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말해."김지유는 잠깐 생각하더니 노준서에 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허설아도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애를 써서 얻어내려 한 게 겨우 너의 업무 정보였다고?""그게 아니면 제 논문에 관심이라도 있겠어요? 서로 전공이 달라서 저희 전공 용어는 봐도 모를걸요."허설아도 노준서가 이런 짓을 해서 얻을 이득이 도무지 짐작가지 않았다.그런데 따지고 보면 àl'aube가 요즘 사소한 골칫거리를 많이 겪는 건 사실이었다.대신 대처는 빨랐다. 허설아가 알 즈음엔 이미 담당 부서에서 다 해결한 뒤였다.오히려 봄날 브랜드가 문제였다.최근 여러 도시에서 오프라인 매장이 잇달아 오픈하고 있었다. 이 기회에 권율 그룹 게임과의 콜라보 소식도 발표하고 남자 주인공별로 콜라보 목걸이와 반지, 귀걸이를 내놓았는데 불티나게 팔리곤 했다. 허설아는 고아현한테 신제품 홍보를 맡아달라고 연락했다.àl'aube의 이번 제품 수익은 전부 동물 보호 사업에 쓰일 예정이었다.하지만 고아현은 거절했다.자신의 상업적 가치도 부족하고 홍보력도 떨어져서 àl'aube가 헛 돈을 팔게 할 뿐이니 차라리 홍보능력이 있는 다른 연예인을 찾으라고 했다.허설아는 그래도 고아현이 맡아주길 고집했고 한동안 신경전이 이어졌다.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고아현이 àl'aube 홍보를 하겠다고 답하기도 전에 벌써 관련 기사가 잔뜩 새어나갔다. 고아현은 연예계를 은퇴한 상태였기에 네티즌들은 이번에 다시 홍보를 맡으면 은퇴 번복이라며 떠들어 댔다.심지어 àl'aube가 고아현과 짜고 노이즈 마케팅을 벌이는 거라며 욕하기도 했다. 돈 좀 벌려는 수작이라는 거였다.기사들을 본 허설아도 머리가 지끈거렸다.요즘 àl'aube가 워낙 잘나가다 보니 뭘 하든 늘 논란의 중심에 서곤 했다.송원영 일까지 들춰내며 양심도 없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고 욕해댄 탓에 봄날 이미지에도 영향을 주었다. 허설아가 다시 고아현한테 전화를 걸었다."홍보를 부탁하는
김지수는 방에 들어가기 전, 소파에 앉은 노현우한테 몰래 고맙다는 손짓을 했다.노현우가 부드럽게 웃었다.김지유는 김지수 방문을 닫아주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김지수가 생각이 많다는 건 김지유도 알고 있었다.그런 환경에서 자란 여자아이가 생각이 없었다면 진작 산골 마을의 암묵적인 관습에 짓밟혀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어렵게 사귄 친구도 민보영마저 전학을 가면서 요즘은 김지수와 어울릴 시간도 많지 않았다.노현우는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김지유를 바라보았다.거실에 켜져 있는 캔들 워머에는 사과향 캔들이 놓여 있어 따뜻하면서도 나른하게 빠져들고 싶은 은은한 향이 퍼졌다.김지유가 다가가 캔들 워머를 끄며 말했다."아까는 고마웠어요, 제가 배웅해 줄까요?""아니에요, 저 같은 성인 남자가 배웅까지 받을 필요가 있나요."노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밖으로 나가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김지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현관에 남자 슬리퍼 한 켤레 놔두는 건 어때요?"김지유가 고개를 저었다."아무도 안 오는데 남자 슬리퍼 놔두면 오히려 더 티 나잖아요. 저희 아파트 안전해요, 경비원이 계속 순찰 돌거든요."마침 문밖에서 순찰 중인 경비원의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노현우도 더는 고집하지 않고 말했다."그럼 먼저 갈게요, 내일 봬요.""내일 봬요."현관문을 닫은 뒤 김지유는 창가로 달려가 노현우가 건물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노현우도 뒤를 돌아보았다.다만 20층이 넘는 데다 시력이 좋지 않아 높은 곳의 실루엣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노현우가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들어서자 흰둥이라는 강아지가 다가와 다리에 몸을 비비고는 신나게 건물 안으로 뛰어갔다.이어서 할아버지가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흰둥아, 왔니."노현우는 건물 입구를 바라보다가 불이 꺼지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김지유 말처럼 주인이 있는 강아지였다. -김지유는 씻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에 온 업무 메시지를 확인했다. 머릿속에 불쑥 노준서가 했
