줘. 유치원에서 나누어준 겨울옷은 너무 두껍지 않으니까.”우빈은 겨우 세 살 남짓 된 어린이였기에 하예진이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입혔어. 그런 걱정하지 마. 언니도 강성에서 감기 조심하고. 많이 입고 다녀.”“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걱정하지 마. 넌 오늘 회사로 출근했어? 요즘 관성도 추울 텐데, 먼저 집에서 쉬는 건 어때? 제부가 돈 잘 벌잖아. 네가 회사로 뛰어다니면서 돈 벌 필요 없어.”하예진은 너무 바빠서 땅에 발을 내디딜 틈이 없으면서도 여동생에게는 집에서 배 속의 아기를 잘 돌보라고 설득했다.“괜찮아. 우리 회사에도 일이 별로 없어서 그냥 와 본 거야. 좀 이따가 서점에 들러야 해. 정남 씨가 이틀을 휴가 내서 나도 효진에게 쉬라고 했어. 두 사람이 함께 편히 쉬라고 가게에 나오지 말라고 했어. 나 혼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으니까.”소정남은 늘 전태윤에게 그의 아내가 샤브샤브를 먹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먹지 못한다고 투덜댔다.하예진도 그냥 잔소리 한 번 해봤을 뿐 하예정이 말을 듣지 않을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더는 말을 설득하지 않았다.하예진은 과거 임신하여 집에서 쉬면서 사회와 단절되었고 출산한 뒤로도 모든 정력을 우빈에게만 쏟아부어 자기 관리에 소홀해 몸매가 많이 무너졌었다.그러나 전태윤은 주형인처럼 어리석게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하예진의 실패한 결혼은 하예정에게 경적을 울릴 것이고 하예정도 최대한 친언니의 과거 생활을 피해 가려
사람들에게 하예정의 친정집의 실력도 강하다는 것을 알게 해야 했다.하예진은 이경혜의 지시에 따라 강성에 와서 이은숙 가족 교통사고의 진실을 추적하는 것 외에도, 이씨 가문의 주인 자리를 되찾아 하예정의 친정집에도 재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강성 이씨 가문은 점점 몰락하고 있지만, 어쨌든 재벌 가문이기 때문에 지금의 하씨 집안보다는 훨씬 나았다.하씨 집안에도 가족들이 많지만, 고향의 그 “일품” 친척들은 하예정의 발목만 잡는 사람들이라 연계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통화를 끝내자 하예정은 휴대전화를 들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전태윤은 부드럽게 물었다.“무슨 생각해?”하예정은 빙그레 웃으며 전태윤의 어깨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당신 그래요? 운명이란 게 참 이상해요. 저는 지금 같은 날은 꿈도 꾸지 못했거든요. 우리 엄마가 원래 부잣집 딸일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게다가 제가 태윤 씨와 결혼하게 되다니, 사람 사이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해요. 내일 일어나게 될 일을 누구도 모르잖아요.”전태윤은 하예정의 얼굴에 뽀뽀하고 난 뒤 말을 건넸다.“처형이랑 일상적인 통화를 하는 것 같더니 왜 이렇게 감회가 새로워졌어? 먼저 회사로 갈 거야? 아니면 서점으로 가려고? 내가 너 데려다주고 다시 회사로 갈게.”“일단 회사로 돌아가야죠. 지금 이 시간이면 학생들도 다 수업하고 있을텐데 가게도 별일 없을 거예요. 서점으로 간다 해도 한가해서 파리만 잡을 텐데. 지금은 날씨가 추워서 파리도 없겠네요.”“그래.”“참, 저의 언니가 말씀하시는데 어제 고 대표님이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셨다면서요? 호영 도련님께서 드디어 소원을 이루셨네요.”전태윤이 웃으면서 말했다.“호영이가 어젯밤에 기뻐하며 나에게 이 좋은 소식을 알려주더라고. 이진이와 호영이가 결실을 보았으니 이제 이혁이와 전우만 남았네.”지난번에 어떤 여자가 전씨 그룹에 가서 전이혁을 찾으러 갔었다. 전이진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물건을 훔친 거 아니냐면서 캐물었
