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어릴 때부터 자립하며 커왔지만 청소부가 돼본 적은 없다.아내의 지시를 받은 전태윤은 화내지 않을뿐더러 흔쾌히 동의했다.“그래, 퇴근하고 바로 갈게. 그때 가서 처형네 집 주소 보내줘. 내 밥도 차려놓고.”“네.”“고마워요, 제부.”하예진이 제부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여동생네 부부가 늘 뒤에서 응원해주지 않았더라면 하예진도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주형인과 합의 이혼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언니, 우리 다 한 가족이야. 새삼스럽게 왜 그래?”하예진은 여전히 감격에 겨워 있었다.통화를 마친 후 그녀는 늘 그랬듯이 했던 말을 또 반복했다.“예정아, 태윤 씨는 참 좋은 남자야. 너 꼭 잘해야 한다.”“언니, 귀에 굳은살이 박이겠어. 제발 나 좀 놔줘.”하예정은 매번 똑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하예진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그녀도 습관처럼 말이 튀어나왔을 뿐이었다.십여 분 후 주형인이 은행 입구에 도착했다.그의 부모님들도 함께했고 주서인은 휴가를 내지 못한 탓인지 자리에 없었다.하예진을 보자 김은희는 새아가를 반기듯 눈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하예진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김은희는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예진아, 이혼 안 하면 안 될까? 전에는 나랑 네 새언니가 잘못했어. 항상 너한테만 지적을 했잖니. 맹세할게, 앞으론 우리 집에서 네가 여왕이야. 형인이가 감히 또 너한테 상처 주면 내가 저 녀석 다리를 분지를 거야! 예진아, 너랑 형인이 안 지도 어언간 12년이야. 긴 시간 동안 서로 부부로 지내오면서 맞춰주고 보살펴줬잖아. 형인이가 너한테 어떻게 해줬는지 누구보다 네가 잘 알 거야. 꼭 심사숙고하고 결정해야 해. 저 녀석은 지금 단지 여우 같은 서현주에게 홀려서 그래. 내가 두 사람 그만 만나라고 훈계했으니 화 풀어. 또 어떻게 해야 마음이 풀리겠어? 나한테 얘기해. 이 어미가 대신 나서줄 테니까 어서 화 풀렴. 우빈이를 봐서라도 형인이 한 번만 용서해줘. 이혼하지 말자, 응?”하예진은 담담한 눈빛으로 이제 곧 전
김은희가 하예진에게 주는 2억 원을 아끼려고 그녀의 할아버지에게 과연 돈을 얼마나 주며 설득하라고 했을까?육백만 원 내지 천만 원을 주지 않는 한 하예진의 할아버지는 쉽게 허락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이 집안 사람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하예정은 오히려 김은희가 할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돌려받길 바랐다.‘그래, 난 사악해. 점점 더 나쁘게 변해가. 그래서 태윤 씨는 이런 내가 싫어?’‘아니, 전혀. 바로 이런 네 모습이 좋아!’“엄마.”주형인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김은희를 잡아당기면서 고개 돌려 주경진에게 말했다.“아빠, 엄마 잘 보고 있어.”김은희는 아들의 손을 뿌리치더니 도리어 손목을 꼬집으며 욕설을 퍼부었다.“야 이 못 난 녀석아, 멀쩡한 가정을 이 지경으로 풍비박산을 만들어?”이어서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대성통곡했다.주형인은 그런 엄마가 너무 창피했다.그는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더니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주경진이 앞으로 걸어와 아내를 부축하며 어두운 표정으로 타일렀다.“여보, 그만해. 이번 일은 되돌릴 여지가 없어.”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는 하예진에게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예진아, 우리가 많이 미안해... 너희 둘 어서 들어가서 이혼 절차 마무리해.”하예진은 아무 말도 없었다.그녀는 이젠 이 집안 사람들의 얘기를 전혀 마음에 새겨두지 않는다.눈앞에 다가온 팩트는 단 하나, 주형인과 곧 이혼하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들어가자.”하예진이 담담하게 말하고 먼저 은행으로 들어갔다.주형인은 아빠에게 몇 마디 당부한 후 곧바로 뒤따라가며 그녀에게 물었다.“그 증거자료들 원본 파일과 복사본 모두 갖고 왔어?”“걱정 마, 난 약속 지켜. 너만 깔끔하게 처사하면 나도 질질 끌지 않아.”주형인은 그제야 조금 안심됐다.부부는 나란히 은행으로 들어갔고 주경진과 김은희도 곧바로 따라갔다.돈은 주형인의 돈이지만 은행카드 명의가 주경진으로 되어있어 그가 서명해야 한다.김은희는
