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선도리에서의 밤은 비현실적일 만큼 투명했다.
갯벌 끝에 닿아있던 상수의 온기, 어깨를 감싸 쥐던 그의 단단한 손등 위로 쏟아지던 별빛들.
혜연은 침대 머리맡까지 차오른 일요일 밤의 어둠 속에서 그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씩 꺼내어 핥았다.
그것은 치명적인 상처 위에 덧바르는 연고이자, 내일이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서 붙들 수 있는 유일한 밧줄이었다.
'내가 당신의 세상이 되어줄게요.'
그 밤, 상수가 읊조렸던 맹세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
혜연은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잠시나마 얻어진 안락.
그 위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수면의 기운이 혜연을 잠식하려던 찰나였다.
하지만 정적은 이내 변질되었다.
방 안의 공기가 서
혜연은 소름이 돋았다.그날 식장 로비, 자신을 에워싸고 비난하던 그 무리 중 누군가가 나를 죽이기 위해 이 글을 썼다.아니면 그 자리에 있던 '우리' 중 누군가가 혜연의 회사 동료에게 이 모든 것을 생중계하며 글을 사주했거나.댓글들은 더 가관이었다. 사실이라는 뼈대 위에 악의라는 살점이 붙어 괴물 같은 소문으로 변해 있었다.ㄴ 와, 평소에도 조향사랑 유난 떤다 싶더니 결국 상간녀 프레임?ㄴ 동네 엄마들끼리 20년 지기라는데 딸이 저러면 부모는 무슨 죄냐 진짜.ㄴ 저 여자 담당 프로젝트도 다 다시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님? 유혹해서 딴 거 아냐?ㄴ 일 좀 잘한다고 유세 떨더니. 결국 그 실력이 그 실력이 아닌거네.추악했다.혜연은 휴대폰을 바닥으로 던지듯 내려놓았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맺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같은 시각, 상수의 방.상수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혜연을 선도리에서 데려온 뒤, 그는 그녀를 지켜냈다는 안도감에 젖어 있었지만 조향사 특유의 예민한 직관이 자꾸만 신경을 긁어댔다.서랍 속에 넣어둔, 간직했던 그 '식어버린 날달걀 두 알'이 환상처럼 눈앞을 어른거렸다.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재현이었다."너 알고 있었어?"재현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밤 늦게 너무나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연락 온 민지.그녀가 미친 듯이 쏟아낸 말들 그리고 그녀에게 받은 무언가를 재현이 휴대폰 화면을 상수의 코앞에 들이밀었다.&nbs
선도리에서의 밤은 비현실적일 만큼 투명했다.갯벌 끝에 닿아있던 상수의 온기, 어깨를 감싸 쥐던 그의 단단한 손등 위로 쏟아지던 별빛들.혜연은 침대 머리맡까지 차오른 일요일 밤의 어둠 속에서 그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씩 꺼내어 핥았다.그것은 치명적인 상처 위에 덧바르는 연고이자, 내일이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서 붙들 수 있는 유일한 밧줄이었다.'내가 당신의 세상이 되어줄게요.'그 밤, 상수가 읊조렸던 맹세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혜연은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잠시나마 얻어진 안락.그 위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수면의 기운이 혜연을 잠식하려던 찰나였다.하지만 정적은 이내 변질되었다.방 안의 공기가 서서히 눅눅해지더니, 잊으려 애썼던 기억들이 벽지의 무늬처럼 기어 나와 혜연의 시야를 가로막았다.결혼식장의 로비.5월의 찬란한 태양 아래에서 펼쳐졌던 그 처절한 처형대.경은의 그 차갑고도 사무적인 미소가 떠올랐다."연애하느라 바쁠 텐데 굳이 또 오고 그래."배려를 가장한 그 예리한 칼날이 혜연의 가슴을 다시 한번 베어냈다.뒤이어 소영의 비릿한 비웃음이 이명처럼 울렸다.포식자의 여유로 자신을 훑어내리던 그 오만한 눈동자.그리고 무엇보다 아프게 박힌 것은 선혜의 일갈이었다.'너희 어머니 시장도 못 다니신다더라. 그건 아니?'선혜의 목소리는 엄마가 휘둘렀던 손바닥보다 더 매섭게 혜연의 고
새벽 4시가 다 되어갈 무룹, 차가 서울 시내에 진입했다.상수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작업실 방향으로 차선을 바꾸려던 순간, 혜연이 나직하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상수 씨, 우리 집으로 가요."상수는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가 홀로 그 외로운 공간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혜연 씨, 오늘은 너무 힘들었잖아요. 내 작업실에서 좀 쉬는 게... 거기 향기들도 당신 마음을 편하게 해줄 거예요. 내가 옆에서 밤새 지켜줄게요.""아니요. 내 집으로 갈래요. 거기서 씻고, 내 침대에서 자고, 내일 아침의 햇살을 내 창가에서 맞이하고 싶어요.상수 씨 덕분에 기운 차렸으니까, 이제는 나 혼자 내 발로 서야죠. 언제까지고 상수 씨 등 뒤에, 상수씨가 만들어준 요새 속에 숨어 있을 수는 없잖아요.박혜연의 집으로 돌아가야, 박혜연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상수는 핸들을 잡은 손등에 핏대를 세웠다.걱정이 해일처럼 밀려왔다.혼자 남겨진 집에서 그녀가 다시 소셜 미디어의 비난이나 외로움의 무게에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하지만 혜연의 옆얼굴은 5월의 새벽 공기보다 서늘하고 단단했다.그녀는 이미 자신이 겪어야 할 지옥이 무엇인지 파악했고, 그것을 회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한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것은 누군가의 연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독립 선언이었다.