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친은 린자오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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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당신의 인생을 훔친 사람, 바로 나예요.” 전화 한 통으로 사람을 울리고, 목소리 하나로 세상을 속였던 여자 - 린자오밍. 그녀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전설이자, 죽은 언니의 복수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땅끝마을 해남, 꽃집 ‘린’을 열고 평범한 얼굴로 살아가는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 전직 국정원 요원, 강혁. 그는 과거의 작전에서 그녀의 언니를 잃게 만든 남자였다. 전화선 끝에 남겨진 거짓말, 그리고 그 거짓 속에서 피어난 진짜 사랑. “당신 목소리… 어디선가 들은 것 같네요.” 사랑이었을까, 복수였을까. 그녀의 이름은 김수진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기억한 건… 린자오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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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فصل الأول

1. 폭설의 밤

하늘은 이미 죽은 듯 어두웠다.

바람은 눈을 실어 나르며 거리를 할퀴고,

흰 눈송이들은 마치 바다의 거품처럼 떠다녔다.

그 속을 두 아이가 걷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매라 부르고, 누군가는 고아라 불렀다.

그들에게는 불릴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언니… 손 시렵다니.”

작은 아이가 흐느끼듯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수진.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얼굴엔  추위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언니 수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동생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조금만 더 가. 저기 불빛 보이지?”

“응… 눈이 너무 와서 잘 안 보인다니.”

“괜찮아. 거기까지만 가면 따뜻해질 거야.”

두 사람의 발밑엔 새하얀 눈이 밟힐 때마다  눅눅한 소리를 냈다.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작은 불빛 하나가, 그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처럼 보였다.

그 불빛은 낡은 건물의 2층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 앞에는 오래된 간판, 글자 반이 지워져 있었고,

‘다방(茶房)’이라 적힌 표지판만 간신히 남아 있었다.

수민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낮고, 담배 연기 같은 목소리가 안에서 울렸다.

수민은 작게 대답했다.

“우리… 잘 곳을 찾고 있다니.”

잠시의 정적.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눈발이 안으로 쏟아지고,

그 안에서 검은 모피코트를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기엔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미소를 지었다.

입술은 붉게 칠해져 있었고, 눈동자는 어둠처럼 깊었다.

“애들이 왜 이런 데서 이러고 다녀?”

그녀의 말투엔 부드러움과 위협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수민은 고개를 숙였다.

“춥다니… 하루만이라도… 잘 데가 필요하다니.”

여인은 두 자매를 한 번 훑어보았다.

그 시선은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물건의 가격을 매기는 듯했다.

“이리 들어와. 밖에 있으면 얼어 죽어.”

그녀는 문을 더 열었다.

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안의 냄새는 달콤했으나, 어딘가 이상했다.

향수와 피, 그리고 오래된 철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수진의 눈에는 두려움이, 수민의 눈에는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비쳤다.

그리고, 문턱을 넘었다.

실내는 따뜻했다.

벽난로엔 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이미 여러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생기가 없었다.

모두 같은 회색 옷을 입고, 손에는 똑같은 노트를 쥐고 있었다.

“여기 아이들 다 너희처럼 길에서 주워온 애들이야.”

여인이 말했다.

“여기선 굶지 않아. 공부도 시켜주지.”

“공부요?” 

수민이 눈을 반짝였다.

“그래. 사람을 설득하는 법, 목소리를 쓰는 법.”

여인은 의자에 앉으며 담배를 피웠다.

“전화만 잘해도 세상은 널 믿게 돼. 그게 돈이야.”

수진은 고개를 기울였다.

“전화…?”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목소리로 세상을 바꾸는 일이지.”

그녀는 수진의 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너 목소리 예쁘네. 사람을 속이기에 딱 좋아.”

수진의 몸이 굳었다.

언니는 그 손을 밀치며 말했다.

“우리 그냥 나갈게요.”

“그래?”

여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럼 나가보지. 밖은 영하 스무 도야.”

눈발이 문틈으로 스며들며 바닥에 녹았다.