“앞으로 우빈이 보고 싶으면 나한테 전화해. 당신 부모님 댁으로 보낼 테니까. 다만 제시간에 우빈이 돌려보내야 해.”하예진은 서현주에게 약속한 게 있다. 아이를 이용하여 서현주와 주형인의 감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이혼 뒤엔 최대한 주형인과의 만남을 피하겠다고 했다.“그래.”주형인도 흔쾌히 대답했다.“인제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절차 마무리해야지. 나 반차 쓰고 나왔어. 이혼 마무리하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서 일해야 해.”주형인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하예진은 동생의 차에 돌아가 함께 가정법원으로 떠났다.한편 주형인은 부모님을 차에 모시고 하예정의 차를 뒤따라갔다.김은희는 차 안에서 한참을 울었다.주경진은 그녀에게 더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고 이에 김은희는 눈물을 닦으며 아들에게 말했다.“이따가 이혼 절차 마무리하거든 예진이더러 짐 싸고 당장 나가라고 해. 하룻밤도 더 묵게 할 수 없어. 나랑 네 아빠는 먼저 집에 갈게. 가서 짐을 싸고 너희 집으로 이사 들어갈 거야. 우리 올해에는 도시에서 설 연휴 보내. 너희 누나네도 휴가 시작하면 다 함께 불러와서 구정 보내자. 서현주한테도 미리 얘기해. 구정에 본가로 내려가지 말고 우리랑 함께 있자고 말이야. 설에 밥하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지 않겠어.”주형인은 단호하게 이혼을 고집했고 우빈의 양육권도 빼앗겨 부모님의 마음을 충분히 아프게 해드렸으니 이젠 부모님이 어떤 요구를 제기하든 전부 들어주기로 했다.서현주도 함께 남아서 그들과 구정을 보내고 그의 가족들에게 밥을 지어줘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주형인은 의외로 당연하다고 여겼다.구정 땐 늘 하예진이 온 가족을 위해 음식을 차려주었으니까!가정법원으로 가는 길에 서현주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 그녀가 먼저 질문했다.“형인 씨, 이혼 절차 마무리했어요?”“지금 가정법원으로 가는 길이야. 아직 10분 더 있어. 방금 예진의 요구대로 재산분할을 마쳤어.”서현주는 뜻밖의 사고가 없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혼 절차 마무리하면
김은희는 한심하다는 말투로 말했다.“너 이번에 이혼하면서 예진에게 그 많은 돈을 나눠줬어. 그나마 예진이는 널 위해 아들을 낳았으니 나눠줄 만 하지. 나도 뭐라 안 해. 하지만 돌아서서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예물까지 준비하려면 또 엄청난 금액일 거 아니야. 형인아, 네가 은행 행장이라도 된 것 같아?”“엄마, 걱정하지 마. 나랑 현주 결혼식에 쓸 돈은 전부 내가 부담해. 절대 엄마, 아빠한테 손 내밀지 않아.”설사 그렇다 한들 김은희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어리석게 하씨 일가 사람들을 찾아가 하예진을 이혼하지 못하게 설득하라고 수백만 원을 쓴 걸 생각하면 김은희는 당장이라도 돌멩이를 찾아와 제 머리를 찍고 싶었다.‘내가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지? 형인이가 이혼 절차 마무리하면 하 영감을 찾아가 내가 준 돈 다 돌려받을 거야.’하 영감은 부르는 게 값이라고 그녀에게 수백만 원을 요구했고 돈을 받더니 제가 직접 나서서 하예진이 이혼하지 못하게 설득하겠다고 맹세했지만 결국 약속을 어겼으니 돈도 당연히 되물어야 한다.10분 후 가정법원에 도착했다.하예진 자매가 먼저 도착해 법원 입구에서 주형인 가족을 기다렸다.주형인이 도착한 후 그들 부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가정법원에 들어갔다.3년 전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잡고 혼인신고를 했었다.그때 하예진은 주형인과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잘 살 거로 여겼다.하지만 몇 년도 채 되지 않아 부부는 이혼 절차를 밟으러 가정법원에 들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합의 이혼이라 다툼 없이 차분하게 필요한 서류들을 챙기고 제 차례가 될 때까지 대기했다. 이곳 직원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이혼 사례를 처리해야 하기에 감정이 무뎌져 더이상 부부에게 화해를 권유하지 않고 절차대로 진행했다.하예정과 주형인의 부모님은 한쪽 옆에서 기다렸다.요즘 세월에 혼인신고 하는 커플은 적지만 이혼하는 부부는 줄을 지었다. 세 사람 모두 이 현실에 한탄했다.하예정은 주형인의 부모를 힐긋 노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혼율이
