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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그림자가 빛을 삼킬 때

Penulis: 데이지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4-07 09:37:27

낮이 다 지나가고, 해가 바다 끝으로 내려앉았다.

‘린꽃방’ 안엔 따뜻한 오렌지색 조명이 켜져 있었다.

작은 라디오에서 피아노 소리가 잔잔히 흘렀다.

수진은 꽃다발을 묶던 손을 잠시 멈추고,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엔 강혁이 서 있었다.

그의 옷자락은 젖어 있었고, 손엔 고등어 상자가 들려 있었다.

“낚시는 오늘도 실패?”

그녀가 미소 지었다.

“아니요. 성공이에요. 잡은 게 없다는 건, 오늘은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 말에 수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무심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 철학적 어부가 다 있네요.”

“누군가 말했죠. 사람은 죽이지 않아야 사랑할 수 있다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서로의 호흡이 들렸다.

그냥 평범한 대화처럼 들렸지만, 서로는 그 말의 밑바닥을 알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문종이 가볍게 흔들렸다. 서여진이었다.

짙은 베이지 코트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묶은 채 들어왔다.

“아, 여기 계셨네요.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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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여친은 린자오밍!   END. 바람은 바다로 흐르고

    새벽이었다.바람은 멎었지만, 어딘가에서 오래된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지하실의 습한 공기를 흔들었다.여진이 남긴 파일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시작됐다.“너희가 믿는 어떤 진실도, 이미 누군가의 거짓말 위에 세워져 있다.”수진은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았다.그 문장은 죽은 사람의 목소리처럼 차갑게 번졌다.그녀의 눈동자에 희미한 떨림이 스쳤다.파일은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었다.흑거미 조직 내부의 통신 기록,국정원이 삭제한 실험 아카이브,그리고 ‘LIN PROJECT’의 원본 설계도.거기엔 짧은 문구가 붉은색으로 강조돼 있었다.LZM-01: 김수진LZM-02: 김수민강혁의 숨이 짧게 멎었다.“……02가 네 언니였어.”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처럼 눈을 감았다.“우릴 만들었어.”그녀가 낮게 말했다.“목소리를 훔치는 기술, 기억을 조작하는 방식…우린 누군가가 설계한 ‘이름’이었어.”백사는 이를 악물고 모니터를 내리쳤다.“그럼 이 모든 게”“배신구의 작품이지.”강혁이 끝맺었다.그리고 마지막 화면이 떠올랐다.좌표: 해남 폐등대LZM KEY – ACCESS GRANTED그들은 동시에 시선을 들었다.오늘 밤, 끝이 열린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폐등대는 바람의 시체처럼 서 있었다.유리창은 오래전 깨졌고, 계단은 녹이 슬어 있었다.바다는 잿빛으로 일렁였고, 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등대 아래, 숨겨진 문이 있었다.문 너머는 어둡고 길었다.마치 오래된 진실이 스스로를 숨기기 위해 만든 뱃속 같았다.배신구는 그 안쪽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얼굴로.“왔군.”백사가 총을 들이밀었다.그러나 배신구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너희는 아직 모르지? 왜 내가 수민을 죽여야 했는지.”수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수민은 LZM-02였어. 네가 LZM-01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리고… 널 지키려 반역을 선택했다.”그 한 문장이 수진의 가슴을 칼처럼 갈랐다