상수는 혜연의 빌라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충청남도 서천군 선도리.도심의 소음이 완전히 소멸한 그곳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차갑게 다가오는 바닷바람의 서글픈 절규, 그리고 썰물에 밀려 나가는 바닷물의 낮은 흐느낌뿐이었다.갯벌 위로 쏟아지는 별빛은 구원보다는 처형장의 조명처럼 날카로웠다.상수는 폐가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갯벌 끝으로 이어진 나무 데크를 달렸다.구두 굽이 나무 틈새에 걸려 비틀거릴 때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저 차가운 진흙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 나는 환각을 보았다."혜연 씨...! 제발, 혜연 씨!"목소리는 비명조차 되지 못하고 서늘한 바닷바람에 흩어졌다.상수는 데크가 끝나는 지점, 해안가 끝 낡은 벤치 옆 바위에 주저앉아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작은 그림자를 발견했다.혜연이었다.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아침에 상수가 직접 골라주었던 그 화사한 베이지색 드레스는 이제 진흙과 먼지에 얼룩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밤의 깊은 어둠 속에서 그 드레스는 찬란한 예복이 아니라,세상으로부터 처참하게 버림받은 이가 슬픔으로 가득차 스스로에게 입힌 수의(壽衣)처럼 위태롭고 서글프게 보였다.상수는 그녀의 등 뒤 5미터 전방에서 멈춰 섰다.차마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규칙적으로 떨리고 있었다.그것은 오열이라기보다 몸 안의 모든 생명력을 밖으로 밀어내려는 처절한 경련에 가까웠다.상수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의 굽은 어깨에 조심스럽게 걸쳐
그는 대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그 낡은 집을 응시했다.혜연이 평생을 자라온, 그리고 이제는 혜연에게 가장 아픈 상처가 되어버린 그 집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상수의 발등을 덮었다.비참했다.자신이 선택한 사랑이, 이토록 무력하게 혜연을 실종 상태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 상수의 영혼을 난도질했다.'소영아, 혜연이가 안 보여. 혹시 네가 무슨 짓을 했니?'수십 번 휴대폰 화면에 띄운 소영의 번호는 맹독을 품은 전갈 같았다.통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이 모든 미로의 끝을 알 수 있겠지만,그 전화를 거는 순간 상수는 혜연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마지막 자존심을 짓밟는 꼴이 된다.혜연은 소영 앞에서 당당하고 싶어 했다.그런 그녀의 연인이 소영에게 전화를 걸어 "혜연이를 찾아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혜연에게 죽음보다 더한 수치를 안겨주는 일임을 상수는 너무나 잘 알았다.그는 핸들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비명을 삼켰다.그때였다. 상수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장소, 단 하나의 좌표가 있었다.충청남도 서천군 선도리.그곳은 상수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가빠질 때마다 도망치듯 찾았던 비밀의 해변이었다.그리고 언젠가 작업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혜연에게 고백하듯 털어놓았던 곳이기도 했다."혜연 씨, 나는 정말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을 때 선도리에 가요. 거기 갯벌 끝에 서 있으면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껴져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거든요."당시 혜연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눈을 반
시계 바늘이 비정상적으로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상수는 작업실 한가운데 서서 몇 번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마치 거대한 망치가 텅 빈 콘크리트 바닥을 치는 듯 고막을 기괴하게 때렸다.혜연이 식장으로 떠난 지 고작 두 시간 남짓이었지만, 그에게는 이 시간이 분 단위로 쪼개져 살을 베어내는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공기의 흐름마저 느껴지는 것 같은 시간들이 상수를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작업실을 가득 채운 수천 가지 향료의 냄새도 오늘만큼은 그의 신경을 안정시키지 못했다.조향사로서의 예민한 후각은 평소 그에게 축복이었으나, 지금은 저주였다. 혜연의 잔향이 남아 있지 않은 공기는 죽은 것처럼 건조했다.샌달우드의 묵직함은 질식할 것 같은 압박으로, 로즈마리의 청량함은 신경을 긁는 금속성 소음으로 변질되어 상수의 폐부를 찔러댔다.주인을 잃은 향기들은 이제 상처 난 기억 위로 쏟아지는 소금물처럼 따가웠다.'식이 시작됐겠지. 이제는 끝날 시간인가.'상수는 휴대폰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화면 속 혜연의 사진을 엄지로 쓸어내리며, 별일 없는지, 너무 힘들면 바로 나오라는 문자를 보냈지만 '1'이라는 숫자는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혜연은 답이 없었다.불안은 형체 없는 진득한 늪처럼 상수의 발목부터 차오르기 시작해 이내 목구멍까지 조여왔다.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신호음만 무심하게 이어졌다. 열 번, 스무 번. 규칙적인 기계음이 이어질 때마다 상수의 심장 박동도 그 속도에 맞춰 기형적으로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