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희가 한참 고민하더니 말했다.“내일 내가 예진이한테 출근하지 말라고 얘기해볼게. 그리고 너도 앞으로 생활비 많이 주고 더치페이하지 마. 원래는 더치페이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아무런 쓸모가 없어. 봐봐, 네가 퇴근하고 와서도 전부 다 직접 하잖아. 나랑 네 누나가 예진이한테 밥을 차려달라고 하는 것도 돈을 줘야 하니... 딱히 돈을 아끼는 것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더치페이 하지 마. 그러면 너도 덜 힘들잖아. 예진이한테 매달 40만 원씩 준다고 해도 괜찮아.”주형인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어머니, 더치페이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랑 예진이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젠 예진이한테... 정이 뚝 떨어질 지경이에요. 우빈이랑 누나 일만 아니었으면 예진이한테 굽신거리지도 않았어요.”그의 말에 김은희가 그의 뺨을 내리치더니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남자들은 다 이래. 결혼만 하면 바깥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니까! 현주인지 뭔지 그 여자가 정말 널 사랑하는 것 같아? 다 네 신분을 보고 그러는 거라고. 네가 한 달에 겨우 이백이나 버는 일반 직원이었다면 그 여자가 널 쳐다보기나 했겠어? 그래, 네가 잘생기긴 했어. 나도 네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 그런데 잘생기면 밥이 나오냐? 지금 여자들 얼마나 현실적인데, 네가 돈이 없고 지위도 없었더라면 아무리 잘생겼어도 쳐다도 안 봐. 정말로 예진이랑 헤어지면 앞으로 꼭 후회할 날이 있을 거니까 명심해.”서현주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주형인은 어머니의 말을 아예 귓등으로 들었다.“어머니, 늦었어요.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예진이한테 조카들 등하교해달라고 제가 잘 설득해볼게요.”만약 하예진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집을 누나의 명의로 변경하지 않아도 된다. 설마 집을 그의 누나에게 주지 않으려고 절대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는 건가?집에 아이들의 등하교를 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주형인은 방으로 돌아가 하예진에게 캐묻고 싶었지만 또 말다툼할까 봐 결국 포기했다
하예정이 배시시 웃으며 심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심효진이 웃음을 터뜨렸다.“예정아, 너희 부부 드디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구나. 태윤 씨가 나한테 아침을 다 사주겠다고 하니 시름이 놓여. 난 또 태윤 씨가 나를 너한테 남자나 소개해주는 중매인으로 오해한 줄 알았어.”김진우는 그녀의 사촌 남동생이다. 하지만 그녀는 절친과 김진우가 커플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씨 가문은 하예정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고모가 평소에는 하예정에게 다정하게 잘해주지만 자기 아들 김진우가 하예정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안면을 바꿀 것이다. 고모 같은 시어머니가 있다면 하예정의 삶도 힘들어지기에 심효진은 사촌 남동생을 도와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그녀는 남매가 단둘이 있을 때 기회를 봐서 김진우에게 마음을 정리하고 가게도 자주 오지 말라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전태윤이 오해하면 큰일이니 말이다.남자든 여자든 결혼했으면 인간관계를 처리할 때 배우자의 기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설령 배우자에게 미안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배우자가 본다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지금 바로 갈게.”전태윤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심효진은 가게 문마저 닫았다.“아 참, 어디 가서 먹어? 주소 보내줘, 난 스쿠터 타고 갈게.”하예정이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고 전태윤에게 물었다.“태윤 씨, 우리 어디 가서 먹어요?”“관성 호텔 1층 뷔페에서 먹자. 거기 아침 메뉴도 엄청 다양해. 어디에서 왔든 고향의 맛을 느낄 수가 있어.”하예정이 심효진에게 전했다.“관성 호텔 1층 뷔페 레스토랑이야.”“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절친과의 통화를 마치고 하예정은 바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가 깬 걸 확인하고는 전태윤에게 말했다.“태윤 씨, 우리 언니 데리러 가요.”전태윤이 알겠다고 하자 하예정은 휴대전화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거실로 가서 차 키
