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원은 잠깐 멈칫했다.정은의 맑고 단단한 시선과 마주친 순간, 본능적으로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정은이 잔잔하게 입을 열었다.“어머님, 저를 데리고 이렇게 둘러보신 건... 사실 저랑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거죠?”강서원은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그래, 맞아. 너라는 사람을 제대로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재석이가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었거든.”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래서, 직접 보시고 나니까 어떤가요? 또... 그 얘기라는 건 대체 뭔가요? 왜 재석 씨는 들으면 안 되는 건데요?”‘이 아이, 생각보다 훨씬 단도직입적이네.’‘감정에 휘둘리지도 않고, 중심도 잘 잡고 있어.’강서원이 피식 웃었다.“너 솔직하구나. 그리고 아주 냉철해.”“예전에 내가 동서 백지영이랑 있었던 작은 갈등 때문에 너까지 괜히 엮어서 오해했어. 그건 내가 편협했던 거고, 미안해.”잠시 숨을 고른 강서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그렇지만, 너도 알다시피 사람 마음이란 건 참 복잡해. 처음 본 날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이유 없이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어. 그런 감정은 굳이 설명이 안 돼도... 이해하지?”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해해요.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결국 개인적인 감정이니까요. 어머님이 저에 대한 첫인상이 안 좋으셨던 것처럼, 저도 처음엔 어머님이 무척 까다롭고 거리감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강서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또 처음이네...’사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그렇게 말로 들으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왜냐면, 자신 역시 정은에게 그렇게 말했으니까.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은 ‘어른’이고, 정은은 ‘아이’라는 것.정은의 이런 솔직함은 ‘예의 없음’이나 ‘거침없음’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그래서일까... 강서원은 괜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하지만 바로 표정을 다잡고 말했다.“사실,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어머님, 정말 대단하세요. 능력 있으시고요.”‘이렇게 넓은 본가에, 정원까지...’‘직접 손에 흙 묻히지 않아도, 이런 집을 설계하고 운영하려면 머리로 일해야 하는 건데...’ ‘솔직히 몸 쓰는 일보다 머리 쓰는 일이 더 어려운 법이지.’강서원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칭찬은 누구나 기분 좋게 할 터였고,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땐 말이지, 집안일 하나하나 챙기랴, 세 아들 옷 입고 밥 먹고 공부하는 거 다 보랴, 남편하고 관계도 신경 쓰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잠시 말을 멈춘 강서원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그 미소에는 조금의 회한과 지침이 담겨 있었다.“다들 재벌가 며느리 하면 편하고 여유로울 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직장 다닐 때보다 더 힘들었어.”정은은 그 말이 뜻밖이었다.“직장을 다니셨어요?”강서원은 두 손바닥을 펴 보이며 웃었다.“그럼. 나도 한때는 월급 받던 사람이었지. 대학 졸업하고 부동산 회사에 들어가서, 영업부터 시작해서 5년 만에 팀장이 됐고, 그다음엔 퇴사하고 나와서 개인 사업을 시작했어.”“저는 그냥...”정은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나도 우리 동서인 백 여사처럼 금수저일 줄 알았다고?”강서원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나 백 여사처럼 대단한 집안 출신 아니야.”“우리 집은 그냥 평범한 중산층. 아버지는 건축연구원 공무원, 어머니는 국립대 교수. 맞벌이였지만, 외동이라 사랑은 워낙 많이 받고 자랐지.”“대학 졸업 전까지는 내 인생 로드맵이 딱 정해져 있었어. 직장 다니면서 실무 배우고, 나중엔 내 사업을 차릴 거였지. 진짜, 사장님이 되는 게 목표였거든.”그 시절의 강서원은 누구 아내도, 누구 며느리도 될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의 사람으로 불리는 게 아니라, 자기 이름 석 자로 살아가고 싶었다.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계획은 언제나 변수를 이기지 못하더라. 나도 그