그 순간, 수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여인은 그 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밥은 먹고 가. 세상은 배고픈 자한테는 기회를 안 주니까.”

그날 밤, 그들은 난로 옆에서 따뜻한 밥을 먹었다.

하지만 밥의 맛은 이상했다. 달고, 쓰고, 씁쓸했다.

잠들기 전, 수진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니, 여긴 이상하다니.”

“그래도… 추위보단 낫잖아.”

“그 여자는… 웃을 때 눈이 안 웃는다니.”

“쉬자, 수진아. 내일은 좀 나을 거야.”

그러나 그 다음날,

아이들은 모두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문장을 외쳤다.

“고객님, 안녕하세요. ○○은행입니다.

당신의 계좌에서 이상 거래가 발견되어 연락드렸습니다.”

그때, 수진은 아직 몰랐다.

그 문장이 평생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다닐 줄은.

밤이 다시 내렸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흑거미라 불린 여인은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끝엔 불 꺼진 담배 한 개비가 있었다.

“수진이라… 목소리가 참 맑아.”

그녀가 중얼거렸다.

“거짓말은… 깨끗한 목소리로 해야 사람들이 속지.”

그 말은 마치 저주처럼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수진은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

“여보세요?”

수진은 손을 떨며 말했다.

“고객님… 이상 거래가 발생했습니다.”

그때, 언니가 문밖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인지, 눈발인지 모를 물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수진아…”

“언니…”

“그 말… 진짜로 믿게 만들었니?”

수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응… 그 사람이 울었다니.”

그 밤, 자매는 서로 다른 꿈을 꿨다.

수민은 ‘이곳을 떠나는 꿈’을, 수진은 ‘거짓말로라도 살아남는 꿈’을.

눈은 계속 내렸다.