하예정은 웃으면서 해명했다.“동서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봐 물어본 거 아니에요. 단지 할머니께서 어떤 며느릿감을 고르실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에요.”그녀는 이런 가십거리를 매우 좋아했다.동서끼리 사이가 안 좋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씨 할머니의 안목은 무척 좋기 때문에 전씨 할머니께서 고르신 아내감은 분명 인성 좋은 사람일 것이다.설령 인성이 나쁘더라도 하예정과 마음이 맞지 않아도 괜찮았다.그들은 모두 서원 리조트에 살고 있지만, 모두가 서로 다른 별장에 살고 있었다. 함께 살지 않으니 마음이 맞으면 서로 좀 더 잘 만나고 마음이 맞지 않으면 관계만 잘 유지하면 그뿐이었다.전태윤이 말을 이었다.“나도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몰라. 아마 비주얼은 좋을 것 같아. 어쨌든 우리 사촌 동생들은 전부 다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할머니께서도 못생긴 여자는 고르시지 않을 거야. 이혁이도 오랫동안 날 찾아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됐는지 몰라.”전태윤은 심지어 전이혁의 미래 아내의 성씨도 몰랐다. 그의 여자도 아니었기에 너무 많은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언젠가 동생들도 그들의 여자들을 데리고 부모님을 뵈러 올 것이다.“그런데 할머니께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저는 못생기지 않게 생겼지만, 우리 집안은 부유하지도 않고 전씨 가문의 재력과는 너무 차이 나는 데다 태윤 씨는 전씨 가문의 장남이잖아요, 왜 태윤 씨와 저를 맞세우려고 하셨는지, 또 왜 우리 두 사람을 결혼시키려고 하셨는지... 태윤 씨도 무척 난처했겠네요.”전태윤은 잠자코 있다가 대답했다.“우리는 아마도 그 점쟁이가 점을 쳐 주신 덕분일 거야.”전씨 할머니는 그 점쟁이를 가장 신임하셨다. 점쟁이는 전태윤과 하예정이 부부 인연이 있다면서 만약 그가 하예정을 놓치게 되면 평생 홀아비로 살 것이라고 귀띔해주셨다.전씨 할머니는 장남 전태윤을 가장 아끼시는데 어떻게 그가 홀아비로 살게 할 수 있겠는가!하여 전씨 할머니는 몰래 하예정의 인성을 관찰하다가 인품이
전태윤은 또 반 시간 동안 하예정의 사무실에 붙어있다가 아내의 독촉으로 사무실을 떠났다.강성.고씨 그룹, 고씨 가문의 저택, 하루 호텔, 그리고 고성 호텔에는 많은 연예 기자들이 지키고 있었다.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바로 고현 도련님이 진짜 여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다.고씨 가문의 저택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연예 기자들이 초인종을 눌렀지만 누군가가 나와서 확인만 했을 뿐 여전히 기자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기자들이 확인하러 나오는 사람한테 물어보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고진호 부부의 휴대전화는 여전히 꺼진 상태였고 고빈의 전화는 연결되지만, 그는 똑똑하게도 모르는 전화가 걸려오면 아예 받지 않았다.지금 고현은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다.물론 전호영도 그녀와 함께 있다.차가 고씨 그룹에 거의 도착했을 때, 전호영의 차가 먼저 앞쪽으로 달려갔다.회사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연예 기자들은 익숙한 마이바흐를 보더니 우르르 몰려갔고 전호영은 결국 급정거할 수밖에 없었다.그들은 전호영의 차를 막은 뒤에야 비로소 그 차가 고현의 차가 아님을 깨달았다. 눈앞의 차는 고현 도련님의 차가 아니었다.고현의 차 번호판도 맞지 않거니와 뒤에 고현의 경호원 차들도 따라오지 않았다.이것은 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의 차였다.이때 전호영이 천천히 차창을 눌렀다.“호영 도련님, 고 대표님이 여자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호영 도련님, 혹시 고현 도련님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어젯밤 송씨 가문의 연회에 함께 참석하셨을 때 호영 도련님은 고 대표님께서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어떠셨습니까?”아직 당사자를 잡지 못했지만, 전호영을 잡은 기자들은 전부 모여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전호영은 고현과 동성연애를 하고 있다.두 사람은 친밀한 일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전호영은 고현이 여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전호영이 대답했다.“저는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 대표님이 여자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지
