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새벽이었다. 불길은 이미 꺼졌지만, 국정원 본청의 잔해는 여전히 뜨거웠다.불탄 철골 사이로 김이 피어올랐고, 새들이 날아들어 금속 파편 위를 지나쳤다.강혁은 그 잔해 속을 걸었다.검게 그을린 벽면을 스치자 손끝에 그을음이 묻었다.그는 잠시 멈춰서, 손바닥을 바라봤다.묘하게도 그 냄새 속에는 피보다도, 기름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꽃 향기. 불길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수진이 쓰던 향수의 잔향이었다.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照明…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남아 있는 거죠.”그는 콘솔 더미 아래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작고 금속성의 장치. SPIDR의 메인 코어가 아니라,누군가 따로 보관해둔 개인 백업 칩이었다.‘LZM-0.4’라는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그는 주머니에 그것을 넣었다.그리고 조용히 말했다.“이건… 네가 남긴 마지막 심장일지도 모르겠군.”그날 오후, 그는 해남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창문 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뒤로 밀려났다.모든 게 지나갔다.그의 삶도, 임무도, 복수도, 그리고 사랑마저도.그런데,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 뒤로 희미하게 다른 그림자가 겹쳐졌다.그녀였다. 그녀의 미소. 그녀의 눈빛. 그녀의 손끝에 닿았던 꽃잎들.그는 그 환영을 쫓지 않았다.이젠 쫓을 필요가 없었다.그녀가 살아 있든, 아니든. 그녀는 이미 그의 안에서 숨을 쉬고 있었으니까.버스는 국도를 벗어나 해남으로 향했다.해안길을 따라 들어서자, 짠내 섞인 바람이 창문 사이로 스며들었다.그 바람은 오래된 기억의 냄새였다.그가 처음 그 바다를 본 날.수민이 죽고, 그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날.그는 그 바다에서 살아남았다.그리고 지금, 그 바다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결국, 모든 건 바다로 돌아오네.”그가 낮게 웃었다.저녁 무렵, 그는 해남의 작은 포구에 도착했다.‘린꽃방’의 간판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오래된 나무 간판은 바람에 깎여 글자조차 희미했다.그러나 문 앞의 풍경 하나만은 변
밤은 길었다.국정원 본청은 이미 ‘SPIDR’의 폭풍을 견디고도 남을 만큼모든 시스템이 파손된 상태였다.그러나 불이 꺼진 모니터 사이,한 사람만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흑거미 - 윤혜란.그녀는 오래된 콘솔 앞에 앉아 있었다.손끝엔 떨림이 있었다.어깨는 약간 구부러져 있었고, 한쪽 조명은 여전히 깜빡였다.그녀의 눈앞엔 린자오밍의 이름이 남겨진 시스템 로그가 있었다.[USER LOG: LIN ZHAOMING][DATA: MEMORY FRAGMENT REMAINS / STATUS: ACTIVE]그녀는 낮게 웃었다.“살아남았구나,照明.”그녀의 목소리는 쓸쓸했다.그리고 이상하리만치 다정했다.그녀는 모니터에 손을 얹었다.손끝이 차가운 유리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난 널 만들어낸 괴물이었지.”“널 이용해서 내 세상을 유지하려 했고, 그 세상은 결국, 피로 물들었어.”모니터 속 코드는 계속 흘러갔다.그녀는 한 줄, 한 줄을 따라 읽듯 속삭였다.‘감정 주파수 연결 성공.’‘감정 공명 임계치 도달.’‘사랑: 시스템 재정의.’“사랑이라…”그녀가 중얼거렸다.“난 그 단어를 한 번도 믿지 않았는데.”그녀는 고개를 떨궜다.머리카락이 흩어졌다.“照明, 너는 결국 나보다 더 강했구나.”“난 세상을 통제하려 했지만, 넌 세상을 연결시켰어.”그녀는 천천히 일어났다.그때였다. 문이 열렸다.“윤혜란 국장.”낮고 냉정한 목소리. 배신구였다.그의 발소리가 메아리쳤다.그는 이미 이전의 ‘조직의 그림자’가 아니었다.서류 가방 하나, 권총 하나. 그리고 완전히 정리된 표정.“끝내 여기 있었군.”“그래.”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이게 내 자리니까.”“자네답군.”그는 웃었다.“세상이 다 무너졌는데도, 여전히 신을 자처하지.”그녀는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신이었으면, 그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겠지.”“아이들이라…”배신구가 짧게 웃었다.“윤혜란, 그 아이들은 네 손으로 만들어진 괴물이야.”“아