그들의 세상은 이미 하얗게, 너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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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폭설의 밤
하늘은 이미 죽은 듯 어두웠다.바람은 눈을 실어 나르며 거리를 할퀴고,흰 눈송이들은 마치 바다의 거품처럼 떠다녔다.그 속을 두 아이가 걷고 있었다.누군가는 자매라 부르고, 누군가는 고아라 불렀다.그들에게는 불릴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언니… 손 시렵다니.”작은 아이가 흐느끼듯 말했다.그녀의 이름은 수진.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얼굴엔 추위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언니 수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동생의 손을 더 꼭 잡았다.“조금만 더 가. 저기 불빛 보이지?”“응… 눈이 너무 와서 잘 안 보인다니.”“괜찮아. 거기까지만 가면 따뜻해질 거야.”두 사람의 발밑엔 새하얀 눈이 밟힐 때마다 눅눅한 소리를 냈다.허공에 떠 있는 듯한 작은 불빛 하나가, 그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처럼 보였다.그 불빛은 낡은 건물의 2층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문 앞에는 오래된 간판, 글자 반이 지워져 있었고,‘다방(茶房)’이라 적힌 표지판만 간신히 남아 있었다.수민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누구요?”낮고, 담배 연기 같은 목소리가 안에서 울렸다.수민은 작게 대답했다.“우리… 잘 곳을 찾고 있다니.”잠시의 정적.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눈발이 안으로 쏟아지고, 그 안에서 검은 모피코트를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그녀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기엔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미소를 지었다.입술은 붉게 칠해져 있었고, 눈동자는 어둠처럼 깊었다.“애들이 왜 이런 데서 이러고 다녀?”그녀의 말투엔 부드러움과 위협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수민은 고개를 숙였다.“춥다니… 하루만이라도… 잘 데가 필요하다니.”여인은 두 자매를 한 번 훑어보았다.그 시선은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물건의 가격을 매기는 듯했다.“이리 들어와. 밖에 있으면 얼어 죽어.”그녀는 문을 더 열었다.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왔다.하지만 그 안의 냄새는 달콤했으나, 어딘가 이상했다.향수와 피, 그리고 오래된 철 냄새가 섞여 있었다.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봤다.수진의 눈에는 두려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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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짓의 온도, 목소리의 무기
눈이 멎은 새벽, 창문에 성에가 피어 있었다.수진은 이불 속에서 언니의 손을 더듬었다. 따뜻해야 할 손끝은 이미 식어 있었다.“언니…”속삭이자 수민이 눈을 떴다.“깼어?”“언니, 여긴 진짜 학교 같은 데냐니?”수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 대신, 벽 쪽을 바라봤다.벽에는 어제 봤던 붉은 문장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거짓은 기술이다. 진실은 약점이다.”그 아래엔 작고 낡은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철컥, 잡음과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일어나라. 훈련 시작이다.”아이들은 벌떡 일어났다.아직 어린 수진은 무심코 언니를 올려다봤다.“훈련이라니… 공부도 안 하고 왜 훈련이냐니?”“몰라. 일단 따라가자.”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어제의 여인이 나타났다.모피 대신 검은 정장을 입은 그녀의 실루엣은 여전히 섬세하고 위협적이었다.“좋은 아침이네, 애들.”그녀는 미소 지으며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이제부터 넌 목소리로 돈을 버는 법을 배운다. 살아남는 법이지.”수민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이건 학교가 아니죠?”여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학교? 아니. 세상보다 솔직한 곳이지. 여기선 머리로 사는 게 아니라, 혀로 산다.”그녀가 손짓하자, 한 남자가 커다란 상자를 끌고 들어왔다. 상자 안에는 전화기 수십 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이게 너희 교과서다.”그녀는 전화기를 하나 들어 수진의 앞에 내려놓았다.“말을 해봐. 아무 말이나.”“아무 말이라니… 무섭다니.”“좋아. 그 말, 지금 네 감정 그대로 들렸다.”여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하지만 그 감정을 버려야 한다. 거짓말은 감정이 섞이면 티가 나.”그녀는 수민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수민.”“너는 나쁘지 않네. 눈이 사람을 의심하는 눈이야. 그건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지.”그 순간, 스피커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자, 훈련 시작.”아이들이 동시에 수화기를 들었다.그녀는 모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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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첫 수업