  • 내 여친은 린자오밍!   265. 공백의 증언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식어갈 무렵, 수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첫 번째 자가 사라진 자리엔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피도, 체온도, 생의 마지막 경련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마치 누군가가 시간이 지나기 전에 서둘러 지워버린 흔적처럼,그 자리는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빈자리는 언제나 말이 많았다.침묵보다 많은 것을 말하는 구멍이었고 수진은 그 침묵의 모양을 오래 바라보았다.“나를… 지켜보고 있었나 봐.”그녀가 낮게 말했다.“언니 얼굴을 한 그 아이를 누가 만들었든, 그들은 내가 어디까지 갈지 알고 있었던 거지.”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지만 말끝이 희미하게 마른 숨에 잠겼다.강혁은 몇 걸음 뒤에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무릎을 굽혀 그 빈자리에 손끝을 가져갔다. 차갑다.차갑다는 감각조차 빠르게 사라진다.“흔적이 너무 깨끗해.”그가 중얼거렸다.“흑거미도, 국정원도… 이런 방식은 안 써. 이건… 당신 언니 사건 이후로 우리가 놓친 세력이 있다는 뜻이야.”수진은 그의 말에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그가 말한 ‘놓친 세력’이라는 단어에 수민의 그림자를 보았다.그림자는 오래전 폭설 속에서 사라진 언니의 모습을 따라갔고 그 뒤를 쫓는 자신의 뒷모습까지 포개어졌다.“배신구가 나한테 한 말이 있어.”수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꺼냈다.“언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은 배신구에게 바로 가지 않았다고 했어.그 위에 누가 있었다고… 그 사람한테 먼저 보고가 들어갔다고.”강혁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그러나 놀라움보다는 이제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에 가까웠다.“그러니까 배신구도 꼭대기가 아니었다는 거지.”수진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끄덕임은 결심의 움직임이 아니었다.아직 반쯤은 상처였고, 나머지 반만 겨우 수면 위로 올라온 진실이었다.“난… 언니가 죽은 줄 알았던 밤부터 배신구만 보면 됐다고 생각했어.” 그녀가 말했다.“그 사람만 겨냥하면 모든 게 끝난다고… 그게 내 복수의 끝이라고… 그

  • 내 여친은 린자오밍!   264. 지워진 흔적

    바닥이 흔들린 뒤, 방 안에는 짧고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먼지가 흩어지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모든 공기가 갑자기 가벼워졌다.그러나 그 가벼움은 해방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차갑게 빠져나간 무게 때문이었다.봉인이 깨지자, 방 안의 온도는 서서히 떨어졌고첫 번째 자는 마치 실을 끊은 인형처럼 가볍게 무너졌다.그 움직임엔 생명도, 의지도 없었다.마지막까지도 ‘언니의 얼굴을 가진 껍데기’였다는 사실이 잔혹할 만큼 명확해졌다.수진은 그 모습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무너져가는 형체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늘어나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눈앞이 흐려진 것도 아닌데 경계가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손끝은 아직도 첫 번째 자의 팔을 잡았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고손바닥에 남아 있는 ‘가벼움’이 오히려 무거운 죄처럼 느껴졌다.강혁이 먼저 다가왔다.몸을 숙여 수진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그의 움직임은아까의 전투에서 보여줬던 속도와 전혀 다른 느리고 조심스러운 것이었다.“수진.”그는 그 한 단어를 부르며 숨을 아주 천천히 들이켰다.그녀의 눈이 흔들렸다.흔들린 이유는 방금 전의 폭력도, 봉인의 붕괴도 아니었다.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안도감이, 미안함이 함께 묻혀 있었기 때문이었다.수진은 떨림을 억누르던 입술을 조금 씹었다.“괜찮아.”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조용했다.“다 끝났어.”“끝난 게 아니야.”강혁은 고개를 저었다.“네가 혼자 감당하는 방식으로는… 아직 끝이 아니야.”그 말은 그녀의 가슴에 조용히 박혔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내리깔았지만시선이 떨어진 곳에는 첫 번째 자의 몸이 점점 흐릿해지는 흔적이 있었다.강혁이 그걸 보고 말을 멈췄다.수진도 고개를 들어 살폈다.첫 번째 자의 몸은,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고 있었다.피도, 살도, 무게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빛이 빠져나가듯 처음부터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이것은 흑거미의 기술도, 국정원의