서버룸은 더 이상 조용하지 않았다.바닥의 패널 사이에서 빛의 흐름이 스며 나왔다.기계의 고동처럼 일정한 진동이 퍼져나가고,그 진동은 곧 사람의 심장박동과 같은 리듬을 띠었다.[L.Z.M : ACTIVE / LINK RATE 72%][WARNING – EMOTIONAL OUTPUT UNSTABLE]강혁은 콘솔 앞에 서 있었다.그의 귀엔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혁 씨, 바다 기억나죠?”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녀의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지하의 콘크리트 냄새가 사라지고, 짠 바람과 물비린내가 대신 그의 뺨을 스쳤다.눈을 뜨자, 그는 해남의 바다 위에 서 있었다.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그리고 물결 위로 흩어지는 빛.그녀가 서 있었다.흰 원피스 차림,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照明…”그가 속삭였다.그녀가 돌아섰다. 미소였다.“당신은 여전히 나를 그렇게 부르네요.”“이건… 현실입니까?”“아니요. 당신의 감정 속이에요.”그녀의 발 아래로 파도가 부딪쳤다.그 물결 속엔 수많은 이미지가 떠올랐다.꽃집의 창가, 연변의 눈길, 그리고 국정원 지하의 어둠.“이건 내 기억이에요.”그녀가 말했다.“당신이 나를 떠올릴 때마다, 이 감정이 자라요.”그의 눈이 흔들렸다.“당신은… 살아 있는 겁니까.”“살아 있음의 정의가 뭔데요?”그녀가 고요히 웃었다.“숨을 쉬는 건 아니지만, 당신이 느끼는 나는 분명히 여기에 있잖아요.”그는 한 걸음 다가갔다.“당신이 만든 시스템이 지금 위험합니다.”“SPIDR가 당신의 감정 주파수를 흡수하고 있어요.”“당신이 흔들리면, 세상 전체가 흔들립니다.”그녀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그럼… 내가 사라져야 하겠네요.”“그럴 수 없어요.”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당신은 지금도 살아있어요.”“당신의 사랑이 이렇게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데.”그녀의 눈가가 젖었다.“혁 씨… 내가 이렇게 남기를 원했나요?”그의 대답은 없었다.그저 눈빛으
침묵. 폭풍이 지나간 뒤의 공기는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국정원 본청 지하.SPIDR 서버의 붉은 불빛이 모두 꺼진 자리엔 기계음 대신 바다 냄새 같은 습기가 감돌았다.강혁은 조용히 서 있었다.눈앞의 유리 패널엔 금이 가 있었고, 그 너머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의 목소리도,그녀의 빛도,그녀의 온기도.“照明…”그는 천천히 그 이름을 불렀다. 바람이 불었다.그 바람 속에서 먼지가 일었다.아주 희미한, 아주 낯익은 냄새가 스쳤다.꽃 향기. 그녀가 항상 손끝에 묻히던 그 향기였다.그는 몸을 돌려 서서히 걸었다.한 걸음마다 그 향기가 조금 더 짙어졌다.마치 그가 향하는 곳을 누군가 인도하는 것처럼.지하 2층 제어실.한때 수많은 모니터가 깜빡이던 그곳엔 단 하나의 화면만이 미세하게 살아 있었다.[SYSTEM RESTORE – 3%][DATA NODE REMAINING: EMOTIONAL LOG]그는 화면 앞에 섰다.“남아 있군요.”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그 순간, 화면이 번쩍이며 공간 전체가 흔들렸다.어디선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혁 씨…”그의 눈이 커졌다.“照明…?”“이건 제 의식이 아니에요.”“단지, 남아 있던… 감정의 파편이에요.”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그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그런데도 목소리는 분명히 들렸다.“당신이 내 손을 잡았던 날, 난 처음으로 세상이 따뜻하다고 느꼈어요.”“그 기억이… 여기 남아 있었나 봐요.”“그럼 당신은…”“죽지 않았어요. 하지만 완전하지도 않아요.”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마치 그의 귓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했다.“사랑은… 데이터가 아니라, 연결이에요.”그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당신이 이걸 의도했습니까.”“아니요. 당신이 날 불렀어요.”그 순간, 그의 왼손에 빛이 번졌다.서버 패널의 조각이 그의 손끝에서 반응하듯 깜빡였다.[LINK ESTABLISHED – HUMAN SIGNAL / K.H][MIRROR LOOP REAC