새벽 여섯 시. 침대 머리맡의 스피커가 울렸다.금속성의 벨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기상. 훈련생 전원은 5분 내 1층 집합.”창문 밖은 아직 어둡고, 공기에는 먼지와 탄내가 섞여 있었다.수진은 몸을 일으키며 이불 끝을 움켜쥐었다.방 안은 적막했지만, 바닥 밑에서 들려오는 진동이 공간을 미세하게 흔들고 있었다.어제 밤 새벽 내내 전화 벨소리가 울렸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 소리가 들렸다.그 웃음은 인간의 웃음이 아니었다.언니 수민이 무릎을 꿇은 채 양말을 신었다.“빨리 움직이자. 늦으면 맞는다.”수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문을 열자 차가운 냉기가 밀려들었다.긴 복도 끝에는 붉은 네온 불빛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아이들이 모두 줄지어 서 있었다.남녀의 구분도, 나이의 차이도 희미했다.모두 똑같은 회색 옷, 검은 머리, 그리고 말이 없었다.흑거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그녀의 발소리는 힐이 아닌 군화의 소리를 닮아 있었다.“좋은 아침이네, 애들.”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미소를 지었다.“오늘은 ‘목소리의 기술’을 배운다. 네가 가진 건 그거 하나뿐이니까.”그녀가 손짓하자 조교들이 전화기와 헤드셋이 달린 기계를 책상마다 놓기 시작했다.벽에는 스피커가 달려 있었고, 그 위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목소리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없다.”“이게 오늘 교실이다.”그녀는 수민의 눈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누구든 처음엔 거짓말을 못한다. 하지만 굶어보면 배운다.살기 위해선 진심을 버려야 한다.”조교가 수진 앞에 헤드셋을 씌워주었다.귀에 밀착된 차가운 금속 감촉이 낯설었다.그녀는 작게 숨을 삼켰다. 옆자리 아이가 말했다.“오늘 첫 수업이래. 목소리 평가부터 한대.”“목소리… 평가?”“응. 얼마나 믿기 쉬운가, 얼마나 따뜻한가, 얼마나 돈 냄새가 나는가.”앞에 서 있던 여교관이 마이크를 잡았다.“좋아. 각자 자기 목소리를 들어보자.”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수진의 귀에 자기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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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처로 피어나는 꽃
바람이 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 안의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다.훈련소의 하루는 늘 같았다.새벽 여섯 시, 기상. 일곱 시, 발음 교정. 아홉 시, 실습 통화.점심은 고작 죽 한 그릇, 저녁은 간장국물뿐이었다.수민은 그 일정이 하루, 이틀, 열흘을 지나며 하나의 형벌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잠을 자도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고객님, 걱정하지 마세요.”“네, 안전하게 처리하겠습니다.”매일같이 들려오는 아이들의 말.그 속에는 생명도, 감정도 없었다.모두 복제된 목소리였다.어느 날 오후, 훈련실의 스피커에서 잡음이 섞인 음악이 흘러나왔다.그건 흑거미가 입장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신호음이었다.아이들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녀는 천천히 걸어왔다.오늘은 검은 정장이 아니라, 하얀 셔츠에 긴 트렌치를 걸치고 있었다.그녀의 향이 공기 속으로 스며들며, 모든 숨을 묶어두었다.“오늘은 ‘감정 제어’ 수업이다.”그녀의 말 한마디에 공간의 온도가 떨어졌다.“사람을 속이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사람이 널 믿게 만드는 감정을 조절하는 거다.”조교가 각 아이 앞에 노트북을 내려놓았다.화면에는 실시간 통화 시뮬레이션이 뜨고 있었다.“오늘은 상대방이 울 수도 있다. 그럴 때 네가 울면 실패야.”수민은 고개를 들었다.“왜요? 진심으로 미안하면 안 되나요?”흑거미의 시선이 그녀를 꿰뚫었다.“진심은 약점이라고 말했을 텐데.”“하지만, 그건 사람의 마음이잖아요.”“마음?” 그녀가 웃었다.“여긴 마음이 아니라 시장이야.”수민은 입술을 물었다.“그럼, 우린 뭐예요?”“상품이지.”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사람들은 상품에 감정을 원하지 않아. 결과만 원해.”그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수민은 움직이지 않았다.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분노가 스쳤다.“그럼, 전 그 상품에서 빠질래요.”순간 공기가 멈췄다.흑거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녀의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아이들의 몸이 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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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달콤한 거짓말