“가전제품도 전부 네가 산 게 아니야. 함부로 옮기지 마.”김은희는 괜히 본인들이 산 가전제품까지 그녀가 모조리 가져갈까 봐 생색냈다.“걱정 마시라니까요, 아줌마. 내가 산 거 아니면 건드리지도 않아요. 물건 적어진 거 있으면 바로 날 찾으세요.”김은희는 코웃음 칠 뿐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띠리링...”이때 주형인의 휴대폰이 울렸다.대표님한테서 걸려온 전화에 주형인은 재빨리 받았다.대표님이 뭐라고 말했는지 주형인은 낯빛이 확 어두워진 채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대표님, 제 일은 이미 해결했습니다. 지금 바로 회사 가서 처리하려 했는데 발주가 취소되다니요? 걱정 마세요 대표님. 제가 반드시 잘 처리해서 그 발주서를 만회하겠습니다.”전화를 끊은 후 주형인이 부모님께 말했다.“아빠, 엄마, 나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엄마, 아빠는 택시 타고 돌아가.”그리고 하예진에게도 말했다.“예진아, 밤 10시 전까지 짐 빼면 돼. 나 그때 돼야 집에 돌아가.”그러고는 부랴부랴 자리를 떠났다.그녀에게 잘 지내라는 안부도 남기지 못한 채 회사로 향했다.주형인의 부모는 아들이 황급히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경진은 하예진 자매를 뒤돌아보더니 더 말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길옆에 서서 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한편 하예정은 언니를 싣고 집에 돌아가 짐을 옮겼다.“언니, 보아하니 주형인 요즘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아?”하예정은 전 형부가 대표의 전화를 받았을 때의 식겁한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어쩌며 그 인간 오늘 이 자리까지 올라간 것도 다 언니 덕이지 않을까? 이젠 이혼하고 더는 언니 덕을 못 보니 그 인간 커리어도 내리막길을 걷나 보네.”하예정은 이렇게 되기만을 바랐다.어떤 남자들은 아내가 가정에 충실하고 묵묵히 책임진 덕에 근심 걱정 없이 밖에서 큰 사업을 벌일 수 있다. 그런 아내들이 진정 현명한 아내이다.하예진이 담담하게 말했다.“내리막길을 걷든 말든 어차피 난 돈을 다 챙겼어. 예정아,
하예정이 차를 세웠다.“예정아, 다 잘 돼가?”심효진이 관심 조로 그녀에게 물었다.하예정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완전 잘 돼가지.”하예정은 차에서 내려 아파트 출입 카드를 꺼내서 긁으며 경비원에게 말했다.“저 이사하려고요. 이 사람들은 제가 이사를 도와달라고 청한 사람들이에요.”경비원은 아파트 입구의 한 무리 사람들을 보며 하예정에게 물었다.“대체 이사예요 철거예요? 저 사람들 무슨 공구를 저렇게 많이 들고 왔어요? 이사하고 인테리어 다시 하려고요?”“네, 맞아요.”다만 그녀의 돈을 쓰는 건 아니다.경비원은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싸우러 온 사람만 아니면 되니까.한 무리 사람들은 하예정을 뒤따라 호탕하게 광명 아파트로 들어갔다.수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고 구경했다.“예진 씨,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려왔어요?”아는 사람이 하예진과 인사하는 척하며 질문을 건넸다.하예진은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이사하려고요. 원래 인테리어를 허물고 리모델링하려고 사람들을 데려왔어요.”“왜 멀쩡한 집을 리모델링해요?”“지금 인테리어가 마음에 안 들어 허물고 다시 해보려고요.”그 사람은 알겠다며 칭찬을 남발했다.“남편이 잘 버니까 번거롭더라도 리모델링을 하는 거죠.”보통 사람들은 한번 인테리어한 집은 더이상 리모델링하지 않는다.하예진이 웃으며 대답했다.“저 그럼 먼저 가볼게요.”주형인이 잘 버는 건 맞지만 이젠 그녀와 아무 연관이 없다.하예정과 심효진은 할머니를 모시고 맨 뒤에서 따라오며 길을 안내하는 하예진을 흐뭇하게 쳐다봤다.“이혼하니까 우리 언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위풍당당한 모습 말이야.”심효진이 머리를 끄덕였다.시집 한번 잘못 가면 진짜 한 여자의 인생을 망치는 수가 있다.“예정아, 너희 언니 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어르신이 친절하게 물었다.“재혼하고 싶다면 이 할미한테 얘기해. 내가 직접 좋은 남자로 골라줄게. 제2의 인생은 무조건 처음보다 더 찬란하게 꽃 필 거야.”하예정은
“아니 그쪽은 대리기사잖아요?”하예정은 강일구를 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강일구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실은 제가 예정 씨 남편분에게 명함을 남겼어요. 남편분께서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했어요. 제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거든요.”하예정도 대리기사가 종일 콜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니 집에서 놀기보다 다른 일을 겸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강일구의 거짓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그럼 잘 부탁드려요.”“아닙니다. 저는 돈 받고 일할 뿐이에요.”강일구는 말하면서 동료와 함께 소파를 들고 나갔다.이때 심효진이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아는 사람이야?”“응, 발렌시아 아파트에 살아서 몇 번 봤어. 평소에 대리기사를 하고 있어 태윤 씨가 두 번 취했는데 모두 저분이 집까지 바래다줬어.