김지유는 전혀 망설임 없었다. "유학 가고 싶으면 말해. 너 유학 보내줄 돈 있어."사과를 입에 문 김지수가 손을 뻗어 소매를 잡아당기자 김지유가 손등을 세게 쳐냈다."언니, 화내지 마. 월반하고 싶은 것도 이미 다 배워서 그런 거야. 한번 시도해봐서 나쁠 것도 없잖아. 유학도 가고 싶은데 언니 돈 쓰기는 싫어."김지수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이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언니는 나한테 이미 너무 많은 걸 해줬잖아."김지유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김지수를 노려보았다."누가 너한테 무슨 말이라도 했어? 엄마 아빠가 연락했어? 아니면 무슨 얘기라도 들은 거야?"어려서부터 워낙 많은 풍파를 겪은 두 자매는 또래보다 일찍 철이 들었고 눈치 빠른 김지유는 바로 김지수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김지수가 얼버무리며 말했다. "아이참, 엄마 아빠가 연락한 거 아니야. 날 어떻게 찾겠어. 그냥…… 그냥 언니 발목 잡기 싫어서 그래. 인터넷 보니까 사람들이 언니처럼 여동생 뒷바라지 해주면 연애도 못한대."김지유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김지수, 앞으로 휴대폰 보지 마!"고향에 있을 때 김지수는 휴대폰을 만질 기회가 거의 없었다. 동생이 바깥세상을 너무 모를까 걱정되기도 하고 연락하기도 편하도록 김지유가 휴대폰을 사줬다.그런데 이제는 인터넷을 너무 많이 봐서 어떤 정보든 걸러 듣지를 못했다.김지수는 움찔하면서도 계속 김지유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김지유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손님으로 와 있던 노현우는 소파에 앉아 자매의 다툼을 지켜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수 씨, 이름이 참 예쁘네요."김지수는 노현우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고위급 임원진 같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얌전해졌다."저희 언니가 지어준 이름이에요. 예전엔 저희 이름이 초롱이, 초원이었어요." 노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김지유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놀란 노현우는 라이터를 넣고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죄송해요."김지유도 이성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 밤 바람이 너무 차기도 했고 정말 마음이 흔들린 것도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대외적인 가면인지, 가면 뒤의 진짜 모습인지 알고 싶었다.노현우는 입을 뗐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손을 뻗어 김지유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노현우는 김지유의 지난 짝사랑 얘기는 알고 싶지 않았다.다만 지금 흘리는 눈물이 누구 때문인지는 알고 싶었다.권지헌 때문일까?그때 마침 문을 연 김지수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말했다."언니 열쇠 안 챙겼어? 들어와."김지유는 서둘러 얼굴을 닦으며 김지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했다. 노현우도 뒤따라 들어가 수도 밸브를 잠그고 새 수도관으로 교체한 뒤 다시 물을 틀어보니 과연 물이 새지 않았다."오래된 수도관은 나가는 길에 버릴 테니 일찍 쉬어요."김지유는 좀 멋쩍어졌다."옷이 더러워졌는데 벗어놓고 가면 제가 드라이클리닝 맡길까요?"노현우가 안에 받쳐 입은 셔츠에 먼지가 잔뜩 묻어 지저분해져 있었다. 이 시간에 집까지 끌고와서 수도관 수리를 부탁한 것도 모자라 비싸 보이는 옷까지 더럽혔다는 생각에 김지유는 더 미안해졌다.노현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럼 저더러 뭘 입고 돌아가라는 거예요?"봄이라 셔츠에 얇은 코트 하나만 걸치고 있는데 셔츠를 벗으라니, 그럼 코트만 입고 가라는 소리야?길에서 다른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변태라도 나타났다고 생각하기 뻔했다. 김지유도 그건 아니다 싶었는지 서둘러 말했다."그럼 내일 저한테 줘요, 세탁해 줄게요!"노현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김지유 씨," 노현우가 보기 드물게 웃으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내일 더러워진 셔츠를 지유 씨한테 가져다주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게다가 셔츠 한 벌일 뿐인데 제가 지유 씨한테 세탁 맡기겠어요?" 김지유가 빨래 해주는 가사 도우미도 아니고 그걸 당연