새벽의 공기는 무겁고 끈적했다.훈련소의 창문은 늘 닫혀 있었고, 바람은 커녕 소리조차 들어올 틈이 없었다.밖은 세상이 아니라, 단절된 또 다른 지옥이었다.그날, 수진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눈을 떴을 때 머리맡의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그녀는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습관이었다.몸보다 먼저 깨어나는 건 의식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지각하면 벌을 받는다는 걸 이미 배워버렸으니까.언니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수민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밤마다 깨어 있었고, 훈련소의 통신 라인을 살피는 모습을 보였다.수진은 그것이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하지만 말리지 않았다.그녀는 더 이상 언니에게 간섭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조용히 방을 나서자 복도는 차가웠다.벽에는 언제나처럼 붉은 문장 하나가 붙어 있었다.“목소리는 칼보다 빠르다.”훈련실 문 앞에는 이미 조교들이 대기 중이었다.오늘의 훈련 주제는 ‘실전 응용’.아이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실제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그들의 통화는 녹음되어 분석되고, 성공 여부는 오직 ‘상대의 울음’으로 평가되었다.흑거미가 들어왔다.그녀는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색 옷을 입고 있었다.흰 블라우스에 붉은 립스틱, 그녀의 미소는 어둠 속에서 더 또렷하게 빛났다.“오늘부터 너희는 진짜다.”그녀의 말에 아이들의 어깨가 굳었다.“그동안은 연습이었지만, 오늘부턴 실전이다.사람의 돈을, 마음을, 그리고 시간을 훔쳐야 한다.하지만 절대 들켜선 안 된다. 거짓말의 핵심은 들키지 않는 거야.”그녀의 시선이 수진을 향했다.“린자오밍, 네 차례가 올 거야.”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수진의 가슴속 어딘가가 서늘해졌다.그 이름은 이제 그녀의 정체가 되어가고 있었다.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아이가 통화를 시작했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누군가는 너무 서툴게, 누군가는 너무 기계적으로 말했다.상대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흑거미의 입꼬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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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첫 임무
그날은 유난히 공기가 탁했다.창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지만, 새벽의 어둠 속에서 먼지들이 빛을 삼키며 떠다녔다.이제 이곳의 새벽은 ‘시작’이 아니라 ‘명령’이었다.훈련소의 벽면에는 새로운 구호가 걸려 있었다.“감정은 노이즈다. 신뢰는 연기다.”조교의 호명 소리가 메아리쳤다.“린자오밍.”수진은 즉시 일어섰다.오늘, 그녀는 ‘외부 통화조’로 승격됐다.이제부터는 단순한 연습생이 아니라, 실제 현금 흐름에 개입하는 실전 요원이었다.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짧게 자른 앞머리, 눈 밑의 그늘, 차분하게 눌린 입술.거울 속 얼굴은 어제보다 조금 더 낯설었다.“괜찮다니. 할 수 있다니.”스스로에게 속삭였지만, 그 속엔 긴장보다 이상한 차분함이 있었다.그녀는 이미 ‘린자오밍’이라는 이름에 완전히 길들여지고 있었다.대기실 안은 조용했다.수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오늘이야?”“응.”“밖으로 나가는 거야?”“응.”그녀의 대답은 짧고 단단했다.수민은 손끝을 꼭 쥐었다.“조심해.”“괜찮다니. 그냥 전화 몇 통 하는 거라니.”“그 전화가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릴 수도 있어.”“언니…”“진심이야.”“그럼 어떻게 하냐니. 안 하면 맞고, 하면 죄인이 되는 거라니.”수진은 고개를 들었다.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언니, 난 그냥 목소리를 파는 거라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니.”그녀는 돌아서려 했다. 수민이 팔을 붙잡았다.“수진아, 네 목소리는 사람을 움직여. 그게 무서운 거야.”“언니, 사람은 원래 누군가의 말에 움직인다니. 나는 그걸 조금 빨리 배운 것뿐이라니.”“그 말, 언젠가 너한테 돌아올 거야.”“그럼 그때 울면 된다니.”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단단했고, 그 속에 서늘한 슬픔이 섞여 있었다.수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가 본 건 더 이상 동생이 아니라, 이 세계가 만들어낸 완벽한 배우였다.점심 무렵, 흑거미가 통제실에 나타났다.그녀의 손에는 하얀 봉투가 들려 있었다.“오늘 첫 임무다.”그녀는 봉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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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차가워져야만 하는 이유