“여자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또 뭐해요? 여자 분장한 걸 알면 또 뭐할건데요? 예전에 제가 치마를 입고 고현 씨를 기분 좋게 하려는 것처럼 고 대표님도 단지 저를 행복하게 하고 싶은 마음뿐이에요.”기자들은 전호영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이대로 흩어지는 것도 너무 언짢았다.그들은 단지 답을 원했을 뿐이다.고현이 왜 남자 행세를 하고 다녔는지, 혹은 여자 분장을 한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흩어지지 않으실 생각이라면 얼른 길을 비켜주세요. 제가 들어가고 나서 다시 이곳에서 계속 기다리세요.”“고 대표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호영 도련님께서 들어가신다 해도 고 대표님을 볼 수 없으실 겁니다.”“고 대표님 차가 저의 바로 뒤에 있는데 못 보셨어요? 기자님들은 저의 차를 막을 수는 있어도 고 대표님의 차들을 감히 막을 용기가 있기나 하세요?”고개를 돌려보니 고현의 차들이 정말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기자들은 방금 전호영의 차를 포위한 것처럼 한꺼번에 고현의 차에 몰려들고 싶었다.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전호영은 강성의 사람이 아니다.설령 그가 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라 할지라도 조만간 관성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고 또 친근감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자들은 전호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러나 고현은 강성의 사람이고 또 강성에서도 냉담한 성격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녀를 건드리게 된다면 아마 강성에서도 무사하게 지내지는 못할 것이다.기자들은 여전히 답을 얻고 싶은 마음에 한꺼번에 몰려들어 고현의 차를 에워싸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차를 막아 보았다.차창을 내린 고현은 나지막하게 말을 내뱉었다.“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1년 후에 여러분들도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란 말뿐입니다.”말을 마친 고현은 바로 차창을 올렸다.1년 후, 고현은 분명 전호영의 아내로 될 것이고 임신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배가 많이 나온 모습을 보면 모두에게 답을 준거나 마찬가지였다.고현은 자신의 사적인 일에 대해 기자들에게 자
“할머니께서는 저의 선택을 존중하신다고 하셨지만 후회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이혁은 명해은에게 먼저 국물을 떠드렸고 또 전현민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다시 국물을 한 그릇 떠드리며 말했다.“저는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비록 이전에는 도아영과 꿈속의 여자 ‘여우'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우'와 함께할 때 특별히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여우'와의 만남을 간절히 기대했고 만나서 싸운다고 해도 그 순간이 기다려지기만 했다. 이런 기대감은 도아영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다.그가 도아영에게 접근한 건 순전히 전씨 할머니께서 선택해주신 사람이기 때문이다.결국 감정은 억지로 할 수 없는 법, 억지로 따온 열매는 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명해은이 입을 열었다.“그래. 후회하지나 말고.”명해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어머님이 널 이렇게 쉽게 놔두실 리가 없지. 넌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있구나!'전이혁은 그가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전씨 할머니께서는 확신 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명해은이 전씨 할머니를 잘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현민은 아들로서 명해은보다 그의 어머니를 더 잘 알았다.전현민 부부는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웃었다.그리고는 전이혁과 도아영에 관한 화제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식사하면서 명해은은 계속 전이혁에게 반찬을 얹어주었다.“엄마, 제가 방금 돌아오자마자 바비큐를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요. 이렇게 많이는 못 먹겠어요.”자기 그릇에 산처럼 쌓인 반찬을 보며 전이혁이 말했다.“엄마, 아빠께도 좀 드리세요. 안 그러면 또 제가 아빠의 아내 관심을 뺏었다고 투덜대실 거예요.”말이 떨어지자 전현민도 전이혁의 그릇에 반찬을 얹어주셨다.“평일엔 바쁘게 일하느라 제대로 식사도 못 했겠다. 살도 많이 빠졌네. 많이 먹어.”전이혁은 웃으며 말했다.“아빠, 아까는 밥 한 그릇과 나물 한 접시만 주신다고 하셨잖아요.”“그건 화나서 한 말이지,”전이혁도 부모님께 반찬을