이따가 한 사람은 서점으로, 한 사람은 회사로 가야 해서 서로 다른 길이라 각자 차를 운전하기로 했다.부부는 먼저 하예진을 데리러 광명 아파트로 향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하예진이 아들과 함께 나왔다.“언니.”하예정이 차를 길목에 세우고 언니에게 다가갔다.“이모.”주우빈이 두 손을 뻗으며 하예정에게 안겼다. 하예정은 허리를 굽혀 주우빈을 번쩍 안아 들어 볼에 뽀뽀했다. 그러자 주우빈이 행복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그 모습에 전태윤은 자신도 두 살짜리 애로 변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하예정이 뽀뽀해줄 테니까.“우빈이 오늘 왜 이리 일찍 깼어?”“내가 깨웠어. 분유를 마시고서야 따라 나오더라고.”하예진이 전태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제부.”“처형, 타세요.”전태윤은 유모차를 하예정의 차에 실었다.“언니, 버스 타고 출근해?”하예정이 차에 시동을 걸며 언니에게 물었다.“왜 스쿠터 안 타? 스쿠터 태윤 씨 차에 실어도 되는데.”전태윤의 차가 커서 스쿠터 하나쯤 싣는 건 아무 문제 없었다.“시간이 별로 없어서 안 탔어. 내일부터 스쿠터 타고 출근하려고.”하예진은 오늘 특별히 예쁜 옷을 입고 나왔다. 평소 집에 있을 땐 주로 편한 옷만 입던 그녀였다.오랜만의 출근이라 그런지 하예진은 마음이 떨렸다.“그럼 이따가 언니를 회사까지 데려다준 다음에 가게에 가야겠다.”“그래도 되고.”하예진은 동생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하예정은 그녀에게 주씨 집안 모녀가 온 이유에 관해 물었다.“무슨 일이겠어. 지난번에 너한테 얘기했던 그 일이지. 나더러 주서인 애들을 등하교시키고 밥도 해주고 숙제도 봐달라는 걸 거절했어! 누가 낳았으면 누가 책임져야지, 내가 그 집 자식을 돌봐줄 시간이 어디 있다고. 게다가 그 집 애들도 엄마를 닮아서 내 말 잘 듣지도 않아.”그녀와 주형인의 사이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주우빈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언니 시어머니 시아버지한테 등하교
200만 원이 넘는 양복을 사면서 하예정은 특별히 그 브랜드를 기억했기에 절대 잘못 볼 리가 없었다.하예정은 혼자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전태윤이 새 옷을 입고 싶어서 그런 게 틀림없었다.그러니 할머니가 전태윤이 겉모습은 까칠하지만 속은 여리다고 말씀하셨지. 그녀가 사준 옷을 그는 버리지 않았다. 역시 친할머니가 손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관성 호텔에 도착했을 때 심효진은 이미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호텔 매니저가 전태윤을 알아보고 미소 띤 얼굴로 ‘도련님’ 이라고 부르려던 그때 전태윤이 그를 서늘하게 째려보았다. 호텔 매니저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내가 뭘 잘못했나?’호텔 매니저는 그를 부르지도 못하고 다가가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서서 전태윤 일행이 멀어지는 걸 빤히 보기만 했다. 잠시 후,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서야 정신을 차렸다.“둘째 도련님?”전이진을 보자마자 호텔 매니저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그를 붙잡고 나지막이 말했다.“둘째 도련님, 저 방금 큰 도련님이랑 엄청 닮은 분을 봤는데 잘못 봤을까 봐 부르진 못했어요. 진짜 너무너무 닮았어요! 딱 하나 다른 건 옆에 경호원이 없더라고요.”‘그래, 사람 잘못 본 게 틀림없어. 큰 도련님은 외출할 때 항상 경호원이 옆에 있었어. 아까 그 사람은 큰 도련님이랑 엄청 비슷하고 째려보는 눈빛도 똑같았지만 큰 도련님은 아니야.’전이진이 다급히 물었다.“큰 도련님이라고 부르진 않았죠?”“부르고 싶었는데 절 째려보는 바람에 부르지 못했어요. 부르지 않길 천만다행이죠, 하마터면 민망할 뻔했어요.”대표의 얼굴도 모르는 직원이라면 해고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다행이네요. 앞으로 큰 도련님을 봤을 때 옆에 경호원이 없으면 모른 척하면 돼요.”호텔 매니저는 더욱 어리둥절했다.“둘째 도련님 말씀은 아까 그 남자가 큰 도련님이란 말이에요? 큰 도련님이 맞는데 왜 모른 척해야 한다는 거죠?”그러자 전이진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그냥
심효진이 떠난 후, 전태윤은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고 했다.사실 경호원들은 모습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줄곧 그의 뒤에 숨어있었다. 그의 전화를 받고 나서 그들은 재빨리 그를 데리러 호텔로 왔다.“먼저 쥬얼리 가게로 가.”전태윤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운전기사에게 분부했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관성은 번화한 대도시라 쥬얼리 가게가 많았다. 마침 호텔에서 회사로 가는 길에 쥬얼리 가게가 하나 있었다. 쥬얼리 가게 문 앞에 도착하자 운전기사가 차를 세웠다.“따라올 필요 없어.”전태윤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분부한 후 홀로 차에서 내려 쥬얼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빠르게 커플링 금반지를 고른 후 값을 지불했다. 