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는 줄은 몰랐어. 이따가 나도 명함 한 장 받아야겠어. 나중에 필요할 때 부르게. 저분 꽤 믿음직한 것 같아.”우빈의 장난감을 정리하던 전씨 할머니는 속으로 묵묵히 말했다.‘강일구는 태윤의 신변을 지키는 경호원 중 한 명인데 어찌 안 믿음직할 수 있겠어?’사람이 많으니 일도 효율적으로 진행됐다.다들 함께 나서서 하예진이 메모지를 붙인 가전제품을 전부 옮겨갔다.하예진 모자의 짐도 전부 밖으로 옮겨갔다.“띠리링...”이때 하예정의 휴대폰이 울렸다.“태윤 씨, 우리 지금 물건 옮기는 중이에요.”하예정은 남편이 비록 현장에 와서 도와줄 순 없지만 이 일을 매우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어 전화를 받자마자 상황부터 알렸다.전태윤이 다정하게 말했다.“트럭 몇 대 보냈으니까 곧 아파트 입구에 도착할 거야. 네 번호를 기사님께 드렸으니 이따가 나가서 그분들을 아파트에 들어오도록 도와줘. 처형 짐을 새집으로 실어드릴 거야. 처형 새 집에 다 넣을 수 없으면 우리 집에 일단 옮겨놔도 돼.”두 사람의 집은 충분히 크고 물건도 그다지 많지 않다.“그래요, 알았어요. 역시 태윤 씨가 꼼꼼하네요. 우린 와르르 몰려오기만 했을 뿐 짐을 옮
방안에 옮길 수 있는 물건을 전부 옮긴 후 남은 건 주형인이 산 물건들뿐이었는데 그리 많지도 않았다.다들 주형인이 산 가전제품들을 방문 앞에 내려놓고는 바닥 타일과 벽지를 허물기 시작했다.드릴 소리와 벽을 허무는 소리, 망치질하는 소리까지 한데 어우러져 완벽한 하모니를 조성했다.다만 이웃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쳐드린 것 같아 하예진 자매는 서둘러 편의점에 달려가 과일들을 산 후 사과의 뜻으로 이웃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그리고 날이 어둡기 전에 무조건 마무리한다고 약속했다.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고 하예진 자매가 이웃집 주민들과 친분도 있고 과일까지 건네며 사과하자 아무리 시끄러운 소음이라도 주민들은 잠시 참아줄 뿐이었다.집에 애들이 있는 가정은 이 소리를 못 견뎌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 산책했다.두 자매는 또 푸짐한 음식을 사서 집을 철거하는 사람들에게 드렸다.주인이 호탕하니 일꾼들도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했다.저녁 무렵 뜯을 수 있는 건 전부 뜯어냈고 못 뜯는 건 전부 짓부쉈다.“예진 씨, 쓰레기도 처리할까요?”누군가가 하예진에게 물었다.하예진은 방안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아니요, 애초에 제가 인테리어를 시작할 때에도 적잖은 돈을 들여 쓰레기를 처리했으니 이젠 이 집 사람들에게 남겨야죠. 내가 애초에 쓰레기 처리 비용으로 썼던 돈을 환불받는 셈 치죠 뭐.”하예정은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벽지도 깨끗이 뜯었고 바닥 타일은 한번 건드리면 무너져서 전부 다 짓부쉈다. 언니가 따로 쓰레기를 처리할 필요가 없다고 하니 남겨두었다가 주형인 일행이 돌아와서 처리하면 된다.“효진아, 네 말 듣길 참 잘했어. 너희 사촌오빠가 데려온 일꾼들 프로다워서 신속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했어.”심효진이 웃으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거야. 데려오길 참 잘했지?”“일꾼들에게 주는 돈 너희 사촌오빠더러 정산 다 해서 나한테 보내라고 해. 일꾼들 수당은 내가 지급해.”심효진이 대답했다.“오빠랑 다 얘기했어. 일 다 끝내면 오빠가
전씨 할머니는 한 손에 꽃다발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갓 구운 생선을 집어 전이혁에게 건넸다.“이런 작은 생선은 막 구웠을 때 먹는 게 맛있어. 식으면 맛이 없으니 따뜻할 때 먹어.”“고마워요, 할머니.”전이혁은 할머니가 건넨 생선을 받아 주저 없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먹던 중에 핸드폰을 꺼내 전우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전이혁은 전우와 나이도 비슷하고, 어릴 때부턴 전우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형제 중에서 전우와 가장 친했다. 그러니 그는 자랑하고 싶을 때는 무조건 전우를 찾았다.전이혁의 사진을 보자마자 전우는 가족 단톡방에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할머니, 낚시 가셨어요? 직접 구워 드시기까지 하네요. 많이 잡으셨어요? 저도 먹을래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이혁은 일부러 약 올리듯 답장했다.“이젠 없어. 할머니께서 나 주려고 특별히 남겨둔 거야. 그러니 네 몫은 없어. 그리고 너 진짜 생선 한 조각 먹으러 올 거야? 손해가 클 텐데?”“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할머니표 생선구이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할머니는 워낙 자유로워서 오전엔 리조트에 있다가도 오후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었으니, 큰 손자인 전태윤도 못 말릴 정도였다.