밤은 길었다.훈련소의 전등은 꺼져 있었지만, 불빛은 벽 사이로 스며들어 어둠을 더 짙게 만들었다.수민은 그 빛의 경계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건 마치 ‘선’처럼 보였다.넘으면 죄가 되고, 서 있으면 죄책이 되고, 돌아서면 모든 게 사라지는 경계선.그녀는 천천히 손끝을 들어 그 빛의 테두리를 따라 그렸다.차가운 벽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이 안에서 난… 점점 작아지고 있다.”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머릿속에서는 흑거미의 목소리가 되풀이되었다.“네가 그 애를 구하려면, 네가 그 자리에 앉아야 해.”그 말은 단순한 유혹이 아니었다.그건 선택처럼 들렸다.아니, 생존의 다른 형태였다.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기억 속에 떠오르는 건 어린 시절의 수진이었다.겨울 장터 한켠, 눈이 쏟아지는 거리에서“언니, 이 사탕 사주라니.”그때만 해도 수진의 목소리는 투명했다.누구도 거짓으로 들을 수 없던 순수한 톤이었다.그런데 지금, 그 목소리가 사람을 울리고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그걸 견딜 수 없었다.다음 날, 훈련소의 공기는 평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흑거미는 늘 그렇듯 천천히 등장했다.오늘 그녀의 옷은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실크 소재였다.빛을 받으면 은근하게 빛났고, 그림자에서는 완전히 사라졌다.“좋은 아침이네, 애들.”그녀의 음성이 울릴 때마다, 공간 전체가 명령처럼 움직였다.“어제 ‘린자오밍’의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그 아이의 목소리는 이제 조직의 자산이다.”그녀의 시선이 한 명 한 명을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수민 앞에서 멈췄다.“넌 어제 내 제안에 대해 생각했지?”“생각했습니다.”“결론은?”“받겠습니다.”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었다.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흑거미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역시… 피는 못 속이네.”“조건이 있습니다.”“조건?”“내 동생은… 이 조직의 최전선에서 제외해 주세요.”“제외?”“그 아이는 아직 어려요. 전 그 아이가 이 일에서 벗어나길 바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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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언니의 결심
새벽 네 시. 훈련소의 기계음이 멎은 순간이었다.아이들은 모두 잠들었지만, 수민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방 안엔 숨소리와 함께 희미한 전자음이 섞여 있었다.그 소리를 따라 그녀는 천천히 발을 디뎠다.복도는 어둡고 길었다.벽에는 무수한 구멍들이 있었는데, 그 사이로 미세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그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쳤다.‘이 공기, 언제부터 이렇게 눅눅했지…’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대답 대신 심장이 뛰는 소리만 들렸다.창고의 자물쇠를 풀고 안으로 들어섰다.서류더미와 낡은 서버 기계가 어둠 속에 숨을 쉬고 있었다.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문서들을 빠르게 넘겼다.그중 하나, 낡은 도표가 눈에 들어왔다.[해외 송금 루트]거기에 적힌 문장 하나가 그녀의 눈을 멈추게 했다.“한국 내 정보라인 - B.S.G (배신구). 국정원 직속 관리.”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배신구… 국정원…”이 두 단어는 절대 한 줄에 있어선 안 될 조합이었다.그녀는 손끝을 떨며 속삭였다.“이게… 진짜라면…”그때,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급히 서류를 접어 옷 안에 숨겼다.문이 살짝 열렸다. 빛 한 줄기가 스며들었고, 그 빛 속에 흑거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뭐 하고 있지, 수민?”그녀는 숨을 고르고 고개를 돌렸다.“기록 정리 중이었어요.”“새벽에?”“자료가 뒤섞여서요. 확인 안 하면 내일 수업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흑거미의 시선이 서류더미를 스쳤다.“열심이네.”“그게 제 일이니까요.”“좋아. 하지만 기억해. 여기서 ‘너무 열심히’라는 건 곧 ‘의심’이야.”그녀는 미소를 흘리고 돌아섰다.문이 닫히자 수민은 온몸에 땀이 흘렀다.숨을 고르며 손 안의 서류를 다시 쥐었다.그 종이는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이걸 밖으로 내보내야 해.’그녀는 그날부터 서서히 변했다.수업 때는 완벽한 배우처럼 연기했고, 흑거미의 곁에서는 충직한 부하로 행동했다.그러나 밤마다 그녀는 서류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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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의 이름은, 김수민