점원이 커플링이 담긴 빨간색 반지 케이스를 쇼핑백에 담아 가져오자 전태윤이 쇼핑백을 들고 바로 나갔다.점원의 시선이 그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그가 차에 올라타서야 점원이 시선을 거두고 속으로 감탄했다.‘현실 속에 진짜로 저런 훈남이 있다니. 점잖고 잘생긴 데다가 카리스마까지 있어. 정말 너무 멋있단 말이야! 커플링을 산 걸 보면 여자친구한테 주는 거겠지?’전태윤은 차에 올라탄 후 운전기사에게 가자고 했다. 강일구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너 주려고 산 거 아니야.”전태윤의 싸늘한 말투에 강일구가 황급히 말했다.“큰 도련님, 전 그저 궁금해서 본 거예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그에게 주는 선물이라도 해도 감히 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안에 든 건 반지니까!전태윤이 반지 케이스를 하나 꺼내더니 반지를 왼쪽 약지에 꼈다.강일구는 전태윤이 유부남이라는 걸 대외적으로 알리는 뜻이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큰 사모님한테 고백하려는 건가?’“큰 도련님, 앞으로 큰 사모님을 보면 큰 사모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전태윤이 그를 힐끗 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처럼 불러.”강일구가 입을 꾹 다물었다.‘내 착각이었구나. 큰 도련님은 큰 사모님한테 고백하려는 게 아니었어.
그가 차에서 내리자 성소현은 무척이나 기뻤다. 그동안의 고생이 헛되지 않은 듯싶었다. 어쨌거나 그녀를 완전히 무시하던 전태윤이 차에서 내려 그녀를 만났으니 말이다.“태윤 씨, 제가 아침 준비해왔어요.”성소현은 재빨리 정성껏 준비한 아침을 전태윤에게 건넸다. 그와 동시에 꽃다발도 함께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이 꽃은 제가 우리 집 정원에서 직접 따서 가지를 손질한 다음 한데 묶은 거예요. 태윤 씨한테 선물할게요.”전태윤은 아무런 표정 없이 성소현을 쳐다보았다.‘남자에게 꽃을 선물한다고? 하예정은 대체 소현 씨에게 어떻게 대시하라고 가르친 거야? 날 여자로 여긴 건가?’전태윤은 일단 오른손으로 꽃다발을 받은 후 왼손으로 도시락통을 받았다. 그 순간 성소현은 날뛰듯이 기뻤다.‘태윤 씨가 날 받아주려나?’그런데 그녀는 곧바로 전태윤의 왼쪽 약지에 낀 금반지를 발견했다. 꽤 큰 금반지라 흐린 날씨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게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태윤 씨!”성소현이 조심스럽게 그를 떠보았다.“그 반지는 뭐예요? 왜 약지에 끼고 있어요?”그녀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통 결혼반지를 약지에 끼는데.”전태윤은 반지를 힐끗 내려다보고는 그냥 돌아섰다. 경비실 문 앞에 다다른 그가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경비실 쓰레기통이 어디 있어요?”경비원이 쓰레기통을 가져오자 그는 꽃다발과 도시락통을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다시 차에 올라탔다. 왜 반지를 약지에 꼈냐는 성소현의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성소현이 결혼반지는 약지에 낀다고 대놓고 얘기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그의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가자!”전태윤의 서늘한 목소리에 운전기사는 재빨리 차에 시동을 걸고 성소현을 지나 회사로 들어갔다.성소현은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고 안색도 점점 창백해졌다. 전태윤이 그녀를 받아준 게 아니라 그녀가 보는 앞에서 꽃다발과 직접 만든 아침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엔 결혼반지가 끼어있었다.전태윤은 그녀가 수
성기현은 성소현이 왔다는 보고를 진작 받았다. 여동생이 사무실에 함부로 쳐들어와도 그는 절대 나무라지 않았다.“뭘 그렇게 급히 뛰어와? 귀신이라도 쫓아오고 있어?”성기현이 사인펜을 내려놓았다. 여동생이 왔으니 잠시는 업무를 볼 수 없었다.“오늘은 전씨 그룹 앞에서 안 기다려? 오빠가 얘기했었잖아, 전태윤은 너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널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었는데 믿지 않고 계속 고집을 부리더니, 상처받았지?”성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동생에게 다가갔다. 여동생의 창백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전태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그는 여동생이 전태윤을 쫓아다니는 걸 동의하지 않았고 전태윤이 여동생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오빠.”성소현이 성기현의 팔을 잡고 다급하게 물었다.“오빠, 태윤 씨 싱글이야, 유부남이야? 얼른 말해줘.”성기현이 잠깐 멈칫하다가 대답했다.“왜 그런 질문을 해? 