부모 세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잘 해드리는 것밖에 없을 뿐, 감히 할머니를 간섭할 수 없었다. 그나마 큰 손자인 전태윤이 할머니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인데 그마저도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할머니는 그야말로 나이 든 개구쟁이였다. 할머니는 지금은 리조트에 있지만 다섯째 손자인 전우가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웃으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많이 잡지 못했어. 넷째한테 줄 몇 꼬치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먹었어. 먹고 싶으면 설 연휴 때 와서 직접 낚시해서 구워 먹어. 그래야 더 맛있지.”전우는 아쉬움으로
잠시 후, 차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아이는 고개만 돌려 살짝 보더니 다시 바비큐를 먹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왔어요.”멀리서 전이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이혁은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린 후,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풍겨오는 바비큐 냄새는 정말 좋았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 이런 날씨에는 바비큐가 최고죠.”관성의 겨울 날씨는 정말 변덕스러웠다. 어제는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추워서 할머니들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온이 확 올라와 정오 무렵에는 햇빛까지 쨍쨍하게 비추더니 약간 더운 느낌마저 들었다.관성의 사람들은 겨울에 가끔 이렇게 바비큐를 해 먹긴 하지만 보통은 휴일이 되어야 준비해서 해먹을 여유가 있었다.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생각만 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바비큐를 즐길 수 있었다.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이혁은 자신이 나중에 결혼하고 아들이 성장하면 당장 사업을 넘겨주고, 자신은 조기 은퇴해 할머니처럼 여유로운 노후를 즐길 계획이었다. 그것은 신선놀음보다 더 행복한 삶이었다.“넷째 도련님.”양씨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전이혁에게 안부를 물었다.전씨 할머니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여러 할머니도 전이혁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그들은 전씨 할머니가 무려 아홉 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막내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일곱 명의 손자는 이미 뛰어나고 유능한 인물들로 소문나 있었다. 게다가 막내 두 명은 비록 사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성적이 우수했고 앞날도 창창했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었다.전씨 가문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훌륭했고 가업도 재산도 어마어마했으니, 그야말로 할머니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은 가끔 함께 수다를 떨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상하곤 했었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그들보다 훨씬 잘 살았고, 그때부터 이미 가문에서 주름잡는 존재였다. 결국 훌륭한 어른이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전씨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소령이, 이리 와봐.”여자아이는 깡충깡충 뛰어갔다.“어르신, 닭 다리 다 구워졌어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자신에게 닭 다리를 주려고 부른 줄 알았다.전씨 할머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아직 다 안 구워졌어. 조금만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왜 양씨 아저씨의 자리를 잇고 싶다고 했지?”