“재석, 오늘 대체 왜 이래?”지훈이 재석을 서재로 끌고 들어가더니, 문을 ‘탁’하고 닫아버렸다.재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뭐가 왜인데?”“밥 먹을 때 네 여자 친구 강 여사 옆에 못 앉게 하질 않나, 밥 다 먹고 강 여사가 정은이랑 집안 둘러보겠다니까 너도 따라가겠다고 하지 않나...”“야, 우리 강 여사 무슨 맹수야? 정은이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 그래?”‘그럴 리 없잖아...’ 재석은 조용히 눈썹을 찌푸렸다.“정은이 처음 오는 거니까 좀 어색할까 봐. 옆에 앉아야 챙겨주기도 쉽잖아. 그리고 같이 집안 구경하자고 한 거, 내가 따라간다고 한 게 뭐가 문제야?”지훈은 들을수록 어이없다는 듯 눈이 점점 커졌다.마침내 헛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문제지, 이 사람아! 강 여사가 정은이랑 단둘이 이야기 좀 해보려고 기회를 만든 건데, 네가 굳이 따라붙으면 분위기 깨잖아!”재석은 순간 할 말을 다 잃었다.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지언이 눈치를 챘는지 입을 열었다.“그만해라, 둘째야.”“형, 나 진짜 이해가 안 가서 그래. 이게 지금 단순한 문제냐고!”지훈의 목소리에 점점 열이 올랐다.“재석이가 모르고 그랬을까? 어릴 때 IQ 검사했을 때 얘가 너보다 20점 높았던 거 기억 안 나?”“뭐? 지금 그 얘기는 왜 꺼내?”지훈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냐고...’하지만 재석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머니가 정은이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 나도 알아.”“야, 근데 너 그걸 뻔히 알면서도 왜...”그러다 문득 깨달은 듯, 지훈의 목소리가 툭 끊겼다.“잠깐, 설마... 진짜로 우리 강 여사가 정은이한테 뭐라고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야?”‘와, 진짜네. 강 여사가 이거 알면 집안 뒤집히겠어.’‘아들이 친엄마를 그렇게 경계하다니.’지훈이 바로 반박했다.“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티 내면서 감싸고 돌면, 강 여사 눈엔 더 거슬리잖아?”그 순간, 재석이 확
차를 우리는 건, 그 시절 정은이 시간을 보내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물론, 단순한 시간 보내기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서 정은은 확실히 ‘작은 즐거움’을 느꼈다.우릴 줄 아는데, 맛까지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단번에 알 수 있었다.이건, 최상급 녹차였다.정은이 첫 모금만에 눈치를 채자, 조기봉은 예상보다 깊은 반응에 흥미가 더해졌다.“한 단어로 이 차를 표현한다면, 뭐가 어울릴까?”정은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우아함’요.”조기봉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왜 하필 ‘우아함’이야?”정은은 조심스럽게 설명을 이어갔다.“이 녹차는 ‘군산 은침’이에요. 싹이 통통하고 길이도 균일하죠. 안쪽은 은은한 금빛이고, 바깥은 흰 솜털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금빛 속살에 흰 비단옷을 입은 차’라고도 해요.”정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서 말했다.“어떤 책에서는 이 차를 ‘용정차’랑 비슷하다고 하면서도, 잎이 더 넓고 색도 더 푸르다고 했어요.”“또 어떤 고문에서는, 은쟁반 위에 올린 초록 달팽이라는 표현도 있었고요. 그 정도로 정갈하고 고운 차예요. ‘우아함’이라는 말, 딱 어울리지 않나요?”“좋아! 정말 잘 말했어!”조기봉은 감탄하며 거의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지훈이 낄낄 웃었다.“정은 씨, 우리 아버지도 군산 은침은 ‘우아한 차’라고 표현하거든요. 보통 아버지랑 정말 친한 분들이 집에 오실 때만 내놓는 귀한 차예요.”지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둘째 말이 사실이에요. 정은 씨, 혹시 다도나 차 관련해서 따로 배우셨어요? 전문가 같은데요?”정은은 슬쩍 고개를 돌려, 내내 말없이 조용히 있던 강서원을 바라봤다.“그 정도까진 아니고요... 그냥 관련 책 몇 권 읽고, 자격증 몇 개 딴 정도예요.”“헐, 자격증까지 있다고요?”지훈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그 정도면 전문가 맞지...’바로 그때, 강서원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맞아, 나도 직접