관성 전체에 전태윤이 여자친구도 없는 싱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걔 성격에 가족 외에 그 어떤 젊은 여자도 접근하지 못 하게 하는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대시하는 여자는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 내가 오죽하면 이런 말을 했겠어? 우리 동생이 아니었더라면 걔는 누군가가 대시하는 기분이 어떤지도 모를 거야. 그냥 평생 사랑도 받지 못하고 혼자 살라고 해.”“오빠, 오늘 보니까 태윤 씨가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더라고. 진짜 싱글이 확실해? 이미 결혼했는데 우리가 모르는 건 아니고?”“전태윤이 결혼반지를 꼈다고? 결혼 안 한 거 확실한데.”두 그룹의 경쟁이 치열하여 그는 늘 전태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하여 만약 전태윤이 결혼했다면 그가 가장 먼저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전태윤의 신분에 결혼했는데 아무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의 결혼은 관성 전체를 뒤흔들만한 빅뉴스인데.“그럼 왜 결혼반지를 끼고 있지?”성기현이 피식 웃었다.“그거야 나도 모르지. 갑자기 즉흥으로 꼈을 수도 있잖아. 그러는 사람 많아. 미혼
“너 왜 이렇게 고집불통이야?”“나 원래 고집불통이야.”성기현은 분통이 터졌다.“전태윤은 절대 널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전씨 가문에서도 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성기현이 그녀에게 분석했다.“전씨 가문의 할머니도 만만치 않은 분이야. 손자가 아홉이 있는데 제일 어린 두 손자 말고 나머지 일곱은 전부 결혼할 나이가 됐어. 그 어르신 지금 손자들이 결혼하기만을 기다리셔. 그런데 네가 전태윤을 공개적으로 쫓아다닌지도 한참이 됐는데 어르신이 무슨 움직임이라도 있었어? 네가 전태윤을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전혀 미동도 없어. 그 이유가 뭐겠어? 어르신이 네가 큰 손자며느리가 되는 걸 탐탁지 않아 한다는 말이야.”“마음에 들었다면 어르신 성격에 더욱 부추기는 건 당연한 거고 어쩌면 더한 일도 했을 수 있어. 전태윤을 너의 침대에 데려다 눕혀서라도 밤을 함께 보내게 했겠지. 어르신은 하루빨리 증손주를 원하니까. 만약 두 사람이 밤을 같이 보냈다면 전씨 가문이든 우리 가문이든 전태윤한테 널 책임지라고 했을 거야. 너랑 결혼하기 싫어도 결혼하게끔 말이야.”전태윤은 책임감 있는 남자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인하여 전태윤이 외출할 때마다 경호원과 동행하는 듯싶다. 그의 반경 3m 이내에 가족을 제외한 그 어떤 젊은 여성도 다가갈 수 없었다. 혹시라도 꿍꿍이가 있는 여자가 접근하면 큰일이니 말이다.그의 얘기를 듣던 성소현이 말했다.“할머니는 아직 내가 태윤 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모르실 수도 있잖아.”“계속 그렇게 스스로를 기만할 거야? 어르신이 젊었을 때 어떤 분인지 알아? 어르신이 알고 싶지 않은 것 말고는 모르는 정보가 없었어. 네가 공개적으로 전태윤한테 고백한 게 실시간 검색에까지 올랐는데 어르신이 그걸 모를 리가 있겠어? 어르신이 지금까지 아무 움직임이 없다는 건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뜻이야. 비록 전씨 가문의 가풍이 바르고 어른들도 꽉 막힌 분들이 아니라서 애들이 좋다면 반대하진 않겠지만 결혼 후에 널 탐탁지 않아 하는 어른들한테 잘 보
도아영은 전이혁이 보낸 메시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아직 확정된 건 없어요. 왜요? 밥이라도 대접해 주실 건가요? 아니면 제가 돌아가는 게 아쉬워요?”전이혁이 회답했다.[음식 대접하고 싶어서요. 아영 씨랑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거든요.]도아영은 물었다.[무슨 이야기를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요? 아니면 이혁 씨가 이미 그녀를 선택하셨다는 걸 확정하신 건가요? 만약 정말 여자친구가 생겼다면 저에게 그분을 소개해 주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이혁 씨의 세계에서 영원히 사라져 줄게요.]그녀는 노력해보기도 전에 희망이 없다면 포기할 생각이었다.전씨 가문과 같은 좋은 집안은 흔치 않았지만 전이혁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전이혁은 몇 분 동안 답장이 없다가 이렇게 보내왔다.[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아직 공식적인 연인 관계는 아니라서 아영 씨에게 소개할 수는 없어요.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이따가 만나서 천천히 이야기해요.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나요?][없어요.][그럼 언제 시간 되세요? 제가 음식 대접하고 싶은데.]도아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제가 관성에 온 건 이혁 씨에게 확실한 답을 듣기 위해서였어요. 이제 대충 알 것 같으니 이틀 후면 돌아갈 거예요.]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도아영은 며칠 동안 관성에서 휴가를 즐기기로 했다.