명해은은 선물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이 녀석이 혼자 올 줄은 몰랐어요. 어머님께서 이혁이가 점심 먹으러 온다고 하시길래 아영 씨도 따라서 온줄 알았거든요. 어제 함께 저녁도 먹고 술도 마셨으니 오늘은 데려올 줄 알았는데.”명해은은 전이혁이 준 선물도 이제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미래의 며느리인 도아영이 와야 기쁠 것 같았다.전이혁이 입을 열었다.“지금 바로 나갈게요. 회사로 돌아갈게요.”그는 일어서서 떠나는 척했다.전현민이 다시 말했다.“네 엄마가 이미 반찬을 더 준비하라고 했는데 우리 집의 강아지도 다 먹지 못할 텐데 네가 도와서 다 먹고 가.”즉, 집에서 기르는 개가 밥을 다 먹을 수만 있다면 전이혁에게 밥을 주지도 않겠다는 의미였다.여자친구를 데려오지 못하는 아들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집안이란 말인가.“밥 드세요.”명해은은 남편과 아들을 식탁으로 불렀다.전이혁은 일어나 명해은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정말 밥 안 주실 줄 알았어요... 저는 이제 우리 집 개보다도 못한 존재네요.”“이번은 봐줄게. 다음에 도아영 씨가 오면 꼭 데리고 와서 식사해. 네 아빠와 나도 한번 보게. 길에서 마주쳐도 누군지 모를 텐데 우리도 한 번 좀 만나보자고.”“엄마, 저는 아영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명해은이 눈을 부릅떴다.“할머니께서 골라주셨는데 안 좋아한다고? 안 좋아하면서 지난 몇 달 동안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네 형은 두세 달 만에 운초의 마음을 움직였는데.”여운초는 당시 그녀가 시각장애인이어서 전이혁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계속 거절했지만 사실은 이미 마음이 움직인 상태였다.전이혁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저랑 형은 달라요. 형도 3개월 만에 형수님을 꼬시지는 못했거든요.”명해은도 앉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가 안 좋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할머니께서 골라주신 사람인데 아무리 못해도 그 정도는 아닐걸. 너무 까다롭게 여자를 고르지는 마. 너도 거울 좀 봐. 넌 너희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도 아
명해은의 친정집도 재벌 가문으로 그녀는 어릴 때부터 보석 액세서리들과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었다.전씨 가문에 시집올 때 그녀의 부모님과 형님, 형수님이 준비해 주신 보석들은 보석 가게를 열어도 될 만큼 많았는데 그것이 그녀의 혼수품이었다. 지금도 그 보석들은 그녀의 보석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전이진이 여운초와 결혼한 뒤로 명해은은 수많은 소장품 보석들을 며느리에게 선물했다.전이혁이 대답했다.“저는 아직 아내가 없잖아요. 새로 나온 보석 액세서리들을 보고 너무 예뻐서 한 세트 사 왔어요.”“전씨 할머니께도 사드렸지?”전이혁은 빨간색 선물 상자를 명해은에게 건네며 말했다.“할머니께서 액세서리들을 선물하지 말라고 하셔서 꽃다발만 사드렸어요. 근데 또 산 아래 꽃밭에 꽃이 많은데 왜 돈을 쓰냐면서 꾸지람 하신 거 있죠.”명해은은 상자를 건네받으며 웃었다.“겉으로는 싫다고 하시지만 속으로는 매우 기쁘셨을 거야. 꽃다발을 네게 돌려주지 않으신 건 마음에 드셨다는 뜻일 거고. 오늘 산 아래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않으실 거다.”수십 년 동안 전씨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명해은은 시어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명해은은 다시 아들 뒤를 살피다가 차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차에 아무도 없니? 