“도어락 해제 완료.”흑거미의 손끝에서 장치가 ‘틱’ 소리를 냈다.강혁은 총구를 들고 문을 밀었다.국정원 본청.국가가 만든 그림자의 중심.전기가 완전히 끊긴 듯, 모든 복도가 어두웠다.비상등만 깜빡이며 붉은색으로 천장을 물들였다.그들은 소리 없이 걸었다.한 걸음, 또 한 걸음.벽면마다 붙은 거대한 유리 패널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감정의 데이터.수진이 남긴 ‘거울 코드’가 이곳의 중앙 서버와 연결되어 있었다.“照明…”그가 중얼거렸다.그 순간, 벽면의 한 패널이 반응했다.빛이 번쩍이며 화면이 켜졌다.[USER: KANG HYEOK – AUTHORIZED ACCESS][LINKED FILE: L.Z.M MEMORY CORE]흑거미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그녀가 널 위해 열어둔 거야.”강혁은 천천히 화면 앞으로 다가갔다.그 안에는 수진의 얼굴이 있었다.살아 있을 때의, 그 웃음과 숨결까지 그대로 담긴 모습이었다.그녀는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혁 씨.”그는 숨을 삼켰다.그녀의 입술이, 마치 지금 이 순간 그를 부르고 있는 듯했다.“당신이 이걸 본다면, 전 이미 세상에 없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은 알아야 해요.”화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녀의 눈빛이 슬픔과 확신 사이를 오갔다.“언니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당신을 구했어요.”“그게 진실이에요.”그의 눈이 흔들렸다.“수민이…”“그녀는 제게 말했어요.”‘혁 씨를 믿어야 해.그 사람은 절대 거짓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야.’그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눈앞이 아득했다.“하지만 전 그걸 믿지 못했어요.”“언니가 죽은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어야만 제가 살 수 있었거든요.”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그래서 전 복수를 선택했어요. 하지만 그 복수가 끝났을 때, 제 안엔 사랑만 남았어요.”“혁 씨, 이제 당신이 제 복수를 끝내주세요.”화면이 꺼졌다.남은 건 붉은 조명 아래 흔들리는 두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는 검게 젖어 있었다.비는 여전히 내렸고, 차창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도시의 불빛을 일그러뜨렸다.운전석에 앉은 흑거미의 손은 핸들을 잡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고정돼 있었다.그 얼굴은 더 이상 윤혜란도, 완전히 흑거미도 아니었다.조수석의 강혁은 조용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라디오에서 흐르던 뉴스는 이미 멎었고,대신 낮은 주파수의 전파음만이 차 안을 채웠다.“SPIDR 백업 시스템의 가동으로, 전국 통신망의 일부 구간이 마비되었습니다.정부는 일시적 오류라고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원인은 밝히지 않았습니다.”소리가 끊겼다.잡음이 섞이며, 짧은 신호음이 이어졌다.삐~익.“혁 씨… 들리세요.”그녀의 목소리였다.린자오밍. 수진.그는 고개를 돌려 무전기를 잡았다.“照明…?”“본청으로 가고 있죠.”“시간이 얼마 없어요.”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지금, 어디에 있습니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당신은… 진실을 봐야 해요.”신호가 끊겼다.잠시, 차 안에는 아무 소리도 남지 않았다.흑거미가 말했다.“그녀야.”“살아 있나요.”“당신이 알고 있는 의미로는 아니지.”“그럼…”“감정은 죽지 않아, 강혁. 사람은 사라져도 감정은 남는 법이야.”그녀는 도로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照明은 감정을 남긴 거야. 그게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온 이유야.”고속도로 출구 표지판에‘국가정보원 본청 → 4km’라는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강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당신은 그때, 왜 수민과 수진을 데려갔습니까.”“왜냐고?”“그 아이들을… 이용하려 했던 겁니까.”흑거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미세하게 웃었다.“이용? 아니.”“그 아이들은… 나의 그림자였어.”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나는 윤혜란이었고, 국가가 나를 삼켰지.그 아이들은, 국가가 버린 나의 죄의 조각들이었어.”“照明은 나보다 더 영리했지.”“그 애는 이미 열여덟 살 때, 내가 어떤 괴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