"바꿀게요, 당장 바꿀게요. 지금 바로 사러 가요!"다른 건 몰라도 재물운에 영향 준다면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김지유는 외투를 걸치고 김지수한테 당부한 뒤 곧장 집을 나섰다.단지 밖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철물점이 하나 있었다. 노현우가 사이즈 사진을 찍어놔서 바로 맞는 수도관을 고를 수 있었기에 김지유는 서둘러 QR코드를 스캔해 결제했다.노현우가 힘들게 자기 집 물건을 수리해 주는데 돈까지 쓰게 할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주머니를 더듬던 김지유는 그제야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열쇠를 챙기지 않은 걸 깨달았다.문을 두드려도 김지수는 들리지 않는 듯했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샤워 중인 듯했다.김지유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지수 샤워하는 데 삼십 분은 걸리는데… 이거 저 주시고 먼저 가보세요, 제가 고쳐볼게요."김지유가 산 집은 한 층에 두 세대가 사는 구조였다.옆집은 아직 인테리어 공사 전이라 건축 자재가 복도에 잔뜩 쌓여 있었다.노현우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괜한 걱정이 아니라 인터넷에도 인테리어를 하지 않은 빈집에 이따금 갈 곳 없는 노숙자들이 들어가 지낸다는 기사가 종종 올라오곤 했다.김지유와 김지수, 여자 둘만 있는 집이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안심할 수 없었다.노현우는 손으로 담뱃갑을 더듬다가 라이터를 쥐고 달칵달칵 불을 켰다. "그냥 가버리고 지유 씨 혼자 문 앞에서 기다리게 하라고요? 그럼 나중에 밥 먹자고 해도 다신 얼굴 못 보겠는데요."김지유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바람 부는 방향을 내어주었다."담배 피우실래요?""아니요."김지유는 김지수한테 샤워 끝나면 문을 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꼭대기 층은 평소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서 이 시간엔 이따금 순찰 도는 경비원 말고는 김지유와 노현우 둘뿐이었다.노현우는 권지헌보다 키는 살짝 작았지만 다부진 근육질 몸매였다.보기만 해도 든든한 타입이었다.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노현우가 손에 든 라이터 불꽃이 일렁거리며 얼굴을 비출 때마다 짙은 이목구비에서 왠지 모를
노현우는 김지유네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김지유가 말을 꺼냈다. "올라가서 잠깐 앉았다 가실래요?""아니에요, 내일 봬요."성인 사이에서 내일 보자는 말은 암묵적인 약속이나 다름없었다.김지유가 고집을 부렸다."사실 저희 집 수도관이 고장 나서 그래요. 방금 동생이 집에 물이 샌다고 하던데 올라가서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노현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차 옆에 서 있는 김지유는 단아하고 자태가 고왔다. 아직 학교를 다녀서인지 왠지 모를 편안하면서도 지적인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같이 있으면서 가장 편한 건 뭘 하든 늘 솔직하고 직설적이며 빙빙 돌려 말하거나 숨기지 않는다는 거였다.노현우가 손등으로 김지유를 살짝 밀며 말했다."뒤쪽으로 서 있어요, 부딪히지 않게."노현우는 차를 후진해 주차한 뒤 차에서 내렸다.김지유가 산 집은 크지 않았지만 단지 환경은 괜찮은 편이었다. 녹화율이 높아 들어서자마자 향긋한 재스민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노현우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단지 괜찮네요, 대출은 얼마나 돼요?""주택청약 적금으로 해결돼요. 다만 입주가 급해서 인테리어는 대충 했으니 올라가셔서 흉보지 마세요."노현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그리고 김지유가 메고 있던 곰돌이 가방을 받아 한 손에 든 채 앞장서라는 손짓을 했다."앞장 서요."어둑어둑한 데다 가로등 불빛까지 어스름한 길가 나무가 살짝 흔들렸다. 길고양이나 강아지가 숨어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람일 수도 있었기에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노현우는 여자인 김지유를 따라가며 자연스레 뒤를 지켜주었다. 수풀이 흔들리더니 안에서 얼룩 강아지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고개를 돌린 김지유는 바로 알아본 눈치였다."흰둥이예요. 근처에 할아버지가 키우시는 강아지인데 아마 친구 찾아왔을 거예요." 김지유는 노현우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김지유의 집은 꼭대기 층인 24층이었다.엘리베이터는 금방 위층에 도착했다. 열쇠를 꽂자마자 김지수가 먼저 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