너 혼자 왔어? 할머니께서 네가 식사하러 온다고 하시길래 엄마는 네가 귀한 손님을 데려올 줄 알았는데.”“제가 혼자 왔어요.”전이혁은 모른 척했지만 속으로는 전씨 할머니가 이미 도아영이 관성에 온 일을 명해은에게 알려주었을 것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말씀대로라면 명해은 부부가 아들들의 인생사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 부모님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기에 조바심을 내도 소용없었을 뿐이다. 하여 전씨 할머니께서 나서서 형제들의 인생사를 걱정해주실 수밖에 없었다.명해은은 아들을 노려보며 나무랐다.“도아영 씨가 온 거 아니었어? 너희들 어제저녁 함께 식사도 하고 밤도 같이 보냈잖아. 근데 데려오지도 않고 말이야. 엄마는 할머니께서 너에게 골
도아영은 그 선물이 전이혁이 선물인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잠시 생각하던 전이혁은 결국 전씨 할머니의 말씀대로 하기로 했다.만약 도아영에게 선물이 자신이 준 것이라고 알려준다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도아영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집착할 수도 있을 테니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할머니, 집에 가서 식사 안 하실 거예요?”전이혁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전씨 할머니가 대답했다.“너무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러. 조금 있다가 가서 흰죽 한 그릇 먹을 거야.”고기 요리를 많이 먹으면 간단한 죽에 김치를 곁들이는 게 좋았다.“넌 집에 가서 네 부모님과 식사하렴.”“네.”전씨 할머니가 집에 가길 원하지 않자 전이혁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다른 어르신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셨고 굶을 염려도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꽃 구경하자고 전화해서 친구들을 불러야겠다.”전씨 할머니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어르신들이 이쪽으로 오는 모습을 확인한 전이혁은 그제야 정자에서 나왔다.곧 차 앞에 도착한 전이혁은 차에 올라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떠난 뒤로 전씨 할머니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속삭이는 것을.“이 자식아! 너는 할머니를 이길 수 없어. 나중에 네가 할머니에게 매달릴 날이 올 거야.”이렇게 해야 드라마가 재미있어지는 법. 노년의 삶에 약간의 즐거움을 더할 수 있으니 말이다.나이가 들면 할 일이 없어진다. 손자들이 일을 시키지 않는다면 전씨 할머니는 손자들을 놀려먹으며 즐기면 그만이었다.명해은은 별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이혁의 차가 보였고 그가 아직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명해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아들이 다 큰 뒤로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자 명해은 부부는 아들들이 집에 와서 식사라도 함께하는 걸 간절히 바랐다. 며칠이라도 집에서 머물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하지만 아들들이 모두 바쁜 사람들인
전씨 할머니는 묵묵히 전이혁을 바라보았다.이미 모든 말을 털어놓은 전이혁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전부 입 밖으로 내뱉었다.오늘 본가에 온 것도 전씨 할머니에게 확실하게 말하러 온 것이다. 그는 형들처럼 전씨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전이혁에게는 그가 원하는 여자가 있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전씨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의 말도 일리가 있구나. 오래 끌기보다 단칼에 정리하는 게 낫지. 아영 씨도 너에 대한 감정이 아직 깊지 않을 테니 확실히 설명해 주고 마음을 접게 하는 게 좋겠다. 아영 씨의 시간을 더 뺏지 말고.”전씨 할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이혁아, 정말 아영 씨를 고려하지 않을 거냐? 