  • 내 여친은 린자오밍!   263. 첫 번째 자와의 대면

    첫 번째 자가 바닥을 가르며 뛰어드는 순간, 방의 공기가 단숨에 찢어졌다.금속이 긁히는 소리는 없었다.살이 공기를 헤치며 나아가는 날것의 속도만이 귀를 때렸다.강혁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몸을 낮췄다.그의 어깨와 팔 근육이 순간적으로 수축하면서첫 번째 자의 팔꿈치가 지나가는 궤적을 비켜냈다.팔꿈치 하나에 함부로 스친다면, 골절 정도가 아니라 관절 전체가 뒤틀려버릴 정도의 힘이었다.수진은 뒤에서 숨을 들이마셨다.정확하게 말하면, 들이마신 게 아니라 숨이 ‘절로’ 끊겼다.오랜 시간 몸으로 기억해버린 공포흑거미가 키운 아이들이 가진 공격 방식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알아본다.첫 번째 자의 발끝이 바닥을 스치며 강혁 쪽으로 돌아섰다.금속 같은 무게를 가진 움직임. 그러나 소리는 없다.소리 없는 움직임일수록 치명적인 훈련을 견딘 아이들이었다.강혁은 공격을 막지 않았다.대신 ‘흐르는 방향’에 몸을 맡겨 첫 번째 자의 깊이를 읽었다.흑거미의 방식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수진도, 강혁도.직접 막는 순간, 죽는다.부딪히는 힘이 아니라‘흐름’을 읽어야 한다.첫 번째 자가 두 번째로 공격을 내리찍었다.이번엔 손날이었다.목을 자르는 각도. 흑거미가 심장 다음으로 즐겨 노리던 부위.강혁은 뒤로 내딛으며 팔목을 피하려 했지만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손날이 스친 자리에서 피가 아주 얇게, 필름처럼 번졌다.“강혁!”수진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감정이 억눌려 있는 목소리.이름을 부르는 그 짧은 울림만으로 어린 연변 사투리가 조금 섞여 있었다.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몸을 비틀며 첫 번째 자의 손목을 잡았다.그러나 잡는 순간 깨달았다.힘이 너무 가볍다.사람의 팔을 잡은 느낌이 아니라깃털이 붙은 금속 막대를 잡은 것 같은 비현실적인 공허함.수진도 그걸 느낀 듯 숨이 멎은 얼굴로 중얼거렸다.“…몸이… 비어 있다…”바로 그 순간 첫 번째 자가 몸을 비틀어 강혁의 손을 빠져나갔다.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가볍게 돌아서 강혁의 중

  • 내 여친은 린자오밍!   262. 잔인한 모조품

    강혁이 앞을 막아선 순간, 방 안의 온도는 더 낮아진 듯했다.그 차가움은 봉인의 압박 때문이 아니었다.수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일어난 급격한 변온,마치 심장이 잘못된 기억을 찾아 맥박을 얼려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수민의 얼굴을 한 그 존재는 미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수진을 바라보았다.그 눈동자는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았다.그저 ‘남겨진 껍질의 눈’처럼 조용히 흔들릴 뿐이었다.그런데 바로 그 침묵이 수진의 폐 안쪽을 파고들어 숨을 막았다.“자오밍.”그 존재는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수진은 무릎이 풀릴 것 같은 순간, 강혁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힘이 아니라 온기였다.지금 이 방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수진. 네가 알고 있는 건 기억이고, 지금 저기 있는 건… 흑거미가 만든 윤곽이야.”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그러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수진의 시야가 흔들렸다.눈앞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얼굴이 과거의 어느 겨울밤과 겹쳐졌다.눈 속에 묻혀 있던 자매. 언니의 손.“자오밍, 언니한테 와.”그 목소리. 그 부름. 그 따뜻함을 가장한 잔인한 모조품.수진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 나갔다.그러나 강혁이 그녀를 붙잡아 멈추게 했다.“가지 마.”그는 속삭였지만, 그 속삭임은 명령 같았다.“저건 너를 무너뜨리려고 만든 거야. 네가 언니를 잃은 그 순간을 다시 꺼내서, 네 마음을 갈라버리려는.”수진의 목 안에서 작은 숨이 튀어나왔다.“강혁… 내가… 언니 이름을… 들었어.”“그래. 너만 아는 거니까 흑거미가 더 노린 거야.”강혁이 수진의 눈을 바라보았다.“흑거미가 그걸 알아냈다는 건… 네 마음을 가장 아픈 데서 찌르려고 했다는 뜻이야.”그 존재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수민의 얼굴. 그러나 수민에게 단 한 번도 없었던 ‘감정의 공백’이 있었다.그 공백이 수진의 심장을 칼처럼 찔렀다.“자오밍.”이번엔 한발 더 다가와서 불렀다.수민의 입 모양, 수민의 톤, 수민의 미세한 호