해주시로 돌아가면 다시 바쁜 업무에 파묻히면서 쉴 틈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돌아가기 전에 식사 한번 하죠.]부부는 못 되더라도 원수지간이 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둘 사이에 원수 사이로 지낼만한 일도 없지 않은가.전이혁은 이미 그녀에게 모든 걸 말해 주었다. 그가 왜 그녀에게 접근했는지, 왜 그렇게 잘해줬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말이다.그리고 도아영이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의 취향이 아니라는 점도 알려주었다.두어 달밖에 알지 못한 사이, 설령 마음이 움직였다 한들 깊은 정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는가.전이혁이 도아영을
“이혁 도련님을 네 가이드로 삼아서 관성 구경을 시켜줄게. 교외에도 괜찮은 관광지 몇 군데가 있으니 한번 가보는 것도 좋아.”도아영은 고개를 저었다.“이혁 씨는 저랑 말 한마디조차 나누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요. 여행은 기분 좋게 다녀야지 제가 왜 그의 차가운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야 하죠? 오히려 기분만 망치겠어요. 언니 시간 있으세요? 같이 쇼핑 좀 하고 싶은데. 내일은 서원 리조트에 들러 전씨 할머니를 뵙고 싶어요.”전씨 할머니를 찾아가는 이유는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따지려는 게 아니라 전씨 가문의 유명한 어르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였다.하예정은 웃으며 답했다.“물론이지. 근데 나는 낮잠 자는 게 습관이 되어서 안 자면 오후에 힘이 없어. 푹 쉬지 못하면 두통도 오고 눈도 아파.”“그럼 언니가 낮잠에서 깬 후에 같이 가요.”“그래, 내가 일어나면 우리 서점에도 데려갈게. 효진이가 거기 있을 거야. 내 가장 친한 친구는 효진이와 소현 언니뿐이거든.”하예정은 새로운 동서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두 친구를 소개하곤 했다.“좋아요.”도아영은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는 터라 하예정이 어디로든 데려가 주기만 하면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너는 낮잠을 안 자?”“30분 정도는 자요.”“내 사무실이 크진 않아서 별도의 휴게실은 없어. 평소에는 긴 소파를 펴서 침대처럼 쓰고 낮잠에서 깨면 다시 접어서 소파로 써. 우리 둘이 자면 좀 비좁긴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도아영은 하예정을 도와 소파를 칩대로 펴주었다.“이런 접이식 소파 침대가 괜찮네요. 언니는 좀 주무세요. 저는 커피 마시면 잠이 안 와서... 지금은 일도 안 하기에 밤에 일찍 자면 돼요.”하예정은 하품하며 말했다.“그럼 난 좀 잘게.”“네.”도아영은 자신이 하예정의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몇 분간 대화를 나눈 뒤 누웠다. 그녀는 도아영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는지 금방 잠이 들었다.도아영은
“언니, 그때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니가 마음에 들어서 전 대표님이 언니에게 구애하신 건가요?”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나와 태윤 씨는 깜짝 결혼했어. 누가 누구에게 구애하는 그런 것도 없이. 결혼 후에 서로 정을 키워나간 케이스지. 하지만 우리 할머니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하예정과 전태윤의 깜짝 결혼 이야기를 도아영도 조금 알고 있었다.하예정은 간단히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태윤은 완전히 전씨 할머니의 강요로 하예정과 결혼했던 것이다.더욱 놀라운 것은 전씨 할머니가 이미 일찍이 하예정을 노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더욱 황당했는데 어떤 점쟁이가 하예정과 전태윤이 한평생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점쳤을뿐더러 전태윤이 하예정과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전태윤을 가장 아끼는 전씨 할머니께서 가만히 계실리가 있겠는가! 할머니는 전태윤의 효심을 이용해 온갖 방법으로 결혼을 강요했고 덕분에 지금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가능했다.도아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전씨 할머니는 왜 저를 선택하신 걸까요? 확실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전씨 할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제 사주를 알아내서 점을 쳐보시고 이혁 씨와 부부의 인연이 있다고 판단하신 건가요?”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전씨 할머니께 직접 여쭤보셔야 할 것 같아. 내가 알기로는 그 점쟁이는 이제 전씨 할머니를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셨어. 서로 인연이 끝났다면서. 내 생각에는 점쟁이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께서 여행 다니시며 여러 사람의 인품을 파악하시고 손자들에게 맞는 여성이라고 판단하셔야만 손자들에게 추천하시는 것 같아. 할머니는 늘 태윤 씨 형제들을 걱정하고 계시거든.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 키웠는데 정작 연애만큼은 어리숙하다고 말이야. 결혼은커녕 연애도 제대로 안 한다고 잔소리하셔. 남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알맞은 여성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할머니 손자들의 인생 대사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남의 일까지 신경 쓸