할머니의 안목을 전혀 믿지 못하겠어?”전이혁은 진지하게 대답했다.“할머니, 저는 할머니의 안목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여자예요. 그런데 저는 그녀에게 설레는 느낌이 없어요. 아영 씨와 결혼한다 해도 예의만 차리며 형식적으로 살뿐 진정한 부부간의 정은 없을 거예요. 아영 씨도 똑똑한 사람이라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강제적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 것 같아요.”전씨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할머니도 이제는 네 연애사에 간섭하지 않겠어. 원하는 대로 해 봐. 하지만 단 한 가지! 인품이 좋은 여자를 데려와. 아주 뛰어나지 않아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어야 해. 우리 전씨 가문의 이름을 망치지 말고. 만약 인품이 나쁜데도 네가 고집부린다면 난 억지로 막지는 않겠다. 대신 나와 인연을 끊고 전씨 가문에서 나가.”전씨 할머니는 쥐 한 마리가 천 냥 술을 썩히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다.전씨 가문의 좋은 명성은 몇 대에 걸쳐, 그리고 전씨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평생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것이다.전이혁 하나 때문에 무너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약속했다.“전씨 할머니, 걱정하
“할머니는 제 마음속에서 저의 부모님보다도 더 중요하거든요. 백 세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증손녀도 안으실 거 아니에요. 우리 형제가 아홉이나 되는데 앞으로 아홉 며느리가 생기면 그중 한 명이 꼭 증손녀를 낳아드릴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증손녀를 안고 키우시면서 나중에 좋은 신랑을 골라주시기까지 하셔야 하는걸요.”전씨 할머니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나도 하느님께 500년 수명을 더 빌고 싶지만 그게 될 일이니? 현실을 직시해야지. 나는 증손녀가 태어나는 걸 보기만 해도 만족해. 증손녀가 시집갈 때까지 살겠다는 건 너무 큰 욕심이지.”전씨 할머니의 건강은 아직 좋으시지만 이미 여든이 넘으신 데다 증손녀가 언제 태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어쩌면 막내인 전이율이 결혼할 때까지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어이구, 농담이야. 아까 내가 말했듯이 인품이 좋고 가치관이 바르면 내가 정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고. 그럼 꿈속의 그녀가 누군지는 아느냐?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네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전이혁은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했다.“제가 너무 무능해서 알아낸 정보가 하나도 없어요. 정남 형에게 부탁해 그녀를 조사해보라고 했는데 이런 일은 신경 쓰기 싫다고 하더군요. 만약 태윤 형이 부탁한다면 무슨 일이든 도와주겠지만 제가 부탁하는 건 싫다고 하더라고요.”“정남이가 네 형의 친구이지 네 친구가 아니잖아.”전씨 할머니는 소정남이 전이혁의 부탁을 거부한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정남은 전이혁에게 빚진 것도 없지 않는가.전이혁은 전씨 그룹 본사에서 일하지도 않고 소정남과도 동료 사이도, 친구 사이도 아니었다. 소정남이 원하면 도와주고 원하지 않으면 안 도와줘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그런 일까지 정남에게 부탁하려고?”전씨 할머니가 다시 물었다.전이혁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그는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라 결국은 바베큐만 먹었다.“2, 3개월 정도의 시간을 더 주겠다. 그때 가서도 여전히 도아