  • 내 여친은 린자오밍!   261. 흑거미의 첫 번째 자(者)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울렸다.진동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그러나 ‘몸이 먼저 느끼는 종류의 진동’이었다.지하 흙층이 아닌, 철골이 흔들릴 때 나는 낯선 떨림.수진은 귀 아래까지 심장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내뱉으면, 그 순간 들이킨 숨의 떨림이 자신의 공포를 그대로 드러낼 것 같아서였다.강혁은 바닥 중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그의 눈동자는 작은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는 위험한 집중의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수진 뒤에 서 있는 그 여자는 이미 손등에 핏기가 모두 빠져 있었다.수진이 어깨를 붙잡아 겨우 버티게 했지만봉인의 압박과 천장 위에서 내려오는 ‘무언가의 존재’가 그녀의 체온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있었다.바닥 한가운데가 아주 조금 사람 한 명의 무게보다 가볍게 하지만 분명히 눌렸다.수진이 숨을 멈췄다.강혁은 말을 잃었다.그리고 순간, 천장에서 떨어지는 건 그림자도, 사람도, 발걸음도 아니었다.기척이었다.흑거미가 키운 자들은 절대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기척을 먼저 내고, 다음에 발을 내딛는다.그 기척은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만 살아온 존재들이 가진 형체 없는 그림자의 느낌이었다.바닥이 다시 눌렸다.그리고 세 번째 진동이 왔다.그 순간 수진은 깨달았다.“…하나가 아니야.”강혁이 미세하게 머리를 돌렸다.“뭐가?”“여긴 ‘한 명’만 내려오는 구조가 아니야.흑거미는 늘 첫 번째 자를 보낼 때 그녀와 짝을 이루는 ‘그림자’를 함께 붙여.”그 말은 흑거미의 방식에서 거의 예언이나 다름없었다.첫 번째 자는 정면을 맡고, 그림자는 뒤에서 심장을 노린다.강혁은 순간 숨을 가볍게 들이켰다.“그럼… 벌써 둘이 내려왔다는 건가.”수진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그녀의 눈동자에 아주 작게, 금속판이 들리는 틈이 보였다.그리고 그 틈 사이로 ‘눈’이 있었다.사람의 눈이라 부르기엔 너무 차갑고,짐승의 눈이라 부르기엔 너무 조용한 그런 눈이었다.수진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그 눈은 과거의 자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76. 흔들림의 밤

    강혁은 잠시 말문이 막힌 채 수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나누던 대화의 흐름이 잠시 멈춘 듯했지만, 그 침묵조차도 어쩐지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그는 그 안에서 오히려 무언가 더 깊은 결을 찾으려는 듯 표정을 정리했다. 수진은 앞치마 끈을 느슨하게 매만지며, 마치 방금까지 나누었던 말들이 그녀의 손끝에 얽혀 남아 있는 것처럼 잠시 시선을 떨구다가도 다시금 강혁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전과 다르지 않게 차분했고, 낯설지만 기묘하게 가까운 온기를 품고 있었다.“꽃 말이 참 이상해요.”강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75. 선 위에서 시작된 균열

    다음 날 아침, 해남의 공기는 밤새 내린 비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지붕 끝에 걸린 물방울들이 아침 햇빛을 받아 잠시 반짝였고, 그 빛은 오래 잠들었던 마을의 골목을 천천히 깨웠다. 그러나 강혁에게 그 아침은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흐려진 채로 다가왔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깨어 난창 너머의 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잔잔했고, 바다는 어제보다 조용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더 많은 소리가 겹치고 흘렀다.여진의 마지막 표정, 깊게 젖은 수진의 눈빛, 그리고 말하지 못한 비밀이 서로 엉켜 마치 조용한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61. 숨겨진 자리에서, 진실은 조금씩 모양을 드러낸다

    밤 깊은 바다의 잔향이 두 사람을 조용히 감싸고 사라진 뒤, 수진은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닫지 않은 채 잠시 멈춰 섰다. 좁은 방을 비추는 전등의 불빛은 그동안 그녀가 모아두었던 메모와 지도를 비추고 있었고, 그녀는 그 빛 사이로 서늘한 바람 한 줄기를 끌어들이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방은 그녀의 ‘린자오밍’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작은 피난처였지만, 동시에 복수를 향한 긴 문장들이 쌓여 있던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 문장들은 다른 의미로 다시 이어져야 했다. 더 이상 혼자만의 문장으로는 남을 수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51. 그 남자의 그림자

    해남의 겨울은 다시 길어지고 있었다.바람은 차가웠고, 파도는 잿빛으로 흩어졌다.강혁은 새벽 어둠 속에서 홀로 배를 손질하고 있었다.손끝에 닿는 밧줄의 감촉, 기름 냄새, 젖은 철의 냉기 이 모든 게 오히려 익숙했다.그는 평생 이런 냄새 속에서 살았다.피와 물, 그 사이의 냄새.수진이 잠시 서울로 올라갔다.‘희망복원재단’에서 공식 자문으로 참여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떠났다.“잠깐이면 돼요. 돌아오면 다시 꽃을 심을 거예요.”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불안이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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