하여 전이혁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도아영은 어제 하예정과 이야기를 나누며 잘 통하는 부분이 있어 그녀의 회사로 찾아온 것이다.“난 점심에는 보통 커피를 마시지 않아.”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도아영은 하예정의 배를 살펴보며 말했다.“지금은 커피나 진한 차는 피하는 게 좋아요. 임신 중에는 조심해야죠.”하예정은 웃으며 답했다.“알아. 커피나 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끊었어.”하예정이 오랫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도아영이 직접 커피를 내려야 했던 것이다.“성소현 씨는 오늘 안 오시나요?”도아영이 무심코 물었다.도아영이 온 지 30분이 넘었지만 성소현이 회사에 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소현 언니는 오늘 채소 시장에 갔어. 저녁이 되어야 돌아올걸.”하예정과 심효진은 둘 다 임신부였다. 그녀들 스스로 자신이 아직 힘이 넘친다고 생각했지만 성소현의 눈에는 둘 다 국보급 보물로 소중히 보호받아야 할 존재였다.“아...”식당에 들어가 두 사람은 각자 음식을 담아 한적한 자리에 앉았다.도아영은 생선과 고기, 그리고 새우가 가득 담긴 요리들을 보며 물었다.“회사 식사는 모두 똑같나요? 등급별로 나누지 않으시는군요.”“응, 등급 같은 건 안 나누어.”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관리직이었기에 등급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여기까지 오기에는 너무 멀었지만 하예정은 그들을 위해 삼시 세끼를 제공했고 요리들도 나쁘지 않았다.그녀는 노동자들의 식사에 고기와 국물이 반드시 놓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농장에서 힘든 일을 이겨내려면 고기와 기름진 음식이 없으면 쉽게 배고프기 일쑤였다.하예정은 시골 출신이었다. 열 살 이후로는 마을을 떠났지만 그전까지는 집안일을 많이 도왔기에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하예정은 도아영을 살펴보며 물었다.“너희 회사 식당은 등급별로 나누어?”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여러 개의 식당이 있어요. 직급에 따라 다른 식당에서 식사해요. 물론 메뉴도 다르지만 보통 직
“할머니께서는 저의 선택을 존중하신다고 하셨지만 후회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이혁은 명해은에게 먼저 국물을 떠드렸고 또 전현민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다시 국물을 한 그릇 떠드리며 말했다.“저는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비록 이전에는 도아영과 꿈속의 여자 ‘여우'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우'와 함께할 때 특별히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여우'와의 만남을 간절히 기대했고 만나서 싸운다고 해도 그 순간이 기다려지기만 했다. 이런 기대감은 도아영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다.그가 도아영에게 접근한 건 순전히 전씨 할머니께서 선택해주신 사람이기 때문이다.결국 감정은 억지로 할 수 없는 법, 억지로 따온 열매는 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명해은이 입을 열었다.“그래. 후회하지나 말고.”명해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어머님이 널 이렇게 쉽게 놔두실 리가 없지. 넌 아직도 진실을 모르고 있구나!'전이혁은 그가 후회할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전씨 할머니께서는 확신 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시는 분이었다.명해은이 전씨 할머니를 잘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현민은 아들로서 명해은보다 그의 어머니를 더 잘 알았다.전현민 부부는 서로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웃었다.그리고는 전이혁과 도아영에 관한 화제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식사하면서 명해은은 계속 전이혁에게 반찬을 얹어주었다.“엄마, 제가 방금 돌아오자마자 바비큐를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요. 이렇게 많이는 못 먹겠어요.”자기 그릇에 산처럼 쌓인 반찬을 보며 전이혁이 말했다.“엄마, 아빠께도 좀 드리세요. 안 그러면 또 제가 아빠의 아내 관심을 뺏었다고 투덜대실 거예요.”말이 떨어지자 전현민도 전이혁의 그릇에 반찬을 얹어주셨다.“평일엔 바쁘게 일하느라 제대로 식사도 못 했겠다. 살도 많이 빠졌네. 많이 먹어.”전이혁은 웃으며 말했다.“아빠, 아까는 밥 한 그릇과 나물 한 접시만 주신다고 하셨잖아요.”“그건 화나서 한 말이지,”전이혁도 부모님께 반찬을