전씨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예뻐한다는 건 리조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전씨 가문은 몇 대째 아들만 태어났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딸을 가지길 원했었고, 그것이 안 되자 손녀를 기대해 보았지만, 매번 실망으로 마무리되었다.할머니는 이제 증손녀를 기대해 보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증손녀를 안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할머니는 종종 직원들에게 집에 여자아이가 있으면 관성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같이 생활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리조트에 있는 놀이공원에 놀러 오라고도 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여자아이들이 리조트에 놀러 오게 되면 손주며느리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한테 증손녀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양씨 아저씨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고 돈도 많이 벌잖아요. 양씨 아저씨가 사는 집도 아주 예뻐요. 저도 양씨 아저씨처럼 되고 싶어요.”그 여자아이는 겨우 세 살밖에 안 됐지만 머리가 총명하고 말도 잘해서 가끔 그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여자아이는 부모도 가르친 적이 없는 말을 스스로 내뱉곤 했었다.우빈이도 가끔 서원 리조트에 올 때마다 리조트에서 내려와 그 여자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곤 했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여자아이가 리조트에 올라와 우빈이와 함께 놀기도 했었다.“아까 양씨 아저씨가 한 말 잘 들었지? 네가 컸을 때는 양씨 아저씨는 이미 은퇴하고 다른 사람이 저 자리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이 은퇴한 다음에야 네 차례가 오게 돼. 그보
할머니는 함께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말했다.“날씨가 좀 쌀쌀하네. 우리 따뜻하게 몸도 데울 겸 한 잔씩 할까?”“어르신.”전씨 할머니가 술을 마시자고 하자 양씨 아저씨는 바로 할머니를 제지했다.“어르신 술 마시면 안 됩니다. 큰 도련님께서 아시면 또 어르신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며 저를 혼내실 거예요.”“양 집사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태윤이는 점점 자기 할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아. 온갖 걸 다 간섭하려 들어.”할머니는 손자인 전태윤이 자신을 간섭하려 든다며 투덜거렸다.그러자 함께 있는 몇몇 할머니들이 웃기 시작했다.“큰 도련님께서 어르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저희 나이에는 술도 적게 마시는 게 좋잖아요.”“과일주는 괜찮아. 양 집사, 가서 과일주 두 병 가져와. 바비큐에는 술이 있어야 제맛이지.”양씨 아저씨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리조트에 전화해서 과일주 몇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그들이 직접 잡은 생선 외에도 양씨 아저씨는 몇몇 어르신들이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바비큐용 식재료를 다양하게 준비했다. 어르신들 옆에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양씨 아저씨는 그들을 위해 과일 주스를 준비해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기분 좋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전씨 할머니는 이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따뜻한 분위기의 생활을 참 좋아했다. 게다가 내년엔 첫 증손주가 태어나니 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할머니는 자신이 구운 소시지 한 꼬치를 여자아이에게 건네주고 그 아이의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소령이 갈수록 예뻐지네. 반짝이는 눈 좀 봐. 네 엄마가 너를 ‘소령이’라고 부르는 게 딱 맞아.”그 여자아이는 소시지를 건네받으며 귀엽게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어르신.”전씨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또 뭐 먹고 싶어? 할머니가 구워줄게.”“닭 다리요.”여자아이는 전씨 할머니가 익숙한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씨 할머니에게 닭 다리를 구워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