정은은 말을 멈췄다가, 이내 정정하듯 조심스레 말했다.“감사합니다, 어머님.”그러자 지훈이 재빨리 받아쳤다.“괜찮아요, 호칭이야 뭐... 부르기 편한 대로 부르면 되죠.”강서원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약간의 차이는 있지. 지금 정은이는 우리 막내아들의 여자 친구잖아. 재석이가 정은이보다 두 살 많기도 하고, 또 집에서는 막둥이고. 당연히 좀 더 친근하게 불러야지.”말을 멈춘 그녀가 두어 초 뒤에 덧붙였다.“세월 참... 어느새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려올 나이가 됐네. 우리가 안 늙을 수가 있나?”조기봉이 헛기침하며 말했다.“자자, 일단 식사하자. 음식 식겠다.”“맞아요, 맞아요.”사람들이 젓가락을 들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아무도 모르게, 재석은 조용히 정은의 그릇에 담긴 훈제 삼겹살 한 조각을 자기 쪽으로 옮겼다.가장 아래쪽의 기름진 부분만 조심스레 떼어내고, 살코기만 다시 정은의 그릇에 살짝 올려놓았다.“됐어, 먹어.”재석이 나지막이 말했다.“고마워요.”정은은 조용히 웃으며 답했다.‘이런 사소한 배려 하나에도 마음이 간질간질해진다.’두 사람은 자신들만 아는 은밀한 행동이라 생각했지만, 이미 가족들 눈에 모두 들어가고 있었다.지언은 갑작스레 눈꺼풀이 씰룩거렸고, 시선은 저절로 강서원의 얼굴로 향했다.강서원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반찬을 집고 있었고,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진짜... 보통 분이 아니시네.’지언이 시선을 돌리는 찰나, 지훈과 딱 마주쳤다.두 사람은 짧은 눈빛을 주고받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식탁 위 음식들을 보면, 강서원이 꽤 신경 쓴 게 분명했다.L시 지역 특유의 반찬 몇 가지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고, 하나같이 손이 많이 간 흔적이 느껴졌다.맛도... 왠만한 맛집보다 나았다.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그만큼 식사는 집중도 높았다.정은은 남은 새우 세 마리를 재석이 손질해 주는 대로 다 먹은 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재석 씨, 이젠 본인 것도 먹어요. 나
“와! 재석아, 들었어? 들었지? 역시 정은 씨가 눈치가 있지. 오빠 소리 듣자마자 피로가 싹 풀린다.”지훈은 ‘지훈 오빠’ 소리에 절로 어깨가 펴졌다.곧이어 정은은 조기봉과 강서원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회장님, 사모님, 처음 뵙겠습니다.”강서원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늘 그녀는 짙은 파란색 비단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려 은색 비녀로 고정해 두었다. 평소보다 날이 서 있지 않았고, 대신 여유 있고 기품 있는 분위기가 느껴졌다.“정은 씨, 우리 아들 여자 친구가 회장님, 사모님이라고 부르면 너무 거리감 느껴지잖아요. 좀 더 따뜻하게 불러야죠.” 정은은 잠시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부드럽게 말했다.“네, 어머님, 아버님. 저도 편하게 대해주시면 더 감사할 것 같아요.”강서원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정은아. 다들 문 앞에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거실로 들어가자 강서원이 정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모두 소파에 나란히 앉자, 가사도우미가 정성스레 손질된 과일 플레이트를 가져왔다. 재석은 양손 가득 선물과 과일 봉투를 들고 뒤따라 들어왔다.정은은 타이밍 맞춰 말했다.“처음 인사드리는 자리라,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별건 아니지만, 정성을 담았습니다.”“아휴, 이 친구 참... 너무 예의 바르네.”“아닙니다. 아버님, 제가 당연히 챙겨야 하는 겁니다.”짧은 인사를 나눈 뒤,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가사도우미의 말에 강서원이 일어나며 모두를 다이닝 룸으로 이끌었다. “식사 준비됐어. 정은아, 이쪽으로 와서 내 옆에 앉으렴.”강서원은 정은의 손을 살짝 잡고 곁에 붙어 앉게 했다. 마치 도망칠까 봐 붙잡아두는 것처럼. 그러고는 지언 옆자리를 가리키며 재석에게 말했다.“너는 저기 지언이 옆에 앉아. 여기 말고.”재석은 잠시 멈칫했고,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강서원의 미소가 살짝 어색해졌다.“왜? 같이 앉았다고 엄마가 정은이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나, 네 엄마야.”