명해은은 선물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이 녀석이 혼자 올 줄은 몰랐어요. 어머님께서 이혁이가 점심 먹으러 온다고 하시길래 아영 씨도 따라서 온줄 알았거든요. 어제 함께 저녁도 먹고 술도 마셨으니 오늘은 데려올 줄 알았는데.”명해은은 전이혁이 준 선물도 이제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미래의 며느리인 도아영이 와야 기쁠 것 같았다.전이혁이 입을 열었다.“지금 바로 나갈게요. 회사로 돌아갈게요.”그는 일어서서 떠나는 척했다.전현민이 다시 말했다.“네 엄마가 이미 반찬을 더 준비하라고 했는데 우리 집의 강아지도 다 먹지 못할 텐데 네가 도와서 다 먹고 가.”즉, 집에서 기르는 개가 밥을 다 먹을 수만 있다면 전이혁에게 밥을 주지도 않겠다는 의미였다.여자친구를 데려오지 못하는 아들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집안이란 말인가.“밥 드세요.”명해은은 남편과 아들을 식탁으로 불렀다.전이혁은 일어나 명해은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정말 밥 안 주실 줄 알았어요... 저는 이제 우리 집 개보다도 못한 존재네요.”“이번은 봐줄게. 다음에 도아영 씨가 오면 꼭 데리고 와서 식사해. 네 아빠와 나도 한번 보게. 길에서 마주쳐도 누군지 모를 텐데 우리도 한 번 좀 만나보자고.”“엄마, 저는 아영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명해은이 눈을 부릅떴다.“할머니께서 골라주셨는데 안 좋아한다고? 안 좋아하면서 지난 몇 달 동안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네 형은 두세 달 만에 운초의 마음을 움직였는데.”여운초는 당시 그녀가 시각장애인이어서 전이혁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계속 거절했지만 사실은 이미 마음이 움직인 상태였다.전이혁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저랑 형은 달라요. 형도 3개월 만에 형수님을 꼬시지는 못했거든요.”명해은도 앉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가 안 좋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할머니께서 골라주신 사람인데 아무리 못해도 그 정도는 아닐걸. 너무 까다롭게 여자를 고르지는 마. 너도 거울 좀 봐. 넌 너희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도 아
명해은의 친정집도 재벌 가문으로 그녀는 어릴 때부터 보석 액세서리들과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었다.전씨 가문에 시집올 때 그녀의 부모님과 형님, 형수님이 준비해 주신 보석들은 보석 가게를 열어도 될 만큼 많았는데 그것이 그녀의 혼수품이었다. 지금도 그 보석들은 그녀의 보석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전이진이 여운초와 결혼한 뒤로 명해은은 수많은 소장품 보석들을 며느리에게 선물했다.전이혁이 대답했다.“저는 아직 아내가 없잖아요. 새로 나온 보석 액세서리들을 보고 너무 예뻐서 한 세트 사 왔어요.”“전씨 할머니께도 사드렸지?”전이혁은 빨간색 선물 상자를 명해은에게 건네며 말했다.“할머니께서 액세서리들을 선물하지 말라고 하셔서 꽃다발만 사드렸어요. 근데 또 산 아래 꽃밭에 꽃이 많은데 왜 돈을 쓰냐면서 꾸지람 하신 거 있죠.”명해은은 상자를 건네받으며 웃었다.“겉으로는 싫다고 하시지만 속으로는 매우 기쁘셨을 거야. 꽃다발을 네게 돌려주지 않으신 건 마음에 드셨다는 뜻일 거고. 오늘 산 아래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않으실 거다.”수십 년 동안 전씨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명해은은 시어머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명해은은 다시 아들 뒤를 살피다가 차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차에 아무도 없니? 너 혼자 왔어? 할머니께서 네가 식사하러 온다고 하시길래 엄마는 네가 귀한 손님을 데려올 줄 알았는데.”“제가 혼자 왔어요.”전이혁은 모른 척했지만 속으로는 전씨 할머니가 이미 도아영이 관성에 온 일을 명해은에게 알려주었을 것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말씀대로라면 명해은 부부가 아들들의 인생사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 부모님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기에 조바심을 내도 소용없었을 뿐이다. 하여 전씨 할머니께서 나서서 형제들의 인생사를 걱정해주실 수밖에 없었다.명해은은 아들을 노려보며 나무랐다.“도아영 씨가 온 거 아니었어? 너희들 어제저녁 함께 식사도 하고 밤도 같이 보냈잖아. 근데 데려오지도 않고 말이야. 엄마는 할머니께서 너에게 골