그런데도 전이혁은 휴지로 할머니의 자리를 닦았다. 그러나 전이혁 자신은 의자에 앉을 거라서 굳이 의자를 닦지 않았다.“할머니는 정말 수재이신 것 같아요. 수재는 집 밖을 안 나가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잖아요.”할머니는 전이혁을 흘겨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만 아부하고, 어서 말해봐. 도아영 씨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 건데?”“아영 씨 괜찮은 사람이에요. 전 나쁘다고 한 적 없어요. 저도 좋아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아영 씨와 감정을 쌓아보려고 노력도 했는데 전 안 생기고 아영 씨만 강정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먼 길까지 절 찾아와서 따지더라고요.”“아영 씨는 제가 자기 가지고 논 거 아니냐고 하는데, 저도 억울해요. 저도 아영 씨 좋아해 보려고 진심으로 노력했지만,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걸 어떡해요.”전이혁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입은 쉬지 않고 계속 바비큐를 먹고 있었다.“할머니가 점찍은 사람이라 능력도 좋고 조건도 잘 맞고, 여러모로 저랑 잘 어울린다는 거 알아요. 저도 아영 씨를 싫어하지 않고요. 하지만 함께 있으면 뭔가 찌릿한 느낌이 부족해요. 이미 봐온 시간도 꽤 되고, 이제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전 아영 씨를 사랑할 수 없어요.”“물론 제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영 씨와 결혼해서 평생 서로 존중하며 지낼 수는 있을 거예요.”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런데?”전이혁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뗐다.“할머니도 아시잖아요. 제 꿈속에 자꾸 어떤 여자가 나타나 저와 얽힌다는 사실을요. 사실, 현실에서 진짜로 그 여자를 만났어요.”“나도 알고 있어.”전이혁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정말 할머니를 속일 수 없다니까. 제가 그 여자의 물건을 가지고 간 것도 아시잖아요.”“네가 그 물건 가져간 거 인정하면서 왜 아직도 안 돌려줘? 그 여자가 회사까지 찾아가서 네 둘째 형에게 물어봤었다며. 너 없다는 거 알고 나서야 돌아갔다고 하더라.”이 일은 할머니뿐만 아니라 전씨 가문 온 가
전날 밤잠을 설쳐 속이 불편했던 전이혁은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비닐봉지에 먹을 것들을 담고 나서야 할머니의 뒤를 따랐다.“할머니, 여기 구운 닭 다리요.”전이혁은 할머니에게 닭 다리 하나를 건넨 뒤, 고개를 돌려 테이블 앞에 앉아 입가가 번지르르할 정도로 맛있게 먹고 있는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더니 할머니에게 물었다.“할머니, 그런데 저 여자아이는 누구예요? 엄청 복스럽게 먹고 있네요.”“소령이라고, 그 애 부모가 여기 꽃밭 관리자야. 난 그 애가 참 마음에 들어.”전이혁은 할머니가 구운 생선 꼬치를 먹으면서 말했다.“할머니는 여자아이면 다 좋아하잖아요. 예씨 가문에 갔을 때도 그 집안에 유일한 증손녀를 데려오고 싶어 하셨잖아요.”할머니는 아쉬운 듯 말했다.“우리는 예씨 가문과 조건도 비슷하고 가풍도 똑같이 좋은 집안이라 지연이가 우리 집에서 살더라도 나쁠 게 없을 텐데, 아쉽게도 그 집 식구들이 허락하지 않더구나. 예준성은 내가 정말 딸을 데려가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나를 경계했는지 몰라. 내가 가면 할 일도 없는지, 맨날 집에 붙어서 나를 감시하는 거야.”“그거야 지연이가 예씨 가문의 유일한 증손녀이니 당연히 아까워하죠. 제가 예준성이라도 할머니가 딸 훔쳐 갈까 봐 감시했을 거예요. 하하하.”전이혁은 눈앞에 그려지는 그 장면을 상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손자인 전이혁이 보기에도 할머니는 진심으로 손녀 아니면 증손녀를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그는 가끔 자기 부모에게 시험관 아기라도 시도해서 넷째는 꼭 딸을 낳으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돌아오는 건 부모의 매질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의 부모는 이제 손주 볼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그들 형제 셋이 각자 노력해서 딸 한 명쯤은 낳아 보라고 독려하곤 했었다.“할머니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자, 이제 말해 봐.”할머니가 물었다.전이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죠. 그냥 할머니 보러 오면 안 돼요? 꼭 할머니한테 무슨 할 얘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