불빛은 여전히 깜박였다.전선이 오래되어서인지, 훈련소 천장의 형광등은 숨을 쉬듯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그 어지러운 리듬 속에서 수민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책상 위엔 여전히 한 장의 문서가 놓여 있었다.“국정원 내부자 협력 기록.”그 제목만으로도 이 문서는 누구든 죽일 수 있는 무기였다.그녀는 서류의 구석을 접어 작은 천 조각 사이에 숨겼다.손끝이 떨리지 않았다.이제 그녀의 몸은 두려움을 기억하지 못했다.공포보다 익숙해진 건, 감시당하는 일상이었다.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정확하고 규칙적인 구두 소리. 그 리듬은 언제나 흑거미였다.그녀의 발소리는 이곳의 시계처럼 들렸다.그녀가 움직이면, 누군가는 사라졌다.문이 열렸다.“수민.”그녀는 조용히 일어났다.“네.”“오늘은 잠을 안 자네?”“문서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그럼 이건 뭔가?”흑거미의 손끝에, 그녀의 책상 밑에 떨어진 조그만 종잇조각이 들려 있었다.아주 미세하게 찢긴 문서의 일부였다.그녀의 손이 순간 굳었다.“그건… 정리 중에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정리라…”흑거미는 종이를 손가락으로 말아 올리며 천천히 웃었다.“요즘 네가 부쩍 조용하더라.”“그게 문제인가요?”“조용한 사람은 두 가지야. 죽은 자거나, 비밀을 가진 자.”그녀는 한 걸음 다가왔다.수민의 코앞까지. 그녀의 향기가 짙게 밀려왔다.꽃향기 같지만, 그 안엔 철 냄새가 섞여 있었다.“넌 어떤 쪽이야?”“아직… 숨 쉬고 있습니다.”“좋아. 그럼 계속 그렇게 숨 쉬어. 하지만 숨은 한정돼 있지.”그녀는 종잇조각을 그대로 수민의 손바닥에 얹었다.“다음엔… 이런 거, 떨어뜨리지 마.”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천천히 돌아섰다.문이 닫히는 순간, 수민의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그 종잇조각이 마치 살덩이처럼 뜨겁게 느껴졌다.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이젠, 오래 못 버티겠네.”그날 밤, 비가 내렸다.창밖으로 들려오는 빗소리는 규칙적이었지만, 그 속에는 긴장감이 있었다.마치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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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국경의 목소리
어둠은 새벽을 집어삼키듯 천천히 퍼져갔다.훈련소의 담벼락은 짙은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고,공기 속에는 금속과 비 냄새가 섞여 있었다.그날의 공기에는 단 한 가지 확실한 냄새가 있었다.이별의 냄새였다.수진은 새벽 세 시에 불려 나왔다.방 안에는 이미 짐이 정리되어 있었다.흑거미가 직접 왔다.“린자오밍.”“예.”“오늘부터 넌 작전팀 ‘홍단’ 소속이야.”“...홍단.”“목소리만으로 국경을 넘기는 아이들이지.네 임무는 단순해. 목소리로 돈을 끌어오고, 그 돈으로 정보를 사.”그녀의 말은 간단했지만, 그 말 속엔 단 하나의 경고가 숨겨져 있었다.‘실수하면 돌아오지 못한다.’“출발은 두 시간 뒤야. 짐 챙겨.”그녀가 나가자 방 안이 다시 정적에 잠겼다.수진은 천천히 손끝을 들어 창문을 밀어봤지만,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늘 그랬다.그녀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언니, 나… 가야겠다니.”그 말은 입 밖으로 새어나왔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수민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루 전, 흑거미가 통보했을 때 그녀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하지만 그날 밤 내내 한숨조차 쉬지 못했다.지금 그녀의 손엔 국정원에서 받은 작은 수신기가 있었다.그 안에 들어 있는 주파수는 단 하나.‘82-7-A.’그건 ‘배신구’와 관련된 내부 감청 코드였다.그녀는 통신기를 켰다.“여기는 김수민. 정보 확인 요청합니다.”잠시 후, 잡음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확인 중입니다. 말씀하세요.”“‘배신구’란 이름, 당신들 시스템에 등록돼 있죠?”“...맞습니다.”“그가 지금 어디 있습니까?”“서울.”그녀는 손을 꽉 쥐었다.“그 사람, 흑거미와 연결돼 있어요.”“그걸 입증할 증거가 있습니까?”“곧 보내드릴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요. 내 동생이… 그 작전에 투입됩니다.”“그녀의 이름은?”“린자오밍. 중국 이름이에요.”“기록하겠습니다.”수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그 애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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