도아영은 그 선물이 전이혁이 선물인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잠시 생각하던 전이혁은 결국 전씨 할머니의 말씀대로 하기로 했다.만약 도아영에게 선물이 자신이 준 것이라고 알려준다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도아영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집착할 수도 있을 테니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할머니, 집에 가서 식사 안 하실 거예요?”전이혁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전씨 할머니가 대답했다.“너무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러. 조금 있다가 가서 흰죽 한 그릇 먹을 거야.”고기 요리를 많이 먹으면 간단한 죽에 김치를 곁들이는 게 좋았다.“넌 집에 가서 네 부모님과 식사하렴.”“네.”전씨 할머니가 집에 가길 원하지 않자 전이혁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다른 어르신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셨고 굶을 염려도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꽃 구경하자고 전화해서 친구들을 불러야겠다.”전씨 할머니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어르신들이 이쪽으로 오는 모습을 확인한 전이혁은 그제야 정자에서 나왔다.곧 차 앞에 도착한 전이혁은 차에 올라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떠난 뒤로 전씨 할머니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으면서 속삭이는 것을.“이 자식아! 너는 할머니를 이길 수 없어. 나중에 네가 할머니에게 매달릴 날이 올 거야.”이렇게 해야 드라마가 재미있어지는 법. 노년의 삶에 약간의 즐거움을 더할 수 있으니 말이다.나이가 들면 할 일이 없어진다. 손자들이 일을 시키지 않는다면 전씨 할머니는 손자들을 놀려먹으며 즐기면 그만이었다.명해은은 별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이혁의 차가 보였고 그가 아직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명해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아들이 다 큰 뒤로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들자 명해은 부부는 아들들이 집에 와서 식사라도 함께하는 걸 간절히 바랐다. 며칠이라도 집에서 머물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하지만 아들들이 모두 바쁜 사람들인
전씨 할머니는 묵묵히 전이혁을 바라보았다.이미 모든 말을 털어놓은 전이혁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전부 입 밖으로 내뱉었다.오늘 본가에 온 것도 전씨 할머니에게 확실하게 말하러 온 것이다. 그는 형들처럼 전씨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전이혁에게는 그가 원하는 여자가 있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전씨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의 말도 일리가 있구나. 오래 끌기보다 단칼에 정리하는 게 낫지. 아영 씨도 너에 대한 감정이 아직 깊지 않을 테니 확실히 설명해 주고 마음을 접게 하는 게 좋겠다. 아영 씨의 시간을 더 뺏지 말고.”전씨 할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이혁아, 정말 아영 씨를 고려하지 않을 거냐? 할머니의 안목을 전혀 믿지 못하겠어?”전이혁은 진지하게 대답했다.“할머니, 저는 할머니의 안목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여자예요. 그런데 저는 그녀에게 설레는 느낌이 없어요. 아영 씨와 결혼한다 해도 예의만 차리며 형식적으로 살뿐 진정한 부부간의 정은 없을 거예요. 아영 씨도 똑똑한 사람이라 그런 삶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이라는 건 강제적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 것 같아요.”전씨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알겠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할머니도 이제는 네 연애사에 간섭하지 않겠어. 원하는 대로 해 봐. 하지만 단 한 가지! 인품이 좋은 여자를 데려와. 아주 뛰어나지 않아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어야 해. 우리 전씨 가문의 이름을 망치지 말고. 만약 인품이 나쁜데도 네가 고집부린다면 난 억지로 막지는 않겠다. 대신 나와 인연을 끊고 전씨 가문에서 나가.”전씨 할머니는 쥐 한 마리가 천 냥 술을 썩히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다.전씨 가문의 좋은 명성은 몇 대에 걸쳐, 그리고 전씨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평생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것이다.전이혁 하나 때문에 무너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약속했다.“전씨 할머니, 걱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